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712화 (707/1,132)

< -- 712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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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샤드 경과 함께 황제가 있는 창고로 향하던 니사는 수나 마구스 때문에 어색해진 분위기도 잡을 겸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아샤드 경에게 물었다.

“울피는 잘 있겠지요? 설마 그 울보한테도 지금처럼 군대식으로 대하시는 건 아니죠?”

니사의 장난어린 물음에 아샤드 경이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부인은 따로 첩보가 있어 부대원 200명을 데리고 아케메니안 궁으로 갔습니다. 그분께서 몸소 맺어주신 귀한 인연입니다. 고귀하신 한 분을 제외하면 제게는 세상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입니다.”

“폐하, 니사 라말라 박사이옵니다. 서부 7제후 아샤드 레즐린 경과 함께 왔습니다.”

황제의 처소에 발을 들여놓은 니사는 놀란 표정을 얼른 감추었다. 어깨에 큰 털가죽을 덮은 황제는 반쯤 탈진한 듯 창백해 보였지만 여전히 당당한 모습 그대로 눈을 반쯤 뜨고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물론 눈은 겉으로만 떴을 뿐이지 앞이 제대로 보일 리가 없었다.

“서부 7제후 레즐린 가 종장 아샤드라고 합니다.”

아샤드 경은 황제의 앞에 얼른 꿇어앉았다. 황제는 여전히 잘 보이지 않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아샤드 경 쪽에 대고 말했다.

“레즐린 가라면 내 외가 쪽인데, 늦게라도 내게 힘이 되어주어 고맙네.”

카렐이 억지미소를 지으며 아샤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바닥을 기어간 아샤드 경은 황제의 손과 발끝에 입을 맞추고는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그대 가문은 정예병을 보유하고도 그동안 줄곧 중립만 유지한 것으로 유명한데, 이번에 갑작스레 참여한 것에 내 놀랐어.”

황제의 말이 정말 놀랐다는 것인지, 아니면 황제의 혈족이면서도 그동안 동맹군에 참여하지 않아 온 레즐린 가에 대한 힐책인지는 분명치 않았지만 아샤드 경은 그다지 놀라거나 당황한 표정은 아니었다.

“지금이야말로 소인의 정예병이 존재해 온 의미를 보여드릴 때라 여겨져 이곳에 왔습니다.”

아샤드 경이 또렷하게 대답했다. 서부 아라무트의 정글과 산악 사막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하급제후 레즐린 가는 비록 수는 적어도 서부에서 가장 정예, 아니 정확히는 정예라고 ‘알려지기만 한’ 속칭 ‘검은 사신’ 부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레즐린 가의 군사력이 이렇게 괴상한 평가를 받는 이유는 그들의 별난 전통 때문이었다. 필요한 때만 중립주의를 써먹는 세호 가와는 달리, 레즐린 가는 자신들의 영지인 정글과 사막을 건드리지 않는 한 바깥세상에서 제아무리 대단한 일이 벌어져도 개입은 고사하고 그 어떤 정치적인 견해도 보이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가문이었다.

그렇다보니 그들이 보유한 정예병도 먼 옛날 어디선가 홀연 나타나 정글을 순식간에 장악하면서 ‘검은 사신’이라며 한 번 유명세를 탄 이후로는 정작 실전에 동원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당연히 다른 가문이나 무장들조차 이들을 ‘이름만 그럴싸한 놈들’이라며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 ‘검은 사신’들이 이번에 뜬금없이 동맹군, 그것도 황제를 바로 곁에서 호위하는 호위부대 역할을 하겠다고 나타났으니 카렐로서는 놀랍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영 믿음이 가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카렐은 잘 보이지 않는 눈을 더 가늘게 뜨고 아샤드 경을 따라온 2명의 병사를 응시했다. 사실 그도 페로가디언 시절에 저들을 몇 번 먼발치에서 본 일은 있었지만 그다지 많이 아는 건 아니었다. 그들의 체격은 보통 사람보다는 큰 편이었지만 가디언처럼 거대한 건 아니었고, 일반인 사이에 섞인다면 그저 ‘몸 제법 좋군’ 소리를 들을 정도가 고작이었다.

이들의 무장은 그때그때 경보병도, 중장보병도 되는 것 같았지만 검은 망토에 얼굴 위에는 항상 검은 베일을 두르고 있는 것이 유별난 특징이었고 이들이 ‘검은 사신’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근거였다.

언뜻 생각에 망토와 베일이 실전에는 지장이 될 듯 보였지만 전장에까지 그대로 나가는 것인지, 아니면 평상시에만 그러고 있는 것인지는 아직 알려진 것이 없었다.

“‘검은 사신’이 오르마즈 경의 별명으로 유명해지기는 했지만 원조는 그대의 부대 아니었던가?”

카렐이 검은 실루엣만 어른거리는 병사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샤드 경이 얼른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그분의 모계가 소인의 레즐린 가문이고, 평소 검은 갑옷을 즐겨 입으셔서 세인들이 가문 보병대의 별명을 따 그분께 붙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허, 그런데 그 양반 명성이 워낙 하늘을 찔러서 원조가 뒤바뀐 셈이군? 훗, 내 전장에서 입을 어갑이 그 양반 입던 놈 고친 것이니, 이번엔 정말 제대로 짝짜꿍이 맞겠어.”

카렐은 탈진해 고개조차 잘 가누지 못하는 와중에도 여전히 가벼운 말투로 자신의 건재함을 보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팔에 주사를 놓고 있던 니사는 억지로 성한 척 보이려 애쓰는 그의 이런 모습에서 내심 안쓰러움을 느낄 지경이었다.

“그나저나, 누굴 호위한다는 건 가디언들 아니면 전문적인 특수부대나 가능한데 말이야, 그대 부대가 정예라고 해도 어차피 야전군인데 내 곁을 지키겠다는 건 좀 무리가 아닐지…….”

“소인의 부대 ‘검은 사신’, 아니 ‘크바르나 여단’은 원래부터 존귀한 분들을 지키기 위해 태어난 부대이옵니다.”

순간, 놀란 카렐의 어깨가 들썩거렸고, 그에게 새 주사를 놓다 말고 기겁을 한 니사는 하마터면 엉뚱한 혈관을 찌를 뻔했다.

“지금 뭐라 그랬나. 혹시 보청기가 고장나 잘못 들은 건가?”

카렐은 자신의 주변에 혹시 못 믿을 사람이 있는지부터 재빨리 생각했지만 다행히 이곳엔 카토와 몇 명의 호위가디언들 뿐이었다. 그런 황제에게 아샤드 경이 고개를 들어 보이며 또렷하게 대답했다.

“아니옵니다. 제대로 들으셨사옵니다.”

아샤드 경이 가슴에 X자로 두 손을 겹치며 바닥에 이마를 가져가 두 번째 인사를 올렸다.

“소인 야푸르 빈 다하카르 대신관님의 곁을 지키던 경호대장이었고, 현재 크바르나 여단장으로 있는 합성 헤네티 아샤드 알 레즐린이옵니다. 현재는 당시 아케메니안 궁을 버리고 떠나야 했던 크바르나 여단 전사 8백, 그리고 뜻을 함께하는 다하카르 교단 헤네티 전사 2백을 거느리고 있사옵니다.”

카렐이 턱에 힘을 꽉 주었다. 하지만 내심 짚이는 바가 있는 그는 대놓고 놀라지도 고함을 지르지도 않았다. 카렐이 의자를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람다 아스탈과 싸우기 위해 돌아왔는가?”

“그 교단 반역자가 이번엔 상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폐하를 지키기 위해 돌아왔사옵니다. 그러니 부디 저희에게 임무를 다하고 전장에서 죽을 영광을 주시옵소서.”

동맹군의 공격을 코앞에 두고 있는 사오시안트 시, 2번 도시였지만, 사실 이곳의 내각은 물론이고 민간인들도 크게 긴장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2번 도시는 남북으로 수만 스타디아에 달하는 긴 반도의 끝자락에 있었고, 그 입지만으로도 웬만한 침략자는 고개부터 절레절레 흔들 정도의 자리였다.

게다가 지형까지 철저하게 수비 측 편이어서, 도시는 해수면 위로 거의 200척(60m) 가까이 솟아 올라와 있는 흰색의 거대한 융기절벽 위에 위치해 있었다. 그렇다보니 해상에서의 대규모 상륙공격은 엄두도 못 낼 판이었고, 유일한 공격로는 북쪽에서 좁고 긴 반도를 타고 죽 내려오는 길고 긴 육로가 고작이었다.

그렇게 보면 이곳은 군사기지라면 모를까 사실 대규모 상업도시로서의 입지로 썩 좋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런데도 세나우스 2세가 굳이 이곳에 프라임 2번째 규모의 도시를 세운 것도 유사시 황실이 피난을 올 수 있고, 근위대 예비병력을 둘 수 있는 ‘예비수도’라는 의미에서였다.

그리고 그렇게 세심히 선택한 곳인 만큼, 이곳을 공격해야 하는 카렐과 동맹군 입장에서는 악몽 같은 난공불락이기도 했다.

당연히 연합군 역시 카렐의 ‘숫자도 적은 동맹군이 이런 곳에 도대체 어떻게 공격을 하겠다는 것인지 구경이나 해 보자’며 도리어 비웃고 있는 판국이었다.

“빌어먹을, 내 팔자야.”

별궁 남쪽의 위험천만한 절벽에 나와 앉은 연합군측 법무대신 아리아노 라자루스 경은 눈앞을 뿌옇게 채운 물안개를 보며 평소와 똑같은 불평을 늘어놓았다. 이 일대가 다 그렇지만, 특히 별궁 주변은 해류가 빠르고 물살이 거친데다가 이런 겨울에는 거의 매일같이 안개가 잔뜩 끼어 있었다.

특히나 아리아노가 나와 있는 절벽 중간, 지금은 폐쇄된 근위대의 해안 경비초소가 있던 곳에 있으면 마치 구름 속에 붕 떠 있는 것 같은 묘한 느낌을 종종 얻곤 했다. 아리아노가 심란할 때 술병 하나를 들고 민간인 통제구역인 이곳을 혼자 가끔 찾는 것도 그 장관을 언제든 구경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돼 가는 건지.”

아리아노는 반쯤 마신 술병을 기울이며 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는 무언가 잘못 돌아간다는 것을 눈치 챘지만 정확히 뭐가 잘못되었는지를 알 수가 없으니 미칠 지경이었다. 수우 황제는 몇 달째 아예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황도의 전장에서 돌아온 사위 제롬은 며칠째 계속 술만 벗삼고 있었다.

사실 상황이 아주 나쁜 건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절친한 친구인 베흔이 죽기는 했지만 보안국장 쿠베가 인수인계도 제대로 했고, 동부최고제후 샤자한도 죽었지만 다행히 황도 공략군 전체가 무너진 건 아니었다.

그리고 막강한 동원력의 남부연합군은 그새 10만이 넘게 다시 충원을 받았으니 전체 규모로만 보면 그다지 큰 피해를 입은 건 아니었다. 몇몇 거물들의 죽음도 어찌 보면 그냥 역사 속에서 흔히 보이는 ‘주역의 교체’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해석해도 될 일이었다. 그들이 아니어도 연합군 측에 인물은 충분히 많았다.

따져보면 적에게도 피해는 컸다. 적 황제가 죽지 않은 건 정말 애석한 일이지만 눈도 멀고 한동안 전장에도 못 나오게 되었으니 치명타가 될 테고, 총리 페로도 중상을 입고 전장에서 자취를 감추었으니 적 역시 만신창이기는 매한가지였다. 게다가 가장 큰 차이는 동맹군의 장기적인 동원 능력이 연합군에 비해 크게 떨어진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아리아노의 걱정은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이런 ‘양쪽의’ 전황 때문만은 아니었다.

“음?”

마지막 술잔을 들이키던 아리아노는 단검이 있는 허리춤에 살며시 손을 가져갔다.

‘누구지?’

묘한 인기척을 느낀 아리아노가 움직임을 자제한 채 침을 꿀꺽 삼켰다. 따로 군대 경험은 없지만 형사 법무관 시절에 호신술과 체포술, 어느 정도의 격투, 사격술은 익힌 일이 있었다. 하지만 뒤에서 움직이는 누군가의 몸짓은 언뜻 느끼기에도 보통의 건달 따위가 절대 아니었다.

‘제기랄, 어떤 놈이지.’

자신이 다룰 상대가 아닌 것 같다고 판단한 아리아노는 칼에서 손을 떼고 할룩스를 대신 잡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군사 통제구역이었고 근위대 외에는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다. 아리아노가 경호원 하나 없이 이렇게 혼자 나와 주사를 부릴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긴급 구조요청’을 보내려던 아리아노의 손끝을 귀에 익은 굵은 목소리가 붙들었다.

“나요,”

“니미럴, ‘나’가 누군지 내가 어떻게 알아?”

“내 목소리도 잊은 거요? 아리아노.”

“누구……설마……베흔? 근위대장이요?”

깜짝 놀란 아리아노가 놀라움 반, 반가움 반으로 고개를 휙 돌리려 했지만 얼굴만한 큰 손이 그의 목을 덥석 붙들었다. 누군가의 굵은 팔에 붙들린 아리아노는 비명소리도 내지 못한 채 초소 안쪽의 어둠 속으로 쑥 빨려 들어갔다.

“쉿.”

아리아노는 가슴을 누르는 육중한 느낌에 반사적으로 숨을 꾹 눌러 참았다. 아리아노를 깔고 누운 베흔이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베흔은 4명 정도의 낯선 가디언들과 함께 초소 안쪽, 빈 상자들이 몇 개 굴러다니고 있는 좁은 공간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아리아노는 살짝 술기운이 오른 붉어진 눈으로 베흔의 초록빛 눈동자를 한참동안 뚫어지게 응시했다.

“맙소사, 근위대장 맞잖아?”

아리아노가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모습에 긴장이 풀린 베흔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생존을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이 눈썰미 좋은 전직 수사관만은 자신을 바로 알아본 것이었다.

“심란할 때마다 한 잔 하러 여기 몰래 온다는 걸 아는 사람이 또 있던가요?”

베흔이 이 익숙한 친구의 뺨을 톡톡 두드리며 씨익 웃음을 지었다.

베흔의 가슴 밑에 깔린 채 멍한 얼굴로 누워 있던 아리아노는 둘이 조금은 민망한 자세를 하고 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근데, 거시기 복원한 거 아니면 좀 비켜줄 수 없소?”

아리아노의 능청스런 한 마디에 베흔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베흔은 이 유쾌한 친구에게 ‘우리가 사돈지간인 건 알고 있소?’하고 되물으려다가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복원했다면 상대가 되어 줄 생각은 있나보오?”

베흔이 키득거리며 그제야 아리아노의 가슴 위에서 물러났다.

“뭐, 확인시켜 주면 까짓거 한 번 생각해 보지요.”

이 노련한 법무대신은 베흔의 엉큼한 농담에도 별로 당황하지도 않은 듯 태연히 몸을 일으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물론 아리아노는 상급제후가 종장이고, 이곳 시장으로 있는 남편에 자식까지 있는 가장이니 감히 그런 발칙한 상상은 양쪽 모두 해 본 일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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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잡담 한 마디>

설문조사 중계입니다. 초반 압도적인 우위를 달리던 코리온을 페로가 무서운 기세로 추월해서 이젠 거의 더블 스코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자 중에는 솔이 생각 외로 선전중이고, 겁나게 운없는 밀리타는 설문에서도 여전히 겁나게 운이 없습니다.

그리고 아메스는 여전히 자리값 못 하고 있군요. ^^

<근데 지금 보니 어떤 분께서 평점에 폭탄을 뿌리고 가셨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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