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719화 (714/1,132)

< -- 719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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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아스탈 이 새끼, 어디로 갔지?”

사람들 눈을 피해 옆 동 창고에 몸을 숨긴 베흔이 이를 갈며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그 은발머리 남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장, 대장.”

창고 주변을 둘러보던 베흔이 귀에 익은 목소리에 옆을 휙 돌아보았다. 이곳 창고에 불을 붙인 2명의 가디언들이 숨어있던 곳에서 급히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들도 그새 싸움을 벌였는지 1명은 등에 볼트가 박히는 부상을 입은 상태였고 1명은 흙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헤네티 둘이 튀어나와서 한바탕 붙었습니다.”

“병신새끼들, 상등급 가디언 둘이 고작 헤네티 둘도 못 당하고 이 꼴이 됐냐?”

베흔이 버럭 화를 내자 그들이 정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대장 있는 쪽에서 웬 머리 하얀 놈이 달려와서 공격을 하는데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헤네티 하나씩 맡아서 싸우고 있었는데 놈이 옆에서 협공을 하고 석궁을 쏘아대는데 헤네티들과 제대로 맞설 수가 없었습니다. 이 친구도 까딱하면 목에 볼트를 맞아 죽을 뻔했습니다.”

“그놈이 싸움도 잘 한다고?”

“보십시오. 그놈 칼을 막다가 제 팔이 빠질 뻔했습니다.”

당혹스러워진 베흔에게 가디언이 부러진 칼을 내보였다. 상등급 가디언의 칼을 부러뜨릴 정도라면 같은 가디언 수준 혹은 그 이상의 힘을 지녔음이 분명했다.

“그놈들 지금 어디 갔어?”

“모르겠습니다. 원래 주변에 서너 군데 불을 더 붙이려 했지만 놈들도 덤비고 항구 소방대까지 몰려와서 한 군데밖에 못 붙였습니다. 한참 싸우다가 일단 피해야 했습니다.”

“젠장, 한 번에 확 태워버려야 되는데.”

베흔이 이를 갈며 얼굴을 찡그렸다. 어쨌든 문제의 11번 창고가 불타고 있는 건 사실이었지만 눈치 없는 작업자들이 한구석이 타고 있는 창고에 들어가 ‘관’이 들어있는 큰 상자를 급히 끄집어내고 있었다. 저대로는 저곳에 있는 좀비들 중 얼마나 태워버릴 수 있을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창고들이 워낙 다닥다닥 붙어있고, 열기는 무서운 기세로 건물 한쪽을 태워가고 있었다. 이대로는 열기 때문에 다른 창고 동에 옮겨 붙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이대로는 시가지가 성치 못하겠는데요? 시 소방대는 전투를 대비해서 전장인 성벽 쪽에 가 있을 테니 애써 봤자 끄기는 힘들 겁니다.”

부상을 입은 가디언이 소방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항구 자체 소방대는 애당초 불을 끄기 위한 조직이라기보다는 시 소방대가 올 때까지 시간을 버는 역할이었다, 다른 창고를 보호하기 위해 불꽃과 연기를 바깥쪽으로 돌리고 있다보니 대로 건너편의 시장 쪽이 고스란히 불꽃과 연기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몇 군데만 불 더 붙이면 아주 난리가 나겠군. 그러고 나면…….”

그때, 어둠 속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베흔, 베흔이요?”

몇 명의 인기척과 함께 땀으로 번들거리는 검은 얼굴이 드러났다. 급히 옆을 돌아보았던 베흔은 저고리 바람으로 거친 숨을 헐떡이고 있는 법무대신 아리아노 경과 구르베스 일행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내 전문 받고 온 거요? 그런데 꼴이 이게 뭐요?”

“빌어먹을, 내 팔자 하고는.”

아리아노는 군데군데 찢겨 솔기가 드러나고 흙까지 묻은 저고리를 들어 보이며 쓴웃음을 지었다.

“출입문에서 날 막길래 몰래 담을 넘어오느라 그랬소. 그 앞뒤 꽉꽉 막힌 남정네가 날 들여보내지 말라고 했다더군. 하여간, 내 그 답답한 인간하고 지금껏 산 게 용치.”

아리아노가 남편 이야기를 하며 여지없이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사실 이 부부는 극단적으로 다른 피부색만큼이나 성격도 완전 딴판이었다. 종장 아리아노는 활달하고 화통한 성격에 수다와 유머감각이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여자였고, 남편 니콜라프는 고리타분한데다가 과묵하기로는 공직자 중 손에 꼽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중앙귀족 종가에서 이들만큼 잘 어울리는 부부도 찾기 어려웠다. 매일같이 미남 타령에 술과 놀기를 좋아하는 아리아노였지만 최소한 집안에서는 다정한 아내이고 어머니, 위엄있는 종장의 모습을 잃지 않았다. 게다가 약간의 정치적인 손해와 가문 원로들의 압박을 감수하면서까지 둘째, 셋째 남편도 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니콜라프 역시 도무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외향적인 아내를 묵묵히 감싸주고 집안을 든든히 지켜주는 기둥이었다.

베흔은 아리아노와 함께 온 구르베스를 힐끔 쳐다보았다. 몇달 전, 아들 제롬을 사주해 저 여자를 몰래 범하도록 만들었던 그로서는 이제와 구르베스를 대하기 영 껄끄러웠지만 정작 구르베스 본인은 아직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이 그에게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때, 아리아노의 할룩스가 갑자기 울리기 시작했다. 발신자를 확인한 아리아노는 할룩스를 받아들자마자 짜증스레 따져물었다.

“니콜라프? 당신 도대체…….”

순간 말을 멈춘 아리아노의 찡그린 얼굴이 조금씩 굳어갔다. 비틀거리며 앞으로 주저앉으려는 그를 구르베스가 얼른 붙들었지만 아리아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거친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아리아노? 괜찮은 거요?”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눈치 챈 베흔이 떨고 있는 그의 어깨를 붙들며 조심스레 물었다. 할룩스를 쥔 채로 바닥에 주저앉은 아리아노는 급히 손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눈물까지는 감출 수 없었다.

“니콜라프가……, 그 답답한 사내가…….”

베흔이 말을 잇지 못한 채 울고만 있는 이 친구의 웅크린 어깨를 꼭 안아주었다. 누군가를 달래준다는 게 그에게는 꽤나 익숙지 않은 짓이었지만 이 상황에서 아리아노를 달래줄 수 있는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

할룩스를 끈 아리아노는 사람들 앞에서 울음소리를 내지 않으려 베흔의 가슴에 얼굴을 꽉 기댔지만 그의 어깨를 짚은 손끝은 주체할 수도 없이 떨리고 있었다.

“답답하고 멍청한 남자 같으니. 말도 지지리 안 듣는 한심한 남자 같으니.”

아리아노가 맘에도 없는 말을 계속 늘어놓으며 마구 고개를 저었다.

베흔은 가슴을 적시는 그의 더운 눈물을 느끼며 계속 등을 토닥여 주었다.

“천하의 아리아노 라자루스가 이런 약한 모습 보이면 안 되지. 제발 기운 차리구려.”

“내가 누군데, 제국 제일의 수사관 아리아노인데.”

아리아노가 베흔의 가슴에 눈물을 닦아내며 억지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말로는 이렇게 하면서도 그는 다리가 풀려 일어서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러면 안 되지, 그럼요.”

맘 놓고 울지도 못한 채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는 아리아노의 모습이 베흔에게는 더 안쓰러워 보였다. 웬만한 동정심 따위와는 벽을 쌓은 그였지만 이번만은 그도 뭐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였다.

“이봐, 아리아노 경을 안전한 곳으로 모셔라.”

울고 있는 아리아노 경을 꼭 안고 일으켜 준 베흔은 그의 곁을 지키던 가디언에게 일렀다.

“우린 여기 불을 붙이고 별궁으로 다시 들어갈 테니 자택으로 모시고…….”

“집어쳐요 베흔.”

아리아노가 갑자기 앙탈을 부리며 그의 팔을 떨쳐냈다. 베흔은 또다시 휘청거리는 그를 얼른 붙들었지만 아리아노는 퉁퉁 부은 눈을 부릅뜨며 대뜸 이를 드러냈다.

“아스탈 그 작자 소행이죠?”

“……아마도.”

아리아노가 두 손이 파르르 떨며 그는 자신의 눈물방울이 떨어져 있는 바닥을 노려보았다.

“옛날에……그때 다하카르 교단 놈들을 내가 다 잡았더라면……그때 다 끝냈더라면…….”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어차피 핵심부까지 수사했더라도 그 놈은 못 잡았을 거요.”

베흔이 아리아노의 손을 잡아주며 위로하려 했지만 별 도움이 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됐어요, 난 괜찮으니까. 정말 괜찮으니까.”

아리아노가 야무지게 입을 다물며 베흔의 손을 떨쳐냈다. 하지만 여전히 휘청거리는 그는 결코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암살범이 몸에 불을 붙여서 놈을 잡으려던 7명의 병사들까지 타 죽었답니다. 그 일대 아스팔트 포장재까지 다 다 버릴 정도로 위력이 강했다는군요.”

아리아노가 눈물을 훔쳐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었다.

“그 암살범 놈이 여기서 살아났을지도 모릅니다.”

그때, 이곳에 있던 가디언이 냉큼 끼어들었다.

“창고 안에서 튀어나온 놈 중에 하나가 무장이 좀 독특했습니다. 경호원 복장이라기보다는 회전에 투입되는 중장보병 갑주 같았습니다.”

아리아노가 손에 쥐고 있던 비단포를 다시 챙겨 입으며 흐트러진 머리칼을 대강 손으로 빗어 넘겼다.

“내가 함께 있지 않으면 별궁에 들어가기 어려울 겁니다. 빨리 불을 붙이고 여기서 나갑시다. 베흔. 내 별궁에 들어갈 수 있게 도와줄 테니.”

“남편 시신부터 거둬야 하지…….”

“시신은 나중에도 거둘 수 있지만 원수는 지금 잡아야지.”

아리아노가 비단포 자락을 펄럭이며 뒤로 휙 돌아섰다.

아랫사람들에게서 돌아선 채 숨죽이며 울고 있는 그의 뒷모습에 베흔도 만감이 교차하는 느낌이었지만 더 이상 지체할 수는 없었다. 베흔은 부하들에게 급히 일렀다.

“들었지? 빨리 불을 붙여. 최대한 빨리 끝내고 별궁으로 돌아간다.”

그때 성벽이 있는 북쪽 멀리에서 다시 와아 하는 큰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놈들이 정말로 자살공격을 개시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베흔의 입에서 짧은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젠장, 제발 넌 좀 죽지 마라.”

베흔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큰 줄기는 이제 베흔의 손을 떠났고, 성 밖의 카렐에게 공이 넘어가 있었다.

동맹군 원정부대의 사오시안트 공략은 카렐이 무언가 깜짝쇼라도 벌일지 모른다는 연합군 측의 기우가 무색할 정도로 당초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사오시안트 별궁이 있는 2번 도시 남, 동, 서쪽, 험악한 해안에는 연합군의 기대 아닌 기대와는 달리 동맹군은 아예 나타나 주지도 않았다.

황제 카렐과 카나르 플라칼 경이 직접 이끄는 남-서부연합군 보병대 9만5천은 2번 도시 성벽에서 한나절 거리나 되는 ‘무난한 위치’에 상륙해 남진을 개시했고, 부마 예르마크 경의 기병대 1만8천은 그보다 조금 북쪽에 상륙해서 보병대를 뒤쫓아 남진하기 시작했다.

물론 예상과 다른 것도 몇 가지는 있었다. 지쳐 휘청거릴 것이라 예상되었던 남부 제후군은 황제가 직속병력으로 펜지켄트 시에서 시간을 끈 며칠 동안 적도 부근의 따뜻한 해안가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힘을 비축한 상태였다.

물론 그 기간 중에 황제가 시력을 잃는 비싼 대가를 치렀지만 최소한 제후군들은 다시 활기에 넘쳤고, 빨리 전쟁을 끝내야겠다는 의욕도 어느 때보다 강했다.

그런데 정작 북부보병대나 슈로 기사단 같은 카렐의 직속병력이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는 건 연합군에게 희소식이면서 동시에 걱정거리였다. 그네들이 얼마 전 수송선을 잃고 보급품에까지 문제가 생기면서 전력에 치명타를 입어 아예 동원이 불가능해진 것인지, 아니면 나중에 쐐기를 박는 기동부대로 동원하려는 기만작전인지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둘 중 어느 쪽이든, 2번 도시의 방어력은 충분했고, 설사 그들이 멀쩡한 전력으로 불쑥 나타나 깜짝쇼를 벌인다 해도 연합군 측은 그다지 당황하지 않기에 충분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어쨌든 동맹군은 충분히 예측 가능한 모습으로 움직였고, 2번 도시의 연합군도 여유 있는 승리를 자신하며 느긋하게 수성전을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막상 동맹군이 사오시안트의 성벽 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성을 지키는 연합군 지휘부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자신들의 눈을 의심해야 했다.

“저놈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온 걸까?”

사오시안트의 성벽에 선 제롬은 동맹군 선발대의 기이한 구성을 보며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정상적인 공성부대라면 무수한 공성장비와 사역병단, 그리고 전면에 설 대규모 중장보병대가 주축이 되어 성을 새카맣게 감싸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이번에 카렐이 성벽 앞에 포진시킨 부대는 그런 상식과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글쎄요, 뭐 저런 배치가 다…….”

근위대장 쿠베도 기가 막힌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카렐 황제의 동맹군 공성부대는 공성부대라는 호칭이 무색하게 공성장비는 아예 갖고 있지도 않았다. 제일 선두에는 투창을 든 경기병 3천 정도가 느슨한 대오로 늘어서 있었고, 2선에는 1만 정도의 서부 경보병대와 가디언부대, 그리고 마지막 3선에 서부 장갑보병 5천과 남부 중장보병 1만 5천 정도가 대오를 맞춰 서 있었다.

물론 지금 포진한 병력은 어제 상륙한 11만 중 3만에 불과했지만 어딘지 이상한 건 사실이었다. 전면에 기동부대를, 뒤에 중장갑부대를 배치하는 건 일반적으로 공성전이 아니고 필드에서 기습전을 벌이기에나 적당한 포진이었다. 그러니 제롬과 쿠베가 기가 막혀하는 것도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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