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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743화 (738/1,132)

< -- 743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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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했다.”

보병진까지 거의 되돌아온 하지즈 장군의 귀에 황제의 짧은 격려 한 마디가 돌아왔다. 퇴각한 낙타병들이 보병들 틈새를 재빨리 지나 뒤로 물러난 순간, 보병과 그들이 든 빽빽한 창이 높고 단단한 벽으로 기병들의 앞을 차단했다.

“양 측면에서 대기해라. 곧 궁기병대가 도착해 도와줄 테니.”

황제의 지시는 이번에도 짧고 간결했다. 하지즈 장군은 얼른 주변을 둘러보았다. 생각해 보니 조금 전. 적 ‘자살공격대’가 올 때까지만 해도 함께 있었던 3천의 슬레이프니르 궁기병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궁기병대가 어디서 옵니까?”

물으면서 다시 확인해 보니 중군의 후방에 숨어있던 궁기병들이 어둠 속에서 슬그머니 이쪽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저들을 보탠다고 해도 턱도 없는 역부족이기는 매한가지였다. 하지즈 장군은 ‘제발 뒤로 물러나시면 안 되겠습니까?’라고 마지막으로 조언할까 했지만 맘을 접었다. 저 고집불통 황제가 그렇게 말한다고 들을 것 같지도 않았다.

“뭔가 믿으시는 모양이시니 나도 믿어야지 별 수 있나.”

보병대를 지나온 하지즈 장군의 앞에는 그의 익숙한 애마가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두 번째의 공격을 준비할 때였다.

낙타병들을 쫓아 진흙탕을 가로질러 달려온 류한 경은 진영이 흐트러지고, 바닥도 엉망이고, 심지어 말도 지쳐 속도가 떨어진 최악의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다른 선택이 없었다. 저 진창을 지나 여기까지 힘들게 온 판국에 이제와 퇴각한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젠장! 한 번으로 끝내!”

바로 그의 앞에 검은 깃발을 세운 적 황제가 잡아 보라는 듯 서 있었지만 무른 땅, 지친 말은 기병들이 최대한의 속도로 돌격할 수 있게 놓아주지는 않았다. 류한 경은 첫 돌격의 실패를 어느 정도 직감했지만 뒤따라오는 다른 기병들이 있으니 크게 염려하지 않기로 했다.

“일단 진영에 부딪치면 말 따위는 필요 없어진다!”

황제의 앞에는 이미 수십의 북부보병들이 창의 벽을 쌓고 있었지만 류한 경과 뒤따르는 수십의 근위기병들은 몸을 바싹 낮추며 창의 벽에 말의 몸을 날렸다.

“이악!”

창의 벽에 막힌 류한 경이 말 뒤로 굴러 떨어졌다. 긴 창에 꿰어버린 말들의 처절한 울음소리와 창이 부러져 날아가는 소리, 꼬꾸라지는 말에 받혀 목과 허리가 꺾인 보병들의 비명이 사방에서 튀어 오르는 진흙과 피, 살점이 한데 뒤엉켜 처절한 밤을 수놓았다.

“하, 학.”

창을 떨어뜨리고 말에서 굴러 떨어진 류한 경이 얼굴을 뒤덮은 진흙을 털어내며 얼른 몸을 일으켰지만 제정신은 아니었다.

“어떻게 되었어!”

예상은 했지만, 속도를 잃어 위력이 떨어진 첫 충돌의 결과는 끔찍했다. 1차로 돌격한 수천의 선봉 기병들 중 상당수는 시체가 되었거나 말에서 떨어져 신음하고 있었지만 이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또 온다!”

보병들이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1천이 넘는 2선의 기병들이 선봉대에 바로 뒤이어 다시 보병대 대오를 덮쳤다.

“이크!”

류한 경이 얼른 머리를 낮추고 바닥에 엎드렸다. 북부보병대도 첫 돌격은 힘겹게나마 받아냈지만 두 번째로 쇄도해 들어오는 어마어마한 기병들까지는 막아내지 못했다. 황제 앞을 지키던 보병들까지도 말의 육중한 몸을 무기로 덮쳐오는 기병들의 힘을 당해내지 못하고 우루루 무너져 내렸다.

“후방에서 나와! 뒤에서 좀 나와 도우라고!”

말에 깔려 죽어가는 부하 보병을 말의 몸뚱이 밑에서 끌어내며 가디언 분대장들, 살아남은 병사들이 울부짖었다. 일순간 수백, 아니 어쩌면 1천이 넘을 병사들이 죽거나 부상을 입고 쓰러지면서 견고해 보이던 보병대의 대오 전방이 무너져 내렸다. 제1열이 무더기로 쓰러지고, 후열이 동료들에 걸려 미처 나오지 못한 그 사이, 치명적인 창의 벽도 잠시나마 사라졌다.

엎드렸던 자리에서 고개를 든 류한 경은 지금이 기회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다리 멀쩡한 놈들은 다 일어나!”

류한 경이 칼을 빼들며 여전히 말에 올라 있는, 혹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부하들에게 외쳤다. 조금은 아이러니지만, 진흙투성이의 무른 땅이 말에서 떨어지는 기병들을 부상에서 지켜주었다. 뒤를 돌아보니 3열이 와서 칠 때까지는 수십 초는 더 있어야 할 듯 보였다.

“공격! 놈들이 무너졌으니 공격해!”

아직 어질어질한 그의 의식 속으로 검게 펄럭거리는 무언가가 확 들어왔다.

“적 황제다!”

류한 경이 무너진 보병들 뒤에 서 있는 황제를 칼로 겨누며 큰 소리로 외쳤다. 주변의 부하기병들 중 일부는 여전히 말에 탄 상태였고, 일부는 두 발뿐이었지만 이제 황제와의 사이에는 부상을 입고 쓰러졌거나 혼란통에 무질서하게 흩어진 만만한 적 보병들뿐이었다.

“여기를 공격해!”

류한 경을 선두로 주변에 있던 십여 명의 남부기병들이 일제히 말에 탄 황제를 향해 돌격했다. 황제는 다가오는 그들을 가늘게 뜬 눈으로 지켜보면서도 깃발 옆에 선 채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저놈 미쳤나!”

류한 경은 잠시나마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평소 황제를 지키던 카토와 근위가디언들도 보병대 후방에 떨어져 있다 보니 빽빽한 대오와 혼란통에 막혀 별 소용이 없었다.

“폐하! 제발 물러나십시오!”

부상을 입은 가디언 분대장이 칼을 빼들고 나가 선두에서 달려오던 기병의 다리를 베어버렸지만 그 사이 또 다른 기병들과 수십의 ‘말에서 내린’ 기병들이 그 옆을 스쳐 황제에게 쇄도했다. 다른 가디언 사관들이 앞장서서 말에 탄 기병들을 우선 차단했지만 모두를 막을 수는 없었다.

“폐하를 지켜! 빨리! 빨리!”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던 부상병 한 명이 황제를 향해 달려오는 기병을 향해 부러진 창을 무작정 휘둘렀다. 죽은 줄 알고 있던 적의 발악에 놀란 기병이 급히 방향을 돌리려다가 진흙 바닥에서 미끄러지며 옆으로 나동그라졌다.

“죽여! 죽여!”

몸도 성치 않은 말단 보병 2명이 넘어진 기병을 일제히 몸으로 덮쳤다. 그새 허리춤에서 도끼를 뽑아든 동료 보병이 동료들의 몸에 눌려 발버둥치는 기병의 이마를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귀족 중장기병의 화려하고 단단한 투구도 평민 보병의 악에 받힌 도끼질 한 번에 쩍 소리를 내며 두 조각으로 쪼개져 버렸다. 최소한 칼날 앞에서만은 이들은 철저히 평등했다.

“병신들! 창 든 놈들 어디있어! 말에 탄 놈을 잡으라고!”

기병을 죽인 병사가 이미 죽은 시체를 동댕이치며 동료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황제는 여전히 병사들에게 자신의 안전을 완전히 맡긴 채 자리에 굳건히 서 있었다.

“빨리 막아!!!”

몇 명의 보병들이 황제를 공격하는 2명의 중장기병들을 향해 창을 겨누고 소리를 지르며 무작정 달려들었다. 보병이 대오도 이루지 않은 채 중장기병에게 덤벼드는 건 말도 안 되는 바보짓이었지만 황제가 적 앞에 노출된 지금은 그들도 눈앞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으악!”

창을 든 보병과, 말을 타고 돌격하던 기병의 비명이 동시에 울렸다. 2명의 보병들이 돌격하는 기병에 받혀 공중에 인형처럼 붕 솟아올랐지만 동시에 보병들의 육탄돌격에 차단당한 기병들 또한 중심을 잃고 황제가 탄 말 바로 앞에 맥없이 꼬꾸라지고 말았다.

카렐은 쓰러진 기병에게 십여 명의 말단 병사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난도질하는 광경을 물끄러미 쳐다보고는 짧게 한 마디 입을 열었다.

“잘했다, 제군들.”

황제의 격려에 잔뜩 고무된 병사들의 눈에서 살기가 되살아났다. 기세가 살아 오른 그들은 피투성이가 된 칼을 쥐고 목표를 찾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피에 굶주린 그들의 눈에 화려한 차림새의 ‘장군’ 한 명과 그를 뒤따라오는 기병들이 말에서 내린 채 달려오는 모습이 또 들어왔다.

“저놈 잡아!”

적 황제를 향해 돌격하던 류한 경은 명색이 ‘장군’인 자신과 중장기병들에게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악 소리를 지르며 달려드는 보병들의 무시무시한 눈빛에 기겁을 했다. 가디언도 아니고, 장교도 아닌, 말 그대로 말단 보병들뿐이었지만 그들의 표정은 마치 정신이 반쯤 나간 자들처럼 보였다.

“이놈이 감히!”

류한 경이 힘껏 칼을 휘둘러 선두에서 오던 보병의 팔과 가슴을 단번에 조각내 놓았지만 그 뒤에 오던 또 다른 덩치 큰 보병이 동료와 뒤엉킨 그를 향해 힘껏 몸을 던졌다. 그리고 사방에서 보병들이 기병들에게 몸을 던졌다.

“우욱!”

힘에서 밀려난 류한 경이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났지만 이 정도로 쓰러질 무장이 아니었다. 그는 재빨리 몸을 돌려 두 번째 보병의 등을 재빨리 찔러버리고는 계속 카렐에게 돌진했다. 눈앞으로 돌진해오는 번쩍이는 실루엣을 발견한 카렐이 눈을 가늘게 뜨며 그제야 시선을 주었다.

“누구냐?”

그 순간, 조금 전 등을 칼로 찔린 보병이 악을 쓰며 쫓아와 그의 허리를 와락 안았다.

“이놈! 어딜!”

막 달리려던 참에 몸을 붙들린 류한 경이 다시 휘청거렸다. 급한 나머지 적의 갑옷을 뚫고 즉사할 만큼 위력적인 일격이 되지 못했던 탓이었다. 자리에 붙들린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칼을 카렐에게 힘껏 던지고는 허리에 달고 있던 메이스를 대신 집었다.

“으음?”

무언가 날아오는 것을 눈치 챈 카렐이 팔에 끼고 있던 건틀렛으로 얼른 얼굴을 가렸다. 공중을 빙빙 돌며 날아온 칼은 그의 건틀렛을 꽝 소리를 내고 후려치고는 어딘가로 날아가 버렸다.

“이익.”

칼을 쳐낸 카렐이 얼굴을 찡그렸지만 여전히 움직이지는 않았다.

“무엄한 놈!”

3명의 보병들이 류한 경에게 우루루 달려들었다. 메이스를 든 류한 경이 선두에 온 보병의 이마를 단번에 부숴놓았지만 그것도 이미 눈이 돌아가 반쯤 미친 보병들을 겁먹게 하기는 역부족이었다. 뒤이어 계속 몰려드는 보병들에게 수와 힘에서 밀린 류한 경은 중심을 잃고 진흙바닥에 완전히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병사 중 한 명이 그의 손목을 무릎으로 내리찍어 끝내 메이스까지 떨궈놓았다.

“제기랄!”

병사들에게 깔리고 무기까지 빼앗긴 류한 경은 이제 죽었다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놈들! 감히! 비키지 못해! 난 델루지 가 장군이란 말이다! 이놈들!”

죽을 위기에 처한 류한 경이 필사적으로 버둥거렸지만 도끼를 든 병사들을 잠시 머뭇거리게 만든 것뿐이었다. 그제야 조금 이성을 찾은 병사 한 명이 동료들을 저지하며 뒤에 말을 타고 서 있는 황제 쪽을 돌아보았다.

“폐하! 명을 주십시오!”

“델루지 가 장군이라 했나. 이름이 뭐냐.”

카렐이 큰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물었다. 투구까지 벗겨진 채 악을 쓰던 류한 경은 황제의 음산한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자 그제야 살았다 싶은 맘에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데, 델루지 가 상급귀족 류한 델루지……입니다, 폐하.”

류한 경이 내심 안도하며 ‘폐하’라는 말에 최대한 힘을 주었다. 전투에서 이렇게 생포한 무장, 그것도 부유한 명문가 출신의 상급귀족 무장을 살해하는 경우는 지금껏 거의 없으니 이제 살았다고 여긴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류한? 마자리크 경에게서 도망친 놈?”

카렐이 얼굴을 가린 손을 천천히 치웠다. 조금 전 그가 던진 칼에 스쳤는지, 사파이어 서클렛을 타고 붉은 피 한 줄기가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움찔한 류한 경이 최대한 불쌍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도망친 것이 아니옵고 그저……제발,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시오면 가, 가문에서 몸값을 두둑이 지불할 테니…….”

“몸값?”

카렐이 손바닥에 묻은 피를 죽 핥고는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류한 경을 깔아뭉개고 있는 병사들에게 물었다.

“저자의 몸값과 짐의 피값 중 어느 쪽이 더 귀하겠나? 나의 용사들.”

황제의 말뜻을 이해한 병사 한 명이 도끼를 번쩍 치켜들었다. 류한 경이 다시 버둥거리려 했지만 병사들이 이미 그의 팔다리를 붙들고 있었다. 그리고 겁에 질려 꽉 감은 류한 경의 두 눈 사이에 도끼날이 무자비하게 내리꽂혔다.

“우욱!”

숨이 덜 끊어진 류한 경의 머리를 다른 병사가 뒤이어 후려쳤다. 그를 붙든 병사들은 죽었는지 아닌지도 아랑곳없이 류한 경의 머리와 가슴을 번갈아가며 사정없이 난도질했다. 가디언 분대장이 달려와 뜯어말릴 때까지 피에 굶주린 병사들의 무서운 광기가 계속되었지만 황제는 더 이상 그쪽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적 장군을 우리가 잡았다! 우리 분대가 잡았다고!”

류한 경을 난도질해 죽인 병사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그의 머리를 잘라 창끝에 꽂아 공중에 높이 치켜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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