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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736화 (731/1,132)

< -- 736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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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아 신전에서 정신을 잃었던 보안국장 루토는 정신을 차린 것 같았지만 눈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아직 멍한 의식 속에서 무언가 쑥덕거리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저 녀석 깼군.”

처음 들어보는 여자 목소리는 어딘지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말씀하지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 목의 상처가 더…….”

“답답해서 골병나는 것보다는 낫지.”

루토에게 두 번째로 느껴진 건 예민한 코로 들어오는 독한 소독약 냄새였다. 아직 감각이 온전치 못한 그는 자신이 병원에 있는 것인가 하고 생각했지만 무언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턱이 움직이지 않았다.

“저 친구 안대는 풀어 줘. 말도 못 하는데 앞도 가려놓으면 죽을 맛이겠지.”

“위험합니다. 명색이 1등급……아니, 곧 특등급이 될 최정예 가디언입니다.”

“왜? 저놈도 누구처럼 시선만으로 사람을 죽인다던가?”

여자의 말투는 꽤나 냉소적이었지만 최소한 위압적이라던가 협박조라기보다는 마치 가볍게 놀리는 듯 들렸다. 그리고 여자의 지시대로, 누군가가 루토의 안대를 조심조심 풀어주었다.

갑작스런 빛에 루토가 눈을 찡그렸다. 그의 안대를 풀어 준 건 아스탈의 주치의이기도 한 아프라스 야투 박사였다. 황궁이 보이는 작은 방, 손과 발의 차가운 쇠사슬을 느낀 순간, 그는 자신이 포로가 되었다는 것을 조금씩 실감할 수 있었다. 루토는 자신이 어디 있는 것인지 파악하려 얼른 눈동자를 굴렸다. 창문 너머로 황궁이 멀리 보이는 것을 보아 황도의 남쪽 시가지 어딘가가 분명했다.

“이번에 살아나갔으면 정말 특등급 달았을 텐데 솔직히 안됐어.”

그 냉소적인 목소리의 주인공은 목에 피투성이 드레싱을 한 단발머리의 여자였다. 루토가 카타콤베 출입문에서 망치를 휘둘러 쓰러뜨렸던 바로 그 여자가 분명했다. 그는 창가에 놓인 큰 안락의자에 기대앉아 망원경으로 황궁을 지켜보고 있었다.

루토는 다시 무어라 말을 하려 했지만 여전히 턱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여자가 그런 루토를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군. 데리고 나오는 동안 마취시켜 놓았는데 약발이 좀 오래 가나봐.”

루토가 이 낯선 여자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무장인 건 분명했지만 아직 그 이상의 정체는 알지 못했다.

“어떻게 나왔는지 궁금하겠지? 뭐 어렵지는 않아. 12시 자정에만 열리는 곳이 있거든. 유리병들 사이로 걷는 건 기분이 영 꽝이지만 말이야.”

루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조금은 초조한 표정의 바에자는 시계를 확인하며 황궁 본관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나저나, 엔지니어 놈이 말한 시간이 다 된 것 같은데 왜 반응이 없지? 아스트라이아 홀이 무너진 게 언제인데.”

그때, 황궁이 있는 곳에서 또다시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조금 후, 바에자의 할룩스에서 내부의 누군가가 보고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쿠 학장이 방금 살아서 나왔습니다! 그자가 에아 신전의 물막이벽을 아예 무너뜨린 모양입니다! 지하수층에 물이 급격히 들어차고 있습니다!”

“벌써? 그걸 벌써 알아냈다고?”

바에자가 또다시 시계를 확인했다. 엔지니어가 ‘황궁 본관이 무너질 거다’라고 말했던 시각에서 이미 한참이 넘어가 있었고, 황궁 본관은 여전히 건재해 보였다. 망원경으로 확인한 황궁 본관 부근은 수많은 작업자들이 오가며 무언가 바삐 작업을 하고 있는 듯 보였다.

“방금 무너진 소리는 그럼 뭐지?”

“무너진 건물들이 다른 건물에 피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학장이 앞장서서 잔해를 아예 철거해 버리고 동쪽 별관 지하에서 대대적인 공사를 시작한 것 같습니다.”

“결론이나 말해. 황궁이 무너질 것 같나?”

“동쪽 별관까지는 큰 피해가 가겠지만……본관의 붕괴까지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후우.”

바에자가 얼굴을 찡그렸다.

“빌어먹을 돌연변이들.”

조금 전까지도 냉소적이지만 나름대로 가볍게 떠들던 바에자의 표정에 무거운 절망감이 흘렀다.

“어떡하실 거죠?”

아프라스 야투 박사의 물음에 바에자가 대답을 생략한 채 물었다.

“사오시안트 쪽 사정은?”

“코런덤들이 모두 시내에 풀렸습니다. 대신관께서 직접 지휘하고 계십니다. 사오시안트 궁을 곧 점거하실 수 있으실 것 같습니다.”

바에자가 눈살을 찡그렸다.

“그것보다 카렐 그것을 죽이는 데 더 주력하시는 게 좋겠다고 전해드려라.”

“……여기서 퇴각하실 겁니까?”

“쓸 만한 가디언 하나 구한 걸로 만족해야지.”

바에자가 루토를 힐끔 돌아보았다. 마취가 약간 풀리면서 놀란 루토가 버둥거렸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바에자는 바닥에 누워 있는 그에게 다가와 목 밑에서 맥을 짚어보았다.

“가디언 치고는 꽤 똑똑한 놈이라지?”

“보안국장을 아무나 하는 건 아니니까요. 제대로 가르쳐 키우기만 하면 거의 베흔 놈과도 맞먹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지난번 황궁에 적을 들여보내는 큰 실수를 했어도 카렐 그놈이 용서하고 넘어갔죠.”

야투 박사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나, 난……배신은…….”

루토가 억지로 첫 마디를 뽑아냈지만 배신이라는 말에 바에자가 갑자기 코웃음을 쳤다.

“배신? 너희는 애당초 우리 마구스들을 받들라고 만들어진 존재였어. 배신이 아니고 제자리를 찾아오는 거라고.”

바에자가 루토에게 코끝이 닿을 듯 바싹 얼굴을 들이댔다. 루토의 망치에 스쳐 찢어졌던 상처가 아직 그의 얼굴에 길게 남아 있었다.

“마구스의 얼굴에 감히 상처를 냈으니 전 같았다면 넌 이미 사지가 찢겨 죽었을 거야. 하지만 이번만은 용서하지. 네가 맘에 들거든.”

마지막 한 마디는 바에자의 입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머릿속을 울리는 정체불명의 울림에 전율한 루토가 놀라 양쪽을 두리번거렸지만 틀림없이 바에자가 ‘소리 없이 말한’ 것이었다.

“치사하게 목숨값은 받아내지 않아. 너도 ‘가디언’으로서의 반쪽짜리 삶 대신 진짜 시민처럼 살 수 있는 자유를 얻고 싶지 않나?”

바에자는 황금색 가디언 팔찌가 끼워진 루토의 손목을 덥석 붙들었다.

“이 끔찍한 굴레도 없애 주고 진짜 남자로 복원도 시켜 주지. 너희는 못 한다고 자신하지만 우리 기술 정도면 어려운 일이 아니야. 여자도 안아보고, 자식도 낳고, 자유를 만끽하며 살고 싶지 않나? 어때?”

피비린내와 소독약 냄새가 뒤엉킨 바에자의 뜨거운 숨결이 루토의 얼굴에 그대로 와 닿았다. 무슨 이유엔지 갑자기 몸이 뜨거워진 루토가 무심결에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바에자의 ‘소리 없는 한 마디’가 또 루토의 머릿속을 울렸다.

‘다시 보니 꽤 미남인걸.’

바에자가 자신의 목에 붙어있던 소독용 드레싱 한 장을 떼어 루토의 얼굴에 묻은 피를 살며시 닦아 주었다. 뺨을 스치는 그의 손끝은 생각 외로 부드럽고 따뜻했다.

“대신관님의 연락입니다.”

둘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은 야투 박사의 보고에 그대로 깨져버렸다.

“사오시안트 별궁을 곧 장악하실 것 같다는 연락입니다.”

바에자는 루토의 뺨을 짚은 채 고개를 천천히 밖으로 돌렸다. 이제 최후의 승부는 사오시안트에서 벌어질 카렐과 아스탈의 대결에서 결정날 순간이었다.

사오시안트의 성벽 밖에서 카렐을 향해 돌격한 자살공격부대가 황제를 죽인다는 큰 임무는 완수하지 못한 채 몰살당했지만 쿠베나 제롬에게는 그다지 충격적인 결과도 아니었다. 어차피 성공 여부에 관해서는 그들 스스로도 반신반의하고 있었고, 동맹군 선봉부대의 서부 경보병대를 일거에 궤멸시켜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것만으로도 그들에게는 어느 정도 목적을 달성한 셈이었다.

“저기도 꼴이 볼만하군.”

제롬이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카렐 황제가 있던 모래언덕 위는 여전히 잔불과 검은 연기에 휩싸여 있었고, 망원경으로 확인해 보니 꽤 많은 사상자와 피해가 발생한 듯 보였다.

“그것보다는 저쪽이 더 중요한데요.”

쿠베가 망원경을 내밀며 어두운 북쪽 지평선 너머를 가리켰다. 달빛도 없는 흐린 밤공기 너머, 8만의 동맹군 공성부대 본대가 지평선을 꽉 채우며 다가오는 중이었다. 평야지대라 언뜻 가까워 보였지만 망원경에 찍힌 실제 거리는 아직 40스타디아(6km) 정도의 꽤 먼 자리였다.

쿠베가 이런저런 보고를 대강 취합해 일단 지도를 완성했다.

“현재시각 20시입니다. 정찰병 말이 적들은 1시간 정도면 성 밖에 집결을 모두 끝낼 것 같다고 합니다.”

“아군은? 카산드라 경한테 연락 왔어?”

제롬이 퉁명스런 얼굴로 물었다. 적을 코앞에 두고 몇 시간째 지루한 대치를 이어가면서 이 성질 급한 사내의 인내심이 점점 바닥나가는 기색이 역력했다. 쿠베가 그에게 물 한 잔을 내밀며 침착하게 말했다.

“적 추가병력의 뒤를 일정한 간격으로 쫓고 있습니다. 21시 30분 정도면 놈들의 뒤를 틀어막을 수 있습니다. 놈들이 집결하자마자 앞뒤로 조이면 오늘이 가기 전에 놈들을 끝장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럭저럭 희망적인 전황 예측에 초조해있던 제롬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지만 분위기에 바로 휩쓸리지는 않았다. 그는 여전히 붉게 타고 있는 남쪽의 항구를 돌아보았다.

“우리 후방은 어때? 저기만 조용하면 다 될 것 같은데.”

제롬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쿠베의 할룩스가 울리기 시작했다. 할룩스를 받아든 쿠베의 표정은 바로 확 일그러졌다. 이번에 보고를 올린 건 쿠베의 수하인 근위대나 보안국 사람들이 아니었다.

“항구에 무장한 대병력이 나타났다고?”

쿠베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항구 부근에서 민간인들을 통제하는 치안군부대는 원래 이곳 시장인 니콜라프 경이 맡고 있었지만 그가 죽으면서 이제 머리를 잃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예! 창고에서 웬 무장병력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적어도 1천 명은 되는 것 같습니다! 중무장한 걸 보니 가디언은 아닌 게 분명합니다만 싸우는 건 거의 가디언 수준입니다. 이대로는 몰살당합니다! 빨리…….”

사오시안트 치안군 부대장이 창밖을 내다보며 보고인지 고함인지를 마구 질러댔다.

“1천? 장난 하냐? 검수까지 하고 들여보낸 군수품 창고에 무슨 군인 1천명이 숨어 있어?”

쿠베가 버럭 화를 냈지만 치안군 부대장은 보고를 끝까지 이어가지 못했다. 무슨 급한 일이 생겼는지 모르지만 할룩스에서는 제대로 된 보고 대신 빨리 막으라는 필사의 고함소리와 안 된다는 절망어린 절규가 함께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놈 왜 나는 붙들고 난리야.”

일단 대답은 했지만 쿠베는 이들의 보고를 내심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애당초 치안군은 근위대의 지휘 하에 있는 부대도 아니었다. 그들의 상관이고 중간에서 상황을 정리할 의무를 진 시장 니콜라프 경이 죽었다보니 급한 대로 근위대에 도움을 청한 모양이었다.

“빨리 원군을 보내 주십시오! 이대로는 못 버팁니다!”

“알았다. 내 알아서 조치할 테니까 일단 저지만 하고 있어.”

쿠베는 습관처럼 보안국을 먼저 불러냈다. 베흔이 떠난 이후, 아직 황실 전체를 장악하지 못한 처지다보니 그가 후방에서 믿을 수 있는 눈은 보안국장인 쿠마르와 그가 이끄는 보안국 뿐이었다.

“이봐, 창고에서 중무장한 적 병력이 1천이나 나왔다는 게 사실이야?”

쿠베는 쿠마르의 얼굴을 보자마자 다급한 얼굴로 물었다. 그의 물음에 쿠마르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중무장한 병력이 1천이나요? 창고에서요? 뭔가 착오가 있는 모양입니다. 후방에 잠입한 적 병력은 아까 말씀드린 소수의 적 가디언 특수부대가 전부입니다.”

쿠마르가 말도 안 된다며 손을 저었다.

“그놈들도 보안국 요원들과 후방의 근위대 가디언들이 쫓고 있는 걸 눈치챘는지 사라졌습니다. 뭐 어딘가에서 나타날 것 같아서 신경을 곤두세우고는 있습니다만……1천의 중무장 병력이라뇨? 세상에 누가 그런 헛소리를 합니까?”

치안군 쪽과는 완전히 상반된 측근의 대답에 쿠베가 그나마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확인차 몇 마디 더 묻기로 했다.

“치안군 쪽에서 그런 보고가 들어왔는데 설마 아주 헛소리겠어?”

쿠베의 잔뜩 긴장한 모습에 쿠마르가 껄껄대고 웃으며 손을 저었다.

“고작해야 좀도둑이나 잡던 허접한 겁쟁이들 말을 다 믿으십니까. 적 그림자만 나와도 오줌을 지릴 놈들이죠.”

“바쁘니까 빨리 대답해. 그럼 성 안이 조용하다는 거야?”

쿠베가 성 밖에서 조금씩 늘어나는 적병을 돌아보며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뭐 항구가 불타서 난장판이 되었으니 조용하다는 건 어폐가 있겠죠.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아까 말씀드린 소수의 가디언 특공대 정도라면 몰라도 1천이나 되는 중무장 군인이 어떻게 전혀 안 들키고 후방에 들어왔겠습니까? 그게 말이나 됩니까.”

쿠마르가 눈썹 하나 까딱 안 하고 웃으며 쿠베를 안심시켰다. 창고에서 쏟아져 나온 코런덤들이 이미 항구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고 있었지만 그는 사실대로 말해 줄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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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이 바뀌었습니다. 대선을 앞두고(?) 저도 총리 선거를 한 번 해 보려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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