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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724화 (719/1,132)

< -- 724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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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말라 박사 외에는 다가가지 마라!”

말에서 내린 카렐이 쓰러져 있는 수나 마구스에게서 옷과 베일을 벗기려는 의무병들을 급히 저지했다.

앞을 잘 못 보는 그는 중간에 있는 돌부리에 걸러 넘어질 뻔했지만 개의치 않고 다가가 수나의 창백해진 뺨을 짚었다.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던 수나는 카렐의 손끝이 닿자마자 갑자기 움직임을 딱 멈추었다.

“라말라 박사는 어딨나!”

카렐이 그의 얼굴에 흰 베일을 덮어 주변의 눈길에서 가려 주었다. 수나의 잘린 팔과 죽은 말의 목에서 터져 나온 피로 모래바닥이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저, 저자만은 제 능력 밖이군요.”

수나가 거친 숨을 토하며 자신의 잘린 오른팔과 깊이 베어 속살이 그대로 드러난 가슴을 돌아보았다.

다행히 지휘부 한쪽에 피신해 있던 니사가 수나의 부상 소식에 파랗게 질린 얼굴로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카렐이 베일 안에 손을 넣어 수나의 검은빛 뺨을 조심스레 짚었다.

“잘린 팔도 건졌고, 의사가 왔으니 별일 없을 거요. 의사니 나보다 잘 알지 않소.”

카렐은 어깨에 덮고 있던 늑대 가죽을 벗어 추위에 식어가는 수나의 몸을 감싸 꼭 안아주었다. 황제의 가슴에 얼굴을 기댄 채 지독한 아픔을 참아내던 수나는 언젠가 이것과 비슷한 경험을 했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이, 이익.”

상처를 지혈하기 위해 니사가 손을 대자 수나가 비로소 낮은 신음소리를 내며 카렐의 손목을 부러져라 꽉 붙들었다.

“으읍.”

카렐은 수나의 손아귀에 잡힌 오른 손목은 물론이고 어깨와 가슴까지 뻐근할 정도의 아픔을 느꼈지만 팔과 흉곽이 잘려 신음하고 있는 사람 앞에서 차마 아프다는 티를 낼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카렐이 오른팔을 떨고 있는 것을 느낀 수나가 난데없이 사과를 하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제발 놔 주십시오. 그냥 편하게 눕고 싶습니다.”

“불편한 거요? 알았소.”

수나를 내려놓고 일어나려던 카렐을 니사가 정색을 하며 붙들었다.

“아닙니다, 폐하, 제발, 진통제 효과가 나타날 때까지라도 이 분을 계속 안아주십시오. 폐하께서 계셔야…….”

“음?”

카렐은 니사가 이렇게 윗사람의 명을 대놓고 거역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지만 일단은 그의 말대로 해 주기로 했다. 카렐은 떨고 있는 수나를 꽉 안고 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내 힘이 된다면 뭐는 못 하겠소.”

진통제 덕분인지, 다른 무슨 이유인지, 온몸을 부들부들 떨 정도로 고통에 신음하던 수나 마구스가 조금씩 가라앉는 것도 같았다.

그 사이, 니사가 그의 잘린 상처를 지혈하고 한쪽에 떨어진 그의 팔을 보존 상자에 넣었다. 어느새 수나는 방금 팔을 잘린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안정되어 있었다.

“괜찮은 거요?”

황제의 물음에 수나는 탈진한 표정으로 가는 숨만 몰아쉴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최소한 이젠 많이 안정되었다는 것을 촉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폐하. 이제 한쪽으로 모셔서 따로 치료하겠습니다.”

병사들이 들것을 가져오자 니사가 비로소 안심하는 표정으로 손을 털었다. 카렐도 그를 들것에 놓아 준 후에야 비로소 그의 손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상황이 상황이라 야전병원은 아직 없어. 따로 자리를 내서 가디언들로 지켜 줄 테니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버틸 수 있겠나?”

카렐의 물음에 니사가 불안감이 어린 얼굴에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응급처치가 빨라서 큰 변은 없을 것 같습니다.”

“궁금한 게 있네.”

수나의 들것을 따라가려는 니사를 황제가 난데없이 붙들었다.

“멍청한 질문이라고 할 지 모르지만……나 때문에 저 양반이 안정이 된 건가?”

정곡을 찌르는 직접적인 물음에 니사가 움찔했다.

“지금 시간 없으니 빨리 대답해.”

카렐이 시알피의 고삐를 잡은 채 니사를 재촉했다.

“내가 아팠을 때도 저 양반의 손이 닿으면 안정이 되는 느낌이었어. 어머니……만큼은 아니지만. 단순히 심리적인 것 말고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

“……페로몬과 옥시토신의 힘이지요.”

작은 목소리로 짧게 힌트만 준 니사가 수나를 따라 황급히 멀어져갔다. 멀어지는 수나 마구스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카렐은 병사들의 부축을 받으며 다시 시알피에 올랐다. 지휘 실무를 맡은 제네르는 사방을 뛰어다니며 각 부대들의 상황을 파악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피가 많이 묻었습니다. 이건 버리시고…….”

경호대장 카토가 수나 마구스의 피가 군데군데 묻은 황제의 늑대털가죽을 내보이며 물었다. 카렐이 고개를 저으며 등을 가리켰다.

“아니, 상관없으니 그냥 덮어주게. 그런데 바닥에 마구스를 응급 처치한 붕대와 거즈들이 있겠지?”

“물론입니다. 치울까요?”

“아니, 혈흔들이 산화되지 않게 지금 빨리 챙겨 놔. 어느 상황에서 나온 건지도 따로따로 적어서 나중에 자그룰라 모렌 박사에게 전달하게. 무슨 뜻인지 알겠나?”

눈이 휘둥그레진 카토는 구석진 곳에서 니사의 헌신적인 치료를 받고 있는 수나 쪽을 힐끔 돌아보았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의무관들에게 황제의 명을 급히 전달하고 돌아온 카토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저 마구스가 폐하를 지키러 튀어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

“계획대로 다 되어 가는데 폐하께서 갑자기 뛰어드신 것도 뜻밖이었고…….”

카렐이 눈동자를 살짝 움직여 카토를 돌아보았다.

주변을 살핀 카토가 목소리를 잔뜩 낮추고 황제에게 귀엣말로 물었다.

“저 사람을 제거하시겠다는 계획은 그럼…….”

“모두 취소한다.”

카렐이 단호하게 대답하며 시선을 다시 사오시안트 성벽으로 돌렸다. 카토는 가디언으로서 훈련받은 대로,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당초 황제의 명령은 ‘코런덤의 손을 빌려 수나 마구스를 제거할 수 있다면 굳이 달려들어 구하지 마라’였다.

황제는 할 수 있다면 수나를 제거해 코리온이 새 하마타 수장이 될 명분을 만들려 했던 것으로 보였지만 맘이 갑자기 바뀐 모양이었다.

상황을 대강 정리한 제네르가 피 묻은 손을 털며 다가와 황제에게 고개를 숙였다.

“모두 확인했습니다. 적은 전멸했고, 아군에는 가디언 5명 전사, 기병과 보병 30명 전사, 18명 부상입니다. ‘검은 사신’ 부대 쪽은 아샤드 경이 따로 보고를 올릴 예정입니다. 경호 병력은 중앙의 서부 장갑보병을 2백 정도 불러 보강하겠습니다. 이제 어떡해야 할지 하명해 주십시오.”

“이젠 다시 공이 베흔에게 넘어갔군.”

카렐은 잘 보이지도 않는 사오시안트 성벽을 향해 눈가를 찡그렸다.

“우리 본대는?”

“카나르 경과 부마 예르마크 경이 이끄는 우리 동맹군 본대는 1시간 30분 정도 후 도착 예정입니다. 그 뒤를 근위대 2개 군단과 남부연합군 10만 이상이 쫓아오고 있습니다. 그네들은 2시간 정도 후면 도착합니다.”

“아니, 제후군 말고 ‘내 병력’ 말이다.”

황제의 물음에 제네르가 얼른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3시간 이내로 여기 도착이 가능할 것 같다고 합니다.”

카렐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근위대를 선봉으로 상륙시켜라. 기병들은 배에 남겨두고.”

“알겠습니다.”

제네르가 즉시 고개를 숙였다. 사실 제후군이 타고 왔던 선단에는 지난번 보급품 파동으로 전력이 크게 손상된 카렐의 직속병력 중 그나마 건질 수 있던 일부, 그리고 지난 전투에서 투항한 근위대까지 총 3만 정도가 함께 타고 있었다. 그들은 11만의 제후군과 황제가 상륙해 적의 주의를 끄는 동안 여전히 배에 남아 있었고, 지금은 본대를 따라 배를 타고 소리 없이 남하하고 있었다.

“내게 제일 쓸 만한 부대가 근위대라니.”

카렐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가장 믿을만한 부대였던 북부보병대는 보안국 내사 결과 참모단의 상당수에서 ‘미심쩍은 혐의’가 포착된 상태였다. 아직은 그냥 혐의만 둔 채 지켜보고 있는 중이지만 결정적인 타이밍에 선봉으로 투입하자니 신뢰가 가지 않았다.

그에 비하면 지난번 투항한 근위대 1군단과 그동안 투항한 다른 근위대 부대를 모아 임시로 만든 ‘11군단’은 이전의 탄탄한 전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황실 양성소 출신 가디언들이 야전 지휘관인지라 최소한 야전군은 교단의 영향에서 자유로웠다.

그리고 1군단을 이끌고 있는 특등급 가디언 제파, 11군단을 이끌고 있는 역시 특등급 가디언 타크마도 새 황제 눈앞에서 능력을 보일 첫 전투, 아니 어쩌면 마지막 기회에서 어떡해서든 공을 세우려 의욕에 충만해 있었다.

“죽은 저 좀비 놈들도 이젠 다시 깨어났겠지?”

카렐은 자신이 쓰는 ‘좀비’라는 표현이 아스탈과 공교롭게 똑같다는 것을 알지는 못했다. 그가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사오시안트 시내가 엉망이 되겠군. ……어쩌면 다른 곳도.”

사오시안트에서 황제가 거의 모험에 가까운 전술로 마지막 사투를 벌이고 있는 동안 황도 아케메니아는 최소한 겉보기는 평온하다 못해 고요할 지경이었다. 샤자한의 차남이고 친 카렐 성향의 다히르 슈트란 경이 새 동부최고제후가 되면서 연합군은 일단 탄현성으로 물러났지만 여전히 그곳에서 ‘새 기회’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황도를 떠난 민간인들도 재공격의 공포에 여전히 황도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어차피 탄현성을 공격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보니 황도의 수비군들은 사오시안트에서 올 ‘종전 소식’만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게다가 그간 황실을 이끌던 총리 페로가 지난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쓰러지면서 지금 내각은 황제가 지명한 ‘임시수반’ 코리온이 이끌고 있었다.

매사 나서기 좋아하고 허영심 많은 페로와는 대조적으로, 코리온은 ‘상의 무거운 짐을 나누어 진 미천한 종일 뿐’이라며 공개 석상에는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고, 행사 따위는 벌이지도, 참석하지도 않았다.

그런 그가 동부를 굴복시키고 남부연합군을 일단 쫓아낸 후에도 요란스런 논공행상이나 축제 따위를 벌일 리가 없었다. 도리어 ‘아직은 축배를 들 때가 아니다’라며 지난 황도에서의 승리에 내심 잔뜩 들떠있던 무장들을 이래저래 김새게 만들어 버렸다.

코리온이 황도를 맡으면서 생긴 불만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교단이 불량 보급품으로 동맹군을 뒤흔들어놓은 직후, 그는 ‘안전성이 검증된’ 식량을 제외한 것들은 모두 소각해 없애버렸고, 안전이 확보된 몇 척의 선박 외에는 아예 접안조차 하지 못하도록 항구를 폐쇄했다.

덕분에 황도 전체가 식량난에 봉착하면서 코리온은 사치품 및 개인차량 금지는 물론이고 심지어 직책에 따른 ‘배식 기준’까지 정해 실시했다.

이 배식 기준은 사무직, 혹은 위로 올라갈수록 박해지는, 윗사람들 보기에는 ‘기가 막힌’ 기준이었지만 코리온의 설명은 ‘그럼 너희도 나가 힘을 쓰면 될 것 아니더냐.’가 전부였다. 물론 일시적인 것이기는 했지만 말단 군인이나 노동자를 제외한 사람들은 내각 대신이나 내명부 비빈들까지도 거친 빵이나 쌀, 약간의 저장채소 외에는 입에도 댈 수가 없었다.

“솔직히 내 페로 그 인간 꼴도 보기 싫어하긴 해도 말이야.”

아케메니아 항구에서 보급품 검사하는 지겨운 일에 사흘째 매달려 있던 네피는 잔뜩 먼지 앉은 셔츠를 벗어 툭툭 털며 짜증을 버럭 냈다. 이 지저분한 적치장에서 컨테이너, 곡물자루들과 씨름을 하던 네피는 아버지 얼굴이라도 볼 겸 궁에서 찾아온 딸 솔 덕분에 잠시 목이라도 축일 짬을 낼 수 있었다.

“내 이 명색이 대장군 꼬라지가 이게 뭐냐?”

웃통까지 벗은 채로 곡물상자 위에 걸터앉은 네피는 딸이 몰래 가져온 술을 대접째 벌컥 들이키고는 달콤한 크림빵을 씹으며 사방에 ‘파편’을 날려댔다.

“아니 빌어먹을 서생 그 인간 아무리 군대를 몰라도 그렇지, 싸움 한 번 이겼으면 질펀하게 술판이라도 벌여주고 잘한 놈들 등 좀 토닥여주고 못한 놈들 곤장이라도 좀 치고 해야 뭐 다음에 싸울 기분이 나지. 페로 놈이 하는 짓은 그래도 그런 거 하나는 확실하게 잘 챙겼는데, 젠장, 니미럴.”

손에 든 빵도 부실하다며 탓하려던 네피는 이나마도 딸이 저녁에 나온 것을 숨겨뒀다가 가져온 것이라는 것을 떠올리고는 방정맞은 입을 다물기로 했다.

“이 천하에 잘 나가는 대장군이 고작 이런 데서 밀가루 푸대나 쑤셔가면서 씨름을 해야 쓰것냐? 이딴 거야 잡역부나 노예들 시켜도 될 걸, 가뜩이나 할일 많은 가디언들보고 이런 잡일을 하라니 말이나 되냐고.”

아버지의 불평에 솔은 엷은 웃음만 지을 뿐 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지난번 배 위에서 헤네티들의 무서운 모습을 똑똑히 목격했던 솔은 코리온이 ‘헤네티 수색’에 굳이 무장병력과 가디언을 함께 투입한 이유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지만 아직 그네들 옷깃도 본 일이 없는 네피는 이런 처사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지금 사정 어려운 거 아버지도 아시잖아요. 식량도 오늘내일 하는 것 같던데 술판이 가당키나 한가요.”

솔은 황실 내명부 문장이 매겨진 고운 원피스에 먼지가 묻는 것도 아랑곳없이 불만투성이 아버지 옆에 걸터앉았다.

솔은 웃통을 벗어던진 아버지의 우락부락한 얼굴과 떡 벌어진 어깨, 털이 시커멓게 돋은 불룩한 가슴, 웬만한 사람 허리만한 굵직한 허벅지를 내려다보며 갑자기 킥킥 웃음을 지었다.

“왜 웃어? 카렐……아니, 황상하고 딴판이라서?”

“아뇨, 그냥 아버지도 남자 맞구나 싶어서요. 듣자하니…….”

솔은 우스워 죽겠다는 얼굴로 또다시 키득거렸다. 솔은 무언가 다른 할 말이 있는 눈치였지만 전혀 눈치를 못 챈 네피는 굵직한 팔을 번쩍 들어 보이며 퉁명스레 대답했다.

“이놈 보게? 그럼 내가 남자지 여자냐?”

이런 아버지의 곁에 호리호리하고 가는 선, 어머니 마리안을 빼다 박은 고운 미모의 솔이 나란히 앉아있으니 둘의 모습은 더 비교가 되었다. 솔에게서 ‘아주 가끔’ 터져 나오는 발끈하는 성미와 괴력을 뺀다면 이 둘은 누가 봐도 부녀지간이라는 사실에 고개를 갸우뚱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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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림없이 올렸는데 갑자기 없어진;;; 다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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