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49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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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아노가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설마 그때…….”
당시 황실의 고위 법무관이었던 아리아노는 그때의 일을 바로 기억해 냈다. 멀쩡한 민간인을 정당한 재판도 없이 죽여 버린 황제의 처사에 가장 크게 반발했던 것이 그를 비롯한 법무부의 일선 법무관들이었다.
“생각해 보니 그때 경하고 어지간히 싸웠었지.”
베흔이 아리아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사실을 다 말해줄 수 없던 사정을 이해해 주시구려. 그 양반 그래도 나중에 유가족들은 뒤로 다 거둬주었으니까.”
“그럼 성벽이 뚫리면 동맹군이…….”
“조카 릴라크가 선봉장으로 들어온다고 하니 오랜만에 한 번 안아주시구려.”
베흔의 넉살에 아리아노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일행이 탄 차는 별궁 쪽으로 넘어가는 다리 앞, 근위대 검문소에 천천히 접어들었다. 검문소 앞에는 푸른색 제복 차림에 신분증을 가슴에 단 30여명의 사람들이 미리 대기 중이었다.
“법무부 수사관들?”
베흔의 물음에 아리아노가 짧게 대답하며 차창을 열었다.
“나도 아랫사람 없는 건 아니라오.”
검문소 앞에서 큰 빗자루로 바닥을 쓸고 있던 근위대 병사가 아리아노의 모습에 정색을 하며 경례를 올렸다.
“라자루스 법무대신님?”
경비대장 가디언이 초소에서 허겁지겁 달려나왔다. 그는 초소를 포위하듯 빙 둘러싸고 있는 30여명의 ‘법무부 수사관들’ 눈치를 힐끔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연락도 없이 웬일이십니까? 차림새가 왜 이러십니까?”
“아니, 대신이 궁에 출근한 게 뭐가 이상해서? 빌어먹을 민간인들이 도로를 꽉 채우고 있다보니 이 꼴이 되었잖나.”
짜증스런 표정의 아리아노가 다리 입구를 막고 있는 큰 철문을 열라고 손짓했다.
“그, 그게…….”
경비대장이 잠시 머뭇거렸다. 급히 초소로 돌아간 그는 다리를 막고 있는 철문을 여전히 내린 채 병사들과 무어라 귀엣말을 주고받는 모습이었다.
“입 모양을 보니 누가 경을 ‘집으로 데려가라고’ 한 모양인데.”
뒤에 숨어있던 베흔이 작은 소리로 귀띔을 해 주었다.
“암살수 경력이 쓸모는 있구려, 베흔?”
아리아노가 갑자기 차 문을 열고 내려서서는 초소에 성큼성큼 다가갔다. 어딘가로 연락을 취하려던 경비대장이 그가 다가오는 기척에 기겁을 하며 할룩스를 껐다.
“당장 문 안 열고 뭐해! 법무대신의 말이 말 같지 않냐!”
아리아노의 호통에 궁지에 몰린 경비대장이 법무부 수사관들의 눈치를 다시 보았다. 아리아노의 직속조직인 법무부 수사관들도 민간의 범법자들을 재판하고 구금하는 준(準) 군사조직었고 가볍지만 나름대로 무장까지 갖추고 있었다. ‘원칙적으로는’ 민간인인 아리아노를 체포할 권한도 그들에게 있지 근위대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윗선에서 대신님을 댁으로 모시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경비대장이 헛기침을 하며 병사들에게 아리아노를 붙잡으라고 눈짓을 보냈다. 그 모습에 놀란 수사관들이 양쪽 사이를 얼른 몸으로 막아섰다.
“무슨 말이냐? 윗선? 누가 그 따위 명령을 해?”
경비대장은 차마 대답을 못 한 채 머뭇거렸다. 자칫 잘못 처신했다가는 별궁 내에서 법무부 무장요원들과 근위대와 충돌이 벌어질 판이었다. 물론 싸움의 결과야 보나마나겠지만 전방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이곳에서 소요사태를 일으키는 것이 현명한 처사는 아니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팽팽한 긴장감이 막 폭발하려는 순간, 아리아노가 재빨리 상황을 추슬렀다. ‘일을 크게 벌여’ 난처해지는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 집에 돌아갈 상황도 아니고 그럴 생각도 없다. 별궁 안의 내 집무실에 갈 참이니 너희 근위대 사람이 와서 내 옆을 지켜도 좋아.”
“예?”
경비대장이 당혹스런 얼굴로 코를 만지작거렸다. 따져보면 장소만 바뀐 셈이지 아리아노를 억류할 수 있다는 건 마찬가지였다.
“날 잡아두라고 하던 의자에 묶어두라고 하건 따를 테니까 당장 문이나 열어.”
“윗선에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초소로 돌아가 상부에 무어라 연락을 하고 나온 경비대장이 다시 헛기침을 하며 알렸다.
“일단 들어가십시오. 우리 보안국 요원들이 맞아드릴 겁니다. 차에는 누가 타고 있습니까?”
경비대장이 아리아노의 차를 따라온 대형차량 안을 미심쩍은 얼굴로 들여다보았다. 차의 짐칸 안에는 차가운 표정의 무장한 남자들 20여명이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우리 사복 수사관들이다. 바깥이 난리통이고 치안마비 상태인데 저놈들이라도 데리고 다녀야 할 것 아냐. 네 말대로 잡혀있어 준다는데도 빨리 문 안 열 거냐?”
아리아노는 의심어린 표정을 짓는 가디언에게 삿대질을 하며 화를 버럭 냈다. 발끈하는 그의 성미를 잘 아는 경비대장은 일단 무안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저게 뭐냐?”
차에 다시 오르려던 그는 빗자루질을 하고 있는 병사를 가리켰다. 평소 미끄러져 넘어질 정도로 맨들거리고 깨끗하던 대리석 바닥이 젖은 발자국과 더러운 얼룩으로 엉망이었다.
“명색이 궁 앞이 왜 이리 지저분해? 비도 안 왔는데?”
“모르겠습니다. 방금 들어간 보안국 병력의 발에 묻어있었습니다. 잔뜩 젖은 발에 묻히고 와서 이 이 지경을 해 놨지 뭡니까……보안국장님 앞세우고 들어와서 찍소리도 못했습니다.”
경비대장이 엉망이 되어 있는 다리 위를 가리키며 볼멘소리를 했다.
“엑.”
무어라 더 말하려던 그는 바닥의 물을 손가락으로 ‘찍어먹어 보는’ 법무대신의 모습에 기겁을 했다.
“더럽습니다. 대신님.”
“짜군.”
“네?”
경비대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혹시 그놈들 은색 갑옷에 허리춤에는 석궁 달고 있지 않았나?”
“네. 파란색 망토도 두르고 있었습니다. 3백 정도 되어 보이던데요. 보안국 요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맙소사, 한발 늦었구나.”
아리아노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육중한 별궁을 올려보았다. 그는 허겁지겁 차에 뛰어올라서는 운전을 하는 가디언을 재촉했다.
“빨리 들어가. 시간이 없다.”
“잠깐, 지금 인질이 되겠다는 거요?”
이곳에서 아리아노와 경비대장의 대화를 지켜본 베흔이 그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설마 장모를 죽이기야 할까.”
“감시할 거라고 들은 것 같은데?”
“이봐요, 베흔. 무슨 생각하는지는 알겠는데 법무부 안에는 내 직속 수사관들이 버글거리고 있어요. 내 거기서 얌전히 울고 짜고 하면서 주의를 끌고 있을 테니 일처리는 혼자 알아서 하시구려.”
아리아노는 베흔의 손을 쳐내버리고는 운전하는 가디언을 다시 재촉했다.
“빨리 들어가라니까! 벌써 그 좀비 놈들이 3백이나 안에 들어간 것 같으니.”
“예?”
“아까 항구에서 불을 끈다고 소방대가 바닷물을 끌어다가 뿌려서 바닥이 바닷물 천지였던 거 기억 안 나냐!”
가디언이 무심결에 자신의 발을 확인해 보았다. 항구 전체가 소방대가 무차별로 뿌린 바닷물 때문에 신발창까지 잠길 정도로 물이 그득 들어차 있는데다가 창고에서 날린 재로 아수라장이었다. 그런 곳에서 왔다보니 그의 신발바닥 또한 엉망이 되어 있었다.
“빌어먹을, 그놈이 선수를 쳤군.”
베흔이 망토로 얼굴을 가리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새 차는 다리를 건너 별궁이 있는 ‘바위 위’ 절벽에 접어들었다.
비슷한 시각, 2천의 보병대를 이끌고 사오시안트 항구에 도착한 제롬은 허탈함에 기가 막혀 고개를 젓고 말았다. 항구는 여전히 불바다였고 정박되어 있던 배는 물론이고 웬만한 기반시설까지 모조리 불타고 있었다. 그리고 항구를 이 꼴로 만들어놓은 ‘정체불명의 적’들은 배를 타고 막 빠져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제기랄.”
내심 구세주가 되고 싶었던 제롬은 닭 쫓던 개가 되어버렸다는 치욕감에 이를 갈았지만 이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에게 앞에 남은 건 소방대의 필사적인 작업도 무색하게 걷잡을 수 없이 타고 있는 항구와 길 건너편의 시장, 그리고 사방에서 ‘제발 도와달라’며 애원하는 헤아릴 수 없는 민간인뿐이었다.
“그런데, 항구만 이 꼴을 만들고 바로 도망칠 거면 도대체 뭐 하러 들어왔던 거지?”
상식 밖으로 움직이는 적의 모습에 제롬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저들이 제대로 정신이 박힌 적군이라면 ‘적의 후방’인 여기서 끝까지 저항하며 소요사태를 계속 일으키는 것이 정상이지 이렇게 쉽사리 도망가 버릴 리가 없었다.
"뭔가 이가 빠진 것 같은데?
혼란에 빠진 제롬에게 참모 한 명이 다급히 달려와 말을 전했다.
“이용할 수 있는 배가 없습니다. 무동력선 몇 척과 작은 어선 정도가 고작입니다. 놈들이 자기들 이용할 것 빼고는 다 태워버렸습니다. 2천이나 되는 대군이 탈 배는 없습니다.”
그에 뒤이어 항구 곳곳을 둘러보고 온 장교들이 속속 상황을 전했지만 모두 다 똑같았다.
“배가 있어야 여기서 나가서 놈들 후방을 칠 것 아니냐!”
제롬이 화를 냈지만 어차피 해결책이 없었다. 이곳에서 배를 타고 나가 카렐의 후방을 친다는 야심찬 계획과 똑같은 속셈을 지금 배를 타고 나간 자들도 머릿속에 담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제롬이 알 리가 없었다.
지금은 적대적인 2세력이 아닌, 서로 이해가 얽힌 3세력이 동시에 싸우는 전대미문의 희한한 상황이라는 사실을 그는 아직 알지 못했다.
“근위대에 연락해서 가까운 다른 항구에서라도 배를 불러와. 근사한 배 필요 없으니까 아무 거나 탈 수만 있으면 돼! 그러니까…….”
“제후님, 여기 치안군 생존자가 있습니다! 급한 보고가 있다고 합니다!”
정신없이 명령을 내리던 제롬은 병사들이 시체 무더기에서 구출해 온 한 치안군 사관을 힐끔 돌아보았다. 이곳에 널브러진 많은 치안군들처럼 그도 급소인 목에 큰 상처를 입고 있었지만 천운으로 목숨만은 건진 모양이었다.
“그 몸으로 치료나 받고 있지 웬 참견이냐?”
“아, 압니다만 중요해서…….”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그 사관은 짜증을 내는 제롬에게 헐떡이며 보고를 올렸다.
“여길 공격한 적군 중 일부가……해안도로를 타고 벼, 별궁이 있는 동북쪽으로 가는 걸……봤습니다. ……제대로는 못 봤지만 3, 4백은 되는 것 같았습니다.”
사관이 피를 삼키며 더러워진 손으로 별궁 쪽을 가리켰다.
“수백이나?”
제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포로도 아닌, 아군 사관의 보고라면 엉터리일 리는 없었다.
“사실이 아니면 네놈 목을 뽑아버릴 테다. 정확히 말해라. 적군이 맞나?”
“틀림없습니다. 저기 세워 둔 저희 부대 병력수송차를 타고 갔습니다. 분명합니다.”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그럼 그렇지.”
제롬이 바다 위로 멀어지는 배를 보며 턱을 만지작거렸다.
“저 배를 타고 간 놈들은 우리 주의를 끌려는 눈속임인 게 분명해.”
그는 자신이 적의 속셈을 눈치 챘다는 생각에 내심 뿌듯해하며 얼른 뒤로 돌아섰다.
“1천은 여기 남아 출발준비를 하고 나머지 1천은 나와 함께 별궁으로 간다!”
내심 크게 긴장을 하며 이곳까지 왔던 남부보병들은 다시 온 길을 돌아가라는 명령에 하나같이 허탈한 표정으로 발길을 돌렸다.
제롬은 다시 말에 뛰어오르며 이곳에 남을 대대장에게 지시했다.
“별궁으로 간 놈들만 잡아내면 바로 돌아올 테니 그때까지 배를 수배해 놓고 출항준비 마치고 있어. 알겠냐?”
“알겠습니다.”
제롬은 내심 콧노래를 부르며 별궁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어쩌다보니 ‘적은 적대로 못 잡고’ 이리저리 꽁무니만 쫓고 있었지만 이번만은 정말 큰 대어를 건질 수 있다는 기대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 대어가 하나가 아니고 자신의 아버지, 그리고 한때 제국을 지배했던 세력의 숨겨진 지도자까지 둘이나 된다는 사실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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