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713화 (708/1,132)

< -- 713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

.

.

“그나저나,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요? 당장 궁으로 돌아갑시다. 내가 다 설명해 줄 테니.”

“빌어먹을 쿠베 새끼랑 당신 사위 놈이 날 그냥 놔둘 것 같소?”

“예?”

베흔이 이를 뿌드득 갈며 까마득한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오늘 새벽에 파도가 좀 잔잔하길래 절벽을 타고 여기까지 기어 올라왔소. 여기서 궁까지 절벽은 도저히 올라갈 수가 없어서 경이 내려오기만 기다리고 있었소이다. 운 없으면 꽤 오래 기다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생각 외로 오래 안 기다렸으니 그나마 다행인지도 모르지.”

“그럼 여기서 날 기다렸다는 말이요?”

“내가 반갑지 않은 거요?”

베흔이 입으로는 농담을 던졌지만 눈으로는 주변을 불안하게 계속 살피고 있었다. 구조가 구조다보니 절벽 위의 다른 초소들에서 마음만 먹으면, 아니 정확히는 안개가 걷히고 시야만 트이면 어디서든 이 투명한 유리상자 안을 들여다보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이 해안 경비초소는 수직의 절벽 중간에 접착제로 붙여놓은 유리상자 같은 모양이었고, 위에서 사다리를 내려야 가까스로 올 수 있는 아찔한 곳이었다. 시야 확보를 위해 바닥까지 투명한 통유리로 되어있다 보니 간이 콩알만한 사람이라면 궁둥이를 대고 앉아있는 것만도 쉽지 않았다.

언뜻 효율적으로 보이는 이 초소가 평소에 이렇게 버려져 있는 것도 잘 훈련된 병사들조차 현기증에 얼마 버티지 못하고 실려가거나 심한 두통을 호소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보니 간 큰 아리아노나 이런 유리 초소에 종종 내려와 태연히 절벽에 다리까지 내놓고 술을 마시지 웬만한 사람은, 심지어 군인들도 접근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리고 가끔 베흔 정도나 이 엉뚱한 장소에서 그의 술친구가 되어 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오늘 밤까지 이 물안개가 걷히지 말아야 하는데.”

베흔이 상자 뒤에 몸을 웅크리며 얼굴을 찡그렸다. 상황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것을 눈치 챈 아리아노가 눈가에 힘을 잔뜩 주었다.

“내 이런 거 묻기는 좀 뭣하지만 혹시…….”

굳은 표정의 아리아노에게 베흔이 대답 대신 문서가 든 통 하나를 불쑥 내밀었다. 통의 봉인을 본 아리아노의 눈이 순간 주먹만해졌다.

“이, 이게 뭐요?”

아리아노가 가리킨 곳에는 황제의 직인이 찍힌 뚜껑이 있었지만 그가 지금까지 보아온 것과는 재질이나 도안이 어딘지 달랐다.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지었던 베흔이 그의 시선을 외면하며 짧게 대답했다.

“카렐 황제의 것이요.”

“카, 카렐……황제요?”

그 한 마디로 아리아노는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쿠베가 왜 베흔이 죽었다고 주장하고 있는지, 사위 제롬이 왜 매일같이 술병만 껴안고 사는지가 그 한 마디에 모두 함축되어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아리아노 자신도 심각한 결정의 순간에 면해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까지도.

베흔과 함께 있는 4명의 가디언들은 그를 돕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황제를 대신해 그를 감시하는 역할도 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한 가지만 압시다.”

아리아노가 봉인을 뜯기 전, 침착하게 물었다.

“그대가 먼저 ‘변심’한 거요? 아니면 여기 놈들이 먼저 ‘변심’해서 그대가 어쩔 수 없이 거기 몸을 맡긴 거요?”

“이제와 그게 뭐 그리 중요하오?”

베흔이 짜증스레 대답했다. 그의 입에서는 ‘쿠베와 제롬 그 새끼들이 먼저 날 배신했다’라는 말이 빙빙 맴돌고 있었지만 비록 배신했을지언정 차마 아리아노의 앞에서 자신의 아들이며 그의 사위인 남자를 대놓고 욕하고 싶지는 않았다.

복잡한 심정의 베흔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아리아노는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뜻인지 알겠군요.”

“예?”

“나도 알 만큼은 압니다. 그렇게 애써서 감싸지 않아도 말입니다.”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베흔이 아리아노를 휙 돌아보았다. 하지만 도대체 무얼 안다는 것인지 아리아노는 대놓고 밝히지는 않았다. 대신 짧은 한 마디로 모든 것을 대신했다.

“키워 준 아비만 봤다면 내 귀한 딸을 그리 시집보내지 않았겠지요.”

굳어버린 베흔과, 편지를 쥔 아리아노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왜 하필 날 찾아온 겁니까.”

더 이상 이 남자를 친구만으로 대할 타이밍은 아니라고 여긴 아리아노가 침착하게 먼저 물었다. 그리고 베흔도 평소처럼 승부사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그대와 나는 한 배를 탄 운명이니까.”

“내가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데요?”

아리아노가 살짝 시비조로 물었다.

“난 제롬과 손녀를 지켜야 하고, 그대도 딸과 손녀를 지켜야 하지 않소.”

베흔은 자신이 말한 ‘손녀’가 제롬의 딸 세데스인지, 아니면 카렐인지, 혹은 둘 다인지 차마 밝히지는 못했다. 어쨌든, 그의 대답에 아리아노의 표정이 일순간 창백해졌다.

“적 황제……아니, 카렐이 이미 다 알고 있는 겁니까?”

“지금까지도 그 패를 안 터뜨리고 쥐고 있었으니 무서운 사람이지요. 애당초 제위싸움에 뛰어들었을 때부터 막판에 우리를 잡을 마지막 패로 생각하고 지금껏 숨겨 왔던 모양입니다.”

“세상에.”

아리아노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이마를 짚었다.

“그런데, 당신하고는 서로서로 죽일 것처럼 증오했던 것으로 아는데, 그런데도 받아줬다는 거요?”

아리아노의 노골적인, 하지만 정확한 지적에 베흔은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카렐이 자신을 기꺼이 받아들여 준 것이 물론 그의 끈질김과 포용력 때문이기는 했지만 따져보면 혈연 또한 한몫했음을 그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말을 아리아노 앞에서까지 해야 할는지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길래 세도가는 사람이 내지만 제왕은 하늘이 낸다고 하지 않소.”

“지금 그 말 진심이요?”

아리아노는 이전 같은 기세가 한풀 꺾여나간 듯한 베흔의 초록색 눈동자를 잠시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새 많이 변했구려.”

그는 낮은 한숨을 내쉬며 봉인을 조심스레 뜯어내고 안에 든 문서를 끄집어냈다.

편지, 아니 문서를 펼쳐 든 아리아노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날……새 법무대신으로?”

“두겐 놈이 서부 섭정공으로 임명되면서 그쪽 법무대신이 공석이 된지 꽤 되지 않았소.”

“그게 언제적 이야기인데? 이미 그때부터 그대하고 날 노리고 있었다는 거요?”

“내 그러니 무서운 사람이라 하지 않았소.”

아리아노는 기가 막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문서를 다시 살펴보니 어딘지 이상했다.

“그런데, 이건 공식적인 임명장 아니요? 편지는 어디 갔소?”

아리아노가 통의 안쪽을 아무리 뒤지고 이리저리 흔들어 보았지만 요구조건이나 거래에 관한 내용이 담긴 쪽지 같은 것도 전혀 없었다.

“아무 것도 없는데?”

통 안에는 그저 세나우스 4세 황제 내각의 2번째 법무대신 겸 특별수사관으로 임명한다는 두툼한 가죽 표지의 임명장만이 약간 흐트러진 필체의 수결과 큼직한 옥새가 찍힌 채 안에 말려 있었다. 다만 차이라면 날짜 란이 비워져 있다는 정도였다.

“아니, 조건도 없이 무조건 임명장부터 내린 거요?”

“정말 아무 것도 없소?”

통 안을 재차 확인해 본 베흔 역시 기가 막혀 어깨를 들썩거렸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요구사항 한 마디 없이 달랑 임명장만 내린 것도 지극히 ‘카렐다운 짓’이었다.

“허, 거 꼭 옛날의 어떤 양반 스타일 같구려? 오만이 하늘을 찌르는 게 말이요.”

안개가 점점 짙어지는 것을 확인한 베흔이 여유롭게 상자에 기대앉으며 장난스레 중얼거렸다.

“나나 근위대도 ‘귀순’이 아니고 ‘복귀’라고 고집하는 양반이 오죽하겠소,”

아리아노는 또다시 황당함에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 뭐 이런 양반이 다…….”

베흔은 얼마 전까지도 ‘그놈’이라 부르던 카렐에 대한 호칭이 어느새 바뀌었다는 것을 눈치 챘지만 일단은 못 들은 척 했다.

“조건 따위 없이 진짜 그 양반 사람 입장에서 날 도와주라는 것일 게요.”

“그게 더 무서운데요?”

아리아노가 입가를 씰룩거리며 베흔을 쏘아보았다.

“그러길래 그대와 나와는 결국 한 배일 수밖에 없다고 하지 않았소.”

“근위대장님이 그쪽으로 가면서 어차피 제롬 일가의 목숨은 보장받았을 테니, 나와는 법무대신직 말고는 따로 합의할 것도 없다는 뜻인가요.”

아리아노의 정확한 해석에 베흔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의 말대로, 연합군의 핵심인 델루지 가와 혈연으로 엮여 있는 베흔과 아리아노는 거래와 조건에서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똑똑한 베흔이 아무 약속도 받지 않고 무작정 적에게 항복하지는 않았을 테니, 아리아노로서도 일단은 베흔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내가 선택할 자유는 있는 거요?”

아리아노가 절벽 아래를 힐끔 내려다보며 걱정스레 물었지만 베흔은 쓴웃음만 지을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지금 상황이 언뜻 ‘정치적 선택’의 문제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목숨 문제’였다. 그가 거절한다면 눈앞의 남자가 살인자로 돌변하리라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냉정히 따져보면 카렐이 임명장을 내리며 체면치레를 해 준 것일 뿐, 지금 아리아노는 포로로 잡힌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동맹군의 계획이 뭐길래요?”

자신의 처지를 절감한 아리아노는 ‘적’이라는 표현을 최대한 순화해서 쓰기로 했다.

“법무대신직을 받아들일지 아닐지부터 대답을 주시오.”

베흔이 드디어 본래의 잔혹한 모습을 드러냈다. 베흔의 뒤에 있는 동맹군 소속 가디언들은 이미 허리춤의 칼에 손이 가 있었다. 모두 근위대 출신들인 듯 황금빛 팔찌를 끼고 있었다.

“받아들여준다면 이네들 중의 두 명이 그대를 곁에서 지켜 줄 거요.”

베흔이 웃음을 지었지만 말이 지키는 것이지 사실상 감시자로 붙는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내 가문과 가족들의 안전만 보장해 준다면.”

아리아노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사실 이 자리에서 죽어서 절벽 밑으로 던져지지 않으려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베흔이 그제야 웃음을 지으며 2번 도시의 지도를 꺼냈다.

“나도 큰 계획은 모르오. 알려줄 리도 없고. 그저 내게 주어진 임무에서 짐작만 할 뿐이지.”

“임무? 사오시안트 궁에 침투해서 성문이라도 여는 거? 아니면 격벽식 방어체계를 풀어버리는 거?”

“원래 계획은 그랬었지요.”

“그럼 지금은 안 그렇다는 거요?”

“오늘 아침 갑자기 모든 계획이 변경되었소. 동맹군이 아닌 ‘제3의 세력’이 곧 사오시안트 시를 내부에서 쑥대밭으로 만들려 들 거라고.”

“예?”

“놈들은 아직 제대로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소, 그 양반 생각은 놈들을 유인해 스스로 정체를 드러내게 하고 연합군을 공격하게 만들려는 것 같소. 그러면 그때 제롬과 연합군 수뇌부를 구출해 내는 게 내 임무요.”

“구출? 지금 구출이라고 했소? 연합군 수뇌부를 사로잡으라는 게 아니고?”

아리아노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글쎄, 보는 입장에 따라 구출도 되고 생포도 되겠지. 어차피 안 그러면 그네들에게 모조리 죽을 테니.”

베흔이 또렷하게 대답했다. 혼란스러워진 아리아노가 고개를 저으며 다시 물었다.

“다시 말해 주시오. 그 제3의 세력이 도대체 뭐요?”

“글쎄, 믿을는지 모르지만……교단일 거라더군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베흔의 대답에 아리아노가 입을 쩍 벌렸다.

“교, 교단이요?”

아리아노의 물음에 베흔이 입술에 힘을 꽉 주며 대답했다.

“그 양반께선 연합군과 전면전을 벌여 사생결단을 하는 건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신 모양이요. 지금 사실상 3개 세력이 엮여 있으니 한쪽에만 힘을 집중하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라는 거지. 내 보긴 그네들을 역이용해서 난공불락인 사오시안트를 무너뜨리려는 것 같더군요.”

+++++++++++++++++++++++++++++++++++++++++++++++++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The Iron Vein 개인지 구매사이트 : http://vein.zio.to/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