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61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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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탈은 투명한 천정 위로 보이는 험악한 하늘을 야속하게 올려보았다. 공포의 화신이며 하늘을 지배한다는 다하카르가 그의 몸에 깃들어 있다고 믿고 싶었지만 오늘, 아니 지금 당장의 하늘만 보아서는 그가 현신인 자신을 버리고 어디론가 가 버린 것만 같았다.
아스탈이 자꾸 젖어드는 눈을 손으로 가리며 짧게 말했다.
“금괴를 버려라.”
흔들리는 갑판 위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헤네티들이 별궁에서 가져온 상자들 중 무거운 것들부터 차례차례 내버리기 시작했다. 금괴와 보물이 가득 든 큰 상자가 거칠게 울부짖는 바닷물 속에 차례대로 빠져 까마득한 수면 아래로 사라져갔다.
“다시 올 수 있어. 그래, 다시 거둬 가면 돼.”
아스탈이 검은 물 속으로 사라져가는 상자들을 보며 울분을 삼켰다. 그리고 종전 후 사방에서 봉기할 제후들을 돈으로 하나둘 한편으로 끌어들이겠다는 그의 야심찬 계획도 조금씩 삐거덕거리기 시작하는 느낌이었다.
“빨리 출발해!”
상자를 절반 내버린 것을 확인한 아스탈이 다시 항해사를 닦달했다. 동맹군 수송선은 그새 더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배가 가벼워지고 있는데 왜 못 가는 거냐!”
“물살도 좋지 않고……아직은 많이 무겁습니다.”
아스탈이 초조한 얼굴로 다시 거리를 가늠했다. 이대로는 저 큰 배에 들이받히는 건 시간문제였다.
이 상자가 ‘얼마나 아까운 것인지를’ 잘 아는 헤네티들은 상자를 하나라도 덜 버리기 위해 하나씩만 던지며 배가 흘수선 위로 뜨는지를 확인했지만 워낙 파도가 거칠어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하나 둘씩 상자를 버렸지만 배는 쉽사리 가속되지 않았다.
“빨리 던져! 시간 없어!”
보다 못한 슈라가 부하들을 재촉했다. 다급해진 그들은 내용물이 무엇이건간에 무거운 상자는 무조건 물에 던져버렸다.
“다 버렸습니다!”
거의 마지막 상자까지 던져지고 나서야 배가 비로소 제대로 가속을 하기 시작했지만 이미 동맹군 수송선은 그들의 북쪽 시야를 완전히 가릴 만큼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제야 수면 위로 제대로 떠오른 아스탈 일행의 배는 뒤따라오는 동맹군 수송선의 압도적인 그림자를 급히 피해 조금씩 속도를 붙이기 시작했다.
“속도 냅니다!”
날카로운 뱃머리가 검고 거친 바다를 가르며 양쪽으로 물살을 뿜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쉬움에 가득 찬 아스탈의 시선은 금괴를 버린 수면 위에서 차마 떨어지지를 않았다.
“금괴 버린 곳 좌표는 제대로 표시했겠지?”
“물론입니다. 걱정 마십…….”
아스탈을 달래주려던 슈라가 자기도 모르게 입을 가렸다. 헤네티들은 어지간해서는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법이었지만 이번만은 낯빛까지 창백해진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뭐냐?”
급히 망원경을 눈에 가져갔던 아스탈은 그만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뒤를 쫓아오던 2척의 동맹군 배 중 작은 것이 추격을 멈추며 방금 전 금괴를 버린 수면 위를 천천히 선회하고 있었다.
“안 돼.”
아스탈이 고개를 저었다. 갑판 위의 동맹군 군인들이 수면 위를 가리키며 무어라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을 보아 이 배에서 무언가 버린 것을 저들도 눈치 챈 것이 분명했다.
“안 돼, 저건 내 것이라고.”
아스탈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저대로 해저에 남아있다면 언젠가 다시 거둬갈 수도 있겠지만 저들이 금괴를 인양한다면 황제의 세력에게 칼 한 자루를 더 쥐어주는 격이었다.
“설마……절 버리고 떠나신 겁니까.”
아스탈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낮게 흐느꼈다. 피가 전혀 흐르지 않는 오른손이 평소보다 유달리 차갑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소중한 손과 특별한 능력을 앗아간 원수에 대한 분노가 평소보다 더 강하게 그의 가슴을 쥐어짜고 있었다.
배는 뒤쫓는 수송선과의 거리를 천천히 벌려가고 있었지만 이젠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멍한 얼굴로 주저앉아 있던 그는 마지막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사오시안트 육지 쪽을 느닷없이 돌아보았다.
“아, 악.”
아스탈이 가슴을 쥐며 자리에서 파르르 떨기 시작했다. 대신관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에 슈라가 기겁을 하며 그의 팔을 붙들었다.
“왜 그러십니까?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스탈은 바들바들 떨기만 할 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갑자기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릴라크가 이끄는 기병대가 사오시안트 성벽이 무너지기만을 기다릴 무렵, 황제 카렐이 직접 이끄는 동맹군과 남부 3제후 카산드라 호지 경의 연합군 주력부대 사이의 싸움은 여전히 지루한 대치상태였다.
예르마크 경이 이끄는 기병대는 히르직스의 기병대와 그럭저럭 팽팽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고, 중군에서의 보병대끼리의 대결은 똑같은 남부보병대간에 자존심 싸움이 제대로 벌어지고 있었다.
전투를 막 시작할 무렵, 카렐을 따르는 근위대 1군단과 11군단이 연합군 후방에 기습 상륙해 등 뒤를 찌르려 했지만 카산드라 경이 ‘같은 근위대를 동원해’ 그들을 재빨리 차단한 덕분에 최소한 아직까지는 지루한 대치국면만 이어지고 있었다.
“히르직스 경이 다시 전방에 나선 모양입니다.”
부장 중 한 명이 동쪽의 기병대를 가리키며 카산드라 경에게 말했다.
“그 몸으로?”
“적군이 부상을 입은 예르마크 경 대신 제네르 하크로딘에게 지휘를 맡긴 모양입니다.”
부장의 손끝이 향하는 곳에는 황실 내각 병부대신을 뜻하는 큰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그게 히르직스 경하고 무슨 관계야?”
“슈로 기사단이라면 눈에 쌍심지 켜지 않습니까.”
“풉.”
“어차피 둘 다 몸이 성치 않으니 이번엔 결판을 내려는 속셈인 것 같습니다.”
“하여간, 기병들 자존심이라니…….”
카산드라 경이 기가 막혀 고개를 저었다. 굳이 히르직스가 아니어도 1대 1대결을 선호하고 자존심이 센 기병들은 걸핏하면 되도 않는 ‘원수’를 설정해 놓고 혼자 적개심을 쌓아가곤 했다. 그리고 히르직스도 거기서 예외는 아니었다.
“하려면 옛날 장인이나 원수 삼아서 우리 골치나 덜어주지. 쪼잔하게.”
카산드라 경의 대답에 참모들 몇이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그가 맞서고 있는 플라칼 가 보병대를 이끄는 카나르 플라칼 경이야말로 제후들 중에서도 가장 실전경험이 긴 베테랑 중 베테랑이었다.
“카나르 경도 한때는 히르직스 못잖게 날렸으니 만만치 않을 겁니다. 가만, 그러고 보니 히르직스 경 때문에 딸 잃은 게 한 명이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껏 산 방식이 원수 만들기였으니 자업자득이지 뭐. 그나저나, 지겨워 죽겠네.”
카산드라 경이 눈가를 찡그리며 동쪽의 해안을 바라보았다. 카렐 황제가 8천의 북부보병대와 3천의 낙타병부대를 이끌고 ‘말에서 내린’ 2만의 기병대와 맞서고 있는 서쪽 해안가 상황아 계속 그의 눈에 거슬렸다.
“정말 더럽게들 싸우고 있네.”
망원경으로 전장을 확인하고는 카산드라 경이 고개를 저었다. 질척거리는 진흙탕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 싸움은 구질구질한 땅바닥만큼이나 지저분한 난전으로 번져 온통 피와 욕설, 패싸움인지 전투인지 알 수 없는 난투극이 되어 있었다.
“병력을 더 보내서 빨리 끝내는 게 좋지 않을까요?”
“괜히 무리수 두지 마라.”
카산드라 경이 얼굴을 찡그렸다. 원래 계획은 그의 부대가 북쪽에서, 성 안에 있던 쿠베의 근위대가 남쪽에서 적을 조여서 완전히 전멸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조금 전 릴라크가 이끄는 기병대의 ‘막무가내 돌격’으로 성문이 차단당하면서 적의 반대편을 조여야 할 근위대가 성 안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저 황제 놈이 포기하고 퇴각해 버리는 것보다는 시간을 끌어서 재기도 못할 정도로 적 병력을 완전히 바닥내는 게 중요해. 그나저나 쿠베 저놈이 빨리 나와서 적 뒤를 쳐야 끝장을 내지. 내 원.”
계속 쿠베의 욕을 하려던 카산드라 경은 멀리 사오시안트 동쪽 성벽 쪽에서 보이는 연기와 불꽃을 그제야 발견했다. 그리고 그 불길한 광경은 함께 있는 연합군 지휘부도 모두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불이 난 거야?”
카산드라 경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지만 그는 물론이고 참모진들도 아직까지 사태의 심각성을 알지는 못하고 있었다.
“어떤 병신 같은 놈이 불을 냈나 봅니다.”
별로 심각하지 않은 표정으로 불빛을 멍하니 보며 서 있던 그들의 눈에 잠시 후. 말 그대로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 펼쳐졌다. 자신들의 본거지 성벽이 혼자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황당한 광경에 사령관인 카산드라뿐만이 아니고 연합군의 말단 사병까지도 일순간 패닉에 빠져들었다.
“저게 뭐야.”
카산드라 경이 넋 나간 얼굴로 내뱉은 건 이 한 마디가 전부였다. 아니, 그 이상의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저게 뭐냐고.”
카산드라 경이 다시 중얼거렸다. 순식간에 희뿌연 흙먼지로 뒤덮인 성벽 주변은 정확히 뭐가 어떻게 되어 돌아가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먼지가 어느 정도 가라앉고 나서야 비로소 그는 어느 정도라도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적 기병이 도시 안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카산드라 경은 아무 대답도 않은 채 말없이 이마를 짚었다. 지금 저 광경을 보고 있는 건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적과 피 말리는 대결을 펼치고 있는 연합군 장병 모두가 그 광경에 놀라 크게 출렁이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잠시 무언가 생각을 하던 카산드라 경은 할룩스를 켜고 모든 지휘관들을 일제히 호출했다.
“놀랄 것 없다.”
카산드라 경이 헛기침을 하며 최대한 침착하게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무슨 방법을 동원하든, 흐트러지는 분위기를 빨리 수습하지 않으면 압도적인 병력을 가지고서도 어처구니없이 패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성벽이 무너진 건 계획했던 일이다. 적을 시내로 유인하려는 사전 계획에 따른 것이니 흔들리지 말고 적에게 맞서도록 해라.”
지시를 끝낸 그는 그들이 쓸데없는 질문을 하기 전에 얼른 할룩스를 꺼 버렸다.
“사실입니까?”
“뭘 믿고 참모부 밥을 먹고 있냐?”
참모의 어리석은 물음에 카산드라 경이 한심하다는 듯 눈을 흘겼다.
“기댈 구석을 대 주는 것도 지휘관이 할 일이지.”
카산드라 경은 무언가 맘을 먹은 듯 서쪽, 카렐과 맞서고 있는 부대 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는 초조해진 표정으로 무너진 성벽을 다시 돌아보았다. 릴라크가 이끄는 기병대와 가디언들이 기다렸다는 듯 무너진 성벽으로 쇄도하고 있었다.
“저놈들 단속할래도 한동안은 근위대가 나와 주긴 어렵겠군.”
“…….”
“아랫놈들이 의심을 품기 전에 우리가 직접 전투를 끝내야겠다.”
“예?”
“어차피 적에겐 기병대 말고는 들여보낼 병력이 없어. 까짓거 내가 카렐 그년을 죽이고 속전속결하는 수밖에. 근위보병대 따라오라고 해.”
카산드라 경은 자신을 비롯한 지휘부 주변을 단단히 호위하고 있는 5천의 남부 근위보병대를 손짓해 불렀다. 평소에도 남부 델루지 가와 호지 가의 종가와 수도를 지키고, 전시에는 지휘부를 지키거나 핵심적인 전투에 동원되는 중장보병부대였다.
“지금 간당간당하는 꼴이니 가기만 하면 잡는 건 쉬워.”
제롬을 대신해 연합군 사령관 기(旗)를 앞세운 카산드라 경은 중군 후방 예비대로 대기 중이던 5천의 보병대를 이끌고 카렐이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서쪽 해안 쪽으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슬슬 영양제를 놔줄 때이기도 해.”
카산드라 경은 카렐 황제가 있는 곳을 보며 애써 웃음을 보였다. 황제를 따르는 8천의 북부보병대는 이미 반쯤 빈사상태였지만 그들보다 훨씬 무거운 갑옷을 입고 진흙탕에서 사투를 벌인 기병들도 거의 탈진상태이기는 매한가지였다.
“예비부대도 거의 안 보이고.”
“후방에 있는 모래언덕에 이상한 차림새의 보병들이 보입니다.”
참모 중 한 명이 그 난전의 와중에서도 한 발 비켜선 채 후방에 소리 없이 도사리고 있는 검은 망토 차림의 부대, 크바르나를 가리켰다.
“저놈들 나도 알아.”
노련한 카산드라 경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검은 사신부대라던가? 쓸데없이 소문만 무성하지 알려진 전과도 없어. 숫자도 얼마 안 되고.”
“아까 전투 초입에 자살부대하고 싸울 때 잠깐 보니 실력들이 보통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3, 4백밖에 안 되는 적군이 무섭다고?”
카산드라 경의 대답에 쓸데없이 참견을 했던 참모가 무안하게 입을 다물었다.
“가자, 필요한 때는 결판을 낼 줄도 알아야지.”
카산드라 경은 직접 깃발을 들고 앞장서기 시작했다. 직접 나서서 전공을 쟁취하는 데 집착하는 다른 무장들과는 달리, 그는 실리와 결과에 집착하는 전략가 타입이었지만 이번만은 경우가 달랐다. 상대는 그에게 생애 최악의 치욕을 선물했던 오르마즈와 분신처럼 닮은 사람이었다.
“하긴, 나도 누군가의 목을 따 보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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