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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768화 (763/1,132)

< -- 768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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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네티들이 모래언덕을 헤집고 있을 무렵, 5천의 보병대를 거느리고 카렐이 있는 좌군을 치러 오고 있던 연합군 본대 사령관 카산드라 경 역시도 황제가 있는 곳 후방이 엉망진창이 된 광경을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허, 양쪽 군대 후방이 다 난리법석이구나.”

말을 세운 카산드라 경이 망원경을 눈에서 떼며 헛웃음을 지었다. 동맹군 좌군 후방의 모래언덕이 난데없는 기습으로 뒤집어진 건 그에게도 생각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적 황제가 수습하러 직접 간 것 같습니다.”

부장 중 한 명도 망원경으로 모래언덕을 확인하며 덧붙였다.

“그런데 어느 부대가 이렇게 기가 막힌 타이밍에 적 후방을 친 거지?”

“모르겠습니다. 해상을 타고 잠입한 근위대 아닐까요?”

“젠장, 확인할 수가 있나.”

카산드라 경이 짜증을 냈다.

“이봐, 쿠베 놈한테 대답이 왔나?”

“잘 모르겠답니다. 항구나 시가지에 있던 남부 부대가 독자적으로 움직인 것 아니냐고 묻던데요? ……성 안쪽의 제롬 공과도 연락이 끊어져서 그쪽도 상황을 제대로 파악 못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거 미치겠네.”

카산드라가 고개를 저었다. 성벽이 무너지고, 시가지가 불바다가 되고, 항구까지 엉망진창이 되어버리면서 근위대 지휘부도 지금 상황을 제대로 파악조차 못 하는 모양이었다. 카산드라 경도, 성 안쪽의 쿠베도 제롬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게 근위대 소식을 전한 부장이 볼멘소리를 했다.

“이대로는 근위대와 전반적인 작전 조율을 할 수가 없습니다.”

“쳇, 어느 쪽이든 알 게 뭐야.”

카산드라 경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전방을 살폈다.

“우리야 카렐 놈 죽이고 이기기만 하면 되지.”

그는 현실주의자의 면모를 드러내며 뒤따라오는 자신의 보병대를 힐끔 돌아보았다.

“다 집결한 거냐?”

“적 전방에 ‘검은 사신부대’가 투입되면서 우리 기병대가 박살이 나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정예병인 것 같은데 빨리 도와줘야…….”

“나도 보고 있다. 그런데 지금 적이 물러나고 있지 않나?”

카산드라 경이 북부보병대를 가리켰다. 황제가 모래언덕을 지키기 위해 물러나면서, 지금까지 악으로 깡으로 위치를 지키던 북부보병과 검은 사신부대, 크바르나도 황제를 따라 조금씩 뒤로 퇴각을 하고 있었다.

“이거 지금 보니 놈들 사이에 조금씩 구멍이 나는군.”

카산드라 경이 동맹군 좌군과 우군 사이를 가리켰다. 플라칼 가가 주축을 이루고 있는 중군은 여전히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지만 황제가 이끄는 좌군은 적은 숫자로 계속 압박을 당하고, 동시에 후방 공격까지 당해 결국 못 버티고 물러나는 중이었다. 그렇다보니 양군 사이에 조금씩 틈새가 벌어지고 있었다.

베테랑 카산드라가 이런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적은 숫자로 오래 싸우다보면 자기네도 모르게 결국은 저렇게 되고 말지. 저래서 숫자가 무섭다는 거야. 예측보다 대응이라고 했던가.”

카산드라 경이 자잘한 주름이 진 입가를 만지작거리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500살이 넘은 베테랑 무장답게, 그는 눈앞에 펼쳐진 절호의 기회를 어떻게 하면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을지 바로 응용할 능력이 있었다.

“이런 타이밍을 놓칠 수야 있나.”

카산드라가 히죽거리며 갑자기 말에 속도를 붙였다.

“무거운 군장을 모두 벗어라. 쐐기꼴로 진형을 바꾸고 일제 돌격한다.”

“예?”

“놈들이 수습하기 전에 저 틈새로 돌격해서 놈들을 두 조각을 낸다. 봐, 뒤에 아무도 없잖나.”

말에 속도를 붙이는 카산드라 경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동맹군의 대오 중간에 큰 구멍이 뚫려 있었고, 크바르나와 낙타병부대까지 모조리 투입되면서 이제 동맹군에는 예비병력도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동맹군 중앙을 토막내 끝장을 낼 절호의 기회였다.

“가자!”

카산드라 경이 앞장서자 기수들이 물을 먹어 잔뜩 무거워진 깃발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리고 명령을 받은 5천의 남부 정예보병들은 무거운 짐을 땅바닥에 풀어놓고 보무도 당당하게 함성을 지르며 돌진하기 시작했다.

“목표는 저 모래언덕이다! 대오보다 속도다! 따라와!”

카산드라 경과, 그를 따르는 200여명의 지휘부는 동맹군 좌군 측면을 스치며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그들의 뒤를 따라 5천의 보병들이 틈새를 교묘하게 파고들며 돌격을 시작했다.

선봉에서 혈전을 벌였던 크바르나들은 ‘모래언덕 앞까지 물러나라’는 황제의 명령에 따라 북부보병대에 일단 1선을 내주고 막 뒤로 물러나려던 참이었다. 후미에 새 방어선을 치기 위해 달려가던 그들은 멀리 모래언덕 위에서 벌어진 상황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세상에.”

코런덤들이 말 그대로 ‘쓸려나가는’ 모습을 확인한 아샤드 경이 자기도 모르게 이마를 짚으며 자리에 꿇어앉았다. 함께 가던 4백의 크바르나들도 질척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이 날만 기다렸는데.”

아샤드 경이 빗물이 잔뜩 고인 질척한 뻘밭에 입을 맞추고는 여전히 사나운 하늘을 향해 얼굴을 쳐들었다.

“당신을 이렇게 당당히 올려보는 게 대체 얼마만입니까!”

이따금 번개가 비치는 하늘을 향해 그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는 입을 크게 벌리고 빗물을 입 안에 받아 꿀꺽 삼켰다. 한때는 가망도 없어 보였던 무언가를 위해 백 년이 넘도록 끈질기게 쌓아 온 인내의 결과가 지금 그와, 부대원들의 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분의 뜻이 이루어져간다.”

아샤드 경이 칼을 움켜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옆을 보십시오!”

부장의 고함에 아샤드 경이 고개를 휙 돌렸다. 카산드라 경이 이끄는 200여명의 지휘부 무장들을 선두로, 무거운 무장을 벗어던진 5천의 남부 정예보병들이 이젠 시체산에 더 가까워진 모래언덕에 대오도 반쯤 무너뜨린 채 맹렬히 돌격하고 있었다.

“적이 좌군과 중군 사이를 돌파했습니다!”

아샤드 경이 보고를 위해 황급히 할룩스를 켰다. 하지만 그가 먼저 연락을 보내기 전에, 황제 쪽에서 들어온 연락이 먼저 할룩스를 울렸다.

“아샤드 레즐린 경.”

황제는 무릎 위에 세네피스를 안은 채 고개를 반쯤 숙이고 땅바닥에 앉아있었다. 그는 완전히 탈진한 모습이었지만 아샤드 경에게는 아주 익숙한 것이었다.

“예, 말씀하십시오.”

아샤드 경은 다시 자리에 꿇어앉으며 가슴에 X자로 손을 겹쳤다. 제국의 정식 인사법은 아니지만, 이번만은 꼭 이렇게 경례를 올려야 할 것 같았다. 카렐도 그런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할 뿐 뭐라 하지는 않았다.

아샤드 경이 바닥에 이마를 대며 말했다.

“지금 남부보병대가…….”

“안다.”

“어찌할지 명을 주십시오. 지시해 주시면 저희가 뒤따라 돌격해서 붙들어 놓겠습니다. 저희 모두가 몰살당해도 무방하니…….”

“내가 운이 좋은 건지, 무장들의 능력이 좋은 건지는 모르겠다.”

“예?”

“너흰 살아남아서 타고난 역할을 해 주는 게 충성이다.”

순간 아샤드 경의 눈에 힘이 확 들어갔다. ‘타고난 역할’이라는 말의 저변에 숨은 뜻을 눈치 챈 그는 다시 바닥에 이마를 가져가며 반쯤 울먹이는 소리로 대답했다.

“이 날만 기다렸습니다.”

“카산드라 년의 보병대는 내게 오도록 놔둬라. 하지즈 장군의 낙타병이 옆에서 도울 거다. 네가 뒤에서 적 지휘부를 쳐라. 카산드라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앞으로 나오지 않는 습관이 있다.”

“사로잡으려 하십니까?”

“구더기 살려놔야 파리가 될 뿐이다.”

황제는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샤드 경이 칼을 꽉 쥐며 힘 있게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고개를 든 그는 황제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개인적인’ 말을 꺼냈다.

“살이 많이 빠지셨습니다.”

“내가?”

카렐이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독 때문에 고생을 하면서 살이 많이 빠지기는 했지만 조금 전만 해도 흉하지 않을 정도로는 살이 붙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거의 해골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두 뺨이 움푹 패 있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에 카렐 스스로도 당황했을 지경이었다.

“카산드라와 쿠베 놈의 살점을 한 입씩 먹으면 돼.”

“자, 잠깐, 저게 어떻게 된 거지?”

황제가 있는 모래언덕을 향해 신나게 돌격하던 카산드라 경은 잠시 말을 세우고는 눈을 비볐다.

“지금 내가 헛것을 본 거냐?”

그는 고개를 몇 번 흔들고는 벗었던 스코프를 다시 눈에 끼웠다. 하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그가 돌격을 시작할 때만 해도 정체불명의 병력이 휩쓸고 있던 모래언덕 위는 몇 명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을 빼면 잠깐 새 텅 비어있었다.

“글쎄요.”

함께 가던 지휘부 장교들까지도 당황한 표정으로 전방을 살폈다. 해안 모래가 조수 간만에 쓸려와 만들어진 그 길고 야트막한 모래언덕 위에는 지금은 온통 시체뿐이었다.  고작해야 3백 남짓 되어 보이는 낙타병들이 그 앞에 진을 치고는 있지만 보병대로 밀어붙이면 바로 뚫릴 듯 보였다.

“저게 카렐 놈 맞지?”

카산드라 경이 모래언덕 꼭대기를 가리켰다. 검은 망토를 어깨에 두른 장신의 한 사람이 파란빛이 감도는 칼을 한 손에 쥔 채 장대비 속에 혼자 우뚝 서서 이쪽을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딘지 기분이……좋지 않은데요.”

부장 중 한 명이 어깨를 움츠리고 부르르 떨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른 병력은 분명히 없지?”

괜스레 불안한 느낌이 든 카산드라 경이 부장에게 다시금 확인했다.

“이미 파악한 병력 외에는 없습니다. 해안에 배가 몇 척 있지만 조금 전 그놈들이 타고 온 것일 겁니다.”

부장이 스캐너를 확인하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어느 모로 보아도 그다지 걱정할 것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부장들은 물론이고 카산드라 경도 무언가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사이, 지휘부를 뒤따라온 보병들이 헐떡거리며 자리를 잡았다.

“궁지에 몰려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으니 혼자 객기를 부리는 거야.”

카산드라 경이 고집이 서린 입술에 잔뜩 힘을 주었다.

“속을 필요 없다. 보병대 전진!”

“진격!”

공격 명령을 받은 5천의 보병들은 혼자 서 있는 황제를 빼면 거의 무주공산으로 남아있는 모래언덕을 향해 맹렬히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카산드라와 지휘부는 양 옆을 스쳐 돌진하는 보병들의 제일 뒤에서 천천히 뒤따라갔다.

“적이 온다!”

보병대가 바싹 접근해 오자 낙타병 부대를 이끄는 하지즈 장군이 양쪽으로 손을 저었다. 그의 손짓에 모래언덕 앞을 막고 있던 낙타병들이 급히 방향을 돌려 양쪽으로 서둘러 흩어졌다. 하지만 언덕 위의 황제는 여전히 그 자리에 혼자 서서 남부보병대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계속 갈까요?”

언덕 아래까지 도착한 보병대 선봉부대가 괜스레 주춤거리며 카산드라 경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가야지 뭘 어쩌려고!”

이유도 없이 불안해하는 일선 장병들에게 뒤에 선 카산드라 경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사령관의 의지를 확인한 5천의 보병대는 지금까지의 당당하던 태도를 내버리고 양 옆의 동료들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언덕 위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젠장, 카렐이야. 등급 없는 가디언이라고.”

선두열의 보병들 중 몇이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눈앞에 보이는 적이라고는 칼을 들고 우뚝 서 있는 적 황제 한 명 뿐이었지만 선봉에 선 남부보병들의 얼굴에는 마치 1만 대군이라도 상대하듯 알 수 없는 공포가 흐르고 있었다.

언덕 위에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카렐이 비에 젖은 머리칼을 한 번 휙 털어내며 고개를 꼿꼿이 치켜세웠다. 광대뼈가 선명히 드러날 정도로 잔뜩 여윈 얼굴 위로 이마에 걸친 서클렛의 파란빛 사파이어가 유난히 반짝거리고 있었다.

“잘 왔다.”

카렐이 언덕을 새카맣게 덮으며 올라오고 있는 남부보병들을 향해 빗속에서 하얀 송곳니를 드러내고 웃었다.

“내 품에서 죽는 은총을 원하는구나.”

카렐이 두 팔을 활짝 벌려 보였다. 그것을 신호로, 보이지 않는 사각(死角)인 언덕 너머에서 가디언 타크마를 선두로 큼직한 위장포로 온몸을 감추고 있던 근위대 장병들이 하나 둘씩 모습을 나타내며 언덕의 완만한 실루엣, 그리고 황제의 양 옆을 뒤덮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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