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69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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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
선봉 보병들이 기겁을 하며 자리에 멈춰 섰다. 비가 오는 야음을 틈타서, 그것도 위장포까지 걸치고 언덕 너머에서 숨어 있었으니 저 근위대의 숫자가 모두 얼마나 되는지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어쨌든 그들의 숫자는 계속 늘어나고만 있었다.
“사령관님! 이걸 어쩌죠?”
선봉대 지휘관의 다급한 물음이 할룩스로 들어왔을 때 카산드라는 이미 순간 판단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그는 계속 같은 고함만 지를 뿐이었다.
“젠장! 근위대가 몇 놈인지부터 파악해! 빨리!”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언덕을 계속 넘어오고 있어서……”
스캐너에 의지해 적군의 숫자를 파악하려던 부장도 짜증을 내며 확 꺼 버렸다.
그제야 후방에 상륙했던 동맹군측 근위대를 떠올린 카산드라 경이 재빨리 머리를 굴려보았다. 그쪽에서 대치중인 양쪽 근위대는 여전히 신경전만 벌이고 있을 뿐 도무지 싸울 생각을 않고 있었다.
“병력을 눈에 보이게 많이 뺐다면 우리 편 근위대가 기회를 잡아서 먼저 싸움을 걸었을 테니까 많아야 2, 3천일 거야.”
“측면은 낙타병들이 공격해 오고 후방으로는 ‘검은 사신부대’가 다가옵니다!”
계속해 들어오는 보고에 카산드라는 눈앞이 하얗게 변하는 느낌이었다.
“제기랄 물러나야 하나.”
그는 급히 말을 돌렸지만 후방에서는 얼굴에 진흙을 잔뜩 바른 검은 사신부대, 크바르나가 일렬로 죽 늘어서서 후방을 차단하고 있었다.
“일단 물러나! 물러나서 대오를 만들어!”
카산드라 경은 무질서하게 전진하던 부하들에게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5천의 보병들은 이미 모래언덕을 절반쯤 올라간 상태였고, 최대한 빨리 공격하기 위해 그리 중요시하던 대오까지도 반쯤 무너뜨린 상태였다.
“퇴각! 퇴각!”
지시를 받은 보병들은 적에게 등을 보이고 허겁지겁 물러나기 시작했지만 이번엔 측면의 낙타병들이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놈들이 못 도망치게 해!”
백마에 탄 아쉬드 하지즈 장군이 남부보병들을 향해 창을 겨누고 뛰쳐들었다. 숫자는 많지 않지만, 육중하게 중무장한 낙타병들이 양 측면에서 벌떼처럼 몰려들면서 측면의 보병들은 급히 퇴각을 멈추고 그들에 맞서 창을 쳐들었다. 같은 시각, 중앙의 보병들은 근위대를 피해 허둥지둥 물러나면서 그들의 대오가 U자로 말굽처럼 길게 늘어나 버렸다.
“근위대 이름값을 해 봐라.”
카렐이 흐려진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양손에 시미터를 든 타크마는 옆에 선 황제의 얼굴을 한 번 돌아보며 벅찬 가슴을 절감했다. 그에게는 새 황제 밑에서 처음으로 공훈을 세울 기회였다.
그는 오른손에 든 칼을 앞으로 겨누며 가늘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가디언 선두로 돌격!”
타크마의 명령에 분대장을 맡은 가디언들이 거대한 양손무기를 앞세우고 언덕 아래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뒤를 따라 검과 방패를 든 근위대 보병들이 차례로 모래언덕을 넘어 가디언들의 뒤를 따랐다.
“맞서! 겁내지 마라! 2, 3명씩 뭉쳐서 싸우면 돼!”
베테랑 남부 근위보병대 사관들이 목청을 돋우며 부하들을 격려했다. 얼떨결에 근위대와 맞서게 되었지만 이들 역시 나름대로 자존심 센 남부 제일의 정예 보병이었다. 그리고 아직은 이쪽의 숫자가 훨씬 많아보였고, ―아직 이들도 확신은 못 하고 있지만― 실제로도 그랬다.
“가디언만 막으면 돼!”
선두의 보병들이 동료들과 방패로 겹겹이 벽을 쌓으며 스스로에게 악을 쓰고 최면을 걸었다. 하지만 무서운 기세로 돌격해 온 가디언들이 소름끼치는 무기와 몸으로 그들의 방벽을 사정없이 들이받으면서 사방에서 넘어지는 병사들의 비명소리, 다급한 고함으로 그들의 전열이 일순간 혼란에 휩싸였다.
“위치를 지켜! 지키라고! 뒤쪽에 아직 동료들이 있다!”
장교들은 목에서 피가 터져라 고함을 질렀지만 앞에서 죽어가는 역할은 어차피 병사들 몫이었다.
“들어받아! 놈들을 밀어붙여서 대오를 무너뜨려!”
타크마가 남부보병대 사관의 머리를 단칼에 베어 적진으로 날려 보내며 뒤따라오는 보병들에게 핏대를 세웠다. 가디언들에 뒤이어 근위대 보병들까지 합세하면서 언덕 아래는 남부보병들을 위에서 밀어내려는 근위대, 위치를 지키려는 남부보병들의 목숨을 건 힘싸움의 장이 벌어졌다.
근위대의 정예 병력이 이기느냐, 2배의 남부 근위병이 이기느냐는 초반의 팽팽한 힘싸움 이후, 무언가 ‘작은 무게중심 이동’과 함께 순식간에 결판날 일이었다.
전방에서 장병들이 근위대와 목숨을 건 힘싸움을 벌이고 있는 그 시각, 후방이라고 더 조용한 건 아니었다. 지휘부를 이끌고 나름대로 침착하게 상황을 통제하려던 카산드라의 집중력을 흐트려놓은 건 뒤에서 기습해 온 ‘검은 사신부대―크바르나’였다.
카산드라는 그들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려 이미 몇 번이나 황급히 위치를 옮겼지만 대장기를 앞세운 100여명의 크바르나들은 말 그대로 ‘악착같이’ 카산드라의 뒤만 쫓고 있었다.
“제후님, 저놈들이 우리를 노리는 것 같습니다.”
참모 한 명이 연신 후방을 돌아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빠른 말투로 정신없이 보고를 이었다.
“우린 200명이나 되고 하나같이 중무장한 기마 무장들인데, 가디언도 아니고 말단 보병 100명이 죽자사자 달려드는 게 영 이상하지 않습니까? 죽으려고 환장한 거 아닙니까?”
“처음부터 충분히 이상했으니까 재수 없게 방정 떨지 마!”
신경이 곤두선 카산드라가 분위기를 흐트러뜨려 놓는 참모의 머리를 칼집으로 사정없이 후려치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나저나, 뭐 저런 놈들이 다 있나.”
그는 짜증날 정도로 뒤를 쫓아오고 있는 크바르나들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다리에 무슨 대단한 엔진이라도 달았는지, 저들은 웬만한 중장기병을 뺨치는 속도로 쉬지도 않고 계속 따라붙으며 ‘지휘부가 뭣 하나 제대로 못 하게’ 들들 볶고 있었다.
“혹시 정말 가디언들 아닐까요?”
조금 전의 겁먹은 참모가 다시 입방정을 떨자 카산드라가 이를 드러내며 눈을 흘겼다. 다혈질의 부장 중 한 명이 창을 쳐들며 굵은 목소리로 대신 대답을 했다.
“저 덩치가 무슨 가디언이야? 보병들하고 별로 다를 것도 없는데!”
“그래도 혹시…….”
“제후님! 차라리 우리가 그냥 쓸어버리는 게 낫겠습니다. 제아무리 정예병이어도 고작 보병들입니다!”
혈기왕성한 부장의 제안에 카산드라가 잠시 망설였다. 하임달에서의 악몽 이후, 그는 웬만하면 적 앞에 직접 몸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살아왔지만 숫자도 적은 보병들을 피해 도망만 다니는 것도 무언가 아니다 싶었다.
“너희가 나가서 처리해.”
쫓기다 못한 카산드라가 결국 결단을 내렸다. 안 그래도 ‘별것도 아닌’ 적에 잔뜩 신경이 곤두서 있던 무장들은 사령관의 지시에 기다렸다는 듯 창을 세우고 우루루 몰려나가기 시작했다.
“걸려들었다! 사격 준비!”
적이 쫓기다 못해 반격을 해 오는 타이밍만 기다렸던 아샤드 경이 얼른 자리에 멈춰서며 석궁을 앞으로 똑바로 겨누었다. 그리고 뒤이어 벌어진 상황은 코런덤을 정면 공격했던 동맹군 기병들에게 벌어진 것과 똑같았다.
“저놈들 뭐지?”
어리둥절해진 기병들은 눈을 노리고 날아든 일제사격에 순간 바싹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여지없이, 볼트가 수십은 되는 기병들의 눈을 정확히 꿰뚫으면서 사방에서 놀란 비명, 중무장한 덩치 큰 무장들이 말에서 떨어지는 소리가 육중하게 지면을 울렸다.
“뒤는 너희가 맡아!”
아샤드 경은 칼을 빼들고는 주인을 잃은 빈 말을 향해 맹렬히 달려가 훌쩍 뛰어올랐다. 20여명의 크바르나 헤네티들이 그를 따라 재빨리 탈취한 말에 올라타고 카산드라가 있는 적진 중앙을 향해 서슴없이 돌격해 들어갔다.
“목표는 카산드라 저년이다!”
아샤드 경은 마갑을 벗겨 떨구어 버리고 말에 최대한 속도를 붙였다.
“저, 저놈들 뭐야! 도대체!”
순식간에 부하들을 돌파하고 말을 빼앗아 탄 크바르나들이 돌격해오자 순간 패닉에 빠진 카산드라가 허겁지겁 말을 돌렸다. 하지만 중장기병보다 훨씬 가벼운 무장을 갖춘 사람을 태우고, 무거운 마갑까지 벗어던진 말은 마갑에 중무장한 주인을 태운 그의 말보다 훨씬 빨랐다.
“젠장! 막아! 물러나실 시간을 벌어!”
호지 가 경호기병들이 얼른 퇴로를 막아섰지만 보통의 기병들로 헤네티들을 막는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내가 저년을 쫓는다!”
부하들이 경호기병들을 붙잡아놓은 새, 아샤드 경은 등을 보이고 도망가는 카산드라의 뒤에 바싹 따라붙었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양쪽 말이 거친 숨을 내뱉으며 벌인 맹렬한 추격전이었지만,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다.
“죽어!”
아샤드 경이 온 힘을 다해 휘두른 칼이 카산드라의 목 뒤에서 번쩍했다.
“이크!”
공격을 직감한 카산드라가 딱 적당한 순간 운 좋게 목을 움츠렸다. 덕분에 아샤드 경이 휘두른 칼은 목을 가리는 경갑을 깊숙이 찢어내고 미끄러진 채 공중으로 휙 헛돌고 말았다. 하지만 충격을 이겨내지 못한 카산드라가 중심을 잃고 고삐를 놓치면서 달리는 말에서 질척한 바닥에 그대로 내리꽂혔다.
“우웁!”
질주하는 말에서 떨어진 카산드라가 더러운 뻘밭에 떨어지며 몇 바퀴를 데굴데굴 굴렀다. 그를 말에서 떨어뜨린 아샤드 경이 만족스런 얼굴로 재빨리 말을 돌려 되돌아왔다.
“잘 걸렸다, 이년아!”
말에서 훌쩍 뛰어내린 아샤드 경은 반쯤 넋이 나가 쓰러져 있는 카산드라의 가슴을 사정없이 짓밟고는 목에 칼을 똑바로 겨누었다. 그리고는 투구의 안면 부분을 확 들쳐보였다.
“누구의 은총인지 똑바로 봐라.”
“뭐, 뭐?”
낙마한 충격에 정신이 오락가락하던 카산드라 경은 그제야 아샤드 경의 얼굴, 눈빛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었다.
“네, 네놈……설마……”
잠시 멍해있던 그의 눈이 조금씩 커졌다. 별 존재감도 없고, 황실 모임에도 단 한 번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서부 촌구석 하급제후였지만 카산드라에게는 어딘지 익숙한 얼굴이었다.
“하임달에서…….”
“싸움 전날 마지막 협상사자로 갔던 얼굴을 기억하시나?”
아샤드 경이 이를 드러내고 씨익 웃었다.
“베흔 옆에서 잘난 체하면서 감히 그분 편지를 찢어버리더니, 다음날 못 볼 꼴 봤다지?”
아샤드 경이 손에 힘을 주며 칼을 내지르려는 순간, 카산드라가 고개를 저으며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잠깐, 잠깐!”
“돼지처럼 꽥꽥대지 말고 당당하게 죽어라. 이 할망구야.”
아샤드 경이 이를 드러내며 다시 칼을 뻗었다. 하지만 카산드라는 계속 고개를 저으며 울부짖었다.
“오르마즈에 관해 알고 싶지 않냐고!”
“뭐?”
순간, 아샤드 경의 칼이 그의 목 옆을 살짝 비켜나갔다. 카산드라는 얼굴 바로 옆에 걸쳐있는 칼날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겨누고 있는 아샤드 경을 올려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때……왜 전장엔 안 나왔지?”
카산드라의 물음에 아샤드 경이 바로 짜증을 내며 고함을 쳤다.
“지금 목숨을 빌면서 아는 거 토해내야 하는 건 네년이야!”
“네가 그놈에게 아직 충성을 바치는지 확인하려는 거야.”
“허.”
아샤드 경이 눈가에 잔뜩 힘을 주었다. 이자가 혹시라도 시간을 끌려 하는 것인지 시험해 볼 겸 그는 일단 허세를 부려 보기로 했다.
“최소한 네놈보다는 그분에 관해 많이 알아.”
아샤드 경이 다시 칼을 쳐드는 시늉을 해 보이자 겁에 질린 카산드라 경이 비명처럼 고함을 질렀다.
“시체가 어딨는지는 모를 텐데!”
무언가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에 아샤드 경의 몸이 확 굳어버렸다. 아니, 아찔한 느낌에 자리에 주저앉을 것 같았다.
“그, 그분 시신은……코윈의 묘소에…….”
“그래? 누가 시체를 본 일 있던가?”
웬만해서는 놀라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아샤드 경도 지금 이 순간만은 눈빛이 떨리는 것을 감출 수가 없었다.
“뭐……라고?”
아샤드 경의 칼끝이 가늘게 떨렸다. 전사한 오르마즈의 시신과 유류품은 한동안 근위대 손에 있었고, 북부의 끈질긴 청원 끝에 마지못해 코윈에 매장한 건 한참 지난 후의 일이었다. 그 정도는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었지만 당시 삼엄한 보안 하에 근위대와 남부 사람들이 매장했고, ‘분노한 북부인들의 소요사태를 피하기 위해’ 그의 망가진 시신은 끝내 공개되지 않았었다.
“근위대가 시신을 수습한 건 알 사람은 다 알아.”
아샤드 경이 예리한 칼날을 다시 카산드라의 얼굴에 들이댔다.
“너만 아는 걸 불 생각이 아니면 군말 없이 뒈져.”
뺨에 닿는 서늘한 칼날에 파랗게 질린 카산드라가 빠른 말투로 횡설수설 말을 이었다.
“젠장! 그놈, 아니 오르마즈는 어차피 죽을 팔자였다고! 밤마다 미친놈처럼 발작하느라 사람 꼴이 아니었어!”
상대가 생각보다 많이 안다는 것을 깨달은 아샤드 경의 표정이 일순간 경직되었다. 오르마즈의 끔찍한 마지막 운명을 아는 사람은 교단 내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걸……네가 어떻게 알지?
“그놈이 앓는 건 근위대에서 알고 있었어. 다만 그 병이 내겐 어딘가 익숙했다는 게 차이였을 뿐이지. 내 아버지도 교단에서 강제로 이상한 수술 받고나서 똑같이 고통스러워하시다가 결국 못 견디고 자살하셨으니까.”
카산드라가 씩씩대며 눈을 부릅떴다.
“놈들이 뭐라고 했는지 아나? 일단 발병하면 죽도록 고통스러워하다가 몇 년 내에 죽겠지만 어차피 얼마 못 가 자살할 거라고 비웃더군. 게다가 부검도 하기 전에 교단 놈들이 들이닥쳐서 강제로 시신까지 태워버렸다고!”
카산드라가 핏발선 눈을 똑바로 부릅뜨고 아샤드 경을 노려보았다.
아샤드 경이 창백해진 표정에 애써 위협적인 표정을 지었다.
“설마, 네 아비에게 벌어졌던 일이 궁금해서 그분 시신을 빼돌렸다는 말은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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