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44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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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옵니다!”

그새 대오를 정비한 후열의 북부보병들이 앞으로 나서며 만신창이가 된 1열과 다급히 교대했다. 긴 창과 큰 방패, 도끼로 무장한 보병들이 악 소리와 함께 기세를 드높이며 걸음을 맞춰 황제보다 앞으로 성큼성큼 나섰다.

“와 봐라!”

보병들이 다시 창을 겨누며 소리쳤다.

“놈들이 정비하기 전에 쳐라!”

맞은편 남부기병대의 기세 역시 아직은 대단했다. 하지만 지휘관이 죽은 줄도 모르고 계속 몰려든 두 번째 군단의 기병들도 앞에서 온 동료들처럼 진흙탕과 씨름하느라 이미 기진맥진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들의 앞을 죽은 지휘관의 머리와 악전고투중인 동료들, 말의 시체가 가로막고 있었다. 5천 내외씩으로 구성된 남부기병 3개 군단 중 선봉의 1개 군단이 절반 이상 무참히 깨진 셈이었다.

“젠장! 어떡해야 해?”

눈앞의 전황에 당황한 군단장이 소리를 질렀다. 군데군데 동료들을 기다리며 격전을 벌이고 있는 곳도 남아있었지만 어쨌든 지금까지의 돌격은 참담한 실패였다. 설상가상으로 앞에서 죽거나 부상을 입은 동료들, 그리고 말의 시체 때문에 제대로 돌격을 할 수가 없었고 선봉장 류한 경이 전사했다는 사실도 기병들의 의욕을 크게 꺾어놓았다.

첫 돌격의 실패 소식은 후방에 있는 구디엔 경에게도 바로 전해졌다.

“류한 경이 죽은 것 같습니다.”

망원경과 스캐너로 전방 상황을 확인한 참모가 짧게 설명했다. 경기병들을 이끌고 뒤따라오던 우군 사령관 구디엔 경이 얼굴을 찡그렸지만 섭섭해 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죽어도 지 팔자라고 하지 않았나. 젠장, 저대로는 돌격도 어렵겠군.”

그는 냉담하게 관심을 끊고 할룩스를 켰다.

“남부기병대는 선임 군단장이 지휘한다. 선봉 군단은 모두 퇴각하고 돌격은 일시 중지한다. 적당한 거리에서 견제만 해. 잠깐 말을 쉬게 하고 놈들을 위협만 해라.”

“저어, 제후님, 그건…….”

여전히 전방을 살피던 참모가 얼른 끼어들었다.

“왜?”

“적 보병대 후방에 궁기병대가 막 도착했습니다. 3천 정도 되어 보입니다.”

구디엔 경은 비로소 심각해진 얼굴로 눈에 망원경을 가져갔다.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 경기병들이 북부보병대 후방에 포진을 시작하고 있었다.

“아예 떨어지던지, 아예 근접해야지 어중간한 거리에서 견제만 하다가는 괜스레 투창벼락만 뒤집어쓸 겁니다.”

중장기병과 경기병의 전술 모두에 능한 동부 출신 참모들이 재빨리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노련한 구디엔 경도 방금 전의 명령을 수정해야 함을 느꼈다. 하지만 악에 받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저 견고한 보병진을 돌파할 같은 보병대가 없는 것이 문제였다.

“빌어먹을, 근위대가 저기 가 있으니.”

구디엔 경이 뒤를 돌아보았다. 원래 함께 공격하기로 되어 있던 근위대 정규군단은 상륙하는 동맹군측 근위대를 막기 위해 후방으로 가 있었다. 총사령관 카산드라 경은 기병만으로 해결될 줄로 믿은 모양이었지만 이제 보병이 없는 것이 치명적인 문제가 되어 있었다.

“별 수 없다.”

바로 임기응변을 생각해 낸 구디엔 경이 할룩스를 들었다.

“남부기병 1개 군단을 말에서 내리게 해라.”

“예에?”

예상대로, 남부기병대 장교들의 당혹스런 반응이 바로 돌아왔다.

“당장!”

구디엔 경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명색이 귀족이고 평민 보병보다 몇 배는 훈련받은 정예병이다. 말에서 내려 밀집대오로 보병전을 전개한다. 나머지 기병군단은 좌측면을, 동부기병대가 우측면을 친다. 얕보지 말고 최대한 정석대로 싸워.”

“그래도 귀족 자존심이 있는데……순순히 말에서 내려서 보병처럼 싸우겠습니까? 게다가 적 북부보병대에는 가디언들이 분대장으로 함께 편제되어 있습니다.”

“안 내리면 어쩔 건데. 기병으로 돌격하는 목적이 보병들 겁먹고 지레 무너지라는 건데 지금 놈들이 죽어라 꼼짝도 않잖나! 가디언들도 좌우의 병사들이 다 죽으면 무슨 통뼈라고 버텨? 경기병들이 뒤에서 지원사격을 해.”

구디엔 경의 호통에 남부 무장들도 하는 수 없이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는 이 청천벽력 같은 명령을 부하들에게 전했다. 말에서 내릴 것을 지시받은 군단 사관들의 불평이 줄줄이 이어졌지만 오래 가지는 않았다. 보병대 후방에 포진한 슬레이프니르 궁기병대에서 날린 장거리 투창사격이 머리 위로 쏟아지면서 말에 오른 ‘큰 표적’인 기병들은 더더욱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도 어쩔 수 없이 말에서 내려 방패로 자기 몸이라도 지켜야 했다.

“앞에는 북부보병들이다!”

평소 말에 타던 중장기병들은 돌격창 대신 방패와 기병용 칼을 빼들고 무른 진흙탕 위에 재빨리 집결했다.

“무지렁이 평민들이다! 단번에 무너뜨려서 귀족들의 권위를 알려라!”

기병들이 칼로 방패를 두들기며 일단 크게 고함을 질렀다. 비록 진흙을 온통 뒤집어써 흉한 꼴들이었지만 이들의 갑옷은 훨씬 단단했고 무기도 우수했고 무엇보다 하나하나가 잘 훈련된 정예병들이었다.

“돌격!”

전통적인 돌격전을 포기한 남부기병들이 이번엔 자신들의 두 발로 공격을 시작했다.

돌격해오는 기병들을 본 보병대 지휘관들이 소리를 질렀다.

“보병전이다! 1열은 창을 버리고 2열 뒤는 창을 줄여라! 폐하께서 보고 계신다!”

맞은편의 동맹군 북부보병들도 기병들의 돌격에 즉시 반응했다. 제일 앞의 보병들은 도끼와 방패를 움켜쥐고 적을 노려보았고, 그 뒤의 동료들은 창자루를 발로 고정시키고 앞에 선 동료의 옆으로 날을 내밀어 사람 얼굴 높이를 똑바로 겨누었다.

“남부 돼지들에게 하임달의 복수를!”

누군가의 외침에 병사들이 일제히 ‘복수’를 외치기 시작했다.

“사격!”

양쪽의 경기병들, 동맹군의 슬레이프니르와 연합군의 동부 경기병대 쪽에서 동시에 수천 발의 투창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앞에 있는 동료들의 머리 위를 넘어 상대방 진영에 무섭게 내리꽂히며 기선을 제압하려 했다.

“폐하! 사격입니다! 물러나십시오!”

카렐 옆에 있던 보병들이 주변에 얼른 방패의 벽을 쌓으며 악을 썼지만 그는 말 옆에 걸어놓았던 방패를 들어 앞을 가렸을 뿐, 자리에서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양쪽 진영 모두에서 수십, 수백의 보병들이 쓰러졌지만 어차피 오래 지속될 사격은 아니었다.

“들이받아!”

온몸에 진흙을 온통 뒤집어쓴 기병들이 방패로 창의 벽을 뚫고 보병들의 방패를 온 힘껏 들이받았다. 묵직한 중장갑의 병사들이 보병들의 벽에 부딪치면서 긴 보병진이 사방에서 파도가 치듯 출렁거렸다. 비록 손에 무기는 쥐고 있었지만 어차피 이런 대결은 그럴싸하고 멋진 칼싸움과는 거리가 먼, 무지막지한 힘싸움이었다.

“받쳐! 받치라고! 넘어가면 다 죽는다!”

양쪽이 몸과 힘, 방패로 악을 쓰고 밀어붙이며 중간에 끼어버린 병사들, 중심을 잃고 넘어진 병사들의 비명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후열의 병사들이 방패 사이로 창을 내밀어 적의 빈틈을 노렸고, 방패 밖으로 삐져나온 손목, 발끝, 무릎은 여지없이 적의 표적이 되었다.

“무조건 버텨라. 시간은 우리 편이다. 내가 죽으라 하기 전까지는 죽지도 마라.”

“알겠습니다! 모두 들었나! 물러나면 죽음이다!”

황제의 단호한 지시에 3군단장이 휘하 무장들에게 큰 소리로 그 뜻을 전했다.

“제발, 베흔, 빨리 좀.”

눈앞의 아수라장에서 잠시 관심을 끊은 카렐은 흐린 눈으로 좌우를 둘러보았다. 그의 위험천만한 사수 계획도 이제 본장에 서서히 접어들고 있었다. 양쪽에서는 나머지 남부기병들과 동부기병들이 측면을 조여오기 시작했고, 하지즈 장군의 3천여 낙타병단과 슬레이프니르의 경기병들이 그들을 필사적으로 차단하고 있었다.

“얼마나 막을 수 있나?”

황제의 물음에 하지즈 장군의 숨가쁜 대답이 곧 돌아왔다.

“아직은 막을 수 있습니다만 전세를 돌리기도 힘듭니다!”

“그러면 됐다.”

카렐은 이번엔 중군 쪽을 쳐다보았다. 양쪽의 중군은 공교롭게도 모두 남부보병대였다. 델루지 가가 중심을 이룬 10만의 남부보병대와, 플라칼 가가 주력인 6만5천의 마찬가지 남부보병대의 역사상 첫 대결이었다. 양쪽에서 가장 둔중한 부대들인 만큼 아직 서로를 향해 접근해 나아가며 기세싸움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루이제 대군은 어찌되었지?’

카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해 보니 저곳에서 마누엘과 육탄전을 벌이던 루이제에게서 더 이상의 연락이 없었다.

마누엘을 말에서 떨어뜨린 루이제는 이 우악스런 남자와 멱살을 붙들고 기를 쓰며 힘싸움을 벌였다. 루이제도 6척(180cm)이 넘는 큰 키에 당당한 골격의 떡 벌어진 체구였지만 마누엘은 그보다 한 뼘 가까이 큰 키에 힘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남자였다.

“이 무식한 년!”

마누엘이 팔을 누른 루이제를 필사적으로 밀어내며 거칠어진 숨을 헐떡거렸다. 지금껏 제롬을 제외하면 시민을 상대로는 힘 대결에서 져 본 기억이 없었지만 이 여자는 예외였다. 손목을 꽉 잡힌 순간 그는 갑옷의 경첩이 으스러지는 소리에 경악을 하며 재빨리 손을 빼내야 했다.

‘이년은 도대체 뭘 처먹었길래 이렇게 힘이 세지?’

생전 처음 느껴보는 괴력에 내심 공포감까지 느낀 마누엘은 다시 달려드는 루이제의 얼굴을 힘껏 걷어차고는 흙바닥을 엉금엉금 기어 자신의 말이 있는 곳으로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차라리 칼싸움이 낫지.’

마누엘은 말에서 내려 몸싸움을 시작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기술로는 그럭저럭 대결을 해 볼만 했지만 힘으로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를 않았다. 그새 그를 다시 뒤쫓아온 루이제의 굵은 팔이 막 도망치려는 그의 목을 덥석 낚아챘다.

“욱!”

계속된 난투극에 녹초가 되어버린 마누엘은 중심을 잃고 뒤로 벌렁 쓰러지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턱을 덥석 붙든 루이제는 투구를 사정없이 잡아당겼다. 루이제의 괴력에 투구 끈이 뚝 끊기면서 마누엘의 투구가 홱 벗겨져 바닥에 굴렀다. 쓰러진 그의 얼굴로 날카로운 칼날이 박힌 건틀렛을 낀 루이제의 주먹이 바로 날아들었다.

“으익!”

주먹에서 들리는 쉿 하는 소름끼치는 바람소리에 마누엘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하지만 루이제는 바싹 얼어붙은 그의 얼굴 앞에 주먹을 들이댄 채 킥킥 웃기 시작했다.

“놀랐냐?”

창백해진 마누엘은 눈앞에서 반짝이는 건틀렛의 칼날에 바들바들 떨었다. 루이제가 힘을 조금 주어 저 날을 내리꽂으면 그는 끝장이었다. 그는 이 우악스런 여자와 몸싸움을 시작한 것을 후회했지만 이젠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대군 마마! 이제 물러나셔야 합니다!”

그새 마누엘의 부장을 제압한 후스와 다른 부장들이 급히 달려왔다. 양쪽 군대의 중군을 이루고 있는 둔해터진 남부보병대는 이제야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고, 양 측면의 우군과 좌군에서는 기병들끼리 서로를 향해 맹렬히 돌격하고 있었다.

수십 번의 돌격전을 벌이며 이 벌판을 온통 휘저어놓은 루이제와 마누엘은 중군과 우군의 사이인 보병대와 기병대 중간쯤, 곧 격전이 벌어질 자리에 어중간하게 위치해 있었다.

“다 끝났어.”

마누엘을 바닥에 엎드리게 한 루이제는 부장이 그의 손을 묶는 것을 확인하며 다시 술 한 모금을 시원하게 들이켰다.

“나도 드디어 한건 올렸군.”

“적 기병들이 오고 있습니다. 서두르십시오!”

후스가 손으로 북쪽을 가리켰다. 마누엘이 생포당하는 것을 보았는지 연합군 기병 십여 기가 본대에서 떨어져 이곳으로 맹렬이 돌진해오고 있었다. 다가오는 기병들의 정체를 유심히 파악하던 부장 후스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이런, 맙소사.”

“왜?”

“히, 히르직스 타마르 경입니다. 빨리 물러나야겠습니다!”

히르직스를 누구보다 잘 아는 후스가 기병들 중간에 숨어 있는 푸른색 갑옷 차림의 기병을 가리켰다.

“저 흉갑하고 말을 보니 틀림없습니다!”

“설마? 장군 깃발도 없이?”

“일부러 몰래 오는 게 분명합니다! 신분이 드러나면 난처해지니……”

제국 제일의 맹장으로 꼽히는 히르직스가 마누엘을 되찾으러 온다는 말에 루이제의 눈빛에도 순간 공포와 공격본능이 동시에 맴돌기 시작했다.

“어차피 저놈하고 싸울 가능성도 생각하지 않았던가?

마누엘을 꺾고 자신감에 충만해진 루이제가 엉뚱한 말로 후스를 기겁하게 했다.

“지금 싸울 때가 아닙니다! 우린 숫자도 적고 이젠 창도 없습니다!”

후스는 이 단순무식한 무장의 과욕에 기겁을 하며 손을 저었다.

몇 달 전, 남편 히르직스에게 버림받고 죽은 카나르 경의 장녀 미노아의 기억이 아직 후스에게는 생생히 남아있었다. 뱃속에 아이까지 가진 채로 고통스럽게 죽어가던 그를 결국 구해내지 못했던 후스의 무거운 자책감이 이젠 루이제를 향하고 있었다.

“빨리요! 빨리 물러나십시오! 이놈은 저희가 데려가겠습니다!”

후스는 루이제를 억지로 말 위에 밀어붙였지만 그는 전공에 미련이 남는지 히르직스 쪽에서 시선을 놓지를 않았다. 당황한 후스는 얼른 할룩스를 켜고 예르마크 경을 찾았다. 이 공격적이고 고집 센 대군을 말릴만한 사람은 아버지 예르마크 경밖에 없었다.

“부마님! 지금 적장 히르직스가 대군마마를 노리고 몰래 오는 것 같습니다! 대군마마께 빨리 퇴각령을 주시고 혹시 모르니 병력을 좀……”

“히르직스가?”

동맹군 우군을 이끌고 있던 부마 예르마크 경은 다른 사람도 아닌 히르직스가 딸을 공격한다는 말에 순간 창백해졌다.

“놈이 틀림없나?”

“예! 분명합니다! 갑옷도 그렇고 말 타는 자세도 틀림없습니다.”

예르마크 경은 망원경을 들고 멀리 딸이 있는 곳을 확인했다. 전장은 지평선까지 훤히 보이는 넓은 평원이었고, 멀찍이 떨어져 서 있던 양측 보병들이 그 위아래에서 거리를 좁혀가고 있었다. 그 중간에 있는 루이제와 일행들을 향해 적진에서 튀어나온 십여 기의 기병들이 돌격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번엔 내 차례냐.”

예르마크 경은 품 안에서 맏딸을 보내고 혼자 숨어서 울곤 하던 카나르 경을 떠올렸다.

“안 돼, 저 애는 안 돼.”

그의 손은 무의식중에 말고삐를 딸이 있는 곳으로 돌리고 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저자의 창이 딸의 심장을 향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 망할 년은 빨리 안 돌아오고 뭐 하는데! 당장 나오라고 해! 내 당장 달려갈 테니!”

그는 대장군의 깃발을 뒤에 남겨둔 채 말에 얼른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20여기의 세닉 가 근위기병들이 영문도 모른 채 그의 뒤를 급히 따라 돌격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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