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56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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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릴라크의 명령에 놀란 건 그의 휘하 무장들도 마찬가지였다.
“저 다리를 부수면 우리도 별궁에 건너갈 수가 없어집니다. 별궁을 점령 못 하게 됩니다.”
“상관없다. 무조건 때려.”
“예?”
“누가 먼저 물러나나 보자고.”
릴라크는 아나콘다를 다루는 가디언에게 재차 손짓을 보냈다. 근위대 출신들로 구성된 작업요원들이 능숙하게 발리스타를 방열하고 다리를 겨누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별궁으로 건너가는 이 짧은 다리는 1스타디아나 되는 큼직한 정사각형 표적이었다. 저 정도면 발리스타를 거의 안 쏘아 본 초보 사역병도 맞출 수 있을 정도였다.
“뭐야? 진짜 쏘는 거야?”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에 제롬과 남부보병들, 8군단 근위대들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들은 다리를 등지고 서 있었고, 다리를 잃는다는 건 이 까마득한 해안 절벽을 등지고 완전히 고립된다는 뜻이었다. 그 상황에서 보병도 아닌, 중장기병들이 힘으로 몰아붙인다면 수천의 장병들이 절벽에서 밀려 떨어져 죽는 건 정해진 수순이었다.
하지만 릴라크 입장에서도 별궁으로의 유일한 진입로인 다리를 공격한다는 건 말 그대로 ‘너 죽고 나 죽자’가 아니라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제후님! 제후님! 뒤로 물러나십시오!”
무장들이 무모하게 전방에 나와 있던 제롬을 서둘러 후방으로 잡아끌었지만 제롬이 그들의 팔을 쳐내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못 쏴, 쏠 리가 없어.”
“쏘든 못 쏘든 일단 물러나십시오!”
“다리를 끊으면 지네들도 못 들어오는데 쏠 리가 있냐고!”
제롬이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고 릴라크를 똑바로 노려보았지만 상황은 그의 믿음처럼 흘러가지는 않았다.
“발사!”
릴라크가 손을 확 내렸다. 땅을 울리는 굉음을 내는 다른 발리스타와는 달리 핑 하는 특유의 짧은 울림이 이 ‘아나콘다’의 특징이었고, 이번도 마찬가지였다.
“온다!”
근위대 8군단의 몇몇 가디언들이 비명처럼 외쳤다. 정체를 감춘 채 공중에 솟구쳐 오른 포격이 눈 한 번 깜짝한 사이 남부보병들의 머리 위를 넘어 다리 위에 화살처럼 내리꽂혔다.
“제기랄! 진짜 쐈어!”
다리 위에 남아있던 예비부대들이 일순간 혼비백산하며 크게 흔들렸지만 정확히 어디로 꽂힐지 알아채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여기!”
근위대에 속한 분대장 가디언 한 명이 병사들에게 소리를 지르며 옆으로 몸을 날렸다. 그 직후, 긴 기둥 같은 육중한 발리스타가 다리 상판을 무섭게 후려쳤다. 부서진 발리스타와 상판의 파편이 바로 옆에 있던 병사들 몇의 살점을 함께 찢어내며 주변을 덮쳤다.
“저년 완전히 미쳤잖아!”
제롬이 놀라 날뛰는 말을 서둘러 진정시키며 다리 뒤쪽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뒷걸음쳤다. 다리를 등지고 포진하고 있거나, 다리 위에 남아있는 거의 2천 가까운 장병들이 공포에 질린 채 제후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다.
“자리를 지킬까요? 아니면…….”
부장의 물음에 제롬은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머뭇거리는 새 또다시 두 번째, 세 번째 발리스타가 계속 떨어지며 대리석으로 고급스럽게 꾸며진 다리를 조금씩 누더기로 만들어갔다.
“다리가 정말 무너지는 건 아니겠지?”
제롬이 바닥을 내려다보며 계속 뒷걸음쳤다. 하지만 그런 그를 놀리듯 또 한 발의 발리타가 이번엔 조금 전 첫 번째 포격이 떨어졌던 옆에 꽂히며 상판을 뻥 뚫어버렸다. 순간 다리가 한 번 출렁거리는 느낌에 보병들이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두 번 연달아 포격을 얻어맞은 곳에는 사람 서너 명은 빠져 들어갈 만큼 큼직한 구멍이 까마득한 바닷물을 향해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물러나야 할지 전진해야 할지 결정해 주십시오!”
보병대 장교들이 필사적으로 결정을 재촉했다. 전방에 선 병사들은 고립될 수 있다는 공포에, 다리 위의 장병들은 이대로 다리와 함께 떨어져 죽을 수 있다는 공포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때, 발리스타가 바닥에 꽂히며 다리가 또다시 크게 출렁거렸다.
“아직은 계속 지켜!”
“제발, 제발, 각하.”
제롬의 고집에 기겁을 한 건 병사들뿐만이 아니었다. 제롬의 곁을 지키는 참모들까지도 창백해진 얼굴로 그의 입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건너편에서는 계속 발리스타를 쏘아대고 있었다.
“어, 어차피 계속은 못 쏴! 우릴 물러나게 하려는 수작이다!”
제롬이 반대편에서 히죽거리고 있는 릴라크를 노려보며 고집을 피웠지만 아랫사람들은 그렇지 못했다.
“차라리 진격령을 주십시오!”
선봉의 보병대 대대장 중 한 명의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 할룩스 너머에서 들어왔다. 이 상태에서 압도적인 전투력을 지닌 기병들에게 보병들이 먼저 전진을 한다는 것도 바보짓이기는 매한가지지만 최소한 다리가 무너지고 떼죽음을 당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떨어져 죽느니 창에 찔려 죽는 게 낫습니다!”
다른 장교가 뒤이어 악을 썼다.
“조금만 더 버티라고!”
제롬이 버럭 역정을 낸 순간, 동시에 또 한 발이 이번엔 제롬이 있는 부근을 정확히 후려쳤다. 튀어 오른 돌덩이 파편이 제롬과 참모진의 머리 위에 우박처럼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다리가 또다시 크게 흔들리며 조인트에서 소름끼치는 마찰음인지 파열음인지가 들려와 연합군의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했다.
“젠장!”
겁을 먹은 제롬이 무심결에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옆에 있던 근위대 장교가 그의 말고삐를 확 붙들었다.
“각하께서 먼저 물러나시면 전방의 보병들이 무너집니다. 함께 퇴각해서 새로 방어선을 짜던지, 아니면 함께 자리를 지키십시오!”
“이놈이…….”
발끈한 제롬의 입에서 욕이 나올 뻔했지만 차마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그때, 별궁 내부를 진압하라며 보내놓은 근위대 쪽에서 다급한 연락이 들어와 제롬의 귀를 때렸다.
“각하! 별궁 내부의 경비대대가 명령에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저희를 들여보내 주지 않겠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제롬이 별궁을 휙 돌아보았다. 조금 전까지 조명이 모두 꺼져 암흑 천지였던 별궁의 창문들에도 하나 둘씩 조명이 들어오고 있었다.
“모르겠습니다! 연합군의 명령에 따르지 않겠다고 합니다!”
할룩스로 대답이 돌아왔지만 굳이 들을 필요도 없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20층 정도의 창문 밖으로 잔뜩 겁에 질린 누군가가 몸을 던지는―결과는 말하나 마나겠지만― 끔찍한 광경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설마 베흔 그놈이…….”
극한까지 몰린 제롬은 눈앞을 위협하는 동맹군 기병과, 등 뒤의 별궁을 번갈아 쳐다보며 잠시 어쩔 줄 몰라 했지만 이젠 그의 선택도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 이미 다리는 사방이 구멍투성이였고, 자리를 미련하게 지켜봤자 남을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바다에서 거칠게 불어오는 밤바람이 조금이라도 거칠어질 때마다 다리가 끼익거리며 불안에 떠는 병사들의 심리까지 뒤흔들었다.
“퇴각! 퇴각! 다리 남쪽으로 물러나서 별궁 정원에 다시 진영을 짜라!”
제롬이 손을 저으며 휘청거리는 다리에서 별궁 쪽으로 허겁지겁 말을 몰았다. 그리고 퇴각령만을 절박하게 기다리고 있던 보병들도 황급히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치킨게임’에서 먼저 도망친 그의 등을 동맹군 기병들이 일제히 내지르는 큰 웃음소리가 마치 비수처럼 찔렀다.
“전진!”
릴라크가 기병들에게 앞을 가리켰다. 중무장한 중장기병들이 도망치는 보병들의 후미를 조이며 다리에 성큼성큼 다가갔다.
“저 개 같은 년, 다시 잡히기만 해 봐라.”
제롬이 등 뒤에서 들려오는 적의 비웃음에서 귀를 닫으며 이를 갈았다. 제네르에게 팔을 잘리고 도망칠 때에 이어 그에게는 가장 치욕스런 순간이었다.
“밀집 정렬해!”
포격을 뚫고 다리에서 도망쳐 나온 제롬의 남부보병대와 근위대는 다리 남쪽의 사오시안트 별궁 정원에 다시 정렬하기 시작했다.
지난 수백 년간 곱게 관리되어 왔던 황실의 곱고 소중한 정원이었지만 절박함에 내몰린 이 수천 명의 군인들에게는 곧 싸움이 벌어질 전장에 불과했다. 꽃도 거의 피어있지 않은 늦겨울의 황량한 꽃밭은 이미 반쯤 이성을 잃은 거친 군인들에 짓밟히며 일순간에 너저분하고 거치적거리는 쓰레기더미가 되어버렸다.
“완전히 갇혔습니다.”
참모 중 한 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이미 얼굴에 식은땀이 맺힌 제롬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참모의 말대로, 제롬과 그를 따르는 2천이 넘는 병력은 별궁이 있는 해안의 높은 바위 위에 꼼짝없이 고립된 셈이었다.
양군 사이에 아직까지는 다리가 놓여 있었지만 이미 누더기가 되어 강한 바닷바람에 끼익거리며 흔들리고 있었다.
“괜찮아, 저놈들도 못 넘어오니까.”
제롬은 말도 안 되는 결론으로 일단 절망에 빠진 부하들을 달래주었다.
“아닙니다! 놈들이 넘어옵니다!”
“뭐?”
제롬은 눈앞의 광경에 기겁을 했다. 이를 단단히 악문 릴라크가 이미 누더기가 된 다리로 서슴없이 말을 들여놓고 있었다.
“다, 단장님, 위험합니다.”
릴라크의 부장들이 이 무모한 단장을 급히 막아서려 했다.
“자신 없는 놈은 따라오지 마라.”
릴라크가 눈에 불을 켜고 말을 재촉했다. 사방이 구멍투성이가 되어버린 다리 상판은 누가 보기에도 위험천만했지만 이미 독기가 오를 대로 오른 그를 막을 수는 없었다. 혼자 앞장서는 그를 쳐다보며 부장들도 서로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기만 했다.
그때, 앞장서는 릴라크를 따라 갈색 말 한 필이 불쑥 다리에 들어섰다. 장군 차림새의 무장도 아닌, 자그만 체구의 한 여자가 그 위에 망토를 걸치고 앉아있었다.
“못 갈 것도 없지.”
입술을 굳게 깨문 황비 네페티는 파란 눈을 가늘게 뜨고는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끼익거리는 다리에 두 번째로 접어들었다. 그가 누구인지를 뒤늦게 깨달은 부장들이 일순간 크게 흔들렸다.
“젠장, 가야지 별 수 있나.”
네페티를 이곳까지 데려온 9연대장이 이를 악물며 그 뒤를 따라 움직였다. 이들을 선두로, 벌벌 떨고 있던 참모진과 기병, 가디언들까지 결국 하나 둘 다리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나콘다는 재정렬한 남부보병대의 머리 위에 다시 발리스타를 쏟아 붓기 시작했다. 까마득한 절벽을 넘어 공중을 날아간 아나콘다는 정원을 밟고 선 제롬과 그 휘하들의 머리 위에 다시 벼락을 쏟아부었다.
“뭐 저런 년이…….”
계속해서 예상을 벗어나는 릴라크의 기행에 당황한 제롬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근위대끼리 맞붙은 저쪽의 상황도 그리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그때, 사오시안트 별궁의 화려한 주출입문이 안팎에서 밀고 당기는 거센 힘싸움의 와중에 통째로 뜯겨나가는 굉음이 들려왔다.
“날 가짜라고 하고 싶은 놈은 뒷담화 까지 말고 이 앞에서 지껄이라고!”
문이 부서지면서 별궁 안에서 튀어나온 베흔이 옛 부하들이기도 한 8군단을 향해 거대한 플람베르주를 붕 소리가 나게 휘둘렀다. 사실 허공에 대고 휘두른 말 그대로 헛방이었지만 놀란 8군단 장병들이 창백해진 얼굴로 흩어지며 놀라 뒷걸음치도록 하기에는 충분했다.
“나가! 나가!”
베흔에 뒤이어 구르베스와 몇 명의 가디언들, 그가 지휘하는 20여명의 크바르나들이 근위대의 갑주를 입고 선봉에서 우루루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베흔에 놀라 물러났던 근위대들의 사이를 파고들며 중앙부에 일순간 갈라놓았다.
“뒤가 뚫렸습니다!”
근위대 쪽에서 비명 같은 보고가 들어왔지만 이미 제롬은 눈으로 충분히 확인하고 있었다. 별궁 정문 앞은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도 구분하기 어려운 난전으로 빠져들었다. 앞에는 기병대가, 뒤에는 더 무서운 베흔이 있었다.
“이제 더 물러날 곳이……없습니다.”
누군지는 몰라도, 참모 중 한 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안 물러나면 되지!”
제롬이 다시 큰소리를 쳤지만 정말로 자신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돌격!”
어느새 다리 끝까지 다다른 릴라크가 기계팔에 창을 겨누고 정면의 남부보병대, 그리고 원수 제롬을 향해 찢어지는 고함을 지르며 돌격을 시작했다. 뒤따라 수십, 수백의 기병들이 은빛 파도처럼 돌격을 개시해 창을 세운 남부보병들의 머리 위를 덮쳤다.
“자리를 지켜!”
장교들, 사관들의 고함소리가 허공을 맴돌았다. 기병들을 받아낸 보병들의 처절한 비명과 함께, 사오시안트 별궁 앞 황량해진 정원에 때 이른 붉은 피의 꽃이 만개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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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편은 짧아질 줄 알았는데;;; 탈고하고 잘라보니 또 길어졌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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