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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710화 (705/1,132)

< -- 710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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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투 박사는 알몸으로 침대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밀리타를 힐끔 쳐다보았다. 언뜻 보이는 얼굴에는 얻어맞은 자국이 선명했고 손목도 얼마나 세게 잡혔는지 까맣게 피멍이 남아있었다. 지난밤 이곳에 끌려온 저 여인에게 주어진 첫 선물은 아스탈과의 끔찍한 하룻밤이었던 모양이었다.

말은 하지 않지만, 아스탈의 기계손이 이 지경이 된 것도 어젯밤 밀리타를 험악하게 다루다가 망가진 것이 분명했다. 밀리타는 황제의 승은을 받은 일이 없다고 강변했지만, 아스탈이 ‘다시 제대로 길을 들이겠다.’며 저 지경을 만든 것이 뻔했다.

사실 아스탈에게는 밀리타 말고도 10명 가까운 부인들, 그리고 제법 많은 소년, 소녀들도 거느리고 있었지만 그들 모두에게 저렇게 험악한 모습을 보이는 건 아니었다.

그들에게 아스탈은 권위적이고 신경질적인 성격이 흠일 뿐, 나름대로 책임감도 있고 특별히 나쁠 것도, 좋을 것도 없는 그저 평범한 남편이었다. 다른 부인들에게는 가벼운 손찌검도 절대 하지 않는 그였지만 유독 밀리타를 대할 때만 이렇게 괴물로 돌변하곤 했다.

“뭘 그리 뚫어지게 봐?”

아스탈이 알몸을 한 자신의 여자를 쳐다보는 이 노인에게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당황한 야투 박사가 떼어낸 기계손 쪽으로 얼른 시선을 돌렸다.

“기계라는 건 언제든 고장날 수 있지만 우리 몸처럼 스스로 고치는 기능은 없는 것이 탈입니다. 자극을 감지하는 능력도 기술적으로 한계가 있고……웬만하면 복원하시는 것이…….”

“싫어.”

아스탈이 딱 잘라 대답했다.

“그나마 남은 능력까지 잃으실까봐서요?”

상자에서 꺼낸 새 오른손을 대어보며 야투 박사가 웃음 띤 얼굴로 물었다.

“복원용 세포를 심으려면 어쩔 수 없이 시상하부를 약간 절개해야 하지만 능력을 보존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해 봐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허, 운에 맡기라고? 나한테 남은 건 눈 벌개져서 맹수처럼 날뛰어대는 것 하나인데? 빌어먹을, 집어치우라고 해. 애당초 내 손목을 먹어 치워버린 그놈 탓이야. 아악!”

신경 소켓을 꽂는 순간, 극심한 고통을 느낀 아스탈이 이를 빠득 갈았다. 씩씩거리던 그는 잔에 남은 술을 훌쩍 다 마셔버리고는 다시 병에 손을 뻗었다. 야투 박사가 얼른 병을 치우며 주름지고 고약한 얼굴에 어색한 웃음을 덧씌웠다.

“R의 간이 아무리 알콜에 강해도 위장이 못 버티면 끝입니다. 아랫사람들이 오르마즈 그놈과 술버릇 닮았다고 수군거리면 기분 나쁘지 않으신가요?”

“왜 하필이면 그놈 이야기는 꺼내?”

발끈한 아스탈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지만 어쨌든 효과는 있었다. 그는 술병에서 손을 떼며 멋대가리 없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뒈진 놈은 뒈진 놈이고. 지금 황제 놈은 이름만 R이지 술 냄새도 못 맡는다며.”

“술 때문에 조상님들이 받을 천벌 몰아서 받고 있나 보죠.”

야투 박사의 엉뚱한 대답에 아스탈은 하마터면 화를 내다말고 실없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창밖으로 급히 시선을 돌렸던 그는 어젯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황량한 풍경에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볼 것도 없는데 이 따위 창문은 뭣 하러 만들었나 몰라.”

“그래도 확 트인 게 기분은 좋지 않습니까.”

야투 박사가 지평선까지 뻥 뚫린 얼음벌판을 가리켰다. 멀리 지평선 가까운 곳에 아스탈, 아니 서류상으로는 조합이 소유한 금광컴플렉스의 불빛이 희미하게 보였다.

이곳 크테시폰 궁이 위치한 코윈은 북부의 수도이고 카파키 가의 근거지이지만 적도 부근의 일부 지역만 빼면 온통 황량한 벌판으로 뒤덮여 생명체는 살 수도 없는 얼음지옥 같은 곳이었다. 그렇다보니 인공 구조물로 보호된 몇몇 광업이나 공업 컴플렉스들을 제외하면 보통 사람은 야외활동이 사실상 불가능할 정도의 혹독한 환경이었다.

크테시폰 궁은 다하카르 교단 창시자 아프라시아가 처음 둥지를 틀었던 곳이었지만 아스탈이 ‘왜 하필이면 여기야’라는 불평을 내내 입에 달고 살 정도로 바깥 날씨는 최악이었다.

그런데도 이런 곳이 ‘이 일대의 중심지’가 된 건 풍부한 금과 보석 광산, 광업자원 덕분이었다. 아프라시아가 이끄는 ‘다하카르 교단’이 12개 교단 중 가장 강력한 교단으로 성장했던 힘도, 이곳의 호족이던 카파키 가가 제국 최대의 재벌로 성장했던 발판도 결국은 이런 가혹한 환경에서 목숨을 걸고 일을 했던 노동자들의 피였다.

“아참, 예비신체들은 어디에 대기시켜 두었다지?”

“1천은 2번 도시의 시내 창고에 두었습니다. 그놈들 임무는 적 황제가 죽으면 2번 도시 시가지를 파괴하는 겁니다.”

“나머지는?”

“나머지 5백은 아케메니아 항구의 시체보관소에 두었습니다. 황실묘지에 묻을 전사자 시체와 바꿔치기해 놓았습니다. 어차피 지금은 시체와 같은 상태고 생명반응도 없으니 들킬 일은 없을 겁니다. 내일쯤 시체를 반입해 황궁 바로 위의 황실묘지에 매장할 예정이라니 완전히 은폐되는 거죠.”

“허어, 명령과 함께 땅을 파내고 오는 건가? 황제도 없는 황궁이 관에서 튀어나온 좀비들로 아수라장이 되다니, 생각해보니 정말로 소름끼치겠어.”

아스탈이 농담처럼 중얼거리며 테이블 위의 과자를 꺼내 씹었다.

관에서 나온 헤네티들의 이미지가 그의 묘사처럼 좀비와 흡사한 건 사실이었지만 사실 그는 평소에도 자신이 창조해 낸 이 ‘재활용 가능한 헤네티들’을 매번 ‘좀비’로 장난삼아 부르곤 했다.

아버지 야푸르의 죽음 직전, 그가 민병대 지도자 파냐드에게서 사들인 2천의 세포들은 그들이 하마타에서 훔쳐간 여러 종류의 합성 헤네티들 중 이 소위 ‘좀비’들이었다.

그도 아직 손에 넣지 못한 나머지 세포들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었지만 어차피 황실이 그것들을 제대로 쓸 능력이 없다면 굳이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었다. 그리고 코나 시디크가 적에게 투항한 것을 까맣게 모르는 그는 아직 적들이 이 ‘좀비’의 정체를 모르고 있으리라 굳게 믿고 있었다.

그는 지겨운 풍경이 펼쳐진 창에 커튼을 확 치며 짜증스레 내뱉었다.

“제발 빨리 좀 시작됐으면 좋겠어. 나도 이 지긋지긋한 곳은 좀 떠나고 싶거든.”

잠에서 깬 카렐은 멍하니 천장을 응시했지만 별로 보이는 것도 없고 눈앞은 답답했다. 그가 느낄 수 있는 건 24시간 내내 시끄러운 이곳 펜지켄트 주둔군 지휘부의 소음 , 그리고 그가 누워 있는 딱딱한 침대와 군용 담요의 까칠한 느낌, 벽 틈새로 파고드는 살을 에는 외풍 정도였다.

근위대의 허름한 군수품 창고 한구석 사무실에서 집기를 들어내고 억지로 만들어놓은 이곳은 몸도 편치 않은 제국의 황제가 눕기에는 형편없는 곳임에 틀림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전장 한복판에서 멀쩡하게 뚜껑이 덮여있는 건물에 혼자만의 공간을 두고 누울 수 있는 것만도 황제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라면 특권이었다.

“빌어먹을, 출정이 코앞인데…….”

수나 마구스의 말대로라면 지금처럼 눈이 거의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전투를 지휘해야 할 판이었다. 가끔 암흑을 경험하는 보통의 사람들과는 달리, 어둠 자체를 경험해 본 일이 거의 없다보니 그에게 눈이 안 보이는 현실이 더욱 괴롭고 답답했다.

게다가 무뎌진 감각은 눈 뿐만이 아니어서, 후각과 미각까지 크게 떨어져 이젠 입맛도 거의 없고 몸 상태도 최악이었다. 청력은 보청기로 어떻게 해결하고 있다지만 다른 감각은 아직 해결책이 변변히 없었다.

게다가 보청기로 들어오는 소리도 그냥 말뜻을 알아듣는 데는 별 지장이 없었지만 기계음 때문에 또렷하지를 않았고, 말소리 외에는 무슨 소리인지, 누구 목소리인지도 잘 구분이 되지를 않아 짜증나게 만들기가 일쑤였다.

“후우.”

카렐이 자꾸 찌릿거리는 가슴을 짚었다. 오늘 밤 자꾸 가슴이 벌렁거리는 것이 독 때문인지, 수나 마구스가 놓아준 항독소 때문인지, 아니면 곧 있을 출정이나 또 다른 이유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다시 잠을 청해보려 애썼지만 온몸의 열감과 빠른 심장박동은 자꾸 그를 각성상태로 내몰고 있었다.

“황빈?”

카렐은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을 향해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다. 무슨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인지, 조금 전까지 뛰다 온 것처럼 가쁜 숨소리가 잠결에도 꽤나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잠이 들 때 베아트릭스가 곁에 있었으니 지금 옆에서 거친 숨소리를 내고 있는 누군가도 당연히 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구제불능이구나, 카렐.’

카렐이 잠결에 쓴웃음을 지었다. 몸도 성치 않은 주제에 고작 숨소리 하나에 잠도 못 잘 정도로 달아오른 자신의 모습이 어지간히 한심해 보였다.

“황빈 숨결이 아주 자극적입니다. 괜찮다면……으음?”

더듬더듬 몸을 움직여 여자를 안으려 했던 카렐이 기겁을 했다. 그의 체중에 놀라 내뱉는 짧은 신음소리도, 부드럽고 말랑한 몸의 감촉도 단단한 근육질의 무장 베아트릭스의 그것과 거리가 멀었다.

“누, 누구…….”

놀란 카렐은 얼른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나다가 손이 미끄러지며 하마터면 침대 옆으로 떨어질 뻔했다. 순간 그 사람이 뒤로 떨어질 뻔했던 황제의 어깨를 얼른 붙들어 끌어당겼다.

‘맙소사.’

그제야 누군지를 깨달은 카렐은 흥분이건 뭐건 머릿속에서 일순간 싹 달아나는 느낌이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카렐은 최소한 지금만은 자신의 눈이 안 보인다는 것을 차라리 다행으로 여겼다.

“가, 감기 걸리십니다.”

일단 정신을 차린 카렐은 얇은 슬립 한 장만 걸치고 있는 세네피스의 몸에 얼른 담요를 덮어주며 상황을 무마하려 했다.

“날도 추운데 왜 이리 얇게 입고 계십니까.”

“이보다 더한 지하 감방도 버텼습니다. 옷보다는 누군가의 체온이 더 좋습니다.”

잠결에 어눌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세네피스의 발음은 생각 외로 또렷했다. 그렇다면 그도 자고 있지 않았던 것이 분명했다.

세네피스가 낮은 한숨을 내쉬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는 것이 느껴졌다.

민망해진 카렐은 고개를 위로 젖히고는 괜스레 헛기침을 했다. 세네피스가 담요를 카렐의 어깨까지 당겨 올리며 말했다.

“황빈은 북쪽과 동쪽 전장을 살피고 오전에 돌아온다고 하였습니다. 아침까지 제가 함께 있어드린다 했는데 피곤하여 잠시 누웠다 잠이 들었습니다.”

카렐의 체격이 워낙 크다보니 가슴에 얼굴을 기댄 세네피스의 이마까지 담요가 푹 덮고 있었다. 민망해하는 그를 위해 일부러 시선을 피해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눈이 안 보여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테니 너그럽게 잊어 주십시오.”

카렐의 사과에 세네피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잠시 불안한 침묵이 흐른 후, 세네피스가 꺼질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금 막 깨어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내일이면 중요한 거사를 위해 길을 나서셔야 할 터이니 신경 쓰지 마시고 부디 편히 주무십시오.”

“…….”

카렐은 마지못해 다시 눈을 감았지만 도무지 잠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가슴에 기댄 세네피스의 빠른 숨소리 역시 밤새 잦아들지는 않았다. 그리고 거의 새벽이 가까워올 때까지 두 사람은 서로에게 자는 척 모습만 보이며 그렇게 꼼짝도 않고 누워만 있었다.

유달리 힘겨운 밤을 보내고 난 후, 먼저 일어난 세네피스는 흐트러진 침대 위를 힘없이 돌아보았다. 새벽녘에야 어렵게 잠이 든 황제의 얼굴에는 극심한 피로와 스트레스가 그대로 묻어나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런 황제의 잠든 모습을 보며 세네피스는 묘한 죄책감을 느꼈다.

무언가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다시 이런 기회가 온다면 그는 그때도 같은 행동, 아니 이보다 더한 짓이라도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 때문이니?”

세네피스는 잠든 황제의 뺨을 살며시 짚었다. 그는 밤새 지친 황제가 깊이 잠들어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무슨 악몽이라도 꾸는지, 눈꺼풀 속 그의 안구가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카렐?”

순간, 세네피스는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핏줄이 온통 곤두선 카렐의 손이 우드득 소리를 내며 두꺼운 매트리스와 스프링까지 잡아뜯고 있었다. 어찌나 힘이 들어갔는지, 스프링에 긁힌 그의 손가락 마디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카렐? 카렐!”

세네피스가 황제의 가슴을 두들기며 악을 썼지만 황제는 침대 위에서 벌벌 떨고 있을 뿐, 별 반응이 없었다. 같은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오래 전, 죽기 얼마 전의 오르마즈에게서 보았던 한 끔찍한 광경의 기억이 스치고 있었다.

당황한 세네피스는 급히 방 밖으로 달려 나가며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카토! 카토! 어디 갔나! 의사는 어디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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