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29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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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에자 님!”
“성소에서 이 무슨 방정이냐.”
갑옷 위에 두른 케이프를 정돈하던 바에자는 지상 쪽 출구에서 허겁지겁 뛰어내려오는 사역병 차림새의 병사에게 매서운 시선을 주었다.
“무덤에 있던 동료들이 가디언과 야만족들에게 공격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아 신전의 상황도 좋지 않습니다. 미끼로 걸린 놈들의 저항도 격렬하고 계단을 통해 밖에서 진입하려는 크바르나 놈들과도 교전이 벌어졌습니다.”
“쳇. 여기도 곧 오시겠군.”
바에자는 등에 지고 있던 석궁을 당겨 시위에 걸며 얼굴을 찡그렸다.
“에아 신전에는 몇 명이나 있지?”
“먼저 깨워서 보내놓은 코런덤 20명이 있고 일반 전사와 엔지니어들이 100명 정도 있습니다.”
“훗, 가짜 집주인이 오기 전에 서둘러야겠군.”
바에자가 투덜거렸다.
“이 새끼들 일찍 안 빼왔으면 큰일 날 뻔했어.”
“카타콤베를 그네들이 지킬 예정이었는데 어쩌죠?”
“너희들이 여기서 지키면 되지 않나.”
바에자가 태연하게 대답하며 카타콤베 쪽으로 돌아섰다.
“어차피 지하로 들어올 길은 여기 아니면 에아 신전뿐이야.”
그는 그동안 신분을 감추고 1군단 사역병대에 들어와 있었던 1백여명의 광신도들을 힐끔 쳐다보았다. 이들 중 일부는 옛 헤네티부대의 일반인 전사 출신이었고, 나머지도 대부분 코메트 출신들이거나 그 후손들이었다. 전투부대의 까다로운 심사기준을 빠져나가기 위해 사역병부대에 넣었을 뿐, 상당수는 지금의 정예병들보다 훨씬 우수한 전사들이었다.
비록 코런덤의 헤네티들처럼 타고난 정예병은 아니었지만 마구스와 교단의 명이라면 불타고 있는 기름통에라도 뛰어들 열성적인 광신도들이었다.
“난 코런덤들과 에아 신전으로 가겠다. 마지막 1명이 남을 때까지 여기를 사수하며 시간을 끌어라. 저승에서 내 축복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바에자가 그들 사역병 리더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춰주었다. 마구스의 입맞춤에 감격한 리더가 자리에 털썩 꿇어앉았다.
“이 천한 목숨을 바쳐 현신께 힘이 되겠나이다.”
이곳에서 죽을 100여명의 광신도들을 남겨두고 바에자는 은빛 케이프를 어깨에 휙 돌려 감으며 앞장서 카타콤베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의 뒤를 막 깨어난 250여명의 코런덤 헤네티들이 따랐다.
평소라면 황궁 전체가 잠들어있을 시간이지만, 황제가 사오시안트에서 결전을 벌이고 있는 오늘만은 예외였다.
특히나 그동안 술과 파티 때문에 황제에게 계속 잔소리를 들었던 황후 아메스는 ‘오늘까지 그러시면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계실 황상께서 용서치 않으실 겁니다.’라는 측근들의 협박을 겸한 만류에 술을 자제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 그가 오늘 파티를 열지 않은, 아니 열지 못한 진짜 이유는 어제와 그제 밤에 질펀하게 마신 술 때문에 복원 중이던 왼손에 또 탈이 나서였다. 제대로 치료만 되었다면 그의 잘렸던 왼손도 전쟁터에라도 나갈 정도로 복원되었겠지만, 술을 마실 때마다 도지는 염증 때문에 그는 아직 손가락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황후의 이런 모습에 당황한 측근이나 의사들이 뭐라 지적을 할 때마다 그는 ‘이젠 안 마셔’라고 약속을 하곤 했지만 정작 파티에 나갈 때마다 주변 사람들, 특히 윗사람과 말술을 나누는 것을 당연한 예의로 여기는 동부 사람들이 그를 놔두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항구에서 사에나가 헤네티와 사투를 벌이고 있을 무렵, 황후 아메스는 보안국장 루토, 부총리 구완 슈벨 경, 코리온과 함께 대여섯 명의 가디언들의 호위를 받으며 에아 신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자정에 가까운 이 시각에 뜬금없이 이 셋이 에아 신전에 가게 된 건 그곳에서 들어온 급한 연락 때문이었다.
지난번 황궁의 전투에서 베흔 일당의 공격으로 불에 타고 쑥대밭이 되었던 에아 신전도 황제의 명으로 급히 복구공사를 진행 중에 있었다. 다른 곳보다 이곳의 공사를 서둘러 진행하는 건 이곳이 황도 밖 욱리하와 수로로 직결되어 있다 보니 궁의 안전을 위해 최우선으로 손볼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이곳의 공사를 진행 중이던 사역병대에서 조금 전, ‘이곳에 인신공양된 옛 공신의 유골이 발견된 것 같다.’는 깜짝 놀랄 보고가 들어왔고, 유학자이고 황궁을 책임진 황족 코리온과 황제를 대신한 황후가 이렇게 몸소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제기랄, 왼팔 전체가 푹푹 쑤셔.”
아메스가 팔을 주무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드레스 소맷자락을 들고 확인해 본 손은 검붉게 변해 퉁퉁 부어있었다. 술과 유흥에 찌든 생활이 계속되고 손의 상태가 계속 악화되면서, 의사들 사이에서는 ‘잘라내고 다시 복원하는 편이 낫지 않냐’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럴 땐 술이라도 한 잔 하면……빌어먹을, 또 술이라니, 내가 미쳤지.”
아메스는 짜증스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루토는 물론이고 노구의 슈벨 경도 이 철없는 황후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뭐라 하고 싶은 말이 혀끝에 걸려 있는 모양이었지만 불같은 성미의 황후 앞에서 차마 입을 열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지금까지도 항상 이런 식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상대의 지위 따위에 상관없이 독설을 쏟아 부을 사람이 함께 있는 것이 문제였다.
“동부 사람들에 왜 그리 집착하십니까.”
아메스가 눈가를 잔뜩 찡그리며 ‘황실고문’ 코리온을 쏘아보았다.
“이제 출가외인이니 동부나 자이센 가에 연연하실 처지가 아니옵니다. 황후 폐하만의 세력을 쌓고 싶으시다는 바람이 있으신 것 같으오나, 자고로 비빈의 세력은 침실과 내명부 밖으로 새어나면 아니 되옵니다.”
“아니, 도대체 나를…….”
“황상의 세력이 황후 폐하의 세력이고, 황상의 뜻이 황후 폐하의 뜻일진대, 황후 폐하의 섣부른 행동이 제국을 장악하시려는 상의 큰 계획에 자칫 누가 되지 않을지 심히 염려되옵니다.”
코리온의 거침없는 지적에 아메스는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을 정도였다. 동부는 페로와 아메스의 가장 강력한 지지 세력이고, 이제 새 최고제후가 오르면서 페로에게 더 힘을 실어 줄 세력이었다.
코리온이 일단 시작을 끊어놓자 구완 슈벨 부총리까지 냉큼 받았다.
“세네피스 황태후께서 황후로 계실 때 제국 전체에서 널리 존경받으셨던 것도 친정과의 사적인 감정을 억누르고 모든 지역을 두루 살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왜 하필…….”
역정을 낼 뻔했던 아메스는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세네피스의 황후 시절과 비교될 때마다 그는 매번 할 말을 잃곤 했다. 당시 세네피스는 무능한 황제 대신 제국을 강력하게 이끌며 존경과 사랑을 널리 받았고, 지역을 가리지 않는 원만한 인간관계, 심지어 빼어난 미모까지 덧붙여져 역대 최고의 황후로 제국민들에게 기억되고 있었다.
덕분에 지금까지도 아메스는 ‘황태후께서 계속 황후시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주변의 말들에 계속 상처를 감내해야만 했다.
코리온도 ‘하필 세네피스’를 비유로 든 것에 살짝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슈벨 부총리가 한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었다. 아메스가 나름대로 반격을 하려 했다.
“학장이 서부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는 것처럼 나도…….”
“소인 유학자로서 제 도리를 할 뿐이니, 서부는 그에 따라올 뿐입니다. 안 따라온들 제가 무어라 하겠습니까.”
아메스는 또 할 말을 잃었지만 코리온의 잔소리는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황상과 왜 경쟁을 하려 하십니까?”
속내를 들킨 아메스의 얼굴이 순간 빨갛게 달아올랐다. 지금껏 아무도 이런 사실을 대놓고 지적한 일이 없었지만 이 똑똑한 대군의 눈만은 피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옛 집안 가디언을 이제와 하늘로 받드는 것에 그리 자존심이 상하십니까? 그래서 상과 별도의 권력을 그리 갈구하십니까?”
발끈해 폭발하기 일보 직전의 아메스에게 코리온이 마지막 결정타를 날렸다.
“그리고, 방법도 틀리셨습니다. 제후들이 제발 손을 잡아 달라 빌게 만들어야지, 왜 먼저 손을 잡지 못해 안달하십니까?”
“그, 그건…….”
순간, 아메스는 무언가로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대놓고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결국은 ‘제후들 앞에서 싸게 굴지 말라’는 매서운 지적이었다.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친목을 다진다’며 벌였던 그 모든 행사, 술자리들이 동부나 아랫사람들이 행여 등을 돌릴까, 자신보다 황제에게 더 복종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황후인 자신의 얼굴을 팔고 다닌 것에 불과했다. 아랫사람들이 눈앞에서 해해거리고 아양을 떠는 모습을 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자신의 위상이 무너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안절부절못했던 쪽은 아메스였다.
되짚어보니 황제에게 한소리 들을 때마다 ‘재작년까지도 우리 집안 개였던 주제에…….’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왔던 것도 사실이었다.
잔소리를 가끔 듣는 것을 빼면 황제와의 사이도 그럭저럭 좋은 편이었지만 그의 마음 밑바닥에는 ‘비천한’ 가디언이었던 황제의 옛 모습에 대한 기억이 여전히 도사리고 있었다.
지금이야 나름대로 정도 쌓였고, 자신의 선택에 만족하고 있지만 카렐이 황족이 아니었다면 아메스도 가디언인 그를 누구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선택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휴우.”
에아 신전 문 앞에 선 아메스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맘이었다. 그는 고집스럽고 자존심도 강한 데다가 젊은 나이 탓에 가끔 혈기를 주체하지 못할 뿐, 깊이 생각할 여유만 주어진다면 누구보다 현명하고 똑똑한 선택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잔뜩 풀이 죽어버린 아메스는 앞장서는 코리온을 따라 힘없이 에아 신전에 들어섰다.
지난번에 절반쯤 불에 탔던 에아 신전은 타버린 내장재를 모두 뜯어내고, 부서진 수문을 다시 고치느라 이젠 공사장으로 변해 있었다. 건자재들이 군데군데 쌓여있는 가운데 100여명이 넘는 사역부대 엔지니어와 기술자들이 군데군데 불을 켜 놓고 철야작업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유골이 어디서 발견되었나?”
에아 신전에 막 들어선 코리온이 엔지니어 장교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장교가 가리킨 곳은 에아 신전 중간을 가로지르는 수로였다.
“수문을 고치려고 수로의 물을 빼내다가 구름다리 밑에서 오래된 유골 3구를 발견했습니다. 몸 곳곳에 오래된 볼트가 박혀 있는 것을 보아 물의 신인 에아에게 인신 공양된 시체로 보입니다.”
“광신도가 자진해 공물이 되었을 수도 있다. 공신이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뭐냐?”
코리온이 입가를 씰룩거리며 물었다. 황궁 책임자인 자신과 황후까지 불러들일 정도의 큰 사건이라고 하기는 별 근거가 없는 것 같았다.
“확인해 보십시오.”
장교를 따라간 구름다리 위에는 3더미의 유골이 쌓여 있었다. 시체를 담았던 그물 자루에는 고정하기 위해 썼음직한 큰 돌덩이가 있었고, 그 위에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낯선 바람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코리온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사교도의 문자를 읽어 내려갔다.
“이단의 수괴를 바로 옆에서 받들던 극악한 육신들이오니 물의 신께서 저주를 내리시어 이들의 흔적을 지상에서 없애 주시옵소서.”
“훗, 저주는 고사하고 자알~ 지켜줬군.”
아메스가 황후답지 않게 빈정거렸다. 그의 이런 모습에 코리온이 다시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시체를 유기한 자들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물고기도 없는 깨끗한 물 덕분에 유골은 수백 년의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양호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공신의 시신이 맞는 모양입니다. 황실의 예를 갖추어 따로 모셔야겠습니다.”
부총리 슈벨 경이 말했지만 코리온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유골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딴생각에 빠져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그 장교에게 물었다.
“바람어를 읽을 줄 안다니, 대단하군.”
난데없는 물음에 장교의 낯빛이 순간 창백해졌다. 제국에서 이미 옛날에 사라진 바람어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은 두 가지 경우뿐이었다. 사교 성직자 혹은 광신도이거나, 코리온처럼 따로 공부했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이상한 조짐을 눈치 챈 보안국장 루토가 재빨리 그 장교의 뒤에 바싹 섰다.
“황후 폐하부터 빨리 밖으로 모셔라.”
코리온이 짐짓 아무 일 없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하지만 문가를 돌아보았던 그는 얼른 명령을 수정했다.
“아니, 그대로 계십시오.”
코리온이 아메스의 손목을 덥석 붙들었다. 지상으로 올라가는 출구 쪽으로 작업자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고 있었고, 몇몇은 큰 철판과 용접장치까지 들고 있었다. 출구를 지키고 섰던 2명의 호위가디언들이 약간 당황한 얼굴로 코리온 쪽을 휙 돌아보았다.
코리온의 할룩스로 사에나의 다급한 연락이 들어온 건 그때였다.
- 에아 신전을 당장 폐쇄해 주십시오. 지금 궁으로 가고 있으니 찾아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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