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54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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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성벽을 넘어 사오시안트 시내에 들어갈 차례를 기다리던 동맹군 기병들은 한참 교전중인 본대 쪽에서 달려오는 한 무리의 기병들을 발견했다. 소속을 나타내는 깃발도 없는데다가 지원군이라고 볼 만한 대규모 병력도 아니었고, 숫자도 고작해야 십여 기가 전부였다.
“소속이 어디냐?”
후미 부대의 기병들이 그들을 막아서며 얼른 창을 겨누었다. 그 ‘정체불명의 무리’ 선두에는 자그만 체구의 한 사람이 온몸을 망토로 가린 채 말에 올라 있었다.
“적은 아니니 창은 좀 치워주겠는가.”
나지막한 여자 목소리와 함께 그 사람이 망토와 히잡을 걷고 하얀 얼굴, 크고 새파란 눈동자를 살짝 드러냈다.
“이제 되었나?”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기병들이 기겁을 하며 얼른 창을 거두었다. 사실 그들로서는 황제나 볼 수 있는 이 ‘절세 미녀’의 맨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다는 것부터가 보통 일이 아니었다.
“화, 황비 전하께서 웬일이십니까?”
연락을 받은 3연대장이 선봉에서 허겁지겁 되돌아와 그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네페티가 얼른 그를 말리며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제발 소란 떨지 말게. 내 황실 사람들을 대표해 사오시안트 궁에 조용히 들어가려는 것뿐이니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나.”
“예?……상께서 명하신 겁니까?”
연대장이 얼른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네페티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군령이 엄한데 설마 전장에서 상의 윤허도 없이 멋대로 위치를 이탈했겠는가.”
“그저……확인차 여쭌 것이었사옵니다.”
연대장이 다시 헛기침을 했다. 서부 최고제후 자격으로 이번 원정군에 참가했던 네페티는 동맹군 우군의 예비대로 대기 중인 5천의 장갑보병대와 함께 있던 참이었다. 그가 딱히 무장으로서 능력을 지닌 건 아니었지만 이후 ‘황제를 위해 참전했던 서부최고제후’로서 명분을 만들어주기 위해 황제가 특별히 데려왔던 참이었다.
어쨌든 황제의 윤허까지 받았다는 말에 연대장도 그 이상 뭐라 언급할 수가 없었다.
“하오나……사오시안트 시내는 폐하께서 황실의 영역으로 선포하셨습니다.”
연대장이 네페티를 따라온 서부기병들을 힐끔 돌아보았다. 황비인 네페티는 몰라도 제후군이 시내에 따라 들어온다는 건 정치적으로도 자칫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민감한 사안이었다.
“아, 그저 호위병들일 뿐이네.”
눈치를 챈 네페티는 자신을 따라온 서부 근위기병들에게 본대로 돌아가라며 눈짓을 보냈다.
“되었는가?”
네페티가 망토 안쪽을 벌려보였다. 그가 지닌 것이라고는 선한 생김새에 그다지 안 어울리는 중갑옷에 짤막한 칼 한 자루가 고작이었다.
“난 황비의 신분이니 이제부터는 황상의 기병인 그대들이 지켜주게나.”
절세 미녀의 매혹적인 눈웃음에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린 연대장은 이 사실을 감히 상부에 확인해 본다거나 할 엄두도 낼 수가 없었다. 일순간 얼굴이 빨개진 연대장이 다시 헛기침을 하며 말을 돌렸다.
“아, 알겠사옵니다. 위험하오니 제 곁에서 절대 떨어지지 마시옵소서.”
연대장은 휘하 근위기병들에게 네페티를 지키라 손짓하고는 본대를 뒤따라 성문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기병들 사이에 조용히 자리한 네페티도 그를 따라 폐허가 된 성벽과 성문을 지나 사오시안트 시내에 천천히 접어들었다.
네페티는 앞을 못 보는 황제가 아직까지도 적들과 피 말리는 접전을 벌이고 있는 해안가의 좌군 쪽을 힐끔 돌아보았다.
“제발,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매캐한 연기, 짙은 흙먼지와 피냄새를 느낀 그는 입술을 꽉 깨물며 양 손을 맞쥐었다.
“미워도 제 자식들입니다…….”
퍽이나 오랜만에 ‘누군가의 어머니’로 돌아간 네페티는 자신의 두 아들들이 모두 있는 사오시안트 별궁을 올려보며 무섭고 떨리는 가슴을 애써 달랬다. 자신의 목숨, 혹은 정치생명까지도 거는 일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무너지는 성벽 너머에 자식들을 두고 그저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당연히 황제의 허락 따위는 없었다.
1천의 보병들을 데리고 항구에서 사오시안트 별궁으로 황급히 돌아온 제롬은 별궁의 동력이 모두 끊겨있는 모습에 깜짝 놀랐다. 그는 정말 큰일이 벌어진 것이라 생각하고 호들갑을 떨며 달려왔지만 별궁이 외부에서 공격을 받은 흔적은 전혀 없었고, 초소를 지키는 근위대 장병들도 ‘이놈들이 왜 왔나’라는 식으로 멀뚱하게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제어실에서 제너레이터가 고장났다고 합니다. 보고에 따르면 다른 문제는 없는 것 같습니다.”
제롬의 눈에도 익은 출입문 초소의 수문장 가디언이 이유를 따져 묻는 그에게 태연하게 대답했다.
“보조동력까지 다 고장났다고?”
“보안국에서 그리 알려왔으니 맞을 겁니다.”
제롬이 언성을 높였지만 수문장의 대답은 시시할 정도였다. 또다시 헛걸음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진 제롬이 다시 따져 물었다.
“여길 공격한 적도 없고?”
“공격이 있었으면 수문장인 제가 이렇게 몸 성히 서있겠습니까.”
수문장의 천연덕스런 대답에 제롬은 일순간 민망해질 지경이었다. 잔뜩 긴장을 하고 이곳까지 온 남부장병들도 ‘도대체 여기까지 왜 온 거지?’하는 식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별궁으로 접어드는 널찍한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제후군 병력은 별궁 안에는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별궁 안쪽은 우리 근위대와 보안국이 지킵니다.”
별궁에 들어서는 남부제후군 병사들을 보며 자존심이 상한 근위대 수문장이 결국 입을 열었다.
“알아. 궁 바깥에만 있으면 되잖아.”
제롬이 퉁명스레 대답했다.
그때, 어딘가에서 연락을 받은 수문장이 할룩스를 받아들었다.
“에……예? 정말입니까?”
통화를 하는 수문장의 얼굴이 조금씩 창백해지고 있는 것을 제롬도 바로 눈치 챘다.
“무슨 일이냐?”
“별궁 내부에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황상께서 계신 보안구역 내에 적이 침입했다고 합니다.”
수문장은 초소 안에 있던 장병들에게 빨리 나오라며 손짓을 보냈다. 기겁을 한 제롬이 별궁을 올려보며 급히 물었다.
“뭐? 수우……아니, 황상께선 무사하신가!”
“지금 알아보는 중입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같은 순간, 놀랄 일은 제롬에게도 동시에 벌어졌다. 멍한 얼굴로 별궁과 성벽을 번갈아 쳐다보던 제롬은 성벽의 수비탑과 성벽이 갑자기 무너지는 황당한 광경까지도 볼 수 있었다.
“뭐야? 저건 또 뭐냐?”
제롬은 어둠 속을 올려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할 말조차 잊은 채 우두커니 서 있던 그는 허겁지겁 할룩스를 켜고 성벽을 지키는 쿠베를 불러냈다.
“이봐! 거기 성벽에 도대체 무슨 일이냐! 내가 잘못 본 거냐?”
제롬이 바락바락 악을 썼지만 놀라고 당황했기는 쿠베도 마찬가지, 아니 그가 더 절박한 처지였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공격도 없이 성벽이 그냥 무너졌습니다! 수비병들도 수백은 몰살당한 것 같습니다!”
눈앞이 캄캄해진 제롬은 쿠베를 몰아붙일 여유조차도 없었다. 일순간 절망에 빠진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곳 사오시안트를 버리고 황제령에서 ‘탈출’하는 최악의 시나리오까지도 맴돌고 있었다. 그는 다시 쿠베에게 물었다.
“설마 적이 성벽을 넘어오고 있는 건 아니겠지?”
“……적 기병 5천 정도가 들어갈 것 같습니다.”
“제길.”
제롬이 자리를 빙빙 맴돌며 턱을 만지작거렸다.
쿠베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근위대 예비부대를 그곳으로 보냈습니다. 시간상 적 기병이 진입하는 걸 차단하지는 못할 것 같지만 일단 무너진 성벽 부분을 탈환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후속병력이 또 오면 어쩌고?”
제롬이 버럭 화를 냈지만 쿠베가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다.
“지금 전방의 해안가 전투 상황은 우리에게 유리합니다. 잘하면 카렐 놈을 죽일 수도 있을 테고요. 어차피 적에겐 기병 말고는 더 들여보낼 여유병력이 없습니다. 우리 근위대가 무너진 성벽을 재차 장악할 테니 각하께서 별궁을 차단하고 시간만 끌어주십시오.”
“거기서 막는 게 가능한 거야?”
“좋게만 보면 적 기병들을 함정에 끌어들인 것인지도 모릅니다.”
쿠베는 애써 상황을 긍정적으로 해석하기로 했다. 그런 그에게 제롬이 짜증스레 대꾸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거기서 확실히 해, 별궁은 내가 책임지고 지킬 테니까!”
제롬은 일단 성벽은 잊기로 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별궁 안쪽이 습격을 받았다는 중요한 사실을 깜박 잊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상부와 통화중인 수문장 가디언의 멱살을 확 붙들었다.
“별궁 내부도 공격을 당했다니 제대로 좀 설명해 봐!”
“아,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보안국과 통화가 되지 않습니다.”
그때, 별궁 쪽에서 남부 장교 한 명과 ‘보안국 간부’ 한 명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각하! 각하!”
“바쁘니까 나중에 말해!”
“급한 일입니다!”
그 장교는 말리는 근위병들을 뿌리치고 황급히 제롬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눈이 휘둥그레진 제롬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보안국 요원들이 궁 안에서 갑자기 리프트 케이블을 걸고 뛰어내리길래 확인해 봤더니 위층에서 황상을 구출해 왔다고 합니다.”
“엉?”
제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깜짝 놀란 그에게 이번엔 보안국 간부 차림새의 사람이 귀엣말로 알렸다.
“이 장교가 자꾸 황상을 확인시켜 달라고 해서 낭패를 겪고 있습니다. 일단 차 안에 모셨습니다.”
그 간부가 다리 건너 웬 차 옆에서 남부 병사들의 감시를 받고 있는 ‘보안국 요원’들을 가리켰다.
“빌어먹을, 아무도 못 보게 해! 의사한테도 데려가지 말고!”
수우의 현재 상태를 떠올린 제롬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그동안 황제가 자신의 손에 비참한 꼴로 억류 중이었다는 사실을 아랫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혹은 그와 대화라도 나눈다면 정말 큰일 날 일이었다. 그는 남부 장교에게 버럭 화를 냈다.
“상을 지키는 건 보안국이니 괜히 너희가 참견하지 말라고. 상은 보안국에서 계속 지키게 해 둬.”
눈앞의 ‘보안국 간부’의 정체를 전혀 모르는 제롬은 수우를 구해왔다는 데 내심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바로 이들이 성 내부를 습격하고 수우를 납치한 주범들이었지만 그 사실을 제롬이 알 리가 없었다.
그는 보안국 요원을 붙들고 다시 물었다.
“그나저나, 궁 내부를 도대체 누가 습격한 거냐?”
“적 가디언과 소수의 특수부대인 것 같습니다. 정예부대들이 궁 상층부의 보안구역을 온통 쑥대밭을 만들어놓고 있습니다. 숫자는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그 간부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새빨간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이제야 알겠군. 항구에서 도망간 놈들이 분명해.”
제롬으로서는 이 가짜 간부의 거짓보고에 전혀 엉뚱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간부가 잔뜩 눈치를 보는 척 작은 소리로 말했다.
“이런 말씀 드리기 뭣하지만……법무대신 아리아노 경께서 각하를 저버리신 것 같습니다. 법무부 놈들도 적과 내통해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놈들 손에 우리 국장님도 피살당하셨습니다.”
“뭐, 뭐라고?”
제롬이 입을 가렸다. 장인의 갑작스런 죽음부터 시작해 아리아노 경의 행동은 지금까지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조금 전까지는 장모를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마구 화를 냈지만 이젠 그도 더 이상 무조건 장모 편만 들 수도 없었다.
그런 그에게 간부가 또다시 날벼락 같은 보고를 올렸다.
“믿으실지 모르지만 전 근위대장인 베흔과 비슷한 차림새를 한 자를 보았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그자가 아리아노 경과 함께 다니고 있습니다.”
‘베흔’이라는 말에 아찔해진 제롬의 얼굴 근육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두려워하는 자신의 속내를 필사적으로 감추려 애쓰며 짐짓 태연하게 대답했다.
“황상을 구해냈으니 일단은 됐다. 보안국 병력을 모두 동원해서 적들을 잡아내. 별궁 외부는 근위대 병력과 우리 남부보병들이 막을 테니까.”
제롬이 이를 갈았다. 그에게는 별궁 내부의 적, 그리고 성벽을 넘어오는 기병들이라는 두 적이 있는 셈이었다. 양쪽으로 싸워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아주 절망적인 건 아니었다.
사오시안트 별궁은 폭 10스타디아(1.5㎞) 정도의 시가지 돌출부에서 시작해 마치 깔때기 모양으로 조금씩 좁아져 마지막에는 1스타디아(150m) 정도 폭의 좁은 다리로 연결되어 있었다. 마치 모래시계 같은 구조다보니 가디언 같은 약간의 정예병으로 길목만 틀어막는다면 시가지 쪽에서 별궁에 진입하려는 적은 말 그대로 ‘죽음의 줄’을 설 수밖에 없는 지형이었다.
“충분히 막을 수 있어. 충분히 가능해.”
상황을 대충 파악한 제롬은 별궁 출입문 부근에 집결하는 근위대와 남부보병들을 지켜보며 다시 말에 올랐다.
“해안도로에 적 기병들입니다!”
전방에 나가 있던 척후병이 큰 소리로 알려왔다. 그의 말대로, 큰 깃발을 선두로 긴 꼬리를 이루고 접근해오고 있는 대규모 중장기병대의 실루엣이 어두운 해안가 도로를 따라 희미하게 비치기 시작했다.
물론 그는 저 행렬에 정확히 누가 있는지는 아직 전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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