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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727화 (722/1,132)

< -- 727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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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네티들 정신 팔리면 앞뒤 못 가리는 건 여전하군.”

프레일을 짧게 쥔 그 시커먼 그림자는 머리가 박살나버린 이자의 끔찍한 시체를 옆으로 차 내버렸다. 자이센 가의 시조 제수스를 죽였을 때처럼, 그는 사람을 죽이면서도 철저하게 무표정했다.

“대체 어디 있었나?”

“저 위에선 네가 움직이는 걸 더 넓게 볼 수 있으니까.”

코나가 짧게 대답했다. 사에나는 그의 등장에 안도하는 자신의 모습이 어딘지 낯설었다.

언젠가 회의 시간에 수나 마구스가 코나를 가리키며 ‘그대의 첫 헤네티인가?’라고 물은 일이 있었다. 교단 시절의 젊은 코나는 제수스 휘하에 들어가기 전까지 ‘일반인 헤네티’ 헌병사관이었으니 그가 ‘사에나 마구스’의 첫 번째 헤네티가 되는 것이 이상할 건 없었다.

그리고 교단 시절의 ‘평등과 다양성, 자유로움’을 그리워해서인지, 코나 스스로도 젊은 시절 듣던 ‘헤네티’라는 호칭을 그리 기분나빠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정작 그의 윗사람이 되어야 할 사에나는 그를 자신의 아랫사람으로 대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존댓말은 아직은 어색하니까 둘만 있을 때는 그냥 이름 불러’라고 말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물론 코나는 ‘언젠가는 내가 가슴에 두 손을 대고 진심으로 널 존대해야 할 날이 왔으면 좋겠다.’이라고 대답하곤 했지만.

“네가 선물한 머플러가 더러워졌어.”

사에나는 언젠가 코나가 직접 수를 놓아 선물해 준 머플러에서 얼른 피를 털어냈다.

“일격에 숨골을 파괴해야 몸에 불을 못 붙여.”

코나는 헤네티의 조각난 골이 엉겨붙은 철퇴를 컨테이너에 툭툭 털어냈다.

“머플러 따위는 다시 만들면 돼. 하지만…….”

“날 계속 보고 있던 거야?”

“지금처럼 위험할 때만.”

코나가 짧게 대답하며 사에나의 몸을 살폈다. 그의 겨드랑이에 꽂혀 있는 볼트를 발견하고는 그의 보안국 자켓을 급히 벗겨냈다. 짧은 볼트가 왼쪽 겨드랑이를 비스듬히 뚫고 등까지 삐죽이 나와 있었다.

“큰 혈관이 지나가는 위험한 자리인데.”

코나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상처를 꾹 눌러주었다. 이것도 그가 틈날 때 구석에 쭈그려 앉아 직접 정성들여 수를 놓은 귀한 손수건이었다.

그때, 웬 괴한 서너 명의 그림자가 차가 있던 쪽에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조금 전 죽은 헤네티 녀석이 불러들인 자들인 모양이었다.

“가만히 있어.”

코나가 사에나의 앞을 재빨리 막아섰다. 하지만 바쁜 걸음으로 다가오던 그 괴한들은 누군가의 굵고 거친 고함소리와 함께 허겁지겁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 새끼들!!!”

요란스레 싸움이 벌어지는 듯 한바탕 소란이 지난 후, 웬 육중한 그림자가 그쪽에서 불쑥 나타났다.

“이봐요? 여기 있어요?”

“난 비켜줘야겠군.”

그 정체가 네피라는 것을 알아 챈 코나는 모자를 급히 눌러쓰고는 반대편으로 급히 도망을 쳤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페로 가디언 출신인 네피라면 그가 모습을 보여 좋을 것이 없었다.

“맙소사, 다쳤어요?”

네피가 허겁지겁 달려와서는 쓰러져 있던 마자리크 경을 무릎 위에 눕혔다. 잠시 정신을 잃었던 마자리크 경은 깨질 듯 아픈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눈을 떴다. 사실 언뜻 보기에도 피를 뒤집어쓰고 부상까지 입은 사에나가 훨씬 심각한 상태였지만 이미 눈이 뒤집어진 네피에게는 그 ‘재수 없는 여자’ 따위는 들어오지도 않았다.

“위생병! 위생병 불러! 저 빌어먹을 새끼들! 어떤 놈 짓이야!”

마자리크를 팔에 안은 네피가 뒤따라오는 병사들에게 악을 쓰며 고함을 질렀다. 사에나 앞에서 민망해진 마자리크가 별 것 아니라며 급히 손을 저었다.

“다치지 않았어. 잠깐 정신을 잃었던 것 뿐이니 호들갑 좀 떨지 말게나, 군인이 이런 일 한두 번 겪어 보는 것도 아니고…….”

그 사이, 혼자 남은 사에나는 아픈 몸을 일으켜 컨테이너에 힘겹게 기대앉았다.

‘주고받은 건가.’

갑자기 허전함을 느낀 사에나는 코나가 겨드랑이에 끼워 준 손수건을 만지작거리며 쓴 입맛을 다셨다. 조금 전 마자리크 경이 의식이 있었다면 아마도 코나가 사에나만 챙겨주는 모습에 마찬가지로 섭섭해 했을 테니 결국은 똑같은 셈이었다.

“맙소사, 안 아프세요?”

아버지에 뒤이어 달려온 황빈 솔이 비로소 그에게 관심을 보였다.

이전의 솔이었다면 얼굴에 온통 피와 살점을 뒤집어쓴 모습에 비명부터 질렀겠지만 이제 이런 상황에도 충분히 익숙해진 그는 위엄을 잃지 않은 모습으로 군의관을 불러오라고 차분하게 지시부터 내렸다.

“전 괜찮습니다, 황빈 마마.”

사에나는 고개를 저으며 서류들과 석궁을 챙겨 침착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에나는 겨드랑이에 꽂힌 볼트를 힘으로 부러뜨려 확 뽑아내 버렸다.

“보시다시피 별 것 아닙니다.”

솔이 기겁을 했지만 생각 외로 피는 별로 많이 나오지 않았다. 이곳을 통과하는 큰 혈관을 비켜간 것인지, 아니면 그새 회복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그의 몸은 항상 이래왔다. 그리고 왼팔의 힘이 잘 안 들어가는 것을 빼면 그다지 아프지도 않았다. 이나마도 얼마간 참으면 곧 나아지겠지만.

사에나는 조금 전 머리가 깨진 채로 코나의 손에 죽은 시체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이놈 몸이 왜 이리 더럽지?”

사에나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죽은 놈의 몸은 피 말고도 온몸에 군데군데 젖은 흙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비서관님!”

큰길가 쪽에서 이곳 항구 보안을 맡은 보안국 헌병이 나타나 사에나에게로 달려왔다. 한때 이곳에서 근무했던 그에게는 익숙한 옛 부하들이었다. 사에나가 황도 내로 들어간 건자재의 행방을 알아보라고 지시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건자재와 장비들이 간 곳을 알아보았습니다. 북부보병 1군단 사역병대로 들어갔습니다만 어디에 쓰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네들이 지금 공사 중인 것은 공식적으로는 없습니다.”

“‘공식적’이라는 게 무슨 말이냐?”

사에나가 목소리를 잔뜩 낮추고 물었다.

“비공식적으로……지난번 전투에서 근위대가 지상으로 나오면서 붕괴된 황궁 정원 보수공사를 진행 중입니다.”

“이런!”

침착하던 사에나의 입에서 이런 소리가 나오자 마자리크와 네피, 솔까지 기겁을 하고 놀랐다. ‘붕괴된 정원’이라는 말에 사에나로서는 완전히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지난 황도 공성전 당시, 1소대장이었던 힐러가 지하의 하오마 신전에서 빠져나오면서 정원 일부가 무너진 것이 문제였다. 그날 밤새 비가 오면서 그곳으로 엄청난 빗물과 토사, 흙탕물이 쏟아져 들어가 하오마 신전까지 엉망이 되어 있었다.

“거기 북부보병 1군단이 들어가 있었다고?”

사에나가 이를 갈며 물었다. 조금 전 죽은 헤네티가 했던 ‘네 신전으로 가야겠다.’는 말을 보아 교단 세력이 지하에서 무언가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상께서 청소는 나중에 해도 되니 안전을 위해 최대한 빨리 구멍부터 막으라고 지시하셨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그날 비 때문에 워낙 많이 붕괴가 되어서 어쩔 수 없이 사역병들이 일부 투입되었습니다. 건자재들이 ‘예외’를 인정받아서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이놈도 공사장에서 온 건가?”

사에나는 흙투성이 헤네티의 시체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죽은 헤네티는 옷이나 발 뿐만이 아니고 머리칼에까지 온통 흙이 묻어있었다. 사에나가 시체에 코를 대고 킁킁대는 모습에 부하가 기겁을 했지만 그의 표정은 꽤 진지했다.

“뭐 썩는 것 같이 눅눅한 냄새도 나.”

“예?”

사에나는 자신이 네피에게 보여준 ‘나무상자’의 스케치를 새삼 확인했다. 그리고 황제가 ‘안에 좀비들이 있을지도 몰라.’라고 장난삼아 말했던 것을 문득 떠올렸다.

“좀비?……잠깐, 공사장하고 황궁 묘지하고 가깝던가?”

순간 아차 싶어진 사에나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반입 차단되기 직전에 타르서스하고 펜지켄트 전사자들 시신이 들어왔지?”

“예. 500구쯤 들어왔는데 절반 정도는 이미 묻었고 나머지는 식량반입이 중단되면서 장례가 연기되어서 나머지는 서쪽 별관에 있는 시체 공시소에 그대로 보관되어 있을 겁니다.”

“맙소사, 시체로 들어왔나?”

막막해진 사에나가 이마를 짚었다. 다른 곳은 몰라도 카타콤베는 교단 세력의 앞마당이었고, 그곳 구조에 누구보다 훤한 놈들이 지하 카타콤베에 들어간다는 건 덤불에 뱀을 풀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황제와 니사도 사오시안트로 떠났고, 지금 이곳에는 카타콤베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황제가 ‘교단에 관한 사항은 그대와 학장에게 맡기고 가네.’라고 말하고 전장으로 떠난 이상, 어떻게 해서든 그가 해결해야 했다.

사에나는 마자리크를 살피고 있던 네피에게 다짜고짜 다가섰다.

“네피 대장군님, 절 좀 도와주셔야겠습니다.”

“나? 지금 나한테 한 말이야?”

조금 전까지도 쥐 잡듯 몰아붙이던 이 ‘재수 없는 여자’의 말에 네피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사에나 입장에서는 지금 황도에서 ‘믿고 싸움을 부탁할 만한’, 강력한 헤네티들을 압도할 수 있는 뚝심 있는 무장은 네피뿐이었다.

사에나는 네피가 툴툴대건 말건 그를 붙들고 무작정 일으켜 세웠다.

“가디언들 데리고 당장 황궁묘지와 시체공시소로 가셔서 관들하고 갓 파묻은 시체들을 최대한 파내서 확인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당장 공사장을 폐쇄해 주십시오.”

“뭐? 아니, 짐 뒤지는 것도 모자라서 이젠 관 뚜껑까지 열라고? 도대체 날 뭘로 보는 거냐?”

발끈하려는 네피에게 사에나가 조금 전의 나무상자 스케치를 불쑥 내보였다.

“이게 뭐 어떻다고…….”

뭐라 화를 내려던 네피가 갑자기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단순하고 우직한 남자였지만, 그것이 머리가 나쁘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런, 빌어먹을, 진짜 좀비였던 거야?”

사에나가 안전장치까지 꺼 버린 차를 몰고 시내를 폭주하는 모습에 간 큰 네피까지도 기겁을 할 정도였다. 시내에 민간인들이 거의 없기를 망정이지 행인이라도 있었다면 수십은 공중으로 날려버렸을 무시무시한 기세였지만 놀랍게도 그는 차에 작은 생채기 하나 내지 않은 채 네피와 솔, 마자리크까지 모두 싣고 고작 3분 만에 황궁의 남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성문 앞에 도착한 차는 이미 ‘엔진 과열’이라는 붉은 빛을 깜박이고 있었다.

“혹시 이거 경주 했었나?”

파랗게 질린 네피가 꽉 잡고 있던 딸의 손을 비로소 놓아주며 이 ‘재수 없는 여자’에게 물었지만 그는 이번에도 ‘재수 없는 대답’을 했을 뿐이었다.

“원래 잘 했습니다.”

차를 내버려둔 채 허겁지겁 황궁 1층 로비에 뛰어든 사에나는 한쪽에 소리 없이 모여 있는 무장병력에 다급히 다가갔다. 검은 망토 차림에 마치 유령부대처럼 도열해 서 있는 그 200여명의 무사들은 7제후 레즐린 가에서 온 ‘검은 사신’ 부대였다.

“당당해져라. 사에나, 사에나 쉐너.”

사에나는 스스로에게 다짐을 주며 손목에 찬 에아 마구스 팔찌를 새삼 꽉 쥐어보았다. 어쩌면 이번이 그가 진짜 교단 사람들 앞에 ‘한 명의 마구스로서’ 나설 수 있는 첫 기회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책임자는 어디 있나?”

사에나가 사뭇 위압적인 목소리로 그들 사이에 확 뛰어들었다.

“저, 누구신지요?”

잠시 후, 그들 사이에 있던 웬 여자가 다소곳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망토를 벗고 나타났다.

“제가 책임자입니다. 학장님의 명을 받아 이곳에서 대기 중입니다만.”

나타난 사람은 5척(150cm)이 조금 넘을 웬 조그만 체구의 이쁘장한 여자였다. 입꼬리에 항상 웃음이 고인 앳된 얼굴만 보아서는 그가 데리고 있는 무표정한 얼굴의 전사들과는 전혀 연결되지 않을 인상이었다.

“음? 자넨……사에나 쉐너 경이라고 했던가?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그는 사에나를 뒤늦게 알아본 척 머쓱한 표정으로 눈가에 살짝 미소를 지었지만 사에나는 그런 그의 밝은 얼굴에 대고 대뜸 사무적으로 입을 열었다.

“울피 실론. 하오마 교단 9신관. 내가 누군지는 이미 알겠지?”

예상치 못한 호칭에 울피의 해맑던 얼굴에서 순수한 미소가 싹 사라졌다.

그는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어색하게 대답했다.

“그리 부르시니 당혹스럽습니다.”

울피가 당황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공식적으로는 울피는 한 지역 제후의 부인이었고, 고작 중랑장에 불과한 사에나가 감히 ‘명령을 내릴’ 입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에나의 표정은 완강했다.

“적이 정원의 공사장을 통해 황궁 지하로 잠입하려는 것 같다. 병력의 절반은 정원의 공사장에 보내어 가디언들을 돕고 나머지 절반은 나와 함께 내 신전으로 내려가자. 카타콤베를 잘 아는 병력이 필요하다.”

사에나의 눈을 힐끔 올려보았던 울피가 비로소 가슴에 손을 X자로 겹치며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알겠습니다. 명에 따르겠습니다.”

처음의 어색함을 벗어낸 울피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운명을 받아들이시어 기쁘기 짝이 없습니다. 사에나 빈트 에아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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