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63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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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크는 흩어진 북부보병들, 그리고 함께 온 기병들을 손짓해 불러들였다. 함께 온 기병들은 대부분 그가 슬레이프니르에 가담할 때 함께 온 북부 게릴라부대 출신 창기병들이었다.
“저 정도는 우리 북부인들 힘으로 해결한다.”
갈라크가 부하들을 독려했다. 황제가 황태후를 지키는 동시에 좌군 후방을 통제할 권한을 주었으니 저들을 막는 것도 그의 책임이었다.
이젠 황빈이 된 베아트릭스에게 패하고 슬레이프니르의 단장 자리까지 내주었던 그였지만 북부인으로서의 자부심만은 누구보다 강한 사내였다. 옛 북부기병대의 일원으로, 그리고 오직 ‘북부와 세네피스 황후의 재기’를 위해 100년이 넘는 오랜 세월을 게릴라로서의 살아 온 그에게 북부인으로서의 자부심은 지금까지 그를 버티어 온 기둥이기도 했다.
“무기를 들 수 있는 놈들은 다 불러내.”
갈라크가 확인차 망원경으로 다시 확인했지만 결론은 같았다.
“그래, 우리끼리도 가능해.”
기병들을 데리고 싸우러 나가려던 갈라크는 기병들 사이에 섞여 있던 세네피스와 2명의 기병들을 손으로 가리켰다.
“너희 열외. 여기서 꼼짝 말고 부상병들 통제하고 있어.”
세네피스를 빼 놓은 갈라크는 함께 열외된 기병을 가까이 불러들여 귀엣말을 건넸다.
“귀한 분이시다. 목숨 걸고 지키고 있어.”
“예? 누구십니까?”
머뭇거리던 갈라크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황태후 폐하시다. 어디 떠들지 말고 비밀 단단히 지키고 있어.”
갈라크의 귀엣말에 기병의 눈이 주먹만해졌다.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던 기병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제가 목숨 걸고 지키겠습니다.”
세네피스를 맡겨놓은 갈라크는 홀가분해진 기분으로 말을 몰았다. 조금 전 발견한 쾌속 보트들이 그새 눈에 보일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는 기병들에게 손을 저으며 크게 고함을 질렀다.
“경보병들이다! 가서 한 번 밟아주자!”
20여척의 보트에 나누어 탄 500여명의 코런덤 헤네티들의 표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굳어지고 있었다. 굳건한 믿음으로 중무장한 이들이 딱히 긴장했거나 공포에 질려서는 아니었다. 그저 몇 시간 전, 자신들의 이전 몸뚱이가 타죽었던 모래언덕이 점점 시야에 뚜렷이 들어와서일 뿐이었다.
“제 시체가 남아있을까요?”
함께 가던 부장의 가벼운 물음에 사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의 이전 몸뚱이를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묵묵히 전면만 응시하던 그는 한참 후에야 질문과 별 관계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비가 오는군.”
배는 조금씩 거칠어지는 물살을 가르며 해안에 빠르게 가까워졌다. 빗방울은 아직 가늘지만 바람이 제법 거세어지고 있었다. 짙은 구름으로 달도 가려진 하늘을 멍하니 올려보던 사카가 잠시 얼굴을 찡그렸다.
“빨리 끝내야겠다.”
“동맹군 기병들이 나옵니다.”
“별 것 아니니 시끄럽게 떠들지 마라.”
더 소리를 지르려는 부장의 입을 사카가 단 한 마디로 막아버렸다.
“고작해야 50기 정도밖에 안 된다.”
사카가 손을 들어 부하들에게 전투 준비를 지시했다. 모래언덕에 있던 50여기의 기병들이 해안으로 무섭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 뒤로도 3,4백 정도 되어 보이는 북부보병들이 나오는 것 같았다.
“으음?”
스캐너로 주변을 확인하던 부장이 어깨를 들썩거렸다. 무뚝뚝하게 있던 사카가 그제야 힐끔 눈길을 주었다.
“뭐냐?”
“흐음……이게 오작동하는 게 아니라면…….”
“끌지 말고 할 말만 해라.”
“R-3-3이 잡힙니다.”
“뭐?”
웬만한 말에는 거의 반응도 없던 사카의 표정이 일순간 창백하게 돌변했다.
“확인해라. 정확한 거냐?”
“틀림없습니다. 뮤 세네피스의 신호가 맞습니다. 간뇌에 설치한 추적 장치의 신호가 잡힙니다.”
방향과 거리를 확인한 부장이 모래언덕을 가리켰다.
“저 언덕 같습니다. 마지막 남은 제물입니다.”
‘제물’을 말하는 부장의 목소리가 유달리 단호했다. 새 대신관이 오르는 순간, 새 대신관의 직계, 혹은 배우자가 아닌 나머지 자손들은 모두 헤네티들에게는 반드시 죽여야 할 사냥감이고 가장 명예로운 제물이었다. ‘제물’이라는 말에 주변 헤네티들의 눈이 순간 광기에 가까운 사명감으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가짜 대신관에게 신성한 피를 팔고 몸까지 맡겼던 자니 꼭 없애야 합니다.”
“황태후가 와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사카가 망원경을 들고 모래언덕을 신중히 관찰했다. 야전병원으로 꾸며진 모래언덕은 수백 명은 될 부상병들로 버글거리고 있었지만 딱히 VIP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하긴, 그냥 숨겼을지도 모르고, 자식이 그리워 몰래 왔을지도 모르지.”
사카가 이를 드러내며 슬쩍 웃었다. 어지간해서는 웃지 않는 그의 이런 어색한 미소에 부장들이 긴장된 표정을 지을 정도였다.
사카가 스캐너를 쥔 부장을 가리켰다.
“너희 분대가 선봉이다. 적 기병의 말을 빼앗아 타고 먼저 가서 뮤 세네피스를 찾아내 일단 생포해라.”
“죽이지 않고 말입니까? 피를 깨끗이 하기 위해 그자는 반드시…….”
“대신관께선 죽이는 걸 원치 않으실지도 모른다.”
얼마 전, 아스탈이 욱리하에서 세네피스를 납치하려 했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사카가 모처럼 발견한 제물에 잔뜩 흥분한 부하들을 대신관 핑계로 일단 저지했다.
“해안에 거의 다가갑니다!”
선두에 가는 배에서 고함이 들려왔다. 그리고 선봉대를 맡은 50여명의 헤네티들이 물에 뛰어내려서는 적 선두에서 돌격해오는 갈라크의 경기병들을 향해 칼과 석궁을 빼들고 맞받아 나아가기 시작했다.
“돌격!”
푹푹 빠지는 뻘밭을 박차며 그들이 일제히 악 소리를 질렀다. 상대가 기병들이었지만 부릅뜬 헤네티들의 눈에 공포 따위는 전혀 없었다. 도리어 반대편에서 창을 세우고 달려오는 기병들이 ‘뭐 저런 미친 놈들이 다 있나’라며 당황할 지경이었다.
“보, 보병들 맞아? 왜 이렇게 빨라?”
그들의 발걸음에서 무언가 이상한 것을 눈치 챈 갈라크가 무심결에 말고삐를 당겼다. 조금 전 자살공격 때와는 달리, 제대로 중무장한 헤네티들은 발을 붙들 무거운 인화물질도 없고, 두 번째로 와 보는 이 질척거리는 해안의 뻘이 어떤지도 이제 잘 알고 있었다.
“조준!”
거리를 확보한 헤네티들이 돌격해오는 갈라크의 기병들을 향해 석궁을 똑바로 겨누었다. 지금까지의 석궁은 중무장한 적에게는 별 효과가 없는 무기로 알려져 있었지만 그들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미쳤나?”
휘둥그레진 채 그들을 쳐다보던 기병들의 멍한 눈동자에 매섭게 날아드는 볼트가 들어왔다. 날카로운 직선을 그리며 날아든 볼트는 얼굴에서 유일하게 노출된 눈 부위, 스코프를 박살내고 안구를 단번에 꿰뚫었다.
“우악!”
눈이나 얼굴에 치명상을 입은 20명이 넘는 기병들이 얼굴을 싸쥐며 주춤거리거나 질척한 개흙 위에 무참하게 나동그라졌다.
“아, 아아악.”
뺨에 볼트를 맞은 갈라크가 얼굴을 싸쥐며 주춤거렸다. 하마터면 뒤로 밀려나 말에서 떨어질 뻔했지만 악으로 똘똘 뭉친 이 기병 지휘관은 단발로 쉽사리 쓰러져주지는 않았다.
“이씨!”
그는 얼굴에 박힌 볼트를 힘으로 확 빼 내던졌다. 손바닥과 얼굴 전체가 피로 범벅이 되었지만 이젠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일제사격으로 기병들 중 절반 가까이가 쓰러졌고, 이제 나머지 기병들의 앞으로 헤네티들이 칼을 빼들며 돌진해오고 있었다.
“아냐, 아냐.”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갈라크가 급히 손을 쳐들었다.
“물러나! 물러나! 보병들과 합류한다!”
기병들이 급히 말을 돌리는 와중에도 그들의 옆으로 볼트가 계속 쏟아졌다. 그리고 부상으로 뒤늦게 말을 돌리던 몇 명의 기병들에게는 더한 날벼락이 기다리고 있었다.
“잡아!”
기병들을 단숨에 따라잡은 20여명의 헤네티들이 비어있는 말, 혹은 후미에서 주춤거리는 기병들의 말 위로 단번에 날아올랐다. 그리고는 기겁을 하며 돌아보는 기병들의 목을 서슴없이 끊어내 버렸다. 거의 20마리에 달하는 말의 등에는 이제 동맹군 기병이 아니고 헤네티들이 올라 있었다.
“맙소사! 보통 놈들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절규를 들었지만 갈라크에게 이제 부하 기병들의 숫자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제기랄!”
갈라크가 고개를 저었다. 말을 빼앗아 탄 20여명의 적들이 자신들을 뒤쫓지 않고 옆을 빙 돌아 모래언덕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안 돼,”
세네피스를 떠올린 갈라크가 급히 말머리를 헤네티 쪽으로 돌렸다. 저들이 얼마나 무서운 적인지 따위는 이제 문제가 아니었다.
“황태후 폐하! 황태후 폐하! 황상 계신 곳으로 물러나십시오!”
말을 돌린 갈라크가 그들을 뒤쫓으며 할룩스에 대고 악을 썼다. 이와 턱이 부서져 발음도 제대로 되지 않았지만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영문도 모른 채 모래언덕 위에 있을 세네피스의 안부였다.
“황태후 폐하! 제발! 좀 들으십시오!”
악을 쓰는 갈라크의 입으로 검붉은 덩어리피가 튀어 날았다. 하지만 볼트에 맞으며 얼굴에 붙은 마이크나 수신기가 함께 부서졌는지, 전혀 송신이 되지 않는 것 않았다.
“이씨!”
다급해진 갈라크는 함께 달리는 다른 기병에게 악을 쓰고 소리쳤다.
“저기 남은 기병한테 황상 계신 곳으로 도망가라고 해! 빨리!”
갈라크가 씩씩대며 말에 최대한 속도를 붙였다. 급한 나머지 소리를 질렀지만 말을 타고 질주하는 이 와중에 그 말까지 알아들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아니, 상대가 그 소리까지 듣고도 남을 정도로 충분히 예민한 청력을 지닌 자들이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
“움?”
말을 빼앗아 타고 모래언덕으로 돌진하던 눈치빠른 헤네티 분대장이 뒤를 바싹 쫓아오는 갈라크를 힐끔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할룩스를 켜고 짧게 보고를 올렸다.
“여단장님, 목표는 지금 모래언덕 위에 있는 기병 중 하나 같습니다.”
기병 차림새로 모래언덕 위에 있던 세네피스는 언덕을 꽉 채운 부상자들을 짧게나마 둘러보았다. 별 생각 없이 부상자들을 둘러보던 그는 조금 구석진 곳에서 익숙한 두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여기까지 따라왔나?’
세네피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른팔이 잘리는 중상을 입은 채 쓰러져 있던 수나 마구스가 갑옷 차림의 세네피스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얼굴에 흰 베일을 쓰고 있었지만 세네피스는 직감적으로 그가 누군지를 바로 알 수 있었다.
‘어쩌다가 저리 되었지?’
세네피스가 저 여자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황제에게 항독소를 처방해 준 북부 출신 병리학자라는 것이 전부였다. 황제 주치의인 니사 라말라 박사가 아주 정성스런 손길로 그의 상처를 닦아주고 있었고, 다른 부상병들과는 따로 격리된 곳에서 가디언의 경호까지 받고 있었다.
‘설마 날 알아보는 건 아니겠지?’
세네피스도 질세라 그 여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투구로 얼굴을 가렸고 눈도 스코프가 덮고 있으니 알아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빤히 쳐다보고 있는 그 눈빛을 보아 그저 우연히 눈이 마주친 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무슨 이유엔지, 세네피스도 저 여자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으음.”
수나를 빤히 쳐다보던 세네피스는 뻐근한 오른쪽 팔을 무심결에 만지작거렸다. 주변의 부상병들이 웅성대는 소리를 들은 건 그때였다.
“적이 와! 적이 와!”
세네피스는 병사들이 손으로 가리키고 있는 해안가를 그제야 돌아보았다.
“저게 뭐냐.”
세네피스의 입이 떡 벌어졌다. 갈라크의 기병들을 순식간에 돌파한 ‘적군’들이 이 모래언덕을 향해 새카맣게 몰려들고 있었다. 재정비를 하던 북부보병 300여명이 얼른 대오를 이루며 모래언덕 앞을 차단하려 했지만 돌격해 오는 적군들은 맞받아 대오 따위를 이룰 생각도 하지 않았다.
“목표는 저 언덕이다!”
칼 한 자루, 석궁 하나씩을 손에 쥐고 대오에 뛰어든 적들은 북부보병들이 치켜든 창을 단번에 박살을 내 버리고 대오에 뛰어들어 놀란 병사들을 말 그대로 소 돼지처럼 사정없이 도살하기 시작했다. 누가 보기에도 전혀 상대조차 되지 않을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맙소사.”
그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겁을 먹은 부상병들이 엉금엉금 기어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보병대를 돌파하거나 기병들의 말을 빼앗아 탄 헤네티들이 피로 물든 얼굴에 살기를 내뿜으며 언덕 위로 쳐오고 있었다. 안전한 줄로 알고 있던 이 야전병원도 극단의 공포감이 일시에 휩쓸었다.
“도망가! 아무 데나 가!”
“젠장! 어디로! 어디로 가라고!”
“황상! 황상께서 오셔야 해! 그분께선 어디 계신 거야!”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못 잡은 한 병사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울부짖었다. 움직일 수 없는 중상자는 도망치는 동료들의 발목을 잡으며 도움을 요청했지만 성한 몸으로 달아나도 저들을 따돌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패닉 상태에 몰린 부상병들은 본대 동료들이 싸우고 있는 북쪽의 일선으로 기어서, 혹은 절룩거리며 몰려가면서 언덕 위는 발 디딜 틈도 없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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