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59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
.
.
“이익.”
20여명의 근위대를 데리고 이곳까지 달려온 베흔은 죽은 제롬을 품어 안은 채 빗속에서 울고 있는 네페티의 모습에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를 바로 깨달았다.
“설마, 설마 황제가…….”
충격을 받은 베흔이 고개를 저었다. 카렐이 겉으로는 ‘제롬을 절대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을 해 주었지만 베흔도 내심으로는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그가 ‘제롬과 조우했다.’라는 구르베스의 연락에 만사 제쳐두고 달려온 것이 그 때문이었다.
“저기 적이다!”
함께 온 근위대원들이 그때까지도 제롬의 무장들과 싸우고 있던 크바르나들을 돕기 위해 달려갔지만 베흔은 자리에서 전혀 움직이지 못했다.
“제롬…….”
그는 죽은 아들을 쳐다보며 빗속에 멍하니 서 있었다. 얼굴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는 겨울 빗물이 이상하리만큼 뜨거웠다. 당장 가서 제롬과 네페티를 보고 싶었지만 차마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떤 놈이냐…….”
그의 꽉 쥔 주먹에 핏줄이 곤두섰다. 그의 시선은 낙마해 쓰러져 있는 릴라크를 제일 먼저 향했다. 칼을 빼들려는 그의 손목을 누군가 덥석 붙잡았다.
“제발 가만히 있어요.”
막 폭발하려는 그를 잡은 건 뒤늦게 따라온 법무대신 아리아노였다. 베흔만큼은 아니었지만 사위를 잃은 그의 표정도 파랗게 질려 있었다.
“젠장, 내 딸년은 어쩌라고.”
아리아노가 입술을 깨물었다. 남편에 이어 사위까지 잃었으니 모녀가 모두 홀로 되어버린 황당한 상황이었지만 그는 절망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을 뿐 그 이상의 슬픔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남편의 죽음으로 받은 슬픔만으로도 그에게는 충분했다.
“내 자식이요.”
“내 딸의 남편이기도 해요.”
아리아노의 만류에도 베흔이 이를 드러내며 그의 손을 뿌리치고 다시 칼을 빼들려 했다. 아리아노가 이번엔 조금 거칠게 그의 손을 다시 붙들었다.
“멋대로 사고치지 말아요. 내가 가서 보고 올 테니 여기 적당히 떨어져 있어요.”
격분해 있는 베흔을 저지한 아리아노는 다친 발을 절룩거리며 네페티에게 혼자 다가갔다. 둘의 관계를 아는 그의 생각에 이젠 황비가 된 네페티와 베흔이 ‘부모로서’ 한 자리에서 만나는 것도 썩 좋을 것 같아보이지는 않았다.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베흔이 그 큰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자꾸 변하려는 표정을 감추었다.
“괜찮으십니까.”
떨고 있는 네페티의 어깨를 잡아 준 아리아노가 자리에 쭈그려 앉아 그와 무어라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흐음.”
아리아노가 갑자기 굳은 표정으로 일어서서는 베흔을 다시 돌아보았다. 네페티와 베흔을 번갈아 쳐다보며 꺼질 듯 한숨을 내쉰 아리아노가 멀리 있는 베흔에게 ‘당신이 틀렸어요.’라며 손짓을 보냈다. 하지만 베흔은 그의 말이 무얼 뜻하는지 아직 알 수가 없었다.
아리아노는 중상을 입고 쓰러져 있는 구르베스도 잠시 돌아보았다. 그가 그리 오랫동안 행방을 궁금해 했던 ‘수우 황제’가 비쩍 여윈 팔로 구르베스를 꼭 품어 안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말에서 떨어졌던 릴라크가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서는 의무병을 찾고 있었다.
한편에서는 제롬과 함께 온 무장들이 상관의 죽음에 놀라 허겁지겁 달아나고 있었지만 이쪽도 만신창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사실 그도 엘리베이터에서 다리와 발에 입은 부상으로 제대로 걷기도 힘든 몸이었다.
“이제야 다 끝난 건가.”
아리아노가 무거운 걸음을 질질 끌고 베흔에게 걸었다. 네페티만큼이나, 그에게도 생애 가장 비극적인 하루였다.
떨어져 있던 베흔이 큰 소리로 다시 물었다.
“어떤 놈 소행이냐고 묻지 않았소!”
숲을 쩌렁 울리는 베흔의 분노에 깜짝 놀란 아리아노가 조용히 하라며 손짓을 보냈다.
“가서 말해 줄 테니까 잠깐만…….”
다친 발로 뒤뚱거리며 서둘러 걷던 그는 ‘도망친 가짜 보안국 요원들’을 퍼뜩 머리에 떠올렸다. 생각해 보니 그들을 아직 찾아내지 못한 상황이었다.
“놈들은 어딨지?”
본능처럼 불안감을 느낀 그는 자리에 멈춰 서서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그의 예리한 눈은 멀리서 자신을 쳐다보며 석궁을 들고 있는 검은 제복 차림의 누군가를 발견했다.
“적이다!”
아리아노가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몸을 날렸지만 위치가 별로 좋지 못했다. 그는 머리를 감싸며 바닥에 납작 엎드렸지만 주변엔 몇 그루의 작은 나무를 빼면 피할 곳도 없었다. 질척질척해진 흙바닥에 나동그라진 그는 바로 얼굴 옆에 볼트가 날아와 꽂히는 모습에 기겁을 했다. 그는 어디론가 움직이려 했지만 갑옷도 안 입은 상태에서, 그것도 발도 불편한 몸으로 일어나는 것 자체가 자살행위였다.
그는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 도망치기 시작했다.
“도망친 사교도 놈들이야!”
“하나는 해결됐다. 나머지를 끝내. 갑옷 없는 놈은 석궁으로 쏴 죽여.”
코런덤 분대장이 침착하게 수우와 네페티, 아리아노와 베흔을 가리켰다. 제롬의 뒤를 숨어서 조용히 따라왔던 10명의 코런덤 헤네티들은 그가 죽기가 무섭게 일제히 공격을 퍼부어오고 있었다. 그들을 막을 수 있는 건 도망간 무장들을 쫓아가고 남은 십여 명의 근위대와 크바르나 3명뿐이었다.
“이놈들이 코런덤?”
말에서 떨어져 넘어졌다가 가까스로 일어섰던 릴라크는 아리아노의 말에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는 급히 말고삐를 붙들었지만 기계를 잔뜩 두른 둔한 몸으로는 혼자서는 말에 오를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도 한 명의 코런덤 헤네티가 칼을 들고 그의 코앞에 들이닥치고 있었다.
“이씨!”
급해진 릴라크는 조금 전 제롬의 칼에 부서져 바닥에 뒹굴고 있던 방패 조각을 집어들고는 정면의 헤네티 얼굴에 대고 힘껏 던졌다.
“으입!”
별 생각 없이 날아오는 방패를 칼로 쳐내려 했던 헤네티는 칼끝이 닿는 순간 자신의 힘을 압도하는 엄청난 위력을 느꼈지만 때늦은 판단이었다. 예리하고 넓적한 쇳조각은 그의 칼을 밀어내고 그대로 날아들어 얼굴 중간을 순식간에 두 조각냈다.
“다 어디 갔어!”
릴라크가 어기적거리며 걸어갔지만 걸음이 너무 느렸다. 크바르나 헤네티들과 근위대를 눈 깜짝할 새 돌파한 4명의 코런덤 헤네티들이 네페티와 수우, 아리아노에게 돌진하고 있었다. 그는 한쪽에 서 있던 베흔을 돌아보며 외쳤다.
“황비 전하를 지켜주시오! 제발!”
릴라크가 뭐라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적의 정체를 파악한 베흔은 이미 칼을 빼들며 적에게 돌진하고 있었다. 적이 튀어나오는 모습에 반사적으로 움직인 것인지, 아니면 아리아노의 외침에 움직인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그저 누군가를 지켜야 한다는 맘에 달려 나갔을 뿐이었다. 그의 눈앞에는 두 개의 상황이 동시에 벌어지고 있었다.
“아리아노?”
쏟아지는 볼트를 피해 베흔에게 엉금엉금 기어오던 아리아노가 진흙 위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있었고, 그 뒤에서는 코런덤 헤네티가 기다렸다는 듯 그의 뒤통수를 향해 석궁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시각, 죽은 제롬을 안고 있던 네페티가 그제야 주변의 소란에 놀라 막 고개를 들던 참이었다. 릴라크가 둔하게 뛰어가고 있었지만 그곳에서도 이미 다른 코런덤 헤네티가 네페티를 향해 석궁을 쳐들고 있었다. 눈물에 젖어 있던 네페티의 새파란 눈동자가 순간 놀라움과 공포에 동그랗게 커졌다.
“이런.”
베흔은 당장 결정을 해야 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 눈에는 순간으로 보일 짧은 시간, 그의 머리는 지금껏 살아 온, 아니 네페티와 함께 해 온 오랜 시간이 모두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의 계산 따위는 필요 없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그 와중에도, 발은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고개 숙여!”
허리에서 단검을 빼든 베흔이 막 고개를 들려는 아리아노에게 손을 저으며 목이 찢어져라 소리를 질렀다. 놀란 아리아노가 바닥에 넘어지듯 다시 엎드렸고, 베흔이 던진 단검이 그의 정수리 위를 스쳐 반대편으로 꽂혔다.
동시에 헤네티가 쏜 볼트도 아리아노의 머리 위를 쉿 소리를 내며 스쳐 베흔에게 날아들었다.
“지겨운 놈들!”
베흔이 칼로 볼트를 쳐내며 바닥에 엎드린 아리아노 위를 훌쩍 뛰어넘었다. 그리고는 번개처럼 달려가 단검을 쳐내느라 잠시 자세가 흐트러졌던 헤네티를 덮쳤다.
“익!”
베흔의 힘에 밀려난 코런덤 헤네티가 주춤거리며 한참을 뒤로 물러났다. 상대는 부상을 입은 사자였지만 어쨌든 보통의 헤네티에게는 버거운 상대였다. 헤네티가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 반격을 하려 했지만 웬만한 어른 키만한 육중한 플람베르주가 먼저 그의 목에 무자비하게 꽂혔다.
적의 몸에 뒤늦게 불이 확 타올랐지만 베흔은 긴 칼끝에 꿴 불타는 몸뚱이를 그대로 공중에 쳐들어서는 바닥에 사정없이 내리꽂아 빼내버렸다.
“학, 학.”
아리아노를 공격하던 헤네티를 쓰러뜨린 베흔은 그제야 네페티 쪽을 다시 돌아보았다. 조금 전까지 아들을 안고 바닥에 앉아있던 그 아름다운 여인은 얼굴과 귀에서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이런.”
쓰러진 네페티가 화끈거리는 귀를 만지작거렸다. 볼트가 그의 심장 위를 정확하게 명중했지만 속에 입은 갑옷에 튕겨 목과 귀를 찢고 지나간 모양이었다. 그가 망토 안에 갑옷을 입었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한 적이 가슴을 겨냥한 것이 분명했다.
“고개 들지 마십시오! 기어서 피하십시오!”
릴라크가 외쳤지만 그는 비 때문인지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고 들었다 해도 소용없었다. 축 늘어진 제롬의 육중한 시체가 그의 다리를 누르고 있어 움직일 수도 없었다.
“앗!”
억지로 몸을 들려던 그는 두 번째로 날아든 볼트가 팅 소리를 내며 죽은 제롬의 갑옷에 맞고 어디론가 튕겨나가는 모습에 놀라 다시 뒤로 쓰러지고 말았다.
“수우, 어딨니?”
다시 바닥에 쓰러진 그는 이 와중에도 아들을 돌아보았다. 다행히 갑옷을 입은 구르베스가 다친 몸이지만 수우를 위에서 가린 채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베흔 쪽을 돌아보았다. 급한 적을 쓰러뜨린 그는 그때까지도 적의 사격에 노출되어 있던 아리아노를 큰 나무 뒤로 잡아끌어 피신시키고 있었다.
그때, 네페티를 쏘아 죽이는 데 실패한 코런덤 헤네티가 네페티를 깔아뭉갠 제롬의 시체를 밟고 그 위에 불쑥 모습을 나타냈다. 쓰러진 네페티는 멍한 얼굴로 적을 올려보았지만 움직일 수도, 저항도 할 수가 없었다.
“떨어져! 이 새끼야!”
릴라크가 무작정 던진 칼이 옆에서 다시 붕 소리를 내며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조금 전에 방패를 던졌을 때만큼은 운이 없었지만 아주 효과가 없는 건 아니었다. 그의 칼을 쳐내려던 헤네티는 힘에서 밀려나며 바닥에 벌렁 쓰러지고 말았다.
“이놈, 감히 어딜!”
어기적거리며 걸어온 릴라크가 넘어진 헤네티의 몸 위를 덮쳤다. 무식한 육탄전이지만 다른 이유는 없었다. 가진 것을 다 던지고 나니 마땅히 쓸 무기가 없어서였다.
“이크!”
적을 덮치고 나서야 실수를 깨달은 릴라크는 내심 아차 싶었다.
“후훗.”
바닥에 넘어진 헤네티가 덫에 걸린 그의 목을 덥석 붙들며 갑자기 씨익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다. 상대가 막 불꽃을 붙이려 고개를 든 순간, 릴라크는 발화장치가 있는 그자의 목 뒤를 확 움켜쥐고 사정없이 비틀어 버렸다.
“하, 악.”
구사일생한 릴라크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허겁지겁 뒤로 물러났다. 다른 위험이 없는지 얼른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한쪽에서 갑자기 화끈한 열기를 느꼈다.
“지겨운 놈들!”
아리아노를 대피시키고 마지막 헤네티까지 쓰러뜨린 베흔이 신발에 옮겨 붙은 불을 급히 끄며 욕을 내지르고 있었다.
“휴우.”
긴장이 풀린 릴라크가 한숨을 탁 내쉬었다. 개인적으로는 꼴도 보기 싫은 자였지만 베흔이 이렇게 서둘러 와 주지 않았다면 모조리 몰살당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신발의 불을 서둘러 끈 베흔은 나무 밑에 피해 있던 아리아노에게 다가가 무어라 안부를 묻는 모습이었다.
“괜찮으십니까? 황비 전하?”
릴라크는 제롬의 시체에 깔린 채 쓰러져 있는 네페티에게 엉금엉금 기어서 다가가 무거운 시체를 옆으로 치워냈다.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릴라크는 피를 흘리고 있는 네페티의 뺨을 손수건으로 꾹 눌러주었다. 창백해진 뺨을 따라 피와 섞인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지만 상처의 아픔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곧 의사가 올 겁니다.”
“으, 응.…….”
할 말을 생각하며 잠시 망설이던 릴라크의 눈에 제롬의 시체가 들어왔다. 조금 전까지도 이자의 시체까지 짓이겨놓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보다 아들을 잃은, 그것도 자기 손으로 찔러 죽여야 했던 네페티에 대한 측은함이 먼저 들었다.
“작은 아드님은 무사합니다. 그러니…….”
말을 잇던 릴라크는 옆으로 누군가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말리는 아리아노를 힘으로 뿌리치고 다가온 베흔이 당장이라도 네페티를 잡아먹을 듯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입을 꽉 다문 그는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네페티에게 괜찮은지 따위의 형식적인 안부 한 마디조차 묻지 않았다.
이 매정한 남자를 실눈으로 잠시 올려보던 네페티도 결국 눈을 감으며 그를 외면해 버렸다.
“황상이 너무 보고 싶어.”
베흔은 한 마디도 꺼내지 않은 채 그대로 휙 돌아서서는 바닥에 쓰러진 제롬의 시체를 어깨에 불끈 짊어졌다. 그리고는 조금 떨어진 나무 밑에서 초조하게 서성대고 있는 아리아노를 향해 성큼성큼 멀어져갔다. 가는 내내, 그는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았다.
++++++++++++++++++++++++++++++++++++++++++++++++++++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The Iron Vein 개인지 구매사이트 : http://vein.zio.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