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17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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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아노의 연락을 받았을 때, 베흔은 성 밖에서 전투가 개시되는 즉시 자신을 배신한 새 근위대장 쿠베와 교단의 하수인이 분명한 보안국장 쿠마르 우펠루를 잡아 본때를 보일 궁리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하지만 정작 별궁에는 별로 남은 것이 없었다. 사오시안트의 구조에 누구보다 익숙한 베흔은 아리아노가 만들어 준 가짜 신분증으로 근위대 행세를 해 가며 구석구석을 뒤졌지만 허탕이었다. 쿠베는 제롬과 함께 수성전이 벌어질 성벽으로 떠났고, 보안국장 쿠마르 녀석은 이 중요한 시각에 어디로 갔는지 자리에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항구에 시체가 들어와 있는 것 같다’는 아리아노의 연락을 받은 그는 이번 일의 키를 쥐고 있는 그 북부 끄나풀이 어쩌면 항구 창고에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3명의 동맹군 가디언들과 함께 재빨리 항구로 향하려 했지만 아리아노의 말대로 별궁에서 항구로 향하는 도로는 민간인들로 가득 차 제대로 움직일 수 없어 보였다.
결국 그가 택한 방법은 위험하고 극단적이었지만 잘 훈련된 최고의 가디언들이라면 나름대로 도전해 볼만도 한 일이었다.
“젠장, 이제 정말 물이라면 끔찍하게 싫어.”
별궁 아래의 그 무시무시한 파도를 가까스로 뚫고 온 베흔이 입에 잔뜩 든 짠물을 뱉어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리프트 케이블로 별궁 아래의 까마득한 절벽을 순식간에 내려오는 것까지는 식은 죽 먹기였지만 그 뒤가 문제였다. 절벽을 후려치는 살인적인 파도를 헤치고 해변의 바위까지 그와 가디언들은 몇 분이나 사투를 벌여야 했고, 나중에 땅을 밟았을 때는 기진맥진해 주저앉고 싶은 기분이었다.
지난번 13선지자의 묘에서 ‘물’이라면 아주 학을 떼었던 베흔에게는 헤엄 같은 건 정말 생각도 하기 싫었고, 사실 이렇게까지 서두를 필요까지도 없을 듯 보였지만 남편이 위험할 것 같다는 아리아노의 절박한 부탁을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그 사이 해도 지고,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베흔과 3명의 가디언들은 2번 도시의 남쪽 해안선을 이루는 가파른 절벽 아래, 바위를 훌쩍훌쩍 뛰어넘으며 항구 쪽으로 재빨리 접근해갔다. 사람이 없는 절벽 아래 돌밭을 가로질러 항구에 접근하는 편이 꽉꽉 막힌 도로를 뚫고 항구로 가는 편보다는 빨랐다. 바다를 건너오느라 고생을 좀 했지만 일단 여기부터는 일사천리였다.
아리아노가 말한 11번 창고는 거대한 사오시안트의 항구에서도 가장 동쪽에 위치한 창고라 별궁에서 그나마 가까운 위치였다. 여느 대도시 항구처럼 사오시안트의 항구도 그 자체가 하나의 작은 도시라고 해도 될 만큼 컸다.
“멀리 가지 않아 그래도 다행이군요.”
제일 먼저 철조망을 넘은 가디언이 뒤따라 들어오는 베흔을 도와주며 웃음을 지었지만 베흔의 대답은 퉁명스러웠다.
“솔직히 다행은 아냐.”
철조망을 넘어 들어온 베흔이 젖은 몸을 툭툭 털며 말을 이었다.
“왜 하필 별궁에 제일 가까운 끄트머리 창고일지 생각해 봤나?”
“흐음, 그, 글쎄요.”
가디언이 입을 꾹 다물었다.
“이 창고는 별궁에도 가깝고 시가지에도 가까워. 어쩌면 별궁에 선봉대로 투입할 최정예 좀비 새끼들을 여기 모아놓았는지도 모르지.”
‘최정예 좀비’라는 베흔다운 우스꽝스런 표현에 가디언 중 한 명이 픽 하고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어차피 이들 모두 카렐에게 오기 전까지는 근위대에 있던 자들이었고 이제 베흔의 아랫사람으로 돌아갔을 뿐이었다.
항구 안에 들어선 그들은 벗어서 따로 싸 놓았던 옷을 재빨리 챙겨 입고 근위대 가디언여단 차림새로 재빨리 되돌아갔다. 아리아노가 만들어 준 신분증은 물론이고 그가 알아 준 여단 본부의 암구호도 완벽했다.
베흔 일행은 높은 조립식 건물로 이루어진 항구의 창고들 사이를 재빨리 걸어 지나갔다.
항구의 창고는 갓 들어온 물품들을 분류하기 위한 대기 장소이다 보니 해도 지고 배도 없는 상황에서 썰렁한 것도 당연했지만 경비병들까지 거의 보이지 않는 건 뜻밖이었다.
물론 베흔은 민간인들의 혼란사태와 시장 니콜라프 경이 죽음으로 병사들이 모두 그리로 갔다는 것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창고 안을 수색하실 건가요?”
“미쳤나.”
지쳐 신경이 곤두서 있던 베흔이 짜증스레 대답했다.
“11번 창고에 좀비 새끼들이 있다는 걸 알았으니 거기만 날리면 되는 거지.”
베흔은 함께 온 가디언들 중 2명에게 야적되어 있는 연료통 쪽을 눈짓했다.
“저것 중에 하나 소리 없이 집어 와. 군수품도 함께 있다고 하니까 잘 골라 불붙이면 싹 다 날려버릴 수 있으니. 꽝꽝 터지면 저 귀찮은 파리떼들 놀래켜 쫓아낼 수도 있겠지.”
베흔은 멀리 철조망 너머로 보이는 민간인과 시장의 안전은 고사하고 귀찮아 벌써 몇 번째 ‘저 파리떼들’이라며 짜증을 내고 있었다. 원래 그의 스타일이 그래왔지만.
“그 2, 3백놈이 전부일까요? 놈들 규모가 1천 명이 넘는다고 들었습니다만 수색해서 그놈들까지 다 잡아내지 못하면…….”
부하의 물음에 베흔이 대번 눈가를 찡그렸다.
“새끼야, 보물같은 몸뚱이 2, 3백 개가 불 속에서 지글지글 익고 있는데 놈들이 가만히 있겠냐? 경비병이 뒈졌다는 거 보니 누군가 지키고 있다는 뜻인데, 불 싸지르면 최대한 빨리 깨우던지 수습하려고 어떻게든 모습 드러낼 것 아냐. 시간도 없는데 여길 언제 다 뒤지고 앉았어.”
베흔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창고 건물들을 둘러보며 짜증을 버럭 냈다.
“잔말 말고 너희는 반대편으로 가서 빨리 불이나 질러. 난 주변에 수상한 놈들 없나 살필 테니까.”
베흔이 재차 손짓하자 가디언 2명이 급히 연료통 쪽으로 멀어져갔다.
그들을 보내고 가디언 1명과 함께 창고에 다가가던 베흔은 먼 옛날, 암살 1팀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묘한 짜릿함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이제 그때의 팀원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지만 최소한 맞서고 있는 적들, 그리고 그가 수행하고 있는 임무는 그때와 어딘지 비슷했다.
“역시 이게 내 스타일인가 봐.”
“예?”
“쉿.”
무어라 되묻는 부하에게 베흔이 얼른 입을 가려보였다. 하지만 그런 그의 행동이 무색할 정도로, 창고 모퉁이에서 웬 거대한 그림자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저 새끼?”
상대가 가디언임을 직감한 베흔이 재빨리 플람베르주의 칼자루를 잡았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상대의 키와 체형, 심지어 어마어마하게 큰 손까지도 어딘지 익숙했다.
“원래 이 용도로 데려온 건 아니었는데.”
그 거한의 뒤에서 헤네티 두 명과 함께 석궁을 들고 뒤따라 나온 아스탈이 쓴 입맛을 다셨다. 그자의 얼굴에서 오래 전, 그것도 아주 오래 전 옛날의 기억이 되살아난 베흔이 자기도 모르게 전율했다.
“네놈……혹시…….”
시간만 따진다면 이미 잊어버렸어도 몇 수백 번은 잊어버렸을 기억이었다. 하지만 민병대 지도자 파냐드가 소중한 캡슐들을 ‘팔아먹는’ 불편한 자리에 어쩔 수 없이 함께 있었던 당시의 정보참모 베흔은 그 이후로 저 남자의 눈빛을 잊어 본 일이 없었다.
“기억난다. 네놈이 바로 아스탈이었구나. 아스탈 빈 다하카르.”
퍼즐을 대충 완성한 베흔이 하얀 송곳니를 살짝 드러냈다. 저자는 파냐드에게서 ‘발생이 되지 않는’ 2,800개의 캡슐들을 사갔던 바로 그 은발의 남자였다.
“알아봐 주니 고맙다. X-5-3918. 빨간 머리 불량품."
아스탈의 조롱에 베흔이 입가를 씰룩거렸지만 그 정도로 흔들릴 풋내기가 결코 아니었다. 그는 상대가 마구스 혈통답게 허영심도 누구보다 강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있었다.
베흔은 모자를 벗고는 물기가 남아있는 붉은 머리칼과 잘 다듬은 멋진 콧수염을 보란 듯 쓰다듬으며 냉큼 대꾸했다.
“허어, 네놈은 ‘개성’하고 ‘불량’도 구분 못하는구나. 아비 야푸르한테 후계 신탁도 못 받은 네가 진짜 불량품이 아니고?”
베흔의 정곡을 찌르는 반격에 아스탈의 눈가에 짧게 붉은 빛이 스쳤다.
“네놈의 그 잘난 개성도 이놈 때문에 의미가 없어졌는데 어쩌지?”
아스탈의 손짓에 조금 전의 그 거한이 망토를 벗어던졌다. 순간, 베흔은 물론이고 그를 따라온 가디언까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키는 물론이고 생김새, 머리모양까지 베흔, 아니 정확히는 이전의 베흔과 똑같은 거한이 양손검을 들고 서 있었다.
“자, 잠깐, 이놈 도대체 누구냐.”
평소 같았다면 격분하며 바로 칼부터 휘두르며 싸움이 벌어질 판이었지만 베흔이 재빨리 말을 걸며 또다시 아스탈의 허영심을 자극했다.
“누구긴 누구겠나, 진짜 X-5-3918이지. 너 같은 불량품 말고, 원본 세포로 제대로 만들어진 놈이지.”
베흔이 기겁을 했다. 파냐드가 캡슐을 팔아넘길 당시 저자에게 ‘선물’로 주었던 것이 바로 베흔 자신의 원본 세포가 든 튜브였다. 지난번 펜지켄트에서 ‘자신과 똑같은 유전자의 시체’가 나왔던 것도 이제야 분명히 이해할 수 있었다.
“허, 한 마디로 어린 새끼 놈이군.”
베흔이 놀란 티를 최대한 감추며 또다시 빈정거렸다.
“여러 놈 만든 거 보니 내 유전자가 제법 쓸만한 모양이지? 몇 놈이나 더 찍어냈냐? 열 놈? 스무 놈?”
“이 전쟁 끝나면 쓸모도 없을 놈을 내가 뭣 하러 여럿 만들었겠나?”
베흔의 어처구니없는 넉살에 기가 막혀하던 아스탈이 공격 명령을 내리려 손을 치켜들었다.
베흔은 이 와중에 재빨리 말을 걸어 또다시 싸움을 늦추었다.
“알 건 좀 알자. 네놈은 왜 대신관이 못 된 거냐?”
“허허, 그걸 알아서 뭐 하게?”
“네놈의 경쟁자는 이제 제거한 거냐?”
아스탈이 갑자기 씨익 웃으며 이를 드러냈다.
“네놈이 친절하게 제거해 줬잖나.”
“뭐?”
베흔의 표정이 충격으로 멍해진 순간, 여유만만하던 아스탈 역시 무언가 이상한 냄새에 뒤를 휙 돌아보았다. 무언가 타고 있는 것 같은 악취와 검은 연기가 11번 창고가 있는 쪽에서 조금씩 솟구치고 있었다.
“이 새끼!”
지금까지 시간을 끌기 위한 베흔의 말장난에 잡혀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아스탈의 눈에서 저 화재보다도 더 붉은 빛이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불꽃을 내며 타들어가는 창고를 보며 당황한 아스탈이 급히 뒷걸음질치며 할룩스를 집어들었다.
“밖에 있는 놈들한테 알려! 시간이 없으니 무조건 공격 개시하라고! 11번 창고에 몸이 와 있는 놈들을 제일 앞장세우라고 해!”
“친절하게 다 설명해 줘서 고맙다! 이 불량품 얼치기 마구스야!”
아스탈이 당황한 기색을 보인 순간, 베흔이 악 소리를 지르며 아스탈, 그리고 그를 지키고 있는 자신의 복제품을 향해 돌진했고 함께 온 동맹군 가디언이 아스탈을 지키는 헤네티들에게 동시에 공격을 시작했다.
‘상대 베흔’, 아니 베흔의 입장에서는 ‘가짜 베흔’이 재빨리 칼을 들어 주인의 앞을 막아섰지만 베흔은 생김새가 어떻건, 유전자가 어떻건 아무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동기들까지 몰살시켰던 그에게 적은 그저 적일 뿐이었다.
“네놈 면상을 짓이겨서 누가 불량품인지 보여주마! 이 빌어먹을 가짜 새끼야!”
베흔의 플람베르주가 공중을 붕 날아 적, 아니 자신과 똑같은 쌍둥이의 칼과 귀를 찢는 소리를 내며 충돌했다. 이번 전쟁을 위해 만들었다면 나이도 얼마 되지 않을 것이 분명했지만 육중하게 버티는 힘은 놀랍게도 지금의 베흔과 맞먹거나 그 이상이었다.
그때, 성벽이 있는 북쪽에서 느닷없이 큰 함성이 울려왔고, 동시에 쾅 소리가 울리며 11번 창고 한쪽에서도 큰 불꽃이 확 솟구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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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이런저런 잡담>
이번 전투는 주된 무대의 약간 뒤쪽에서 제3자, 혹은 일반인의 입장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중요성있게 다루는 것이 컨셉입니다. (물론 주된 무대도 곧 다룹니다.) 공성전씬은 이제 많이 익숙해지셨을 테고, 이젠 좀 다른 방향으로 접근하려 해 보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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