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67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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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불명의 충격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모래언덕 위에는 쏟아지는 겨울비만큼이나 차가운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폐하, 폐하?”
흙탕물 구덩이에 머리를 처박은 덕분에 운 좋게 화를 피한 카토가 고개를 힘겹게 들었다. 머리는 깨질 듯 무거웠고 속이 울렁거려 내장까지 토해내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사방에서 하나둘씩 쓰러져 죽어가고 있는 코런덤 헤네티들은 무언지 몰라도 더한 충격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된 거지?”
카토가 억지로 침을 삼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헤네티들이 죽인 시체들로 가득하던 이 모래언덕은 이제 죽었거나 숨이 덜 끊어져 꿈틀거리고 있는 헤네티들로 또 한 겹 덧씌워져 있었다.
“폐하?”
일어나는 것을 포기한 카토가 억지로 고개를 더 쳐들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쓰러진 중간에서 황제는 여전히 홀로 우뚝 서 있었다. 비에 흠뻑 젖은 채 세네피스를 쳐다보고 있는 그의 흐린 눈동자에는 조금 전의 붉은 빛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카렐이 세네피스에게 한 손을 뻗으며 무거운 걸음을 내디뎠다.
“제발 가지 말라고.”
“폐하, 위험합니다.”
카토가 말리려 했지만 굳이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탈진한 채 아슬아슬하게 몇 걸음 걷던 황제는 바로 앞에서 죽은 헤네티 분대장의 시체에 발이 걸리며 맥없이 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괜찮으십니까?”
카토가 물었지만 쓰러진 황제는 질척한 땅바닥에 모로 누운 채 거친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별다른 외상은 없어 보였지만 그도 무언가에 완전히 탈진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제발, 그대로 계십시오.”
바닥을 기어 황제에게 다가가려던 카토는 조금 떨어진 곳에 쌓인 헤네티들의 시체 중간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을 보았다. 위치로 보아 아군이 있던 곳은 아니었다.
“저건 뭐야.”
불길함을 느낀 카토가 다시 일어나려 용을 썼지만 서는 건 고사하고 머리를 가누는 것도 어려웠다. 가까스로 목숨은 건졌지만 황제 바로 근처에서 그 충격을 그대로 받아내서인지 후유증은 심각했다.
그때, 그곳에서 온몸에 진흙을 뒤집어쓴 한 명이 몸 위에 쌓인 헤네티들의 시체를 밀어내며 기를 쓰고 일어나는 모습이 보였다. 누군지 몰라도 젖은 케이프로 얼굴을 돌돌 말고 있던 덕분에 목숨을 건진 듯했다.
“젠장.”
자리에 선 그 남자는 자신의 목숨을 지켜 준 천 쪼가리와 깨진 투구를 옆으로 휙 내던졌다. 충혈된 눈에 코와 귀에서 가는 핏줄기가 비치고 있었지만 여기서 그나마 가장 성한 것만은 분명했다.
“저놈…….”
카토는 투구 밑에서 나타난 저자의 얼굴이 어딘지 낯익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로 몇 시간 전, 황제가 불붙은 나무막대로 마지막에 찔러 죽였던 그 악질 ‘좀비’ 사카였다.
“폐하, 폐하.”
당황한 카토가 쓰러진 황제에게 상황을 알리려 했지만 황제는 힘없이 눈동자만 움직일 뿐 몸은 움직이지 못했다. 사카는 둔한 걸음으로 황제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제발, 일어나십시오.”
카토가 네 발로 악을 쓰며 몸을 일으켰다가 도로 쓰러지고 말았다.
“젠장!”
카토가 말을 안 듣는 몸에 대고 짜증을 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한 손에 칼을 쥔 헤네티는 둔하지만 침착한 걸음으로 황제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 역시 다리의 힘이 빠져 걸음도 위태로웠지만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눈빛 하나만은 여전했다.
사카가 칼을 빼들며 저주를 퍼부었다.
“이 가짜야, 이젠 끝날 때가 됐어.”
“누가 가짜냐?”
카렐도 손으로 바닥을 디디고 기를 쓰며 일어나려 했지만 그저 상체만 조금 일으킨 것이 고작이었다. 사카는 조금 전 말뚝에 찔려 죽었던 끔찍한 기억을 되새기며 이 무기력해진 목표에 저주를 퍼부었다.
“그분께서 네 손 요리를 드시고 싶어 하신다.”
사카가 자꾸 힘이 빠지는 손아귀에 칼을 고쳐 쥐었다. 구질구질하게 적에게 협박 따위를 하는 성격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당장이라도 의식이 꺼질 것 같은 판국에 뭐라도 떠들어야 기절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때, 뒤쪽에서 듣기 싫게 끓는 하이 톤의 여자 목소리가 사카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뭐가 어쩌고 어째?”
사카가 움찔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이크!”
고개를 돌렸던 그는 무언가 번쩍거리는 것이 날아오는 모습에 깜짝 놀라 뒷걸음치려 했다. 하지만 힘이 빠진 다리가 꼬이면서 중심을 잃으며 어처구니없이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의 옆을 휙 스쳐 날아간 단검은 바닥을 튀기며 어디론가 한참 멀어졌다. 하지만 힘없이 빗나가버린 단검보다 더 당혹스런 상황이 그의 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말도 안 돼.”
눈이 주먹만해진 사카가 믿어지지 않는 광경에 고개를 저었다. 진흙과 빗물로 범벅이 된 웬 마른 사람 하나가 하얀 이를 드러내고 유령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왜 안 죽었지?”
놀라는 일이라고는 거의 없던 그였지만 이번만은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 조금 전 죽은, 아니 죽었어야 할 세네피스가 두 발로 서 있었다.
“다시 지껄여라. 뭘 한다고?”
세네피스는 가슴에 박혀 있는 볼트를 홱 빼서는 다시 사카에게 집어던졌다. 볼트를 빼내며 고통스런 신음소리를 냈지만 그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치명적인 부상은 접어두고라도 무언가로 귀나 눈을 막지도 않았으니 당연히 죽어야 했지만 그는 그 모든 충격을 다 받아내고도 분명히 산 채로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세네피스는 남아있는 오른손에 창을 주워들고는 바닥에 흩어진 시체들을 짓밟으며 사카에게 비틀비틀 다가왔다.
“도대체…….”
넘어졌던 사카가 비틀거리며 겨우 일어섰지만 이미 충격을 입어 균형감각과 힘을 잃은 몸으로는 제대로 서는 것만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1년도 못 살 거라던 지하 감방에서 내 어떻게 130년을 버텼는데.”
세네피스의 선명한 그레이오팔에 붉은 핏발과 독기가 곤두서 있었다. 그가 신음소리와 함께 내뿜는 입김이 차가운 빗속에 하얗게 꼬리를 남겼다. 눈앞에 있는 헤네티는 평상시라면 덤빌 엄두도 내지 못할 상대겠지만 지금 이 순간 그런 사실 따위는 아무 상관없었다.
“날 백 번 죽여도 상관없지만 저애는 못 건드려!”
세네피스가 주춤거리는 사카를 향해 한 손으로 창을 힘껏 휘둘렀다. 어설프고 투박한 놀림이었지만 맞으면 다치기는 매한가지였다. 창을 피해 뒤로 물러나 반격하려던 사카는 무언가에 발목이 걸리며 순간 자리에서 휘청거렸다.
“뭐냐.”
놀란 사카가 아래를 휙 내려다보았다. 그새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온 카토가 두 손으로 그의 발목을 꽉 붙들고 있었다.
“빨리 찌르십시오! 찌르고 물러나세요!”
움직일 수도 없게 된 사카가 기를 쓰고 발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같은 순간, 카토가 발목을 확 당기면서 도리어 중심을 잃으며 뒤로 쓰러지고 말았다.
“놔!”
빠져나가려 저항하는 사카의 얼굴 위에서 세네피스가 치켜든 창날이 번쩍거렸다.
“너, 너도 그분과 같았나…….”
“닥쳐.”
악만 남은 세네피스가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사카의 목에 긴 창을 힘껏 내리꽂았다. 사카는 세네피스를 노려보며 무어라 말을 더 하려 했지만 구멍난 목구멍에서는 공기 빠지는 소리만 났을 뿐이었다.
이를 악물고 세네피스를 노려보던 사카의 고개가 뒤로 천천히 기울며 다시 불길에 휩싸였다. X-1-1 사카의 19번째 육체는 지금껏 그가 스쳐간 몸 중 가장 짧은 수명을 기록한 채 이렇게 ‘폐기’되고 말았다.
“휴, 우.”
불타고 있는 사카의 시체를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던 세네피스는 어느 순간 기운이 빠지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정말……괜찮으신 겁니까?”
카토가 팔을 뻗어 세네피스의 손을 붙들었다. 사실 그 역시도 눈앞에 살아 있는 세네피스의 모습을 보면서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손목까지 잘리고 피도 많이 흘려 의식이 오락가락하는 듯 보였지만 조금 전 일어난 불가사의한 일에 영향은 받지 않은 것 같았다.
“급소에 맞으셨는데…….”
카토가 세네피스의 상처를 확인했다. 분명 볼트는 급소에 박혀 있었지만 세네피스는 여전히 살아있었다. 그제야 제정신이 드는지, 세네피스는 주변을 둘러보며 어리둥절한 얼굴로 한술 더 떴다.
“사람들이 도대체 왜 쓰러졌지?……이런, 황상, 황상?”
세네피스가 카토의 손을 떨치고는 황제를 향해 바닥을 기어갔다. 여전히 기운을 찾지 못한 카렐은 겹겹이 쌓인 헤네티의 시체에 기대 힘없이 앉아있었다. 황제는 잘 보이지도 않는 큰 눈을 껌벅거리며 피로 젖은 세네피스의 가슴을 손으로 더듬어 보았다.
“허상일지언정……제발 떠나지는 마십시오.”
카렐의 손끝으로 틀림없는 심장박동이 전해져왔다. 세네피스가 그의 가슴에 몸을 맡기며 자신의 온기까지 확인시켜 주었지만 카렐은 여전히 멍한 표정이었다.
“어떻게 된 건지 모르지만…….”
카렐은 어깨에 걸치고 있던 늑대 가죽을 풀어 빗물에 흠뻑 젖은 세네피스의 몸에 덮어주었다.
“덜 아플 겁니다.”
카렐은 어깨에 기대어 있는 그를 꼭 안아주며 뺨에 입술을 가져갔다. 조금 전 수나에게서 있었던 일이 반복된다면, 그리고 니사가 말해준 대로 서로의 존재에서 고통을 잊는다면 이렇게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세네피스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황상?”
어지간해서는 이런 애정 표현을 하지 않던 그의 이런 행동에 세네피스가 지레 깜짝 놀랐다. 스스로는 깨닫지도 못했지만, 그는 이미 손목의 지독한 고통을 잊고 있었다. 카렐이 세네피스의 눈가에서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내가 지킵니다…….”
카렐이 퀭해진 눈을 힘없이 껌벅거리며 짧은 한 마디를 들릴 듯 말 듯 덧붙였다.
“그날이 올 때까지는 말입니다…….”
카렐의 마지막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세네피스가 황제의 가슴에 다시 얼굴을 묻었다.
“날 두고는 못 가십니다.”
진흙과 피로 온몸이 더러워진 이 두 명의 그레이오팔은 서로 모순된 말을 중얼거리며 시체 산이 되어버린 작은 모래언덕 꼭대기에서 이렇게 꼭 껴안고 있었다.
“폐하, 저기 낙타병들이 옵니다.”
가까스로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앉은 카토가 멀리 북쪽을 가리키며 더듬더듬 말했다. 모래언덕 북쪽에서 서둘러 달려오던 5백의 낙타병들도 정체모를 충격에 잠시 아수라장이 되었지만 다행히 거리가 먼 덕분에 큰 피해는 모면한 듯 보였다. 눈치 빠른 하지즈 장군은 그 와중에 낙마하거나 쓰러져 신음하는 병사들을 그대로 놓아둔 채 일단 무사한 병사들만 추슬러 달려오고 있었다.
“뒤에서는 근위대도 오고요.”
카토는 모래언덕 남쪽의 해안선―바로 조금 전 헤네티들이 상륙했던―도 확인했다. 특등급 가디언 타크마가 지휘하는 1개 연대의 근위대가 탄 배가 해안선에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저 빌어먹을 근위대 놈들, 이제야 오냐.”
카토가 옆에 떨어진 누군가의 투구를 옆에 휙 내던지며 버럭 화를 냈다. 긴장도 풀리고, 지금껏 이 호전적인 황제를 지키기 위해 좌충우돌하느라 기진맥진해진 그도 결국 바닥에 다시 힘없이 누워버렸다.
“저건 또 뭐야?”
바닥에 누웠던 카토가 다시 바닥을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황제가 이곳에서 필사의 싸움을 벌이는 새, 이번엔 카산드라 경이 지휘하는 5천의 남부보병대가 동맹군의 혼란통을 교묘하게 빠져나와 이곳으로 접근해오고 있었다.
“빌어먹을, 설상가상이네. 폐, 폐하, 북쪽에서 적이…….”
깜짝 놀란 카토가 그곳을 가리키며 뭐라 말을 하려 했지만 황제는 여전히 세네피스를 안은 채 기다렸다는 듯 먼저 입을 열었다.
“상륙하는 근위대에 전원 위장포를 입으라고 해라.”
“예?”
카렐이 세네피스를 품에 안은 채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제 전투를 끝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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