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20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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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측 사이에는 에너지장벽을 사이에 두고 이미 몇 번이나 우렁찬 함성으로 기세싸움이 오갔지만 지금 모양만 보아서는 양쪽 모두 싸울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저놈들 아예 공성전을 할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만?”
쿠베가 나름대로 적의 포진을 읽어내고는 제롬에게 말을 건넸다.
“게다가 지난번에 수송선을 잃으면서 공성장비도 거의 날렸다고 들었습니다.”
“제후군이 가진 장비도 있는데 설마 빈손으로 왔을까? 그렇다고 포위만 하고 시간을 끌려는 수작일 리도 없어. 지금 뒤에서 우리 주력군이 다가오는데 몇 시간 후면 샌드위치 꼴이 될 텐데?”
제롬이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그의 말대로, 사오시안트 반도의 북쪽에 대기 중이던 10만이 넘는 남부연합군과 3만이 넘는 근위대가 동맹군 공성부대의 뒤를 치기 위해 내려오는 중이었다.
“게다가 명색이 황제가 이끄는 부대가 왜 저 모양이래?”
제롬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동맹군 우익, 이쪽에서 쳐다보기로는 서쪽에 해당하는 저지대에 황제를 뜻하는 거대한 금빛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강이 바다와 만나는 그 삼각지 저지대는 사오시안트 부근에서 가장 낮은 곳이었고, 가장 위험한 곳이기도 했다.
그런 곳에 들어앉은 황제의 선택도 희한할 뿐더러, 그 앞을 지키는 게 이번 공격군 중 ‘가장 부실한’ 서부 경보병대라는 것도 의외였다.
그리고 제후군 중 가장 정예 중장보병인 서부 장갑보병대가 중앙을, 가장 수가 많은 남부보병대는 오른쪽에서 우군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번 공격부대의 주역이 저들이었지만 황제는 전혀 엉뚱한 곳에 있었다.
멀어서 잘 구분은 되지 않지만 적 황제 카렐은 경보병대가 위치한 삼각주 뒤, 작은 모래언덕에 있는 듯 보였다. 그 언덕을 머리까지 온통 검은 망토를 뒤집어쓴 기이한 외모의 보병대 수백이 둘러싸고 있었다.
“카렐 놈은 가디언 기병대의 경호를 받지 않았던가? 저건 가짜일지도 몰라. 미끼로 우릴 속이려는 수작인지도 모르지.”
제롬이 턱을 만지작거리며 신중하게 말했다. 그때, 쿠베의 할룩스에 보안국장 쿠마르가 다급한 표정으로 나타났다.
“큰일입니다, 대장. 2번 도시 시장이신 니콜라프 경이 방금 항구의 임시 사무실에서 암살당하셨습니다.”
“뭐, 뭐라고? 장인어른이?”
깜짝 놀란 제롬이 입을 쩍 벌렸다. 니콜라프 경이라면 그의 장인이고 도시 후방에서 시가지를 통제할 책임을 지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에게 자초지종을 자세히 설명한 쿠마르가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더듬더듬 덧붙였다.
“최고제후님께 이런 말씀 드리기 뭣하지만……돌아가시기 직전에 법무대신 아리아노 경과 통화하시면서 크게 화를 내셨고, 끊고 난 후에는 그분을 절대 항구에 들이지 말라고 명령을 내리셨다고 합니다. 게다가 오늘 내내 출근도 안 하셨고……딱히 증거가 있는 건 아니지만 정황상 어쩌면 그분께서도 연루가…….”
“이놈이 뚫린 입이라고 감히!”
가뜩이나 충격을 받았던 제롬이 보안국장의 어처구니없는 의혹에 발끈하며 고함을 버럭 질렀다. 그의 호통에 기겁을 한 쿠마르가 짐짓 놀란 척 얼른 입을 다물었다.
“입조심해라. 할 말 안 할 말이 있지. 부군을 잃고 슬픔에 빠져계실 분을 왜 걸고 넘어져.”
근위대장 쿠베 역시 아랫사람의 실언에 버럭 화를 내며 제롬의 얼른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보안국장의 음흉한 속내는 그저 ‘그럴싸한 의혹제기’만으로도 충분히 달성될 수 있었다.
예상대로, 잠시 머뭇거리던 제롬이 쿠베에게 일렀다.
“혹시……같은 놈들이 장모님도 노릴지 모르니 그분을 찾아내서 라자루스 종가로 모시고……아무도 접근 못 하게 해. 고집이 있으신 분이니 안 가시겠다고 할지도 모르니 억지로라도 모셔.”
제롬의 표현은 언뜻 장모를 걱정해주는 것처럼 들렸지만 사실상 아리아노를 잡아 가택 연금하라는 지시나 마찬가지였다. 쿠베는 지시대로 이행하라며 쿠마르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편이 안전하지요.”
쿠베가 짧게 한 마디 거들었고, 그 말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아리아노는 베흔과는 둘도 없는 친구였고, 능력까지 갖추었으니 베흔의 세력을 거세해야 하는 쿠베에게 꽤나 신경 쓰이는 존재였다.
사위인 제롬이 정말로 장모를 의심했건, 아니면 사사건건 사위를 쥐 잡듯 하던 호랑이 장모에게 이 기회에 복수를 하려는 수작이건 쿠베로서는 둘을 이간질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도대체가 라자루스 가 여자들은…….”
제롬이 얼굴을 찡그리며 떠올린 건 호랑이 장모를 빼닮은 드센 정실부인 오르테, 오르테의 사촌언니이고 적진으로 도망가 이젠 슈로 기사단장이 된 릴라크였다. 종장을 닮아서인지, 라자루스 가 여자들은 평소에는 침착하고 냉소적이다가도 한번 화나면 말 그대로 ‘막 나가는’ 종잡을 수 없는 성격으로 워낙에 유명했다.
“제기랄, 마누라 또 한바탕 난리 치겠군.”
제롬이 짜증을 냈다. 그에게는 애당초 별로 가깝지도 않았던 장인의 죽음보다는 다혈질 부인 오르테 라자루스의 얼굴과 맞댈 일이 더 걱정이었다. 물론 지금은 장인의 일을 수습하는 것보다는 눈앞의 적이 더 문제였다.
“어쨌든 암살범에게 배후가 있을 테니 끝까지 추적해서 잡아내도록 해. 요인들 경호에 각별히 신경 쓰고.”
“그나저나, 저놈들 아나? 황제 깃발 둘러싼 까만 놈들 말이야.”
쿠베가 조금 전까지도 그와 제롬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검은 망토’ 차림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의 물음에 보안국장 쿠마르가 냉큼 대답했다.
“서부 레즐린 가의 특수부대인 ‘검은 사신’입니다. 이번에 적군에 합류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적 황제는 원래 가디언들의 경호를 받는데 지금 저런 괴상한 놈들한테 둘러싸여 있거든? 저게 적 황제 맞는 것 같나? 아니면 기만작전 같나?”
“적 황제가 맞을 겁니다.”
쿠마르가 눈을 가늘게 뜨며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레즐린 가 종장 아샤드 경이 막판에 합류했다는 비난을 면해보려고 황제의 경호부대를 자처했다는 첩보가 이미 있었습니다. 인정은 못 받지만 나름대로 이름도 있었던 부대고 카렐 놈에게는 외조모 가문이기도 하니까요. 공훈에 눈이 멀었지요.”
“그래? 난 또…….”
처음 의혹을 제기했던 제롬도 그제야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쿠베가 적의 포진을 보며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면 놈들 생각이 대강 보이는군요. 북부에서 보급선하고 자금줄이 끊기면서 상황이 다급하니 공격은 일단 해야겠고, 황제가 직접 미끼가 되어서 위험한 지점에서 우리를 자극하려고 나온 게 빤하군요. 성문을 열고 나와 제발 선제공격을 좀 해 달라고 기도라도 하고 있는 걸까요?”
“우리가 미쳤나.”
제롬이 바로 맞장구를 쳤다.
“우리야 후방에서 다가오는 부대가 저놈들 뒤를 틀어막아 주기만 느긋하게 기다려 주면 되는 것을. 뭐, 지금도 충분히 요리할 수 있어 보이긴 하지만.”
제롬도 손이 근질근질 미칠 지경이었지만 저 뒤로 따라오고 있는 동맹군의 나머지 원정군까지 앞뒤에서 틀어막고 한 번에 싹 쓸어담으려면 적이 적당히 모이고 후미에서 다가오고 있는 지원 병력이 뒤를 차단해 줄 때까지 조금 더 인내심을 발휘해야 했다.
“저어, 그런데 항구에서 방화로 보이는 화재가 발생해서 항구가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니콜라프 경을 암살한 놈들도 적인 것 같습니다.”
“뭐?”
쿠베와 제롬이 동시에 고개를 휙 돌렸다. 항구가 있는 쪽에서 검은 연기가 솟고 있는 모습이 붉은 저녁놀 속에서 희미하게 보였다.
“목격자 진술로 보아 상당한 숫자의 적 특수부대가 후방에 잠입해 있는 게 분명합니다. 지금 시 소방대도 전투를 대비해 성벽 부근에 모아놓았는데 불이 시가지까지 옮겨 붙으면 손도 못 쓰고 커질 겁니다.”
“정말이야?”
쿠베가 이를 갈았다. 거리가 멀어 화재 규모는 짐작할 수 없지만 항구 창고의 화재라면 그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항구에는 전투가 장기화되면 꼭 필요한 군수품이 보관중입니다.”
쿠마르가 제롬과 쿠베에게 계속 겁을 주었다.
“성 밖의 적들이 일부러 이 상황을 노린 게 아닐까요? 시장을 죽이고 불을 지른 것도 심리전일지 모릅니다. 그럼 후미에 들어온 부대가 생각 외로 많을지도 모르고요.”
“……그럴지도 모르겠군. 소요사태라도 벌어지면 큰일인데.”
그제야 덜컥 걱정이 든 제롬이 망원경으로 적진을 살폈다.
“내가 그래서 민간인들은 다 내보내자고 했잖아. 그래야 지네 집 타든 말든 모르지.”
제롬이 버럭 짜증을 내자 민망해진 쿠베가 일단 둘러댔다.
“적들이 공성장비를 안 가져온 것 같으니 일단 성 주변에 불러놓았던 시 소방대를 절반쯤 뒤로 돌려야겠습니다.”
“도로가 사실상 마비상태라 항구까지 갈 때 즈음이면 시가지까지 모조리 탔을 겁니다. 저 불길을 보십시오.”
쿠마르가 계속 이 둘에게 절망적인 보고로 겁을 주었다. 사실 항구의 불은 이제 막 제대로 타기 시작한 상황이었지만 어둠 속에서는 실제보다 훨씬 크게 보였다.
그때, 쿠마르의 할룩스에 ‘11번 창고 일부가 타고 있습니다. 항구 자체소방대가 출동해가 다른 동과 외부 시가지로 번지지 않도록 애쓰고 있습니다.’ 라는 공식적인 새 전문이 들어왔다. 내용을 보아 연합군 입장에서 아직은 그렇게 나쁜 건 아니었지만 그는 이 말도 곧이곧대로 전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쿠마르는 방금 들어온 전문을 얼른 지우고는 잔뜩 울상을 지으며 쿠베에게 말했다.
“창고 한 동을 거의 태우고 다른 동과 시장으로 번지고 있답니다. 자체 소방대로는 역부족인 것 같습니다. 시 소방대도 없는데 시가지까지 번지면 큰일입니다. 게다가 항구 경비대가 내부에 침입한 수십의 적 가디언부대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현재 잠입경로를 파악중입니다.”
“가디언까지? 수십이나?”
쿠마르의 어처구니없는 과장에 쿠베와 제롬이 경악했다. 쿠마르의 거듭된 절망적인 보고에 그들로서는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베흔이 사라지고 자신만의 인맥을 아직 완성하지 못한 쿠베에게는 ‘유일한 자기 조직’인 보안국과 국장 쿠마르가 단 하나뿐인 눈이고 귀였다.
분위기가 적당히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쿠마르가 작은 목소리로 쿠베에게 말을 건넸다.
“어차피 적 병력도 얼마 되지 않는데 그냥 선제공격을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응?”
“중장기병 약간과 가디언 부대로 길만 뚫고 도주로만 막아주시면 제가 북부에서 데려온 용병들로 지금 적 황제를 죽여보이겠습니다.”
“지금 당장?”
쿠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쿠마르가 못된 음모라도 벌이는 것처럼 목소리를 더 낮추었다.
“적당히 약도 먹여놓았고, 온몸에 인화물질을 소지하게 했습니다. 명령만 주시면 저 황제놈이 있는 곳을 불바다로 만들어 놓겠습니다. 대신 약간의 돈만 약속해 주시면 됩니다.”
“자살 공격을 한다고?”
기겁을 하며 묻는 제롬에게 쿠마르가 기이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어차피 타 죽어도 전혀 아쉬울 것 없는 자들입니다.”
쿠마르의 말은 어찌 들으면 사실이었지만 내막을 전혀 모르는 제롬과 쿠베에게는 ‘용역’들을 비꼬는 것으로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북부에서 용병이라고 해 봤자 사실상 폭력배인 ‘용역’들과 입은 옷의 차이에 불과했다.
“너무 늦기 전에 빨리 결정을 해 주십시오. 불도 번지고 있고 적이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쿠베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화재만 아니라면 사실 그렇게까지 나쁜 상황은 아니었지만 후방의 불과 ‘가디언들’이 계속 그의 신경을 쓰이게 만들었다.
“하긴.”
쿠베가 흔들리는 기색을 보이자 쿠마르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어차피 실패해도 자살공격 한 번 겪고 나면 놈들이 겁을 먹을 테고, 동맹 지역인 북부 놈들이 공격을 해 온 것이니 심리적으로도 크게 흔들릴 겁니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우리로서는 크게 손해 볼 게 없습니다.”
신중한 쿠베가 먼저 나섰으니 이미 손이 근질근질하던 제롬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알아서 해. 지네들이 자진해서 자살공격을 한다는데 왜 말리겠어. 쳇, 직접 나가 구경한다면 최고일 텐데.”
제롬은 아직 불편한 자신의 몸을 원망스레 돌아보았다. 다쳤던 등은 그럭저럭 나아졌지만 지난번 제네르에게 잘린 왼팔은 재생중인 손이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해 불완전한 의수에 의존하고 있었다.
“성공만 하면 나에스탄에서 황실이 직영하는 광산 컴플렉스 1곳의 10년간 수익권을 용병업체에 넘겨주지.”
“감사합니다.”
쿠마르가 내심 쾌재를 부르며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는 이 멍청한 연합군 지휘부가 자신에게 속았다고 기뻐하고 있었지만, 자신들을 궁지로 몰아붙여 연합군을 속일 수밖에 없도록, 그리고 이렇게 서둘러 선제공격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이 바로 적 황제라는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었다.
잠시 후, 십여 개나 되는 사오시안트의 북쪽 성문들이 일제히 열리고 수비군들이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쏟아져 나온 병력은 많지 않은 기병과 가디언들이었고, 보통의 보병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포진을 개시하면서, 성벽과 동맹군 사이에 드리워 있던 에너지 장벽 중 서쪽 일부가 꺼져버렸다.
에너지 장벽 제거는 선제공격을 위한 필연적인 단계였지만 공성장비는 물론이고 에너지 장벽 해체장비조차 가져오지 않은 동맹군 측에게는 완전히 공짜로 열린 문이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사라지는 에너지 장벽을 보면서도 동맹군들은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황제가 있는 저지대 앞쪽으로 1,500명이나 되는 ‘코런덤’ 용병들이 초조한 표정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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