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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732화 (727/1,132)

< -- 732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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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거대한 극장과도 같은 이곳 에아 신전을 밝히던 조명이 확 꺼져 버렸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암흑에 빠진 신전 안은 놀라움의 침묵, 혹은 누군가의 비명으로 뒤흔들렸지만 지하에서 물을 뽑아내던 펌프의 요란한 소음과 진동은 일순간 확 사그라졌다.

“뭐냐! 무슨 일이야!”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짙은 어둠과 동시에, 치열하게 전개되던 싸움도 아주 짧은 찰나 중단되었지만 그 침묵과 어둠은 아주 짧았다.

“켜!”

크바르나 헤네티들이 재빨리 머리에 낀 랜턴을 켜며 마주선 코런덤 헤네티들의 얼굴에 빛을 쏘았다. 미처 준비를 못한 채 이 암흑을 맞이한 코런덤 헤네티들도 뒤늦게 랜턴을 켜려 하고 있었지만 미리 이 순간을 준비하고 있던 크바르나 헤네티들만큼 빠를 수는 없었다.

“아읍!”

어둠 속에서 갑자기 눈앞을 덮친 불빛에 코런덤들이 놀라 얼굴을 가린 순간, 크바르나들이 일제히 칼을 앞으로 겨누고 그들에게 돌진했다. 일순간 무방비상태가 된 코런덤 수십이 비명을 지르며 밀려나거나 나동그라졌고 청중석에서의 싸움은 이 짧은 순간, 크바르나 쪽으로 확 기울었다. 죽은 코런덤 몸에서 터져 나오는 불꽃이 사방에서 빛을 뿜었다.

한쪽에서 목숨을 건 싸움이 벌어지는 사이, 코나는 바에자와 코런덤의 눈을 피해 조심스레 나서서 어둠 속에서 바닥을 손으로 확인해가며 재빨리 움직였다. 조명은 모두 꺼졌지만 사방에서 병사들의 랜턴이 움직이고 있다 보니 여기저기서 산란된 희미한 빛으로 아주 약하게나마 앞을 볼 수는 있었다. 주변의 기물들은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병사들이 이마에 달고 있는 랜턴 덕분에 도리어 그들의 위치는 또렷이 볼 수 있었다.

코나는 바닥에 뒹굴던 몇 개의 공구와 줄을 집어 챙기고는 수로 모서리를 따라 계속 기어갔다. 청중석과 제단 사이의 경계를 이루는 이 수로의 한쪽 끝은 욱리하와 연결되어 있었고, 반대편 끝은 지하수층과 직결된 시커먼 굴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수로는 욱리하의 수위를 따라 세심하게 만들어져 있었고, 평상시 강물이 자연스럽게 흘러들어 황궁 지하를 채우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수문을 닫고 지하의 물까지 한참 빼내던 상태였다.

“여기였던가.”

굴 입구에 도착한 그는 적당한 곳에 줄을 묶고 수로 밑으로 조심스레 내려갔다. 바에자 무리의 관심은 온통 코리온과 아메스에게 쏠려 있었고, 어둠 때문에 헤네티들이 이런 구석진 곳까지는 볼 수가 없었다.

“파이프 한번 더럽게 크네.”

코나가 굵은 파이프를 툭툭 두들겨 보았다. 지하수층에서 물을 뽑아 올리는 이 파이프는 지하 깊은 곳까지 연결되어 수로 바닥을 따라 반대편 욱리하 쪽 수문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파이프를 따라 지하 쪽 깊은 굴로 조심스레 들어섰다. 내리막진 굴은 들어갈수록 깜깜해졌지만 들키지 않으려다보니 랜턴을 쓸 수가 없었다. 다행히 몇 걸음 가지 않아 웬 육중한 기계가 그의 손끝에 만져졌다.

“이놈이 펌프인가.”

사실 그는 기술자도 아니었고, 펌프와 파이프를 어떻게 떼어내는지 따위도 잘 알지 못했다. 그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공구를 조인트에 들이댔다.

“안 되면 부수면 되고.”

그는 습관처럼 이번에도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안에 고압의 물이 꽉 차 있는 파이프를 이렇게 뜯어내는 것이 안전한 것인지 아닌지 따위도 잊기로 했다. 그는 가지고 간 공구로 파이프의 연결 부위를 무작정 비틀어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풀린 나사 틈새로 물이 스멀스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빨리, 빨리.”

그는 물이 새어나오건 말건 아랑곳없이 계속 나사를 풀었다. 그가 절반이 넘는 나사를 풀어낸 순간, 갑자기 조인트가 벌어지며 불이 분수처럼 확 솟구쳤다. 미처 준비할 새도 없이 강력한 물살에 밀려난 코나는 벽에 부딪치고는 내리막 굴을 따라 몇 바퀴를 맥없이 굴러 내려갔다.

“이크!”

코나는 손톱에서 피가 나도록 벽을 움켜쥐고서야 어렵게 멈추었지만 그 뒤가 더 문제였다. 굵은 파이프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살에 굴 안에 있던 이런저런 장비와 공구들이 무서운 속도로 떠내려왔지만 코나는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다.

“악!”

물살 속에서 기를 쓰고 일어서려던 코나는 무언가 위에서 떠내려 온 육중한 기계 같은 것에 다리를 받히며 뒤로 벌렁 넘어지고 말았다.

“이씨!”

코나가 몸통과 다리를 짓누른 무언가를 밀어내려 버둥거렸지만 바닥이나 벽 어딘가에 걸렸는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파이프에서 쏟아져 나온 거센 물살이 그의 얼굴 위로 넘실거리며 그의 호흡을 방해했다.

“아, 아푸!”

그는 머리를 최대한 내밀어 숨이라도 제대로 쉬려 했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그는 호흡곤란으로 조금씩 힘이 빠져가는 것을 느끼며 가슴을 누르는 무게와 물살에 혼자 저항했다.

‘그래, 이 무식한 년. 무식하니 이런 거지.’

코나는 지금까지 항상 그래왔듯이, 다시금 못나고 나약한 스스로를 저주했다. 이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바에자는 코런덤 중대장, 몇 명의 경호 헤네티들과 함께 제단 쪽에서 서성거리며 계속 시간과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사에나가 이끄는 크바르나와의 싸움은 여전히 진행형이었고, 수로 밑에서 저항하는 코리온 일행도 여전했지만 어쨌든 시간은 그의 편이었다. 최소한 지금까지는 그랬다.

그때, 바로 이들이 나왔던 카타콤베 출구 쪽에서 누군가의 다급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하, 아악.”

카타콤베 문에서 막 빠져나온 건 동맹군 사역부대 차림새의 한 병사였다. 조금 전, 바에자가 하오마 신전을 떠나며 그곳을 지키라고 명령을 내렸던 광신도들 중 하나였다.

“저, 전멸입니다.”

이미 피투성이가 되어 있던 그 광신도는 언뜻 보기에도 처참했다. 이미 한쪽 팔이 반쯤 잘렸고 곳곳의 자잘한 상처들에서 많은 피를 흘려 숨이 끊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네, 네피와 가디언들입니다. 곧……5분 정도면 여기까지……올 겁니다.”

“네피 놈이 카타콤베를 타고 오고 있다고?”

바에자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 무식한 놈이 여기 구조를 알 리가 있나?”

바에자가 고개를 저었다. 그가 믿는 건 적들이 시시각각 변하는 그 복잡한 카타콤베를 통해 여기로 오지는 못하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전령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우, 울피 신관님이 놈들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중상을 입은 전령이 손으로 카타콤베를 다시 가리켰다.

“젠장, 이래서야 12시까지 버티겠나? 앙?”

바에자가 버럭 화를 내자 중대장이 난감한 표정으로 둘러댔다.

“공동묘지에 있던 동지들이 죽은 타격이 너무 큽니다. 게다가 조금 전 불이 꺼졌을 때 놈들이 갑자기 반격을 가해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여기에 적 가디언들이 카타콤베로까지 쫓아온다면 앞뒤로…….”

“머뭇거리지 말고 12시 직전까지 버티기 어렵다고 솔직히 말해라.”

바에자의 추궁에 중대장이 입을 꾹 다물었다. 야전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이 마구스의 눈은 정확했다.

“사에나 그년이 가진 에아 교단 팔찌만이라도 구해왔으면 이 걱정은 안 했어. 내 죽여도 좋으니 손목만이라도 잘라서 가져오라 했거늘.”

바에자가 이를 갈며 카타콤베 입구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후대의 제국 학자들이 ‘도무지 용도를 파악하지 못한’ 이상한 제어판 하나가 오랫동안 꺼진 채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었다.

“젠장. 저 판넬은 써 보지도 못했군.”

바에자가 욕을 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 빌어먹을 에아 팔찌만 있으면 카타콤베를 주물러서 놈들을 차단할 수 있었을 텐데…….”

“송구하옵니다.”

“네 잘못은 감히 마구스의 혈통을 만만하게 보고 헤네티를 고작 한 명만 보낸 거다.”

“죄송하옵니다, 만만하게 보아서가 아니옵고……음?”

얼굴이 붉어진 채 머리를 조아리던 중대장은 지하수층과 연결된 굴 쪽을 돌아보았다.

“무슨 소리 안 들리십니까?”

중대장의 말이 끝난 순간, 굴 안에서 갑자기 무언가 때려 부수는 것 같은 굉음과 함께 큰 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바에자는 중대장과 경호원, 엔지니어들만을 대동하고 굴 입구로 황급히 달려갔다.

“이게 뭐냐?”

바에자는 굴 안쪽에 랜턴을 비추었지만 지하에서 물을 뽑아내던 큰 파이프가 살아있는 뱀처럼 혼자 요동을 치고 있는 모습밖에는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안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로 보아 무슨 일인지는 뻔했다.

“안에서 끊어진 거냐!”

악을 쓰던 바에자는 건너편 수로 아래로 걸쳐져 있는 웬 끈을 보았다. 누군가 건너편 청중석 쪽에서 내려와 굴 안에서 파이프를 끊은 것이 분명했다. 바에자와 헤네티가 재빨리 굴 입구 쪽에 석궁을 겨누었지만 아무도 나오는 기척이 없었다.

“이미 도망간 모양입니다.”

“저 망할 트라카 손자 놈 같으니. 저놈이 우리 계획을 이미 간파한 건가.”

바에자가 이를 빠득 갈며 코리온이 있는 곳을 돌아보았다. 물이 다시 채워지고 있다는 건 그에게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아무나 들어가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고 파이프를 막아! 당장!”

바에자가 함께 온 엔지니어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명령을 받은 2명의 엔지니어가 허겁지겁 사다리를 걸고 수로 밑으로 내려가 굴로 뛰어들었다.

그때 바에자가 갑자기 머리를 짚으며 고개를 수로 건너 청중석 쪽으로 돌렸다. 깜깜한 청중석에서는 400명이 넘는 양측 헤네티들이 머리에 랜턴을 달고 여전히 혈투를 벌이며 시간을 끌고 있었다. 랜턴이 비추는 곳 외에는 온통 깜깜해서 누가 어디서 움직이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반쪽 마구스 놈이 제 발로 다가오는군.”

“예?”

- 내 마구스 혈통을 우습게보지 말라 하지 않았더냐. -

이번 바에자의 말은 그의 귀가 아닌, 중대장의 머릿속으로 바로 들려왔다. 머리의 랜턴을 끈 바에자는 그를 놔둔 채 석궁에 볼트를 채우며 수로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새삼 이 마구스의 ‘특별한 능력’을 떠올리며 온몸이 얼어붙은 중대장은 경호원에게 ‘소리 없이’ 그를 따라가라 손짓을 보냈다.

“코나?”

밖에서 크바르나와 함께 있던 사에나는 코나와의 연락이 갑자기 끊어지자 당혹스런 표정으로 계속 할룩스를 호출했지만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코나, 코나?”

사에나는 자기도 모르게 목에 건 머플러를 만지작거렸다. 지하 안쪽 어디선가 엄청난 물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아 그가 맡은 일을 제대로 처리한 건 분명했지만 그 뒤가 문제였다. 코나가 있을 굴 주변에서 두세 개의 빛이 오락가락하는 것을 보아 적들도 이미 코나의 존재를 알아챈 것이 분명했다.

“최대한 빨리 수로까지 전진해!”

사에나는 거추장스런 코트를 확 벗어던지고는 위장포를 쓰고 이마의 랜턴을 꺼 버렸다.

“날 엄호해라. 2명만 불 끄고 날 따라와.”

“고립된 리쿠 학장 일행을 구하러 가십니까.”

사에나는 크바르나 중대장의 물음에 조용히 고개만 끄덕거렸을 뿐 차마 솔직히 대답해주지는 못했다.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사에나는 한참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청중석 중앙을 피해 어두운 구석의 벽에 바싹 붙어 수로 쪽으로 접근해갔다. 하지만 수로에 바싹 다가간 순간, 어두컴컴하던 수로 건너편에서 난데없이 환한 빛이 그를 똑바로 겨누었다.

“으잇!”

어디선가 날아온 몇 발의 볼트에 앞장서가던 크바르나들의 방패와 투구가 뒤로 휙 돌았다. 방패에 맞은 병사는 기겁을 하며 바닥에 몸을 낮추었고, 투구에 맞은 한 명은 허둥지둥 머리를 추스르며 구석으로 몸을 숨겨야 했다.

‘제기랄, 걸렸다.’

수로 바로 앞에서 차단당한 사에나는 폐목재더미 뒤에 몸을 숨겼다. 그새 수로 건너편의 적은 다시 불을 끄고 어둠 속에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어떻게 찾아냈는지 모르지만 그네들이 자신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는 건 분명했다.

- 보이지는 않아도 네 존재는 느껴. 사에나 빈트 에아. -

사에나는 진짜 말소리인지, 환청인지 모를 누군가의 웬 울림에 움찔하며 주변을 급히 살폈지만 아무도 없었다.

“뭐지?”

그가 의자 위로 고개를 살짝 내민 순간,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쉿 하며 머리 위를 스쳤다. 처음처럼 정확한 일격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어느 정도는 사에나의 움직임을 읽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너도 마구스냐?’

사에나는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자가 마구스이고, 이것 또한 그자의 특별한 능력임을 직감했다.

‘젠장, 어머니, 왜 나한테는 이런 신기한 능력 하나 안 주셨는지요.’

사에나가 답답함에 이를 갈았다. 언젠가 수나가 비웃었듯이, 그는 정말로 마구스라고 하기는 민망하리만큼 변변한 능력이 없었다. 어머니가 딸에게 물려준 건 독하디 독한 기질과 냉철함, 남들이 다 쓰러질 때도 죽어라 버티는 끔찍한 참을성밖에 없었다.

그때, 사에나의 할룩스로 기다리고 기다리던 코나의 연락이 들어왔다. 할룩스를 막 켠 그는 물에 얼굴이 잠긴 채 거의 알아듣기도 힘든 목소리로 무어라 말하는 그를 발견했다.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그가 들을 수 있는 건 ‘못 나간다.’ ‘날 포기해라.’ 딱 두 마디 뿐이었다.

“이 한심한 년 같으니.”

사에나가 이를 악물며 씩씩거렸다. 무언가 생각한 그는 함께 온 크바르나들에게 랜턴을 켜고 엄호사격을 하라고 손짓을 보냈다.

“뭘 어떻게 하시려고요?”

“닥치고 쏴. 놈들이 날 쫓아오지 못하게 저지하고 있어.”

사에나의 엉뚱한 명령을 받은 2명의 크바르나들이 얼른 몸을 세우고 조금 전 사격이 날아온 곳에 위협사격 몇 발을 날렸다. 거의 동시에, 사에나가 수로를 향해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어떤 빌어먹을 마구스가 더 질긴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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