< -- 709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
.
.
“날 대신관으로 인정해 줄 세력이 얼마나 있겠소?”
오르마즈는 철문에서 힘없이 돌아서며 최대한 침착하게 물었다. 그런 그의 뒤를 따르며 수나가 차가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솔직한 대답을 원하십니까?”
“비관적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소.”
“크바르나 여단과 우리 하마타 마구스들 외에는 없을 겁니다. 적군 출신에, 아직 아무 기반도 못 만들어 놓지 않으셨습니까.”
“이분께서 남기신 보석과 쪽지가 있는데도?”
수나가 쓴웃음을 지었다.
“대신관님의 본체 카히나에 관해 아십니까?”
“카히나? 그게 이름이요?”
“그자는 이미 14살에 우리 탐사단원 40여명을 살해했습니다.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그 어린 나이에 쓰레기 같은 돌연변이들 수백을 모아 도적떼까지 조직했던 살인마입니다. 16살에 붙잡힐 때까지 탐사단원은 물론이고 동족들까지 무수히 살해했습니다. 살해당한 탐사단원 중에는 마구스들의 후계자와 자녀도 여럿 있었습니다.”
“잡아서 어떻게 했소?”
“심문 도중에 죽었습니다.”
“심문이 아니고 고문이었겠지?”
오르마즈의 차가운 반응에 수나 마구스가 다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자가 납치해 간 R과 S, X 어린아이들을 구해내려면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납치?”
오르마즈의 잔뜩 의심이 어린 물음에 수나는 급히 대답을 돌렸다.
“뒤늦게라도 탐사단이 찾아내서 구하지 않았다면 어린 마샤나그나 세네피스도 더러운 동굴에 갇혀 굶어죽었거나, 우리가 그곳을 떠날 때 다른 생명체들과 함께 절멸되었을 겁니다.”
“…….”
“세포만 가져온 후에도 혹시라도 유출될지 몰라 대형 금고에 따로 보관했을 정도였습니다. 기분 나쁘실지 모르지만, 애당초 저분께서 호기심에 카히나를 되살리겠다고 나서셨을 때부터 반대가 극심했습니다.”
“후우.”
오르마즈가 자리에서 멈춰 서며 이마를 짚었다. 그로서는 할 말이 많았지만 본인, 아니 자신의 유전자에 대한 평가는 이미 ‘과학적으로’ 굳어져 있으니 일단은 반박할 여지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그에게 힘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코윈 같은 대규모 교구의 수장을 지냈던 아스탈과는 달리 교단 내에서 별다른 역할을 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나마 바랄 수 있는 건 야푸르가 남긴 직속부대 크바르나 여단이었지만 고작 8백의 크바르나 여단만으로 아스탈을 지지하는 교단의 나머지 무장병력 수십만을 상대한다는 건 턱도 없는 일이었다. 하마타도 당장은 그를 지원하고 있지만, 사정이 절망적이라면 결국은 그를 버릴 것이 분명했다.
여기에 민병대까지 그를 따른다면 오르마즈에게는 애당초 ‘대신관 자리’를 지킬 가망이 없는 셈이었다.
그 사이, 지하 연구소를 빠져나온 일행은 걸음을 재촉해 3시 방향의 트라카 신전으로 향했다. 제일 앞서가던 오르마즈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내 궁금한 게 있소, 수나.”
“예?”
“민병대는 왜 항상 교단 누군가의 이득을 위해 움직입니까? 이번뿐만이 아니고, 이전부터 그래왔소. 겉으로는 교단에 대항하는 것 같지만……항상 결과는 교단 파벌 중 하나에게 이득을 주었지. 말해 주시오. 민병대는 유교운동을 가장해 교단의 내분에 빌붙어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요?”
“이젠 알 만큼 아시지 않습니까.”
“하마타의 연구소가 약탈당한 것도?”
오르마즈의 물음에 수나가 크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기원전 9년, 대규모 자금과 인원을 투입해 신형 헤네티를 키워내던 하마타의 연구소가 민병대에 대대적으로 약탈당한 것이 수나가 이끄는 하마타 교단 전체에 정치적인 치명타였다. 그 이후로 시간이 지날수록 교단 군사조직은 하마피타가 장악해갔고, 경제력과 군사력 모두에서 열세에 직면한 하마타의 세력은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따져보면 보면 교단 역사상 처음으로, 양쪽의 세력균형이 크게 무너진 유일한 시기가 바로 지금이었다.
수나가 차마 인정하고 싶지 않은 한 마디를 내놓았다.
“지금의 그네들은 돈만 주면 어느 쪽으로든 움직이는 용병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구성원들은 자기들이 도덕적인 목적을 위해 일한다고 착각하고 있지만 파냐드를 위시한 지도부는 돈과 권력에 굶주린 승냥이들에 불과하지요.”
“그런데, 창립자인 타리프 카파키가 원래는 트라카 교단 사람 아니었던가?”
오르마즈의 날카로운 물음에 수나가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제 대신관이 된 그에게 계속 감출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맞습니다. 민병대는 애당초 우리가 만들었습니다.……하지만 이젠 감당 못 하는 암 덩어리가 되어 버렸으니 이 모든 것이 마땅한 대가인지도 모르지요.”
수나는 자조 섞인 한숨을 다시 푹 내쉬었다.
하마피타의 헤네티들과 마주치지 않고 카타콤베를 벗어난 일행의 앞에는 3시의 트라카 신전이 환한 불을 켠 채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새 육신에 깃드심을 축하드리옵니다.”
미리 연락을 받고 기다리던 5명의 하마타 마구스들이 ‘새로운 대신관’에게 꿇어앉으며 첫 인사를 올렸다.
“경호대장.”
오르마즈가 뒤에 선 경호대장을 문득 돌아보았다. 지친 표정으로 힘겹게 그의 뒤를 따라 온 경호대장이 어색하게 부동자세를 잡았다.
“그대를 새 여단장으로 임명한다.”
“감사합니다, 대신관님.”
“나 때문에 고생문이 훤하겠구나.”
“예?”
“아케메니안 궁은 포기한다. 각지에 주둔한 크바르나 여단은 더 늦기 전에 교단 소유의 중요 자료와 돈 되는 것들을 최대한 챙겨 아라무트에 집결한다. 사바브 교단의 피다이 암살단 때문에 공권력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는 정글 지역이다.”
오르마즈의 엉뚱한 명령에 경호대장, 아니 여단장이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대지주 이스마엘 가문이 절반 이상 장악하고 있지만 아직 많은 정글 지역은 손을 못 대고 있다. 정예 크바르나 여단이라면 이스마엘 가와 충돌을 피하면서 충분히 장악할 수 있을 테니 네가 그 지역 새 호족이 되어라.”
“무슨 말씀이신지…….”
“네게 아샤드 알 레즐린이라는 이름을 내리마. 아샤드는 아라무트 방언으로 ‘사자’라는 뜻이고, 레즐린은 내 어머니 성이다. 그 정도면 정글을 평정한 용맹한 호족 이름으로 잘 어울리겠지?”
대신관의 청천벽력 같은 지시에 경호대장은 물론이고 하마타 마구스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직 얼떨떨한 얼굴의 신임 여단장 아샤드 레즐린 장군이 얼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대신관님께서 몸소 내려주신 이름이니 평생 영광으로 간직하겠나이다.”
오르마즈는 피로 뒤범벅이 된 마구스 로브를 벗어던지며 수나 마구스를 돌아보았다.
“난 잠시 민병대로 돌아가야겠소.”
“무슨 말씀이신지…….”
“지금 아스탈을 상대할 수 없다면 여기서 개죽음을 당하느니 한 발 물러나는 편이 낫소. 난 일단 가서 미친개처럼 날뛰는 민병대부터 잠재우겠소.”
오르마즈의 파격적인 발상에 하마타 마구스들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내 돌아간 김에 그대들이 잃어버린 세포도 되찾을 것이요. 가능하다면 민병대를 아예 내가 장악해 버리는 것도 좋겠지. 하마타 그대들도 크바르나 여단처럼 충성이 변치 않기를 바라겠소.”
수나는 물론이고 다른 마구스들도 오르마즈의 낮은 목소리에서 묘한 한기와 힘을 느꼈다. 오르마즈가 뜬금없이 민병대에 돌아가겠다는 것도, 먼 옛날 잃어버린 세포 이야기를 하는 것도 실은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민병대를 장악한다는 건 그들이 군사력을 차지함과 동시에 하마타에서 훔쳐간 세포들까지 손에 쥐어 결국은 하마타의 충성까지 담보받는 2중의 계산이 있을 터였다.
“그 정도면 충성을 담보하기는 충분한 물건이군요.”
수나의 적절한 표현에 오르마즈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수나도 하마타를 믿지 못하는 오르마즈의 처지를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따져보면 지금의 오르마즈는 고작 8백뿐인 크바르나 여단, 그리고 문서화되었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대신관의 유지를 빼면 아무 것도 아닌 빈껍데기에 불과했다.
“크바르나 여단은 책임지고 이분의 시신을 지켜라. 지금은 어렵지만 언젠가는 제 위치에 편히 모셔드릴 것이니.”
야푸르의 시신을 경호대 전사들에게 넘겨준 오르마즈는 이곳에서 기다리던 요아킴이 가져온 새 로브로 갈아입었다. 금빛의 반짝이는 로브에는 화려한 케이프와 대신관을 뜻하는 다하카르의 머플러가 거의 발등까지 길게 늘어져 있었다.
중앙의 제단에 오른 오르마즈는 가슴에 손을 모으고 고개를 꼿꼿이 치켜들어 12명의 신이 새겨진 신전의 높은 벽을 빙 둘러보았다. 신전 안의 마구스, 성직자와 전사들이 모두 자리에 꿇어앉으며 이 31번째 현신을 향해 바닥에 이마를 가져갔다.
그에게는 첫 번째이자, 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대신관으로서의 선언이었다.
“아드함, 크사야시야, 바즈라카, 하가 마나 파투브.”
오르마즈가 반쯤 쉬고 메인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이제 위대한 제왕의 피를 이었으니, 신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오르마즈가 천정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며 눈을 꽉 감았다. 이제 겨우 40세, 12명의 마구스들 중 가장 젊지만 그의 앞길은 고난과 죽음의 그림자에 걸쳐 있었다.
오르마즈는 흰 천을 덮은 채 한쪽에 누워 있는 야푸르를 슬픔어린 눈으로 돌아보았다.
“허나……부디 그 날이 오기 전에 나의 심장을 거둬가소서.”
오르마즈의 이 낮은 혼잣말을 들은 사람은 바로 곁의 요아킴, 니사와 울피뿐이었다. 오르마즈는 천천히 팔과 고개를 떨어뜨렸다.
“요아킴, 그대는 나를 대신해 여기에 남고 니사, 울피는 날 따라와라. 판지셰르의 공기가 그립구나.”
고작 두 명의 수하를 거느린 오르마즈는 제단에서 내려와 지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가 개척해야 할 ‘민병대의 영웅 오르마즈’로서의 삶에 어떤 어려움이 있을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의 정체가 ‘31대 대신관 아르잔 빈트 다하카르’라는 것은 틀림이 없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동맹군과 연합군의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근위대로 파견되었던 야투 박사 일행이 별 소득도 없이 돌아왔지만 아스탈은 그다지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거의 빈손으로 돌아온 야투 박사를 나무라지도 않았고, 카렐이 훔쳐가버린 헤네티 세포에 신경을 쓰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가 요즘 기분이 영 나쁜 건 사실이었지만 야투 박사의 실패 때문이라기보다는 믿었던 부하들이 세네피스와 솔을 못 잡아와서 더 화가 나 있었다. 세네피스에게 입힐 옷과 서클렛, 신방까지 미리 준비해 두었던 아스탈은 겉으로는 대놓고 뭐라 하지 않았지만 거의 이틀을 짜증만 냈고, ‘그놈 것은 모조리 다 빼앗아야 되는데’라며 퉁명스레 내뱉어대곤 했다.
사실 그가 한때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세네피스에게 갑자기 집착하는 것도, 밀리타를 가혹하게 다루는 것도 정말로 그들을 탐내서라기보다는 ‘오르마즈의 것’이라면 무조건 빼앗아 욕보이고픈 히스테리적인 심술에 더 가까웠다. 게다가 요즘은 그 대상이 ‘황제의 것’까지 늘어나서 아랫사람들이 ‘베흔이나 저 양반이나…….’하며 수군댈 정도로 골치 아프게 만들고 있었다.
크테시폰 궁의 침대에서 막 일어난 아스탈은 ‘새 오른손’을 가져온 측근 아프라스 야투 박사를 힐끔 째려보았다.
“왜 이제야 가져왔냐?”
아직 잠이 덜 깬 그는 대신관 침실 한쪽의 작은 테이블에 털썩 주저앉으며 술 한 모금을 벌컥 들이켰다.
아프라스 야투 박사가 조심스레 물었다.
“지금 괜찮겠습니까? 밤중에 갑자기 오작동을 했다고 들어서…….”
“처음 하는 것도 아닌데 새삼스레 괜찮고 말고가 뭐 있어.”
그는 잔뜩 짜증이 난 얼굴로 빨리 하라며 손을 불쑥 내밀었다.
“지금 술을 드시면 혈압이 올라서 교체를 하기가…….”
“됐어, 귀찮게 마취하느니 이거 한 잔이 나아.”
아스탈은 야투 박사의 걱정어린 표정을 외면하며 술 한 모금을 더 들이켰다. 야투 박사는 그의 팔뚝을 덮은 인조피부를 걷어내고 기계로 만들어진 그의 오른손을 조심스레 드러냈다.
“어젯밤에 쿠마르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야투 박사가 나사를 풀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스탈의 얼굴에 그제야 긴장감이 스쳤다.
“물론 좋은 소식이겠지?”
“좋은 것과 나쁜 것 하나씩입니다.”
“그럼 좋은 것부터 말해.”
“코런덤의 헤네티 1천5백이 2번 도시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근위대 놈들 입장에서는 소모품인 용병으로 보일 테니 상당수는 적 황제를 공격하는 자살 돌격부대로 투입할 것 같습니다. 모두 잃을 경우를 대비해 투입 직전에 기억을 백업해 둘 참입니다. 예비 신체도 대기 중입니다.”
“후훗, 헤네티 1천5백이라……그 중에 절반만 자살공격을 해도 아주 볼만하겠군. 황제 놈을 죽인 후에 바로 칼끝을 돌리라는 말은 전했겠지?”
“황제가 죽고 전세가 연합군 쪽으로 기울면 쿠베, 제롬 놈을 죽이고 2번 도시와 사오시안트 별궁을 불태워 버릴 참입니다. 양쪽 다 패배자로 만들어야지요.”
“그럼 나쁜 소식은?”
“아라무트의 아샤드 놈이 사라졌습니다.”
술맛을 음미하던 아스탈이 눈가를 잔뜩 찡그렸다.
“놈이 신사협정을 깼다는 거냐?”
“솔직히 먼저 깬 건 우리죠. 코런덤을 움직였으니.”
“네놈은 도대체 어느 편이냐.”
지나치리만큼 객관적인 야투 박사의 지적에 아스탈이 버럭 역정을 냈지만 정말로 화가 나서라기보다는 상대의 움직임이 생각 외로 민첩했다는 데 당황해서라는 것이 정확했다.
그 사실을 잘 아는 야투 박사가 태연하게 보고를 이었다.
“아마 남은 크바르나를 데리고 황제에게 가겠지요.”
“상관없어. 그래 봤자 우리 1/3밖에 안 돼.”
“게다가 그놈들은 죽으면 ‘수리나 재사용’도 안 되죠.”
아스탈의 오른손을 뽑아낸 야투 박사가 키득거리며 아스탈의 고장난 기계손에서 부러진 구동 축을 가리켰다. 아스탈은 허전한 오른손목을 들어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언제 깨도 깰 것이었는데, 이 기회에 끝장을 보는 거지.”
+++++++++++++++++++++++++++++++++++++++++++++++++++
이제 다시 현재로 컴백입니다.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The Iron Vein 개인지 구매사이트 : http://vein.zio.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