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64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어제 올린 만우절 연중공지(?)를 불식시키려 이렇게 올립니다.>
사실 이번 편.......조금 잔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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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
언덕이 혼란에 휩싸이면서 당황했기는 세네피스도 마찬가지였다. 이 중요한 전투에서 괜스레 걸림돌이 되거나 아랫사람들에게 신경 쓰이는 상전이 되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지만 전투라고는 한 번도 겪어 본 일이 없는 그로서는 당장 어떻게 처신해야 할는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피하셔야겠습니다!”
함께 있던 기병이 할룩스로 들어온 갈라크의 연락을 확인하고는 세네피스가 타고 있는 말고삐를 덥석 붙들었다.
“어, 어디로?”
“상께서 계신 곳으로 가십시오!”
세네피스도 급히 말에 박차를 가하려 했지만 겁에 질려 도망치는 부상병들이나 지원 병력이 온통 뒤엉켜 제대로 말을 몰기도 버거웠다. 그런데다가 기병들의 말을 빼앗아 탄 헤네티들이 언덕을 빙 돌아 퇴로를 차단하고 있는 모양도 심상치 않아보였다.
그 많은 도망병들 사이에서 세네피스는 다시 수나 일행을 발견했다. 수나를 등에 업은 2명의 가디언들도 도망치는 병사들을 거칠게 밀어내며 황급히 물러나는 중이었다.
“저기 기병이다!”
그새 말을 탄 헤네티가 그를 발견하고는 크게 소리를 질렀다. 스캐너를 든 분대장이 신호를 확인하고는 손끝을 똑바로 가리켰다.
“저기 저놈인 것 같다!”
2명의 헤네티가 세네피스를 향해 말머리를 확 돌렸다. 그들은 쓰러져 있거나 놀라 넘어지는 부상병들을 무참하게 짓밟으며 오직 세네피스만 노리고 돌격해왔다.
“내가 막을 테니 빨리 모셔!”
세네피스를 호위하던 기병 중 한 명이 긴 창을 빼들고 그들 앞을 용감하게 막아섰지만 다른 헤네티가 그를 재빨리 피해 거리를 바싹 좁혀왔다.
“빨리요! 도망치는 병사들은 무시하십시오!”
세네피스를 재촉해 말을 달리던 기병이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 그는 눈앞에서 무언가 반짝거리는 작은 점을 보았다.
“우읍!”
헤네티가 쏜 볼트가 두 눈 사이에 정확히 명중하며 즉사한 기병은 말 옆으로 튕겨나듯 붕 날아가 떨어졌다. 동시에 그가 타고 있던 말도 순간적으로 방향을 잃고 세네피스의 말 바로 앞으로 확 뛰쳐들었다.
“이익!”
세네피스가 기겁을 하고 말을 세우려 했지만 말굽이 젖은 모래밭에 쫙 미끄러지며 그도 중심을 잃은 말과 함께 모래바닥에 사정없이 나뒹굴었다. 공중으로 붕 날아올랐던 세네피스의 몸은 흙바닥을 몇 바퀴 굴러서야 겨우 자리에 멈췄지만 바닥에 떨어진 충격으로 제정신은 아니었다.
그새 뒤를 쫓아온 헤네티가 말을 세우고 세네피스를 향해 석궁을 똑바로 겨누었다.
“운명에 순응하시죠. 뮤.”
눈에 낀 스코프가 깨진 채 바닥에 쓰러져 있던 세네피스는 눈을 똑바로 겨누고 있는 볼트 끝을 노려보며 잠시 떨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의 자존심은 절대 꺾지 않았다.
“닥쳐라, 뮤가 누군지 몰라도 난…….”
그때, 누군가 뭉그러진 발음으로 고함을 지르며 석궁을 쳐든 헤네티의 뒤로 쇄도해 들어왔다.
“이 새끼야! 감히 어딜 겨눠!”
“엉?”
‘제물’에만 집중했던 그 헤네티가 뒤를 돌아보았다. 얼굴에 괴물같이 피를 뒤집어쓴 무장의 큰 도끼가 그자의 머리를 한 번에 박살을 내고 휙 스쳐갔다. 머리가 부서진 적의 시체가 시뻘건 불길에 확 휩싸인 순간, 세네피스는 이들의 정체를 비로소 깨달았다.
“사, 사교도?”
“잡으십시오!”
헤네티를 쓰러뜨리고 달려온 갈라크가 세네피스의 팔을 덥석 잡아 말 위로 힘껏 끌어올렸다. 세네피스를 앞에 앉힌 갈라크는 자신의 큰 몸으로 그를 최대한 감싸고는 황제가 있을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모두 제 잘못 때문입니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턱이 부서진 채 엄청난 피를 쏟고 있는 갈라크는 황태후를 살려야 한다는 사명감 하나만을 빼면 제정신이 아닌 듯 보였다. 도망치는 부상병들, 헤네티들에게 쫓겨 온 병사들, 살려달라며 울부짖는 자들로 모래언덕은 거대한 도살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저기 간다! 잡아!”
뒤쫓는 헤네티들의 목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지면서 세네피스를 안은 갈라크의 손에도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세네피스는 갈라크가 갑자기 자신의 눈을 가리며 움찔하자 뒤를 돌아보려 했다.
“뭐냐?”
“아닙니다. 보지 마십시오.”
갈라크가 어눌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눈을 가린 그의 손가락 틈으로 무언가가 옆을 휙휙 스쳐 날아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때, 갈라크가 또다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뭐냐고!”
고개를 돌리려는 세네피스를 갈라크가 다시 힘으로 꽉 붙들었지만 조금 전보다 힘이 빠져 있었다. 세네피스는 자신의 어깨 위로 갈라크의 입에서 떨어진 피가 주르르 흐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무슨 일이냐니까!”
“숙이십시오!”
억지로 고개를 들려던 세네피스를 갈라크가 갑자기 힘껏 내리눌렀다. 악 소리를 내며 몸을 낮추었던 세네피스는 뒷덜미에서 무언가가 확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장군?”
고삐를 쥐고 있던 갈라크의 왼손이 천천히 밑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고개를 반쯤 숙인 세네피스의 뒤통수에서부터 흘러내린 진하고 붉은 피가 투구와 스코프를 타고 코와 턱으로 뚝뚝 떨어졌다.
“도비치 장군? 장군?”
세네피스가 다시 고개를 돌렸지만 이번에는 갈라크의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뒤를 돌아본 세네피스는 투구가 부서진 채 피를 흘리고 있던 갈라크의 얼굴, 아니 어깨 위에 있어야 할 머리를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하, 악.”
얼른 고삐를 잡은 세네피스가 순간 꽉 막혀오는 숨을 억지로 내쉬었다. 머리가 잘려나간 갈라크의 시체는 빗발처럼 쏟아지는 볼트 속에서 누더기가 된 채 여전히 그의 등 뒤를 지켜주고 있었다. 거의 열 발이 넘는 볼트가 갑옷의 약한 틈새마다 고슴도치처럼 박혀 있었다.
“잡았다!”
그새 양옆을 추월해 간 2명의 헤네티들이 세네피스의 말 앞을 확 막아섰다.
“사격 중지! 중지!”
갈라크의 목을 잘라낸 헤네티가 피 묻은 칼을 털며 뒤를 쫓는 동료들에게 손을 저었다. 세네피스는 멍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5명의 말을 탄 헤네티들이 그를 빙 에워싸고 있었다.
“도비치 장군…….”
멍해진 세네피스가 이 고집스럽고 자존심 센 충신의 이름을 다시 불렀다.
“그, 그댈 용서하겠네.”
세네피스가 아직까지 어깨에 걸쳐 있는 그의 손을 붙들며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치 그의 말을 들은 것처럼, 등에 기대어 있던 갈라크의 목 없는 시체가 천천히 옆으로 기울더니 바닥에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경솔한 나를……용서하게.”
자신의 바보짓 때문에 이리 되었다는 참담함, 자신을 지켜내고 죽은 충신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더러운 사교도들 같으니.”
스코프 너머로 보이는 헤네티들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세네피스가 이를 갈았다. 갈라크의 잘린 목에서 터져 나왔던 피가 어깨를 타고 흘러내려 온몸을 흠뻑 적시고 있었다. 헤네티 분대장은 어딘지 붉게 보이는 그의 눈동자가 얼굴에 뒤집어쓴 피 때문이려니 생각했다
“스스로의 피를 그렇게 모독하시다니, 대신관께서 섭섭해 하시겠습니다. 세네피스 빈트 다하카르. 그분 지시만 아니면 여기서 깨끗이 태워 없앴을 텐데.”
분대장이 히죽거리며 손을 뻗었다. 하지만 세네피스는 자신에게 손을 뻗어오는 헤네티 분대장의 손을 거칠게 쳐내며 이를 드러냈다.
“꺼져라.”
“앙탈은 대신관님 침대 위에서나 부리시죠.”
분대장은 이미 잡힌 제물의 저항을 너그럽게 용납하지는 않았다. 그는 세네피스의 멱살을 꽉 붙들고 바닥에 동댕이치려 했다.
“손 치우라니까!”
세네피스가 다시 고함을 지르며 분대장의 손을 꽉 붙들었다. 분대장이 다시 힘을 주어 세네피스를 쳐내려 했지만 힘에서 밀려 말에서 떨어지며 바닥에 동댕이쳐진 건 도리어 헤네티 쪽이었다.
“이크.”
선명하게 붉어진 세네피스의 눈동자와 딱 마주친 순간 당황한 분대장이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맙소사, ……눈이 붉어졌다.”
놀란 분대장이 부하들에게 물러나라며 손을 저었다. 세네피스 하나 죽이거나 제압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그의 붉어진 눈에 압도당한 그들은 차마 접근하지 못한 채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혹시 모르니 조심해. 흥분시키지 말고.”
바닥에 떨어졌던 분대장이 엉금엉금 거리를 벌리며 부하들에게 물러나라며 다시 손짓했다. 걱정이 앞선 몇몇 헤네티들은 귀를 막을 것을 허둥지둥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세네피스는 피를 뒤집어쓴 채 잔뜩 격앙된 얼굴로 그들을 돌아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냐, 그건 아닌가봐.”
잔뜩 겁먹었던 헤네티들은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헤네티를 압도하는 괴력을 발휘하기는 했지만 눈앞의 뮤가 그 이상 ‘특별한 능력’을 가진 것 같지는 않았다.
“하긴, 감히 이 따위 제물감이 가질 능력이 아니지.”
분대장의 눈짓을 받은 헤네티들이 일제히 세네피스에게 달려들어 말에서 끌어내렸다. 결국 힘에서 밀려 바닥에 나뒹군 세네피스는 귀에 연결된 할룩스로 들어온 호위대장 카토의 짧은 연락을 들었다.
“상께서 가십니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상께서 곧 가실 겁니다!”
“안 돼, 그건 안 돼.”
헤네티들에 깔려 바닥에 쓰러진 세네피스가 악을 쓰며 버둥거렸다. 모래언덕은 이미 가망이 없었고, 몸도 성치 않은 황제가 온다는 건 저승길로 뛰어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날 죽게 놔두라고!!!”
세네피스의 발버둥에 그를 깔아뭉개고 있던 헤네티 중 한 명의 목이 아드득 소리를 내며 옆으로 휙 돌아가 버렸다.
“조심하라니까!”
헤네티들이 속속 달려들어 쓰러진 세네피스를 눌러 제압하려 했지만 그들 모두의 힘으로도 무섭게 발광하는 이 제물을 제대로 통제할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뛰어든 분대장이 괴물처럼 날뛰는 세네피스의 투구를 힘겹게 벗겨내고는 목을 뒤에서 꽉 붙들어 조였다.
“안되겠다! 손목을 잘라! 손목만 자르면 돼!”
분대장의 지시를 받은 덩치 큰 헤네티 한 명이 세네피스의 왼손을 발로 꾹 밟고는 그의 손목을 칼로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으아악!”
목이 비틀린 세네피스가 한쪽 손목이 떨어져나가는 끔찍한 고통에 비명과 함께 울부짖었다. 그의 한 손을 잘라낸 헤네티가 나머지 한쪽까지 잘라내려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막 고개를 들던 그는 눈앞에서 무언가 번쩍거리며 날아오는 것을 보았다.
“익!”
그 덩치 큰 헤네티의 고개가 짧은 충격음과 동시에 뒤로 확 꺾였다. 이마 정중앙에 손도끼가 꽂힌 헤네티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뒤로 붕 날아가 떨어졌다.
“이놈들!”
사람 키만한 큰 칼을 휘두르며 뛰어든 2명의 거구들 손목에는 가디언을 뜻하는 푸른빛 팔찌가 박혀 있었다. 바로 수나 마구스의 곁을 지키라며 카렐이 붙여주었던 경호 가디언들이었다. 그때까지도 세네피스를 누르고 있던 3명의 헤네티들이 기겁을 하며 무기를 빼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싸움으로 헤네티들이 떨어지자마자 세네피스가 한 손을 더듬거리며 바닥을 기어가기 시작했다. 그때, 그의 눈앞에 낯익은 얼굴이 다시 보였다. 이미 빠져나간 줄로 알고 있던 ‘흰 베일 차림의 의사’가 다시 되돌아와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몸으로 어딜 가려고.”
수나가 허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손목이 잘린 채 쓰러진 세네피스도, 니사에게 기대어 힘겹게 앉아 있는 수나도 모두 성한 몸은 아니었다.
“이, 이이익.”
세네피스는 피를 흘리며 바닥에 엎드린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말대로, 말을 탄 헤네티들이 퇴로까지 차단하면서 이 작은 모래언덕에 있던 부상병들은 모두 시체가 되어버린 후였다. 수나가 그를 구하기 위해 되돌아온 것인지, 아니면 도망치다가 퇴로가 막혀 어쩔 수 없이 온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과정이야 어쨌든, 세네피스와 수나는 시체와 적병으로 뒤덮인 이 끔찍한 언덕 중턱에 마치 섬처럼 고립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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