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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748화 (743/1,132)

< -- 748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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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에서 나오던 연합군 대군이 릴라크의 기습적인 돌격으로 성문 앞에서 차단당하면서 전방의 주력부대 싸움에 뒤이어 제2전선이 형성되었지만 사실 시간만 끌 수 있을 뿐 애당초  동맹군이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그리고 부단장 발리도 그 사실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이대로 언제까지 막을 수 있겠습니까?”

발리가 걱정스레 물었다.

“이대로 얼마간은 차단할 수 있겠지만 안에서 죽든 말든 계속 밀고나오면 결국은 밀립니다! 궁극적인 반전이 안 나오면 결국은 물러나야 합니다!”

“알아.”

갑자기 딴사람처럼 돌변해버린 릴라크의 아주 침착한 대답이 돌아왔다.

“일단 차단했으니 우리 첫 임무는 끝났다. 네게 절반인 5천을 줄 테니 지금처럼 적을 저지하고 있어라. 최대한 시간을 끌어라.”

“……단장님은 어딜 가십니까?”

“난 나머지 5천을 이끌고 동쪽 성벽으로 가겠다.”

“동쪽 성벽이요?”

발리가 짙은 어둠 너머 사오시안트 시 동북쪽 성벽을 돌아보았다. 그곳은 이번 전투와는 전혀 관계없는, 아주 조용한 곳이었고 약간의 수비병을 빼면 적도, 아군도 없었다.

“설마 기병만으로 거길 공격하시려고요?”

발리가 정색을 하며 물었다. 사오시안트의 성벽은 세나우스 2세 유평황제 시절, 별궁과 함께 지어진 구조물이었다. 그 중에서도 동쪽 성벽은 가파른 고지대에 위치해 공격이 까다로운데도 불구하고 정작 해안가의 ‘취약지점’에 비해 성벽이 기이하리만큼 높고 두꺼웠다.

그렇다보니 나중에 완성된 성벽을 본 군 출신들이 ‘군대에는 문외한인 양반이 멋대로 짓더니 쓸데없이 돈만 쳐들였군.’이라며 고개를 젓기까지 했었다.

잔혹한 황제도 그런 비난을 의식했는지, 완공 직후 그곳을 설계한 핵심 기술자들을 ‘황실 재정을 파먹은 놈들’이라는 죄로 베흔을 시켜 재판도 없이 죽여 버리기까지 했었다.

“거긴 기병은 고사하고 보병도 못 건드리는 황당한 곳입니다.”

발리가 혹시나 하는 맘에 다시 말했다.

“알아.”

릴라크의 태연자약한 대답에 발리는 그가 절벽에서 떨어지더니 제정신을 잃었나 싶었지만 그는 더 이상의 설명은 해 주지 않았다.

“넌 여기서 최대한 시간을 끌어라. 안 그러면 황상께서 위험하시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만…….”

“알았으면 됐어.”

남은 임무를 발리에게 맡긴 릴라크는 여전히 해안에서 계속 상륙하고 있는 후속부대들을 이끌고 동맹군 후방을 가로질러 동쪽으로 향했다. 단장이 황제에게서 무언가 극히 비밀스런 지시를 받은 것은 분명했지만 발리조차도 그것이 무언지는, 아직은 알지 못했다.

“늦게 일어나셨군요.”

사오시안트 항구의 추운 야적장에서 막 눈을 뜬 ‘코런덤’ 여단장 사카는 갑자기 몸을 엄습하는 차가운 기운에 부르르 떨었다. 부대원들이 농담 삼아 ‘관’이라고 부르던 이 상자에는 난방장치는 전혀 되어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갑자기 터져나오는 기침에 몇 번을 힘겹게 콜록거렸다.

“실험실이 훨씬 낫군.”

그는 뚜껑을 대신 열어 준 부관에게 퉁명스레 대답했다. 열린 뚜껑 너머 검은 연기가 가득 들어찬 지저분한 밤하늘이 올려보였다. 몇 번 더 기침을 하고서야 어렵게 안정이 된 그는 자리에 누운 채로 신선한 새 공기를 들이마셔 보았지만 고약스런 탄내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하긴, 이런 데서 깨는 건 처음이시죠?”

이번에도 말수 적은 여단장을 대신해 부관이 수다를 떨기 시작했지만 이 과묵한 여단장은 새 몸에서도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누군 안 그런가.”

그는 지난번과는 분명히 다른, 젊고 강건한 19번째 새 몸을 조심스레 움직여 보았다. 이전에 새로 태어났을 때는 일어나자마자 실험실 거울 앞으로 가서 새 몸을 확인해보곤 했지만 이번은 불가능했다. 이번 몸에는 아예 시작부터 단단한 중장갑과 투구가 빈틈없이 입혀져 있다 보니 자신의 ‘새로 태어난 젊은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볼 수가 없었다.

그는 아직 피가 제대로 돌지 않아 무거운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부관이 부축을 해 주었지만 그는 괜찮다며 손을 저었다.

“아직 내가 여단장 맞나?”

사카의 물음에 부관이 정색을 하며 웃음을 지었다.

“물론입니다.”

부관이 웃으며 사카의 어깨에 박혀 있는 여단장의 계급장을 가리켰다. 사카는 그제야 안도하며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대신관님께서 가장 믿는 게 누구겠습니까.”

부관의 아첨 섞인 말에도 사카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코런덤들에게 죽음은 기대되는 이벤트이면서 한편으로는 떨리는 심판이기도 했다. 그동안 이루어낸 공적과 충성도에 따라 때로는 상태가 나쁜 몸에서 깨어나기도 했고, ‘스스로 단련하며 어른으로 키워내야 하는’ 어린 상태의 몸에서 깨어나거나, 심지어는 기억 자체가 말소되어버리는 최악의 처분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다른 부대원들은 다 일어났습니다. 먼저 깨어나신 2중대장님께서 일단 지휘를 하고 계십니다.”

사카가 얼굴을 찡그렸다. 여단장인 그가 카렐과 수나를 공격하다가 ‘제일 늦게 죽었으니’ 제일 늦게 일어난 것도 당연했다.

그는 다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조금 전까지 화재와 이런저런 소동으로 난리통이던 항구는 코런덤들이 이곳 치안군들을 모조리 몰살시키고 다시 조용해진 상태였다.

화재는 항구 군데군데, 그리고 항구와 가까운 시가지에서 여전히 진행형이었다. 코런덤들도 불을 끄는 소방대원들은 더 이상 건드리지 않았지만 항구를 지키는 치안군들은 남김없이 시체로 만들어버린 후였다.

하지만 어쨌든 지금 당장은 코런덤들이 항구를 장악한 상태였다.

“불이 난 창고에 몸을 두었던 부대는 무사하냐?”

“특무대와 1중대 2백 정도는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사카가 다시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베흔이 창고에 불을 질러버린 덕분에 사오시안트를 휘저어야 할 전력의 5분의 1, 그것도 가장 최정예 병력의 절반이 눈도 떠 보지 못한 채 잿더미로 변해버린 모양이었다.

사카는 할룩스가 울리고 있는 것을 그제야 알아챘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는 얼른 자리에 꿇어앉으며 기계를 작동시켰다.

“이 비천한 종, 하사해 주신 새 몸에서 이제야 깼습니다.”

그는 아스탈의 형상 앞에 조용히 머리를 조아렸다.

“마지막까지 용감하게 싸웠더군.”

아스탈이 먼저 웃음을 지었지만 이 무뚝뚝한 무장은 여전히 굳은 표정이었다.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이 종의 잘못이 큽니다.”

“됐어, 됐어, 먼저 앞서갈 것 없다.”

아스탈은 자신의 칭찬에도 별 반응이 없는 그의 모습에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특무대와 1중대 잔여 병력 3백은 내가 데리고 별궁으로 가는 중이다. 내가 별궁에서 연합군 쪽 황제 놈과 지도부를 처리할 참이다. 2, 3중대 5백은 항구에 놔뒀으니 네가 이끌도록 해.”

“아케메니아에서 깬 4, 5중대의 임무는 어찌되었습니까?”

“별로 좋지 않다.”

아스탈이 짧게 대답하며 더 이상의 언급을 피했다.

“그곳 사정은 네 신경 쓸 일이 아니니 넌 여기서 저 잡종을 끝내면 된다.”

사카가 순간 눈을 부릅떴다. 꽉 쥔 그의 손에 어느새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다시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항구는 장악했으니 적당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라.”

“……카렐 그자의 후방에 상륙하라는 말씀이십니까?”

“먼저 알아채 주니 편하군.”

아스탈이 히죽거리며 대꾸했다.

“방금 상륙한 슈로 기사단이 자기네 황제 후방을 지키지 않고 바로 성으로 돌진한 모양이다. 그렇다면 네가 조금 전 돌진했던 그 해안은 지금 텅 비어있는 상태다. 이제 내가 더 이상 설명해 줄 필요는 없겠지?”

“충분합니다.”

아스탈이 바닥에 이마를 가져가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번엔 반드시 그자의 머리를 가져오겠습니다.”

사카는 조금 전 카렐의 손에 말뚝이 박혔던 어깨에서 정말로 뻐근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카렐에게 마지막을 했던 한 마디, ‘다시 볼 거다’라는 한 마디를 정말로 실현시킬 수 있게 된 데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 같았다.

항구에서 코런덤들을 떼로 불태워 죽인 베흔이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항구를 지키던 아리아노의 남편 니콜라프 경도 죽고, 그가 이끌던 치안군들도 무기력하게 몰살당하면서 항구 쪽은 일단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베흔의 휘하에는 가디언 4명―그나마 한 명은 큰 부상을 입었고 ―과 구르베스가 데려온 크바르나 헤네티 20명뿐이었다. 그리고 베흔 자신도 등에 큰 부상을 입어 한 팔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

어쨌든,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사오시안트 별궁으로 되돌아가 그곳을 장악하고 있는 쿠베와 쿠마르의 수하들을 제압하는 것뿐이었다. 아리아노가 숨어 들어왔던 것처럼 철조망으로 월담을 해 항구를 빠져나온 그는 민간인의 차 몇 대를 강제로 빼앗아 타고 일행들 모두를 태웠다.

“빨리 가, 사교도 놈들이 별궁을 차지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들어가야 하니까.”

베흔이 운전대를 잡은 가디언에게 신경질적으로 명령했다.

화재로 피해를 입은 민간인들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이번 화재가 베흔에게는 꽤 유용했다. 항구 주변에 운집해 소동을 벌이던 민간인들이 화재에 놀라 뿔뿔이 흩어진 덕분에 꽉 막혔던 도로도 이제 조금 숨통이 트인 상태였다.

“옷에 묻은 피 좀 어떻게 가려 봐요. 이 꼴로 별궁 안을 어떻게 돌아다니려고요?”

별 생각 없이 차창 밖을 내다보던 베흔은 아리아노가 등의 상처에서 피를 닦아내는 느낌에 악 소리를 내며 몸을 움츠렸다.

“엄살 그만해요, 베흔.”

아리아노가 퉁명스레 쏘아붙이며 이 덩치 큰 남자의 운동장같이 넓적한 맨 등짝을 손바닥으로 짝 후려쳤다. 남편의 죽음이라는 끔찍한 현실 앞에서도 그는 최소한 겉으로는 그늘을 드러내지 않으려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베흔도 멀어지는 항구를 쳐다보며 몰래 눈물을 감추던 아리아노의 모습을 보았지만 일단은 모른 척했다.

“지금 이 상처가 엄살 같소?”

베흔이 기가 막혀 물었다. 사실 이 정도면 보통 사람이었다면 이미 사경을 헤매고 있었을 정도의 중상이었다.

“밴드로 붙여놨는데 내가 알 게 뭐요. 젠장, 여긴 안 붙였네.”

아리아노는 크바르나 사관이 건네준 응급용 밴드를 그의 작은 상처들에 붙이고는 다시 꽉 눌렀다. 베흔이 차창을 짚으며 다시 신음소리를 냈지만 아리아노는 조금만 참으라는 입 발린 위로 대신 등짝을 다시 때리며 작은 술병을 불쑥 내밀었다.

“황소만한 사내가 시끄럽기는.”

“허, 경이었다면 이미 하얗게 되어서 땅바닥에 누워있었을 거요.”

베흔은 술을 꿀꺽 삼키고는 병을 다시 돌려주었다. 아리아노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이 오랜 친구의 시선에 대놓고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도 술을 한 모금 꿀꺽 삼켰다. 그는 술병을 꼭 잠그며 베흔의 시선을 피해버렸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말아요. 난 괜찮으니까.”

“내가 어떻게 쳐다봤길래요.”

베흔이 벗었던 셔츠를 다시 챙겨 입으며 그의 핀잔을 슬그머니 넘겼다.

아리아노가 술병을 품에 넣으며 다시 물었다.

“그런데 우리가 별궁에 가면 무슨 대단한 수라도 생기는 거요? 밖에서 싸움은 일방적으로 펼쳐질 게 뻔한데.”

“유평황제가 사오시안트 별궁을 무슨 생각으로 지었는지는 알지 않소?”

아리아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야 황도를 빼앗겼을 때 피난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로…….”

“그런데 이런 길쭉한 반도 끄트머리 해안가에 도시를 둔다는 건 수비하기 쉽다는 장점도 있지만 일단 포위를 당하고, 설상가상으로 제해권까지 빼앗겼다면 빠져나올 수 없는 구렁텅이가 될 수도 있다는 게 흠이지.”

“그래서 별궁을 저 모양으로 희한하게 만든 거 아닙니까.”

아리아노가 멀리 어둠 속에서 희미한 실루엣만 보이는 사오시안트 별궁을 가리켰다. 육면체의 멋대가리 없고 육중한 별궁은 바다 위에 불쑥 올라와 있는 기둥 같은 높고 아찔한 바위 위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렇다보니 육지와 연결된 통로는 바다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 하나가 유일했다.

“별궁만으로도 난공불락의 요새가 될 수는 있겠지만 그건 이미 성벽을 돌파당하고 도시까지 장악당한 후의 이야기죠. 그런데 보다시피, 저 다리 하나로는 진입하는 공격도 어렵지만 별궁 쪽에서의 반격도 어렵죠.”

“그러니까 결론부터 말해요. 별궁에 다 와 가니까.”

성질 급한 아리아노가 버럭 짜증을 냈다. 별궁으로 접어드는 다리와 그 앞의 근위대 검문소가 손에 잡힐 듯 가까워져 있었다.

“도시가 점령당하고 별궁만 독야청청 살아 버티는 최악의 상황에서 황제를 구하려는 군대가 외부에서 온다면 어떻게 하겠소? 그네들도 점령군과 성벽을 놓고 죽어라 공성전을 해야겠소?”

베흔이 갑자기 아리아노에게 코끝이 닿을 듯 가까이 들이댔다.

“그, 그런데요?”

“저 별궁의 방어시설을 총괄 설계한 게 나요.”

“……그래서요?”

아리아노는 베흔의 피 냄새 섞인 숨결에 깜짝 놀라 뒤로 움찔거렸다.

“황제의 은밀한 처소에 사오시안트 성벽 일부에 치명적인 피해를 줄 수 있는 장치가 되어 있다면 믿겠소?”

베흔이 이를 살짝 드러내며 웃었다. 아리아노는 그의 웃음에서 묘한 살벌함을 느꼈고, 그의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그리고 작업이 끝나고 그 기술자들을 모조리 죽여서 이 바다에 던져버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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