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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735화 (730/1,132)

< -- 735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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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러나 있어.”

아메스가 가디언에게 뒤로 물러나 있으라고 눈짓했다. 그리고는 코나에게 다시 눈을 바싹 들이댔다.

“네가 누군지 알겠어.”

“누굴 말씀하시는지요.”

코나가 팔의 고통을 이를 악물고 참으며 일단 시치미를 떼었다.

“소인 그저 천한 노예일 뿐입니다.”

“닥쳐.”

아메스는 위로 오르려는 코나를 다시 난간 뒤로 밀어내며 코나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이 젊은 황후 겸 자이센 가 종손은 코나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똑똑했다.

“타르서스 별궁에서 널 본 사람이 너무 많은데 어쩌지? 아버지가 네년이 얼굴을 고쳤다는 것도 알아내지 못했을 것 같아? 훗, 들개 같은 인상은 하나도 안 변했는걸?”

“후우.”

더 빠져나갈 수 없음을 깨달은 코나가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는 여전히 수로 꼭대기에 매달린 채 아메스의 손에 의지해 가까스로 버티고 있었다.

“빌어먹을 투모카프 놈이 손자 놈은 잘 봤군.”

코나가 퉁명스레 내뱉었다. 이 노예가 살려달라고 빌 줄로 알았던 아메스는 여전한 그의 콧대에 피가 확 쏠리는 느낌이었다. 코나는 아메스의 한쪽 손에 위태롭게 매달린 채 수로 난간에 일방적으로 매달려 있었고, 아래로는 거칠게 지하로 빨려드는 물살과 짙은 연기뿐이었다.

“내가 손을 놓으면 넌 끝이야.”

“난 이미 끝났던 사람이야.”

“네가 왜 여기 있지? 네가 파이프를 끊었냐?”

아메스가 오른손에 다시 힘을 주며 물었지만 코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잠시 망설이던 아메스가 그의 손목을 당기며 다시 물었다.

“설마……황상이 널 살려주신 거냐?”

코나는 여전히 대답을 하지 않았다. 발끈한 아메스가 다시 고함을 질렀다.

“이년아! 빨리 대답해! 황상은 여기 없으니 네 목숨은 내 손에 달렸어!”

아메스의 호통에도 ‘황제와의 약속대로’ 굳게 입을 다문 코나는 그가 원하는 대답은 해 주지 않았다.

“황제가 누군데?”

“이년이 고집만 남았나.”

비록 확답은 듣지 못했지만, 똑똑한 아메스는 이 가문의 원수가 왜 이곳에 와 있는지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다. 조금 전 구출되어 나온 사에나는 타르서스에서 반란군 진압을 맡았던 실무자였고, 코나는 ‘공식적으로는’ 당시 사에나가 놓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이 둘이 같이 있었다면 결론은 빤했다.

“그럼 방금 나온 그 쉐너 가 년이 황상을 배신하고 멋대로 널 살려줬구나.”

아메스가 재빨리 함정을 팠다. 사에나가 코나를 놓아주는 ‘대역죄’를 저지른 것이라 인정하든지, 아니면 황제의 ‘특명으로’ 살아난 것임을 인정하든지 둘 중의 하나라도 엮어 볼 참이었다. 둘 중 어느 쪽이든 코나에게는 누군가를 배신해야 하는 선택이었다. 물론 코나가 이런 어설픈 수작에 넘어갈 사람은 아니었다.

“너희의 도움 따위는 안 받았어.”

계속 시간이 지나자 뒤에 있던 가디언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아메스를 재촉하기 시작했다.

“폐하, 시간이 다 되어갑니다! 연기도 너무 짙고…….”

“닥쳐! 이년하고 결판을 내야 하니까!”

아메스가 다시 이를 드러냈다.

“그래, 난 너그러운 황후니까 일단 여기서는 꺼내주지.”

아메스가 다시 콜록거리며 빨개진 눈을 부릅떴다.

“잘못했다고 한 마디만 해. 우리 자이센 가 조상들을 죽여서 죄송하다고 한 마디만 하면 여기서 올려줄 테니까.”

“잘못? 내가?”

코나가 갑자기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내 선택은 마찬가지다.”

순간 땀이 들어찬 아메스의 손이 확 미끄러졌다. 코나가 휘청거리며 밑으로 조금 떨어지자 아메스가 악을 쓰며 그의 손을 다시 붙들었다.

“일가족을 모조리 죽여 놓고?”

코나가 그의 손에 매달린 채 태연하게 중얼거렸다.

“배신자 주제에 그 정도도 축복이지.”

“뭐?”

격분한 아메스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지만 이 고집스런 전직 헌병대 장교는 발밑을 흐르는 무서운 물살과 짙어지는 유독가스, 그리고 죽음 앞에서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아시스에서 학살당한 20만의 노예들한테 무릎 꿇고 빌어야 하는 건 너희 가문이야.”

코나가 자신의 목숨을 쥔 이 다혈질의 황후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뒤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가디언들이 다시 그를 재촉했다.

“빨리 되돌아가야 합니다! 이젠 정말 안 됩니다!”

“이년이 돌았구나. 잘못했다고 비는 것 하나 못해? 이 짐승만도 못한 년 같으니.”

아메스가 다시 악을 썼지만 코나의 대답은 여전했다.

“이봐, 젊은 친구.”

코나가 몸을 뒤로 기울이며 아메스에게 경멸이 섞인 기이한 미소를 던졌다.

“의지가 목숨보다 강할 수 있는 게 사람만의 특권이라는 걸 아나?”

아메스가 이를 빠드득 갈며 코나를 노려보았지만 무슨 이유엔지 맞잡은 손을 차마 놓지 못했다.

“빌어먹을 년!”

말문이 막힌 아메스가 부상을 입은 코나를 위로 확 잡아당겨 바닥에 동댕이쳤다. 부상을 입은 코나는 난간을 휙 넘어 단단한 신전 바닥에 그대로 내리꽂혔다. 부러져 뒤틀린 팔이 몸에 깔리며 코나가 거친 신음소리를 냈다.

“시간이 없으니 끌고 와. 찢어죽일지 기름에 튀겨 죽일지 나중에 생각하면 돼.”

시계를 확인한 아메스가 짙은 연기에 급히 입을 가리며 총총히 앞장섰다. 가디언이 쓰러진 코나를 바닥에 질질 끌고 화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아메스가 도망치던 그 시각, 울피는 3명의 크바르나 병사들과 함께 신전을 가득 채운 연기 속에서 무언가를 바삐 찾고 있던 중이었다.

“여기! 여깁니다!”

병사의 고함소리가 들려 온 곳은 무너진 구름다리가 있던 그곳이었다. 울피가 입을 가리고 허겁지겁 달려간 곳에는 3구의 유골들이 여기저기 치여 흩어진 채 뒹굴고 있었다.

“맙소사. 빨리! 빨리 모아!”

울피가 유골을 한 자리로 급히 주섬주섬 모았다. 이 오래된 3구의 유골들은 처음 코리온과 아메스를 이곳에 끌어들였던 바로 그 미끼였다.

“너희 맞구나.”

울피는 볼트가 박힌 두개골을 소중하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르잔 대신관께서 그렇게 찾으셨는데.”

울보 울피가 이번에도 혼자 훌쩍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후계자 오르마즈를 위해 이곳에서 죽은 그 3명의 동반자, 혼, 카야, 파트라는 이곳에서 에아의 보호를 받으며 수백 년의 오랜 기다림을 감내하고 있었을 터였다.

“그분과 함께 모실 영웅들이다. 빨리 수습해.”

울피가 눈물을 닦으며 병사들에게 급히 손짓을 했다. 병사들이 망토를 벗어 뼛조각들을 급히 모으는 와중에도 신전의 불이 점점 커지면서 지하 신전 전체가 코앞도 분간하기 어려운 짙은 연기로 뒤덮여가고 있었다.

“11시 58분입니다. 빨리 따라오십시오.”

유골을 수습한 크바르나 병사들은 콜록거리는 울피를 데리고 허겁지겁 카타콤베 문으로 향했다.

“11시 59분입니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크바르나 병사가 에아 신전의 돌문을 힘껏 닫았다. 안에는 조금 전 피신해 온 아메스와 네피, 가디언들이 와글와글 모여 있었다. 잠시 후, 바닥이 우르르 울리면서 사람들이 일제히 한쪽으로 쏠렸다.

“이게 뭐야?”

아메스는 물론이고 놀란 가디언들과 병사들이 자리에 주저앉으며 잠시 혼란에 휩싸였지만 그 움직임은 별로 길지 않았다.

“잠깐, 학장은 어디 갔지?”

진동이 멈춘 후, 아메스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코리온은 물론이고 ‘검은 사신부대’ 병사들도 대부분 보이지 않았다. 이곳의 구조를 전혀 모르는 아메스는 덜컥 겁부터 들었다.

“학장님은 피해상황을 확인하신다고 바로 떠나셨고, 검은 사신부대 병사들도 뒤따라 갔습니다. 부상을 입은 사에나 쉐너 중랑장도 데려간 것 같습니다.”

가디언 한 명이 더듬더듬 대답했다. 잔뜩 겁을 먹은 아메스가 랜턴을 켜고 카타콤베 안을 둘러보았지만 사방으로 뚫린 길 중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누가 여기 길 알아?”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울피가 숯검댕이처럼 더러워진 얼굴을 닦으며 아메스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메스는 그의 더러워진 얼굴에 웃음을 터뜨릴 뻔했지만 사실 아메스 자신의 얼굴도 그 모양이라는 건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가 뭐 하는 곳이지?”

카타콤베에 난생 처음 들어와 본 아메스가 당혹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상께서 이곳은 위험천만한 옛 미로이니 절대 들어오지 말라 하셨습니다. 이번은 너무도 다급하여 어쩔 수 없이 들어왔으니 빨리 나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나도 모르는 걸 그대가 어찌 아는가?”

“소인 먼 옛날에 식물학자로 교단에서 일했사옵니다. 자세한 것은 나중에 말씀드리겠사오니 빨리 따라오십시오.”

울피를 따라가려던 아메스는 뒤를 문득 돌아보았다. 가디언에게 끌려온 코나가 바닥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통에 신음하고 있었다.

“흐음.”

아메스가 갑자기 헛기침을 하며 네피에게 눈짓을 보냈다. 눈이 휘둥그레진 네피가 다가오자 아메스가 그를 턱으로 가리켰다.

“중죄인이야. 가문의 원수니 눈에 안 띄게 조용히 옮기고 싶어.”

아메스의 귀엣말에 네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군데요? 뭐 코나 시디크라도 된답니까?”

“응.”

“에……예에?”

네피가 멍한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입니까? 타르서스에서 놓쳤다더니 여기에 왜…….”

“쉿.”

아메스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널 믿으니까 하는 말인데……네가 직접 조용한 데로 끌고 가. 그리고 아무한테도 얘기는 하지 마.”

“조용한 데라뇨? 조용히 죽여 버리라고요?”

아메스의 말뜻을 못 알아들은 단순한 네피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답답한 그에게 아메스가 눈을 흘기며 짜증을 냈다.

“쉐너 중랑장 있는 병원으로 데려가. 그것이 알아서 하게 해.”

“아버님한테 안 알리시고요?”

“시키는 대로 하라고.”

아메스가 버럭 화를 냈다. 그제야 황후의 속을 눈치 챈 네피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 아니, 저자를 잡았다면 가문에 얼마나 영광이…….”

“황상께서 일부러 살려두신 것 같다.”

아메스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꽉 악문 그의 턱에 힘줄이 곤두서 있었다.

“그, 그런데요?”

놀란 네피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저자는 만난 적도 없는 조상들 원수지만 슈벨 부총리가 죽은 건 지금 내 현실이니까.”

네피는 아메스가 반쯤 울먹이고 있는 것을 느꼈다. 아메스는 자꾸 솟구치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쳐내며 짐짓 단호하게 말했다.

“난 자이센 가 종손이지만 그에 앞서서 황후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제야 아메스의 의도를 눈치 챈 둔한 네피가 괜스레 얼굴을 더듬거리며 얼른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중상을 입고 바닥에 쓰러진 노예 작업자 따위에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그렇게 나쁜 놈은 아닌 것도 같아. 그러니 상께서 살려두셨겠지.”

아메스가 네피의 시선을 외면하며 인정하기 싶지 않은 말을 더듬더듬 꺼냈다.

“알겠습니다. 아버님 귀에 들어가지 않게 조용히 처리하죠. 먼저 가십시오.”

아메스는 더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번 결정도 호승심과 의무감으로 가득 찬 그에게는 쉬운 것이 아니었음이 분명했다.

“상께선 황후 폐하께서 살아남으신 것을 더 다행이라 여기실 겁니다.”

네피가 위로를 해 주었지만 별 효과는 없어 보였다. 그는 사람들을 데리고 울피를 따라 터벅터벅 멀어져가는 아메스의 뒷모습을 힘없이 쳐다보았다.

사실 죽은 슈벨 부총리는 문관의 수장이면서 얼마 전 죽은 토로 경과 함께 황제를 가장 오랫동안 보필해 온 충성스런 신하였다. 그런 대신을 어처구니없이 잃은 황제가 황후 아메스를 곱게 보아 줄 리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아메스의 추정이 사실이라면― 황제가 보호하고 있는 코나 시디크까지 가문의 원수 운운하며 죽인다는 건 황제의 총애를 스스로 잘라내는 짓이 될 것이 뻔했다.

“변하셨군요.”

네피가 고개를 저었다. 그 지독하던 고집과 자존심이 한풀 꺾인 모습이 어디지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했지만 한 단계 성숙한 마리안의 핏줄이 어딘지 대견한 것도 사실이었다.

“황후 폐하! 황궁을 지켜내지 않으셨습니까! 황상께서도 정말 기뻐하실 겁니다. 훌륭한 선택을 하신 겁니다! 국모 아니십니까!”

네피가 앞에 가는 아메스에게 큰 소리로 외치며 두 손을 치켜들어 크게 손뼉을 쳐 보였다. 그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와 박수 소리가 들려오자 아메스가 뒤를 돌아보며 더러워진 얼굴에 억지스러우나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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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음 회부터는 다시 카렐의 이야기로 돌아가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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