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766화 (761/1,132)

< -- 766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

.

.

“물러나! 맞서지 말고 물러나!”

세네피스를 에워싸고 있던 헤네티들이 물살이 갈라지듯 좌우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헤네티들이 사라지자 카토는 비로소 세네피스의 손목이 잘려있는 모습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맙소사! 황태후 폐하! 괜찮으십니까!”

카토가 멀리 보이는 세네피스를 향해 큰 소리로 물었다. 니사가 세네피스의 갑옷을 벗기고 상처를 지혈하고 있기는 했지만 잘려나간 손목은 물론이고 헤네티들과의 결사적인 몸싸움으로 생긴 자잘한 상처도 셀 수 없이 많았다.

“곧 갈 테니 기다리십시오!”

소리를 지르던 카토는 난데없이 하늘에서 내리꽂힌 번개에 기겁을 했다. 맑을 것이라던 날씨는 보슬비 수준을 넘어서 이젠 거의 폭우가 되어 쏟아지고 있었다.

“낙뢰 조심해라!”

카토는 뒤따르는 병사들에게 주의를 주며 바닥에 장애물처럼 흩어져 있는 시체들을 피해 급히 말을 몰았다. 황태후의 손이 잘렸다는 끔찍한 보고를 황제에게 어떻게 올려야 하나 눈앞이 캄캄했다.

“폐, 폐하, 황태후 폐하께서 크게 다치신 것 같습니다! 아마 놈들이…….”

보고를 하며 달려가던 카토는 바닥에 쓰러져 죽어 있는 줄로 알았던 시체 중 하나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는 모습에 깜짝 놀라 하마터면 말에서 굴러 떨어질 뻔했다.

“뭐라고 그랬나? 다쳤다고?”

황제의 물음이 돌아왔지만 거의 20여명의 헤네티들이 벌떡 일어나 몰려들면서 일순간 당황한 나머지 대답을 할 여유조차 없었다.

“뭐야! 이놈들!”

카토가 말을 세우며 급히 창을 쳐들었다. 헤네티들이 바로 옆에 있다보니 속도와 돌격이라는 기병의 가장 큰 이점을 살릴 수가 없었다.

“공격! 창으로 잡아!”

기회를 잡은 헤네티들은 북부보병에게서 탈취한 장창으로 말을 탄 가디언들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지금껏 잠잠하던 헤네티들의 일제사격이 가디언들의 얼굴을 노리고 빗발치듯 쏟아졌다.

“폐하! 더 오지 마십시오!”

위험을 직감한 카토가 세네피스의 코앞에서 허둥지둥 말을 돌렸다. 뒤로 돌아선 그는 아직까지도 영문을 모른 채 빗속에서 계속 달려오고 있는 황제를 얼른 막아섰다.

“상황이 안 좋습니다! 잠시 물러나십시오.”

“저 앞에 내 혈통이 있다.”

“안됩니다! 적의 함정입니다!”

아직 상황을 모르는 황제가 계속 나아가려는 것을 카토가 다시 저지했다. 카토는 황제가 ‘어머니’라는 자연스런 말 대신 왜 이리 이상한 표현을 쓰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일단 그에게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장창과 빗발치는 사격이 더 큰 문제였다.

“저희가 해결하겠으니 돌아가 계십시오! 이봐!”

황제에게 날아드는 볼트를 급히 쳐낸 카토는 황제를 뒤따라 달려오는 북부보병들을 손짓해 가리켰다. 전선에서부터 쫓아온 그 십여 명의 보병들도 어느새 모래언덕 모퉁이에 거의 도착해 있었다. 그들이 황제의 후미―유일하게 뚫려있는 퇴로―로 달려오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예!”

“방패 있는 놈들은 황상께 날아오는 사격을 막아! 나머지는 황상을 빨리 뒤로 모시고……”

소리를 지르던 카토가 멈칫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보병들의 걸음이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전력 질주하는 시알피를 이렇게까지 금세 따라붙은 것도 어딘지 이상했다.

“아니다, 너희들 모두 뒤로 물러서서…….”

카토가 급히 명령을 수정했다. 하지만 그들은 들은 척도 않은 채 등에 메고 온 창을 길게 늘여 앞을 겨누었다.

“걸렸다!”

“무슨 소리야?”

카렐이 그제야 뒤를 휙 돌아보았다. 되돌아 빠져나갈 퇴로가 어느새 ‘가짜 북부 보병들’에게 완전히 막혀 있었다. 세네피스를 구하러 달려왔던 카렐 일행 역시 적들 사이에 꼼짝없이 고립된 순간이었다.

“공격해!”

분대장의 손짓에 사역병 차림새의 병사가 도끼를 어깨 위로 번쩍 쳐들고는 시알피의 등 뒤로 훌쩍 뛰쳐올랐다. 시민으로는 도저히 흉내도 낼 수 없는 빠른 몸놀림이었다.

“이 가짜 대신관놈!”

그 말을 알아들은 카렐의 그레이오팔 눈동자가 순간 번쩍 뜨였다.

“뭐라고?”

적의 실루엣을 본 카렐이 건틀렛을 낀 왼팔을 번쩍 들어 도끼를 받아냈다.

“익!”

도끼를 휘두른 병사의 신음소리와 카렐의 짧은 비명이 동시에 울렸다. 도끼에 맞은 왼손의 두꺼운 건틀렛이 쩍 소리를 내며 쪼개졌고, 동시에 그자의 도끼도 날과 자루가 부서지며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감히 누구 앞에서!”

이 잔혹한 황제의 오른손이 첫 공격에 실패한 적의 뒷덜미를 덥석 움켜쥐었다. 병사가 버둥거리며 그의 큰 손을 쳐내고 빠져나가려 했지만 눈은 멀었어도 괴물 같은 힘만은 여전했다.

“알려줘서 고맙다!”

카렐이 괴성을 지르며 이 병사를 땅바닥에 무자비하게 내리꽂았다. 그의 괴력에 밀려 땅바닥에 내리꽂힌 병사의 머리가 투구와 함께 수박처럼 산산이 으깨어지며 모래바닥에 쫙 흩어졌다.

“폐하! 오른쪽을 조심하십시오!”

카토와 가디언들이 병사로 변장한 헤네티들을 재빨리 흩어놓았지만 나머지 두 명이 그 사이를 뚫고 황제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오른쪽?”

카렐이 안장 옆에 꽂아놓았던 ‘나즈라의 검’을 빼 힘껏 휘둘러보았지만 눈앞에 아른거리는 적의 실루엣에 대고 헛손질을 한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쏟아지는 빗발을 가르며 휙 도는 위협적인 검풍에 적들 역시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꺼지라고!”

다시 칼을 휘둘러 그들을 쫓아내려던 카렐은 말이 휘청거리는 것을 느꼈다.

“시알피?”

카렐이 말의 목을 확 껴안았다. 그는 알지 못했지만, 쏟아지는 사격의 와중에 시알피의 마갑 틈새로 이미 두 발이나 되는 볼트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거친 숨소리를 내며 휘청거리던 시알피는 주인을 실은 채로 옆으로 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익!”

안장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카렐이 칼을 쥔 채로 흠뻑 젖은 모래밭에 나동그라졌다.

“하, 악.”

바닥에 떨어진 충격에 의식이 흐려진 카렐이 멍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보았다. 쓰러진 그의 얼굴 위로 잔뜩 굵어진 찬 빗방울이 쏟아지고 있었다. 누군가의 비명, 황제를 지키라는 필사적인 외침이 아득해진 그의 귓가를 웅웅거리며 흔들었다.

“대신관……바즈라마구스……아프라시아……다하카르…….”

또다시 짧은 번개가 치며 주변을 하얗게 밝혔다. 넓은 전장에 흩어져 필사의 대결을 벌이고 있던 양측 수십만의 장병들이 엄청나게 큰 낙뢰에 일순간 공포에 휩싸이며 몸을 움츠렸다.

“아드함 크사야시아 바즈라카……내 이 땅의 위대한 제왕이로되…….”

카렐은 번개의 잔상이 어른거리는 밤하늘을 올려보며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번개에 뒤이어 찢어지는 천둥소리가 전장을 거세게 울렸다.

“폐하! 일어나십시오! 위험합니다!”

천지가 흔들리는 것 같은 천둥소리 사이에서 귀에 익은 카토의 외침이 들려왔다.

“학, 학.”

정신이 퍼뜩 든 카렐이 바닥을 짚고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는 칼에 기대 몸을 세우고 앞을 응시했다. 사방에서 헤네티들이 밀어닥치면서 그들 너머에 있는 세네피스의 모습이 보이다 말다 하고 있었다. 2명의 가디언들이 세네피스와 수나를 양쪽에서 에워싼 채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었지만 가망은 없어보였다.

앞을 거의 못 보는 그였지만 희한하게 세네피스와 수나의 모습, 그들의 실루엣만은 놀랄 만큼 똑똑히 보였다. 사방에서 빗발치는 볼트와 번쩍거리는 무기들 사이에서 세네피스는 바닥에 누워 여전히 떨고 있었다. 그때, 세네피스도 고개를 돌리며 황제를 돌아보았다. 카렐의 모습을 본 세네피스가 손을 저으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누워 계십시오, 황태후 폐하, 위험합니다!”

니사가 기겁을 하며 세네피스를 다시 바닥에 내리누르려 했지만 그는 손목까지 잘린 마른 몸 어디서 괴력이 나는지 이 조그만 의사를 옆으로 확 밀어내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는 몸을 반쯤 일으키며 카렐에게 다시 소리를 질렀다.

“가라고요!”

그는 빗발치는 볼트 속에서 몸을 세우고는 가늘고 갈라진 목소리로 목의 핏줄이 보일 만큼 큰 소리를 질렀다.

“난 여기서……읍!”

높은 톤으로 소리를 지르던 세네피스가 갑자기 하던 말을 뚝 멈추었다. 그는 몸을 일으킨 채 멍하니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니사의 울부짖는 비명소리, 가디언과 카토의 고함이 축축한 빗속을 처절하게 울리고 있었다.

세네피스가 가슴을 더듬었다. 어디서 날아왔는지는 몰라도, 짧고 굵은 볼트가 그의 명치 왼쪽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뭐 하는 짓이야! 무슨 짓을 한 건지 아나!”

후방에서 뒤늦게 달려온 여단장 사카가 경악을 하며 악을 썼다. 아스탈이 ‘무사히 데려오라’며 지시했던 목표물이 어처구니없는 오발에 맞아 죽어가고 있었다.

“사격 중지! 중지!”

사카가 손을 저었다. 이 뜻밖의 상황에 놀란 가디언과 헤네티들은 순간 싸우는 것조차 잊은 채 자리에 굳어 있었다. 예상치도 못한 사건에 뒤이어 ‘묵시적인 휴전’과 함께 짧은 침묵이 이 전장에 흘렀다.

“아, 악.”

세네피스가 가슴을 짚은 채 고개를 들어 황제를 쳐다보았다. 정말로 보고 있는지는 몰라도, 황제의 그레이오팔도 그를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황제를 멍하니 쳐다보는 세네피스의 눈에 맑은 눈물이 가득 고였지만, 같은 시간 그를 쳐다보는 황제의 눈에는 소름끼치는 붉은 핏빛이 번지고 있었다.

“비키라고!”

카렐이 앞을 막는 카토를 거칠게 밀어내며 무작정 앞으로 나섰다. 가슴에 볼트가 박힌 세네피스의 몸이 천천히 앞으로 기우는 모습이 그의 핏빛 그레이오팔 눈동자에 선명하게 반사되고 있었다.

“폐하! 물러나십시오!”

카토가 황제를 몸으로 막으며 뒤로 밀어내려 했지만 그는 돌덩이처럼 굳은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감히 내 땅 위에서…….”

카렐이 더러워진 두 손을 움켜쥐며 파르르 떨었다. 카렐의 손끝이, 그의 입술이 파랗게 떨리고 있는 모습을 본 니사가 입을 가리며 고개를 저었다. 카렐의 눈은 이미 완전히 선홍색으로 변해 있었다.

“맙소사!”

파랗게 질린 니사가 수나의 얼굴을 품에 감싸며 급히 바닥에 엎드렸다.

“엎드려요! 귀하고 눈 막고 아무 것도 보거나 들으면 안 돼요!”

겁에 질린 코런덤 헤네티들 중 몇이 공격을 멈추며 주춤거렸고, 나머지는 지휘관과 카렐을 번갈아 쳐다보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공격……해도 되는 거야?”

지금까지 쌓아 온 투철한 믿음과 눈앞의 광경 사이에서 순간적인 혼란이 그들 사이로 번졌다. 그때, 누군가의 외침이 그들의 귀를 때렸다.

“속지 마! 저 혈통은 아무 능력도 없어!”

조금 전 세네피스를 거의 잡을 뻔했던 헤네티 분대장이 칼을 빼들고 용감하게 앞장서 카렐에게 뛰어나갔다. 황제의 숨을 끊기 위해 힘차게 돌격하는 헤네티들 사이로, 세네피스가 피로 젖은 손으로 땅바닥을 맥없이 짚으며 앞으로 기울었다.

“공격해!”

분대장의 돌격에 고무된 헤네티들이 일제히 공포감을 내버리고 다시 무기를 쳐들었다. 집단의식에 사로잡힌 그들의 힘찬 함성, 굵은 빗소리 사이로 니사의 너무도 미약한 외침이 스며들었다.

“카토! 귀 막고 눈 가려요! 제발 날 믿어요!”

황제에게 밀려 바닥에 쓰러져 있던 카토가 니사 있는 곳을 휙 돌아보았다. 머뭇거리던 그는 따라온 가디언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엎드려! 시키는 대로 해!”

“이 쓸모없는 것들…….”

사방에서 벌떼처럼 몰려드는 수백의 헤네티들 사이에 혼자 우뚝 선 카렐이 두 주먹을 꽉 움켜쥐고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그는 붉은 눈을 크게 부릅뜨며 온몸이 터져라 굵고 큰 포효를 토해냈다.

“내 땅 위에서 다 사라져 버려!”

하늘을 향해 치켜든 황제의 핏발선 목구멍을 타고 피가 터져 나왔다. 동시에 그의 무시무시한 포효가 몰아치는 폭풍우를 뚫고 이 작은 모래언덕을 휩쓸었다. 그에게 달려들던 수백 헤네티들의 커진 눈동자 사이로, ‘공포’의 기운이 땅을 흔드는 울림을 타고 무섭게 번져나갔다.

그리고 소름끼치는 고요함이 언덕 위를 덮었다.

“우, 읍.”

황제의 코앞까지 달려들었던 ―또한 세네피스의 손목을 자르라고 명령했던― 분대장 헤네티의 입과 코, 귀에서 가는 핏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동공이 완전히 열린 채 황제를 우두커니 쳐다보던 그는 조금씩 앞으로 기울더니 젖은 모래밭에 철석 소리를 내며 쓰러지고 말았다. 숨이 끊긴 그의 눈과 코, 입과 귀로 피가 쏟아져 바닥에 고인 빗물 사이로 번져나갔다.

뒤이어 황제에게 몰려들던 수백의 헤네티들이 무기를 떨어뜨리며 젖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자신들이 흘려놓은 경악스러운 붉은 핏물 위에 하나 둘씩 힘없이 얼굴을 처박았다.

++++++++++++++++++++++++++++++++++++++++++++++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The Iron Vein 개인지 구매사이트 : http://vein.zio.to/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