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72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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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르가 떠난 직후, 후방에 남겨진 부마 예르마크 경은 마음을 가다듬어 보려 했지만 눈에 볼트가 박힌 끔찍한 몰골로 누워 있는 딸의 시체에서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루이제…….”
예르마크는 딸의 차가운 얼굴과 헝클어진 머리를 쓰다듬으며 참고 참던 눈물을 뚝뚝 흘렸다. 지금까지는 ‘우군 사령관’이라는 책임감에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지만 지휘권까지 빼앗진 마당에 쓸데없는 자존심과 위엄을 세울 필요도 사라져 버렸다.
“아비 잘못 만난 탓이다. 아비 가문이 못난 탓이야.”
예르마크는 땅바닥에 계속 이마를 찧으며 흐느꼈다. 코앞에서 장남 코리온이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도, 그가 산 채로 황궁 앞에서 목판에 말뚝이 박혔을 때도, 심지어 건연이 연합군에 억류되어 어처구니없이 죽었을 때도 억지로 참아 넘겼지만, 그 위를 또다시 덮친 이 세 번째 상처는 너무 깊었다.
“미안하오, 다 내 잘못이요.”
루이제의 얼굴 위로 겹치는 부인 레곤을 떠올리며 예르마크가 두 손을 부르르 떨었다. 어쩔 수 없이 연합군 편에 서야 했던 힘없는 가문 때문에 자식을 잃었다는 죄책감에라도, 그는 자신에게 시집 온 대공주를 볼 면목이 없었다.
“이대로는 못 돌아가.”
예르마크가 고개를 천천히 쳐들었다. 전장에서 밀려난 채 이대로 돌아간다면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기다려라. 곧 돌아오마.”
예르마크는 딸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투구를 꾹 눌러쓰고, 여분의 창과 칼을 챙겨드는 그의 모습에 당황한 부장들이 서로 눈치를 보았다. 제네르가 이곳에 두고 간 황실 근위 무장이 말에 다가가려는 그의 앞을 서둘러 막아섰다.
“장군님, 하크로딘 상장군께서 이미 전방에…….”
“비켜.”
“이곳에서 움직이지 말라는 황명이 있지 않았습니까?”
“내가 다 책임진다.”
예르마크는 앞을 막는 부장을 거칠게 밀어내고는 아픈 다리로 말에 불편하게 기어올랐다.
“안됩니다. 제발, 이러시면…….”
서둘러 그의 고삐를 붙잡았던 무장은 눈 깜짝할 새 두 눈 사이로 다가와 있는 창날에 기겁을 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닥치라고 했다.”
예르마크는 놀란 제네르의 휘하 무장을 창자루로 쳐 바닥에 쓰러뜨려 버렸다.
“정신 나가고 무모한 지휘관이 널 쓰러뜨리고 가는 거다! 됐나!”
제네르의 수하를 제압한 예르마크는 자신의 근위병들을 향해 똑바로 창을 세우고 큰 소리를 지르며 말을 몰아 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막무가내 돌격에 놀란 근위병들은 이 ‘항명자’를 제압해 쓰러뜨리던지, 아니면 길을 열어주던지,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했지만 조금 전 제네르의 수하와는 달리 자신들의 소속 가문 사령관인 그를 막겠다고 대놓고 나설 사람은 많지 않았다.
“비키라고!”
예르마크는 끝까지 물러나지 않고 버티고 있던 근위병의 턱을 창 자루로 사정없이 후려치고는 계속 돌진했다. 나머지 한 명이 위협 동작으로 창을 내질러 보려 했지만 결국 주춤거리며 포기하고 말았다.
“히럇!”
근위병들을 돌파한 예르마크는 수하 하나 없이 적진을 향해 무작정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부장들과 근위병들이 난감한 표정으로 서로 눈치만 보았다.
“어, 어쩌지?”
지휘관의 돌발행동에 당황했기는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앞뒤 사정이야 어쨌든, 눈이 뒤집어진 상관이 적진에 홀홀단신 돌격해서 개죽음을 당하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어쩌긴 어째! 따라가!”
“그 뚱땡이가 죽었다고?”
본진으로 돌아와 응급처치를 받던 히르직스는 조금 전까지 자신과 싸웠던 루이제 대군이 죽었다는 말에 정색을 하며 물었다.
“정말이냐?”
“예. 자, 장군님이 죽이신 것 아니셨습니까?”
“내가 죽이긴 누굴 죽여!”
히르직스는 붕대를 막 마무리한 의사에게서 거칠게 손을 빼내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빌어먹을.”
눈앞이 막막해진 그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가 예르마크와 루이제 부녀를 ‘적당히 다치게만 하는’ 수준에서 싸움을 끝낸 건 나름대로 철저히 계획한 것이었다. 결과가 어찌되든 황족을 죽여 봤자 결국은 명예보다 손해가 더 큰 것이 사실이었고, 그는 그 모든 것을 미리 고려할 만큼 충분히 용의주도한 남자였다.
“내가 죽인 게 아니다.”
히르직스가 부장에게 삿대질을 하며 언성을 높였다. 부장과 참모진들은 그가 이렇게까지 강하게 부인을 하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여느 정신없는 전투가 다 그렇듯, 루이제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죽었는지까지 시시콜콜 전달될 정도로 정보체계가 원활하게 돌아가는 건 아니었다.
“내가 죽인 게 아니라니까!”
히르직스가 째지는 목소리로 부장들과 참모진에 다시 호통을 쳤지만 저들이 얼마나 믿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선봉에서 교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알아.”
히르직스가 짜증을 내며 대꾸했다.
“아직은 우리 병력이 우세입니다. 하지만 적 측면에 대기 중인 서부 보병대가 어찌 움직일지 모르겠습니다.”
히르직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전방을 응시했다. 양쪽 모두 비슷하게 무장한 남부기병대이지만 연합군 기병은 2만 5천, 동맹군 기병은 1만 5천이니 그가 지휘하는 연합군 쪽이 분명한 우세였다. 하지만 적 측면에 도사린 채 전황을 지켜보고 있는 1만 5천의 서부 보병대가 계속 눈에 거슬렸다.
장군님께서 나서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알아!”
잔뜩 부아가 돋은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지금까지 앉아있던 빈 보급품 상자를 옆으로 뻥 걷어차 버렸다.
‘어딘지 내키지 않더라니.’
그는 묘한 불길함을 억누르며 일단 말에 올랐다.
“적군의 사자입니다!”
막 출발하려던 히르직스는 중군의 ‘적군’인 플라칼 가에서 보낸 사자가 흰 깃발을 등에 메고 달려오는 모습에 눈가를 잔뜩 찡그렸다.
“카, 카나르 플라칼 경께서 히르직스 타마르 장군에게 전달하라 명하셨습니다.”
그 사자는 재빨리 용건만 전하고는 히르직스의 부장에게 서류봉투를 건넸다. 그리고는 대답 따위는 들을 생각도 없는지 잔뜩 겁먹은 얼굴로 허겁지겁 돌아서 멀어져갔다.
“한심한 놈.”
서류 위에 쓰인 이름을 본 히르직스가 모두 들으란 듯 최대한 넉살좋게 코웃음을 쳤다. 사자의 꼬락서니를 보니 내용물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을 것은 뜯어보나마나 뻔했다.
“잡을까요?”
부장들이 허겁지겁 도망치고 있는 사자를 가리켰지만 히르직스는 필요 없다며 손을 저었다.
“됐다. 잡아서 뭐 하게?”
상관과 플라칼 가와의 불편한 관계를 알음알음으로 알고 있는 부장들이 잔뜩 호기심에 찬 얼굴로 이번에 온 봉투에 온통 시선을 집중했다. 자세히는 아니어도, 히르직스가 임신한 아내 미노아 플라칼 경을 델루지 가의 손에 죽도록 의도적으로 방치했다는 소문 정도는 이미 연합군 진영 내에도 공공연히 알려져 있었다.
“안 열어보십니까?”
“나중에.”
히르직스는 봉투를 열지 않은 채 안장 한쪽에 쑤셔 넣어버렸다.
“니들 일이나 신경 써.”
히르직스가 다시 짜증을 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 여유를 떨고 있지만, 사실은 하이에나처럼 호기심에 기웃거리는 아랫놈들 앞에서, 아니,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기 자신에게 내용물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것이 본심이었다.
“출발!”
히르직스가 전방을 향해 말에 속도를 붙였다. 그리고 잔뜩 호기심에 굶주렸던 부장들도 섭섭함을 감추며 일단 그의 뒤를 따랐다.
‘뭔가 잘못됐어.’
안장 밑의 봉투를 의식하며, 히르직스가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아내가 죽고 몇 달 동안, 단 한 번도 맘이 편해 본 일이 없었다. 악처, 아니 악처라 믿고 있던 여자가 죽었고, 제롬이 델루지 가의 상급귀족 여자와 결혼시켜 주겠다고까지 약속했으니 이제 속이 편해야 했지만 도무지 아무 일도 손에 잘 잡히지를 않았다.
‘이게 아니었는데…….’
언젠가 그가 슈로 기사단을 배신하고 한동안 세상에서 매장당했을 때처럼, 그 보기 싫은 악처가 죽은 이후로도 그는 술 없이는 잠도 못 이루고 있었다. 그래도 그 때는 조강지처가 외로워하는 그의 곁을 지켜 주었었지만 ―나중엔 그나마도 출세를 위해 자신이 내쳤지만― 이젠 그의 곁에 아무도 없었다.
“미노아…….”
그는 자신이 죽은 아내의 이름을 중얼거리고 있다는 데 지레 깜짝 놀랐다. 무슨 이유엔지, 요즘은 미노아가 꼭 악처만도 아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콧대가 높고 워낙 말버릇이 험해 걸핏하면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로 히르직스의 속을 뒤집어 놓았지만 항상 그랬던 것도 아니었다.
“그래, 좋은 때도 있긴 했어.”
히르직스는 전장을 코앞에 두고 여전히 딴생각만 하고 있었다.
되짚어보니, 식구가 모두 모여 모처럼 명절 식사라도 할 때 미노아가 항상 첫 술을 부어준 것도, 제일 부드럽고 기름진 고기를 먼저 잘라 건네준 것도 바로 첫째남편인 히르직스 자신이었던 것 같았다.
그때는 다른 남편들 앞에서 ‘이 남자는 아무리 먹여도 맨날 젓가락이야.’라고 자존심 상하는 말을 중얼대며 기름진 갈비만 골라주던 미노아가 정말 꼴도 보기 싫었다.
그리고 악처였든 아니었든, 그가 첫 아이의 아버지로 택한 것도 역시 히르직스였다.
그가 미노아의 임신 소식을 들은 건 노예폭동 무리를 잡기 위해 추운 극지에 나가 있을 때였다. 기억을 되짚어보니 그 ‘악처’는 알려주는 방법도 꽤나 화통했다. 미노아는 한밤중에, 그것도 쏟아지는 눈보라를 뚫고 예고도 없이 주둔지로 불쑥 찾아와서는 꿀잠에 빠져 있던 남편을 침대 밖으로 사정없이 밀어내 버렸다
그리고는 침대 밑에서 얼이 빠져 있는 남편에게 ‘임신한 마누라가 떨고 있는데 잠이 오던? 이 화상아?’ 라며 남편의 야전침대와 이불, 난로를 대뜸 차지해 버린 것이 그의 ‘첫 통지’였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것도 미노아가 나름대로 넉살이라고 부린 것 같았지만 당시의 히르직스는 남편을 무시했다며 막사를 박차고 나가버렸던 터였다. 이후로도 히르직스는 ‘누구의 아이인지’도 미리 알려주지 않은 마누라 탓을 했지만 그 시간에 위험을 무릅쓰고 오지 전장에까지 찾아온 아내의 의도도 눈치 못 챈 건 분명히 그의 잘못이었다.
다른 여느 플라칼 가 자녀들처럼 미노아도 어릴 때부터 뼛속까지 전사로 길러진 여자였다. 평생을 병영 가문에서 살아온 그가 정치니 정세, 전략전술이라면 몰라도 ‘멋진 분위기 연출’ 따위에 심각하리만큼 센스가 부족했던 것도 당연했다.
“내가 심했는지도 모르지.”
히르직스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미노아가 원한 남자는 ‘가정적이고 다정다감한 남자’였으니 집에서 강제로 맺어준 5명의 사나운 군인 남편들이 모두 맘에 안 들은, 아니 지긋지긋하고 꼴 보기 싫어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미노아는 ‘덩치만 큰 애 다섯을 데리고 살려니 죽을 맛이다.’라며 힘들어하곤 했지만 딸 귀한 가문의 장녀 신분으로 그 역할을 저버릴 수도 없었을 터였다. 그는 낮에는 가문 참모장으로 종장인 아버지의 최측근 역할을 해야 했고, 집에서는 가장으로 영지를 관리하고 한편으로는 다섯이나 되는 남편들의 신경전 속에서 무게중심 역할까지 해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좋게 이해해 주려 해도, 미노아는 항상 피곤한 얼굴에 못생기고 매력도 없었고, 걸핏하면 남편들에게 짜증을 내며 스트레스 해소를 하던 형편없는 아내였다. 아니, 그렇게 기억하고 싶었지만 그의 머리는 말을 듣지 않았다.
히르직스는 안장 밑에 감춰놓았던 술을 몰래 꺼내 한 모금 삼켰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싸움에 집중을 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는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미노아의 환영(幻影)―부른 배를 붙들고 피를 흘리며 살려달라고 매달리는―을 향해 다시 저주를 퍼부었다.
“한심한 년 같으니……. 내가 버릴 걸 알았으면서.”
히르직스는 술을 한 모금 더 들이켰다.
술 때문인지, 명절 때마다 미노아가 형편없는 요리솜씨로 ‘가장의 작품’이라며 뻔뻔하게 구워 내놓던 느끼하고 맛없던 양고기가 미치도록 먹고 싶어졌다.
“장군님, 10시 방향에 세닉 가 가문기(旗)입니다.”
히르직스는 예상했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10시 방향을 응시했다. 기병들이 막 교전을 시작한 전장을 빙 돌아, 50여기는 되어 보이는 무장들이 후방으로 전력 질주해 오는 모습이 보였다.
“저 모범생 사내도 눈이 뒤집어질 때가 다 있군.”
히르직스는 말에 꽂아놓았던 창을 천천히 빼들었다.
“내 손에 죽겠지만 그래도 저놈이 부러워.”
히르직스가 뜬금없이 웃었다. 저 사내에게도 나름대로 싸워야 할 사연이 있겠지만, 그가 싸워야 하는 이유는 구구절절한 사연이 아닌, 이제 더 이상 물러날 곳 없는 인생 막판이라는 절박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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