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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746화 (741/1,132)

< -- 746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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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방에서 상황을 총괄중인 제네르에게서 루이제의 전사 소식을 전해들은 카렐은 ‘볼트로 저격당했다’라는 말에 순간 표정이 굳었을 뿐 더 이상 뭐라고 하지 않았다. 그의 앞에서는 북부보병들과 말에서 내린 남부기병들과의 처절한 백병전이 여전히 전개되고 있는 중이었다.

“아군에서 볼트를 쏘는 부대는 검은 사신부대 뿐입니다. 하지만 검은 사신부대는 제 곁에 있으니 관련이 없을 테고, 적군에 볼트를 쓰는 부대가 또 있을까요?”

소식을 전해준 제네르가 걱정스레 말했지만 카렐은 입가를 찡그리며 냉큼 대답했다.

“옛날부터 참전했던 암살수 중에 아직 석궁 쓰는 놈들은 많다.”

“그렇긴 하지만…….”

“부마는?”

의심을 품는 제네르의 모습에 카렐이 얼른 주제를 바꾸었다.

“부상을 입었다더니? 치료는 끝났나?”

“일단 후방으로 보내야 할 것 같은데 응급처치만 받고 지휘에 복귀하겠다고 고집을 피우고 있습니다. 몸도 몸이지만 지금 극도로 격앙된 상태라 저대로는 지휘가 어렵습니다. 폐하께서 따로 명을 내려 지휘권을 회수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 합니다.”

제네르가 우군 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각각 1만 5천씩으로 이루어진 남부기병대와 서부 보병대가 히르직스의 연합군 기병대 3만을 상대로 어려운 싸움을 막 시작하는 참이었다.

카렐이 여전히 고개를 반쯤 숙인 채 침착하게 지시를 내렸다.

“내 이곳을 총괄할 테니 자네가 우군을 지휘하게. 자식을 잃은 아비에게서 지휘권까지 빼앗아서 감정을 건드릴 필요는 없지. 계급으로 자네가 상급자니 그편이 모양도 나아.”

“예? 하지만…….”

제네르는 조금 당황한 얼굴로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여전히 기병대 차림새의 세네피스는 모래언덕에 예비대로 주둔중인 ‘검은 사신부대’ 중간에 서서 전장 한복판에 서 있는 황제의 모습에 혼자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저분’은 어쩌고요? 제게 지키라 명하지 않으셨습니까?”

제네르는 세네피스가 눈치 채지 않도록 목소리를 잔뜩 낮추었다. 잠시 고민하던 카렐이 괜찮다며 손을 저었다.

“내가 여기서 버티고 있으니 여기만 안 뚫리면 상관없다. 곧 릴라크 경이 기사단을 데리고 상륙해 후방을 지킬 테고, 아샤드 경과 ‘검은 사신부대’가 어머니를 지키고 있으니 그걸로 됐다.”

“알겠습니다.”

제네르는 자신의 근위기병들에게 뒤를 따르라고 손짓을 보냈다. 그리고는 루이제의 전사와 예르마크 경의 부상으로 위기에 처한 우군 쪽으로 급히 말을 몰아 달려가기 시작했다.

“또 만나야 하나.”

제네르가 잔뜩 긴장하며 고삐를 단단히 쥐었다. 사실 제네르에게는 전력의 열세보다는 적 기병대를 이끄는 무장이 히르직스라는 사실이 더 신경이 쓰였다. 히르직스도 몸이 성치 않다고는 하지만 제네르도 만신창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언젠가 히르직스가 자신에게 남긴 얼굴의 큰 흉터를 더듬으며 묘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스스로를 일단 달래 보았다.

“학장? 아직 거기 계시오?”

제네르를 보낸 카렐은 황도에 있는 코리온을 서둘러 불러냈다. 스코프 한쪽의 작은 화면으로 무너진 황궁 부속건물 잔해 위에 서 있는 코리온의 모습이 다시 나타났다. 그는 전장에서 바쁜 황제가 또다시 자신을 불러내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황상이십니까? 무슨 일 있으십니까?”

“황제로서 명령이요.”

“예?”

단호한 명령에 코리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디든 좋으니 당장 안전한 실내로 피하시오. 황명이니 대답 따위는 필요 없소.”

황제의 표정에서 위험을 직감한 코리온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시간 없으니 당장! 그리고 가디언 2명 이상 바로 옆에 두고 말이요!”

얼굴까지 벌개진 카렐이 바락바락 악을 썼다. 코리온은 마지못해 부근에 서 있는 2명의 호위 가디언을 손짓해 가까이로 불러들였다.

“상께서 이곳이 위험하다고 여기시는 것 같으니…….”

가디언들에게 지시를 내리던 코리온이 갑자기 욱 하는 비명을 지르며 화면에서 사라졌다. 그의 손에서 할룩스가 떨어졌는지 난데없이 주변 풍경이 보이자 카렐의 가슴도 철렁 내려앉았다.

“학장! 학장! 젠장! 무슨 일이냐고!”

카렐이 기겁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잠시 후, 반쯤 쉰 목소리가 들리며 누군가의 손이 더듬거리며 화면에 다시 나타났다.

“폐, 폐하, 폐하, 아직 거기 계십니까?”

흔들리는 화면 너머 나타난 건 가디언에 깔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코리온의 모습이었다. 크게 놀란 그의 표정에서 핏기가 사라져 있었지만 넘어지며 머리가 긁혀 피가 나는 것을 빼면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누군가……학, 학. 뭐가 날아간 것 같습니다.”

“저격수다! 4시 방향!!”

코리온을 쓰러뜨린 가디언이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며 다급한 목소리로 대신 대답했다. 그는 코리온을 몸으로 감싼 채 주변에 대고 악을 썼다.

“젠장! 빨리 쫓아가! 빨리!”

“폐하? 아, 알고 계셨습니까?”

재빠른 연락과 가디언의 순발력으로 구사일생한 코리온은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카렐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 어떻게…….”

코리온의 물음에 카렐은 짧게 용무만 전했다.

“혹시 모르니 세닉 가 구성원 모두에게 피신하도록 전하시오. 학장도 빨리 안전한 곳으로 가고. 누군가 세닉 가 시조 요아킴 경의 후손들을 노리고 있는 것 같소.”

카렐은 더 이상의 언급을 회피하며 일단 할룩스를 끊었다. 이미 충분히 놀란 코리온에게 여동생의 전사 소식까지 전하는 건 나중으로 미루는 것이 나아 보였다.

“폐하! 성문이 열립니다!”

호위대장 카토가 남쪽을 가리키며 큰 소리로 외쳤다. 걱정하던대로,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면서 성 안의 수비군들이 동맹군을 양쪽에서 조여들 준비를 하는 모양이었다. 남부기병대와 근위대, 가디언들로 이루어진 연합군 최강의 정예부대였다.

“우리 기병대는?”

“남서쪽을 보십시오.”

황제의 물음에 카토가 냉큼 대답했다. 수십 척의 배가 얕은 해안가에 접근해오고 있었다. 바로 신임 슈로 기사단장 릴라크가 이끄는 1만의 기병대와 약간의 가디언 부대였다.

첫 번째로 상륙하는 뱃머리의 슈로 기사단 기병들은 기계가 철크덕거리는 소리에 일제히 시선을 집중시켰다.

“지, 직접 앞장서실 겁니까?”

부단장 발리가 당혹스런 얼굴로 물었다. 기이한 소리를 내며 나타난 건 기사단 신임 단장인 대장군 릴라크 예리노프였다. 부러졌던 다리와 허리는 철제 프레임이 받쳐주고 있었고, 잘려나가서 복원중인 오른팔도 마치 기계 팔 같은 보조 장치에 감싸여져 있었다. 그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들리는 기계음이 어딘지 을씨년스러웠다.

갑옷 위에 찬 이 기이한 기계장치들은 언젠가 코리온이 해부학 공부를 할 때 만들어 보았다는 보조 장치였다. 이 몸으로 전장에 나가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그를 위해 코리온이 케케묵은 창고를 뒤져 마지못해 선물해 주었지만 사실 제대로 쓰여 본 일은 없는 기계였다.

“이 기계가 제대로 작동할지도…….”

발리가 말꼬리를 흐렸지만 릴라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억지로 나오려다보니 어쩌다 몸이 로봇처럼 누더기가 되었지만 이 상태로라도 전장에 나올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게다가 낙천적인 릴라크는 심지어 ‘나름대로 멋지지 않냐? 힘은 세다더군.’이라는 말로 사람들을 할 말 없게 만들기도 했다.

“내가 뒤에서 구경이나 하려고 여기까지 온 줄로 알았나.”

릴라크는 냉담하게 대답하고는 병사들의 도움을 받으며 자신의 애마에 힘겹게 올랐다. 일단 말에 오른 이상, 두 발로 움직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더 편했다.

“다시 말하지만, 지금의 단장은 나다.”

릴라크는 아직 익숙치 않은 오른팔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단호하게 말했다.

“……물론입니다.”

그의 ‘지나치리만큼’ 당당한 태도에 부단장 발리가 보일 듯 말 듯 눈살을 찌푸렸다. 사실 릴라크는 내부승진자도 아니었고, 전공은 고사하고 적군에서 전향해 이제 막 단장이 된 처지였지만 이곳에서 잔뼈가 굵은 아랫사람들 앞에서 전혀 주눅이 들지도 않았다.

게다가 라자루스 가 여자들 특유의 ‘화끈하거나 그 반대이거나’ 식의 극단을 오가는 성격은 항상 침착하게 일관성을 유지하던 전임자 제네르와는 달라도 한참 달라 아랫사람들 처신을 어렵게 만들기가 일쑤였다.

그런 신임 단장이 기사단 내에서도 가장 ‘친 제네르’ 성향의 무장인 발리에게 못마땅해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상륙한다!”

릴라크가 기계 팔을 저으며 얕은 바닷물에 먼저 뛰어들자 발리를 비롯한 슈로 기사단의 중장기병들이 앞 다투어 얕은 물 위를 디뎠다. 한때 남편의 목숨을 구해주었던 릴라크의 말은 이제 다시 그를 싣고 전장을 달릴 차례였다.

“침착하게. 릴라크 경.”

막 땅을 디딘 그를 제일 먼저 반겨준 건 전방에 있는 황제의 차분한 목소리였다. 릴라크는 황제가 많지 않은 북부보병들로 백병전을 벌이고 있는 곳을 돌아보았다.

“걱정 마십시오, 폐하.”

릴라크는 황제가 자신에게 ‘침착함’을 강조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제롬과 어쩌면 다시 마주칠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과 함께 절벽에 내동댕이쳐져 죽은 갓난 딸의 기억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 모든 것을 잊고 군인으로 되돌아갈 때였다.

“다시 마주친다고 해도 흥분하지는 않겠습니다.”

릴라크는 지킬 수 있을지, 아닐지 자신 없는 다짐을 하며 화면 속의 황제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냥 죽이기만 하겠습니다.”

릴라크의 짧은 말꼬리에 황제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곧 밝은 표정을 거두며 단호하게 말했다.

“이거 하나는 명심하게.”

“말씀하십시오.”

“성문을 돌파하면 사오시안트 시내에 제일 먼저 진주하는 건 바로 그대의 부대여야 하네. 절대 제후군이어선 안 돼. 무슨 말인지 알겠나.”

“사오시안트는 황상에게 복속해야 하니까요.”

“알았으면 됐네.”

황제와의 통화를 끝낸 릴라크는 부하들이 계속 상륙하고 있는 뒤쪽을 돌아보았다.

“빨리 내려! 내리지 않고 뭐 하냐!”

이번에 배를 타고 온 건 7천 정도의 중장기병과 3천의 경기병들, 그리고 1천 정도의 가디언들이었다. 원래 슈로 기사단과 슬레이프니르의 병력은 이보다 훨씬 많았지만 말의 절반 정도가 불량 사료로 폐사했고, 남은 말 중 상당수도 상태가 좋지 않아 실전에 투입하기 어려웠다.

폐사한 말들을 나중에 분석해 보니 지난번 북부에서 공짜로 선물해 준 그 많은 군마들은 애당초 특정 독극물과 미생물에 약할 수밖에 없는 유전자가 삽입된 말들이었다. 그러니 불량 사료를 먹인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결국 그 말들 대신 이전에 타던 말을 급히 끌어와 구멍을 메웠지만 그간 부대 규모가 워낙 커졌다보니 병력의 절반 정도밖에 말을 지급할 수가 없었다.

막 땅을 디딘 발리가 계속해 상륙하는 기병들을 돌아보며 릴라크에게 물었다.

“해안가에 정렬할까요?”

“필요 없다. 적이 성 밖으로 나오니 바로 돌격한다.”

릴라크는 쇠로 만들어진 오른팔에 창을 끼워 넣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예? 우리는 적에 비해 숫자도 적고 아직 다 상륙도…….”

“기회는 있을 때 잡는 거다.”

릴라크를 선두로 한 기사단 중장기병대는 모래땅을 딛기가 무섭게 사오시안트 성 앞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1차로 상륙한 기병은 채 2백도 되지 않는 정예 근위기병들이 전부였지만 릴라크는 전혀 개의치 없고 팔을 앞으로 향했다.

“돌격! 최대속도로!”

“정비가 안 되었기는 우리도 마찬가지…….”

발리도 마지못해 뒤를 따라가며 그제야 스코프로 적 쪽을 확인했다. 릴라크가 돌진하고 있는 사오시안트 성문 앞은 이제 막 성문이 열리고 근위대, 남부제후군 보병대가 뒤섞인 수비군들이 산만하게 나오고 있는 참이었다. 적군의 숫자는 꽤 많았지만 아직 대오도 잡지 못했고, 좁은 성문에서 많은 병력이 서둘러 나오느라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적군이 총 몇 명이나 나올는지는 아십니까?”

“보이는 대로 죽이면 되지 알 게 뭐냐.”

‘맙소사.’

발리는 ‘제네르 경이라면 이런 짓은 절대 못 할 텐데.’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말 그대로, 번개 같은 일제 기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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