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62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
.
.
카산드라 경과 5천의 중장보병대가 황제 쪽으로 움직이는 것을 제일 먼저 파악한 건 북쪽 해안에 상륙한 근위대 부대였다.
시로가 지휘하는 근위대 1군단과 11군단은 카산드라 경이 잽싸게 3만의 근위대를 동원해 진로를 차단한 덕분에 해안에 속절없이 발이 묶여있었지만 적 후방의 움직임까지 한눈에 볼 수 있다는 것만은 꽤 유용했다.
이들도 나름대로 긴장된 대치상황이기는 했지만 옛 동료들과의 교전은 쉽사리 벌어지지 않았다. 연합군 편에 선 3만의 근위대, 동맹군 편에 선 2만의 근위대 모두 마주선 ‘적’에게 별 적개심도 없었고, 서로의 전력을 보아 일단 맞붙으면 얼마나 무서운 싸움이 될지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해안 쪽에 포진한 2만의 동맹군은 숫자는 조금 적었지만 시로와 제파, 타크마라는 걸출한 3명의 특등급 군단장이 보란 듯 앞에 서 있었다. 가뜩이나 이 싸움을 부담스러워하던 연합군측 근위대의 눈앞에 이들까지 떡하니 버티고 서있으니 싸울 맘이 들지 않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저놈들이 진짜 공격을 해 올까?”
초조해진 시로가 함께 선 동기 제파에게 물었다.
“글쎄. 눈치를 보니 우리가 먼저 움직이지 않으면 저놈들도 안 움직일 것 같은데.”
제파가 칼로 신발바닥을 툭툭 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몇 달 전, 황도로 진격하던 도중 시로에게 붙잡혔던 그는 처음에는 완강히 전향을 거부했지만 이젠 아니었다. 베흔까지도 황제에게 돌아섰다는 소식에 결국 그도 황제에게 고개를 숙이고 이렇게 동맹군의 일원이 되어 전장에 서 있었다.
“어찌 보면 나쁠 건 없지요. 황상께서도 가능한 근위대는 전력에 손상을 안 입히고 접수하려 하시지 않습니까.”
시로와 제파는 옆에서 들려온 조금 가는 목소리에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황궁 지하 카타콤베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황제에게 붙잡혔던 신참 특등급 타크마였다. 큰형님격인 시로나 제파에게는 한참 후배였지만 그 역시 6세대라는 딱지 덕분에 베흔에게 푸대접을 받았다는 면에서는 동지나 마찬가지였다.
“분명한 건 근위대의 명령체계가 혼란에 빠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겁니다. 사기도 바닥으로 주저앉았을 테고요.”
타크마는 성벽 붕괴와 함께 아수라장이 되어 있는 사오시안트 성문 위, 지휘부를 가리켰다. 바로 새 근위대장 쿠베가 있는 곳이었다. 시로가 턱을 만지작거리며 마주선 근위대를 노려보았다.
“선제공격을 하자면 지금이 좋은 타이밍이긴 한데……황상 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저 보병들이 영…….”
시로가 덜 깎은 수염으로 꺼칠해진 턱을 만지작거리며 고민에 잠겼다. 5천의 남부 중장보병을 거느린 카산드라 경이 황제가 있는 곳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다행히 그들 특유의 둔한 몸놀림 때문에 아직은 시간이 좀 있어 보였다.
“그런데 하크로딘 상장군 쪽만 보고 있는 줄 알았더니 적 움직이는 건 또 언제 봤냐?”
정곡을 찌르는 친구의 물음에 시로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실제로 여기 온 이후로도 그의 시선은 쉴 새 없이 제네르가 있는 우군 쪽을 오가고 있었다.
“어젯밤에 상장군 선실에서 무슨 회의를 그렇게 밤새도록 했어? 아침에 영 피곤해 보이던데? 지시사항 있으면 나한테도 좀 알려줘?”
제파가 앞니를 슬쩍 드러내며 능청맞게 물었다.
“흐, 음. 별 것 아냐.”
시로는 자신의 검은 피부 덕분에 티가 덜 나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얼른 말을 돌렸다.
“이봐! 황상 쪽에서는 아직 답신이 없나?”
시로가 함께 선 부장에게 괜스레 큰 소리로 물었지만 부장도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조금 전, ‘적 보병대가 그쪽으로 갑니다.’라는 급보를 전하려 했었지만 무슨 일인지 황제와 직접 연결이 되지를 않았다.
“카토 호위대장도 연락을 못 하고 있다고 합니다. 상께서 최전방에 몸소 서 계셔서 그곳에 계속 적의 육탄돌격이 집중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전장을 전반적으로 통솔하실 상황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여간, 이런 때도 꼭 나서셔야 하나. 전장을 통솔하는 게 중요하지 저렇게 고집만 부리셔야…….”
불만을 터뜨리던 시로를 막은 건 이번에도 타크마였다.
“상께서 물러나시면 북부보병대가 일시에 무너집니다. 북부보병대가 버틴 덕에 지금까지 전군이 버틴 것 아닙니까.”
“그럼 뭐하냐고, 5천이나 되는 남부 중장보병대까지 몰려들면 북부보병대도 끝이라고.”
“어차피 황상과 연락도 되지 않는데요, 뭘. 도리어 다행이죠.”
타크마가 어깨를 으쓱하며 눈을 쫑긋거렸다.
“무슨 말이냐?”
눈치 빠른 후배의 눈짓에 ‘우직한’ 두 선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3천 명만 제게 주십시오. 상께는 ‘연락이 되지 않아 재량으로 이동합니다.’라고 메시지 보내놓으면 되지 않습니까.”
타크마가 양손에 쥐고 있던 쌍검을 도로 허리춤에 꽂으며 씨익 이를 드러냈다.
“3천을 데리고 뭘 한다고? 설마 앞에 있는 3만의 근위대를 ‘영웅적으로’ 돌파하기라도 하게?”
시로가 해안가를 둥글게 포위하고 있는 근위대를 가리켰다. 한참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황제에게 육로로 가려면 그들의 대오를 돌파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미쳤습니까. 바로 뒤에 배가 있는데요?”
타크마의 의도를 깨달은 시로와 제파가 말없이 서로 마주보았다. 황제와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핑계로 근위대 일부를 떼어내 배편으로 황제가 있는 해안에 지원군으로 보내자는 제안이었다.
“하긴.”
융통성 많은 제파가 먼저 헛기침을 했다.
“우리 중 소수가 배를 타고 움직여도 어차피 눈앞의 근위대가 함부로 덤벼오지는 않을 거야. 아니면 공격을 유인하는 수작처럼 보일 수도 있고. 까짓 거 덤벼오면 싸우면 되지. 어차피 싸우러 온 건데 무슨 상관이야.”
3명의 특등급들은 서로서로 말없이 눈짓을 주고받았다.
결국 명령권자인 시로가 후방에 아직 대기 중인 배와 예비대인 1연대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기왕 가려면 빨리 가.”
원칙에서는 좀 어긋나지만, 처음으로 의기투합한 3명의 6세대들은 무언가 위험해 보이는 이 상황을 미련하게 보고 있지만은 않았다.
“감사합니다. 형님들.”
이번 임기응변의 주역인 타크마는 두 선배들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얼른 해안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특등급이 되고 난 후, 첫 전투였던 황궁 지하에서 어처구니없이 카렐에게 붙잡혔던 그에게는 전공이라는 것을 세워 볼 두 번째 절호의 기회였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난데없이 날아든 도끼를 피하려던 카렐은 놀란 말 위에서 중심을 잃고 진흙바닥에 나뒹굴 뻔했다. 카렐은 이를 악물고 다시 중심을 잡으며 말고삐를 더 꽉 붙들었다.
“괜찮냐고? 도끼 던진 놈을 찾아내 갈가리 찢어 놓으면 훨씬 괜찮아질 거다!”
카렐이 갈라진 목소리로 주변의 병사들에게 악을 썼다. 하지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황제에게 도끼를 던졌던 남부 기병이 2명의 북부 병사들에게 깔린 채 짧은 비명과 함께 두개골이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다시 말한다! 여기서 한 발도 못 물러난다!”
카렐이 이미 피와 진흙으로 더러울 대로 더러워진 황실 깃발을 움켜쥐며 소리쳤다. 피에 눈먼 병사들은 진흙탕에 처박힌 그 끔찍한 시체를 짓밟고 다른 적에게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카산드라 경의 표현대로, 진흙탕 위에서 벌어지는 소모적인 싸움판은 이젠 지저분하다고 말해도 될 정도였다. 날은 추웠고, 푹푹 빠지는 진흙밭은 병사들의 발을 계속 붙들었고, 무거운 갑주와 무기는 병사들의 진을 바닥까지 빼 놓았다.
설 기운까지 잃을 정도로 완전히 탈진한 몇몇 병사들은 코앞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도 더러운 바닥에 주저앉거나 심지어 큰대자로 누워 넋 나간 표정을 짓고 있기까지 했다. 이대로는 양쪽 모두 죽어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지쳐 쓰러져 끝날 판이었다.
“잠깐, 잠깐! 1개 분대만 더 불러와! 황상 오른쪽이 비었다고!”
카렐 주변을 지키다가 부상을 입은 소대장이 들것을 후송하려는 사역병들을 저지하며 주변에 필사적으로 외쳤다. 그의 고함에 병사들 십여 명이 어디선가 달려와 잠시 구멍이 난 황제의 곁을 급히 메웠다.
“분대장은 어디 가고? 너희 도대체 어느 대대 소속이야?”
가디언 분대장이 없는 것에 당황한 소대장이 다급히 물었다. 분대도 말이 분대였지 리본을 보니 소속도 제각각이었고 심지어 붕대를 두른 부상병에 작업용 도끼를 멘 사역병까지 섞여있었다.
“저희 분대장님은 중상을 입어서 후송되셨습니다.”
급조한 분대장 완장을 찬 선임병이 더듬거리며 둘러댔다.
“분대에서 절반이 죽었든지 부상을 입었습니다. 후방에서 응급처치만 받고 나온 병사들하고 전후 교체과정에서 뒤섞인 병사들을 재정비하면서 숫자로 대충 나누다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저도 그냥 상등병인데 어쩌다 분대장이 되었습니다.”
소대장이 얼굴을 찡그렸다. 난전이 오래 지속되다보니 전장 전체에 걸쳐 비슷한 상황이었고, 처음 시작했을 때의 구성을 제대로 유지하고 있는 부대가 드물 지경이었다. 아마 저 상등병의 분대원들 중 몇은 또 엉뚱한 어딘가에서 다른 분대가 되어 싸우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무조건 여기를 지켜! 알았냐!”
지금껏 황제를 지켜 왔던 소대장은 조금은 미덥잖은 표정으로 들것에 실려 멀어져갔다. 그리고 새로 온 병사들은 아직까지도 깃발을 지키는 황제의 옆에 섰다.
분대장 완장을 찬 병사가 제일 뒤에 선 사역병에게 슬쩍 눈짓을 했다.
“네가 첫 번째다.”
격전을 벌이는 병사들 사이에 파묻혀 정신이 없던 황제가 ‘카산드라 경의 남부보병대가 이동해온다고 합니다.’ 라는 메시지를 뒤늦게 받은 건 이때였다.
“때가 되었나?”
카렐이 눈을 찡그리며 전방을 응시했지만 그의 부실한 눈으로는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가 없었다.
카렐은 크바르나들이 예비대로 대기 중인 남쪽의 높은 모래언덕을 돌아보았다. 전투 초기, 크바르나들이 자살공격을 해 왔던 코런덤들을 모두 재로 만들었던 바로 그곳이었다. 공격 방향이 바뀌면서 후방이 된 그곳은 북부보병대 부상자들을 돌보는 임시 진료소로 만들어져 정신이 없었고, 한쪽에는 최전선에서 모아 온 전사자들의 시체가 또 한가득 쌓여있었다.
“아샤드 레즐린 경.”
황제의 부름에 지금껏 긴장된 얼굴로 기다리던 크바르나 여단장 아샤드 경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괜찮으십니까? 지금껏 연락이 되지 않아 모두 걱정했습니다.”
“아직은 괜찮다. 적 보병들이 오고 있다고?”
“그렇습니다.”
“한계가 온 것 같다. 너희가 1선을 맡아라. 카산드라 그년을 잡아야겠다.”
“그분……은 어쩔까요?”
아샤드 경이 모래언덕 꼭대기를 슬쩍 가리켰다. 경기병 차림새의 세네피스는 부상병들로 버글거리는 모래언덕 꼭대기에 말없이 서서 황제가 있는 곳만을 인형처럼 응시하고 있었다.
“거긴 안전하겠지?”
카렐이 확인차 물었다.
“폐하께서 계신 곳이 뚫리거나, 성 안에서 근위대가 나오지 않는 한은 괜찮습니다. 갈라크 도비치 장군이 함께 있습니다.”
“그럼 그냥 거기 계시도록 해.”
“알겠습니다. 전진!”
명을 받은 4백여의 크바르나들은 길게 횡대를 지어 전방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지쳐 흐느적거리는 보병들 사이를 말없이 가로질러 아직 싸움이 진행 중인 1열로 조용히 나아갔다.
후방에 물러나 쉬고 있던 북부보병들이 멈칫거리며 그들에게 길을 비켜주었다. 검은 망토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차갑고 무표정한 얼굴, 오른손에 낯선 석궁, 왼손에 번쩍이는 방패를 쥐고 나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북부보병들 눈에도 무언가 이상한 부대처럼 보였다.
부상병들 사이에서 혼자 애타하고 있던 세네피스가 그들을 따라 슬그머니 황제 있는 곳으로 움직이려 했지만 슬레이프니르 부단장 갈라크 도비치 장군이 그의 앞을 얼른 막아서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여기 계십시오. 가실 곳이 아닙니다. 저긴 전장입니다.”
“하지만 상께서 저기에…….”
“황태후께서 가시면 방해만 됩니다.”
세네피스가 입술을 깨물며 마지못해 돌아섰다. 걱정을 견디다 못해 이곳까지 무리해서 왔지만 황제가 몇 번이나 아슬아슬하게 위험을 넘기는 광경을 눈앞에서 보는 건 아예 안 보느니만 못했다.
세네피스를 저지하고 돌아선 갈라크 도비치 장군은 별 생각 없이 스캐너를 살폈다. 스캐너 화면의 서쪽 바다 부분에 보일 듯 말 듯 작은 점 수십 개가 깜박이고 있었다.
“뭐지?”
그는 재빨리 눈에 망원경을 대고 한밤의 어두운 바다를 유심히 살폈다. 제법 먼 바다에 무언가가 희미하게 보이기는 했다.
더 배율을 높여 확인한 갈라크의 입에서 대번 욕이 흘러나왔다.
“빌어먹을, 쾌속정이잖아?”
깜깜한 물 위를 소리도 없이 미끄러지며 다가오고 있는 건 사오시안트 항구에 있던 쾌속보트 수십 대였다. 워낙 작은 보트다보니 스캐너도 바로 잡아내지 못한 모양이았다.
“비상! 비상! 해안 쪽을 지켜!”
당황한 갈라크가 고작 50명밖에 되지 않는 휘하 기병들과, 응급처치를 마치고 재정비를 하던 ‘덜 다친’ 부상병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는 다른 예비병력이 없나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전방의 북부보병들은 남부기병들을 막는 일에만도 버거운 상태였고, 조금 전까지 이곳을 지키던 크바르나들은 1선으로 가 버린 후였다.
“저어, 적 숫자가 그리 많지는 않아 보입니다, 장군님.”
“응? 뭐라고?”
황제에게 상황을 알리려던 갈라크는 함께 있는 기병소대장의 말에 막 할룩스를 켜려던 손을 멈칫거렸다. 소대장이 망원경으로 바다 위를 재차 확인하며 입을 열었다.
“갑옷을 보니 그냥 정규군 경보병입니다. 고작해야 4, 5백 정도?”
“겨우?”
머쓱해진 갈라크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이 모래언덕에는 기병만 50기 정도나 있었고, 재정비 중이던 병사들까지 모두 동원하면 3, 4백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다.
갈라크는 다른 부대에 도움을 청하려던 생각을 접고 할룩스를 살며시 꺼 버렸다.
“별 것 아니군.”
+++++++++++++++++++++++++++++++++++++++++++++++++++++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The Iron Vein 개인지 구매사이트 : http://vein.zio.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