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75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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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이 대강 정리되자 제네르는 전장을 다시 빙 둘러보았다. 사령관 히르직스를 잃었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는 남부기병대는 아직까지는 버티고 있지만 이 소식이 알려지고, 새로운 상황이 벌어진다면 어찌될지는 뻔했다. 이제 그가 준비했던 회심의 일격을 가할 때였다.
그때, 땅을 울리는 말굽소리를 느낀 제네르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바삐 달려왔는지, 거칠게 입김을 내뿜으며 숨을 몰아쉬는 큰 군마 위에는 창을 움켜쥔 예르마크 경이 눈을 무섭게 부릅뜨고 제네르와 히르직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미 죽은 겁니까!”
아직 분노에 휩싸인 예르마크가 히르직스의 시체를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내 그놈의 시체를 갈가리…….”
격앙된 예르마크 경에게 제네르가 냉담하게 대답했다.
“내가 일기투로 죽였으니 이자의 시체를 어찌할지는 내 권리입니다, 부마.”
“저자가 누구 원수인지도 모르는 거요? 그러면 최소한 목숨만은…….”
“그래서요?”
제네르가 스코프를 확 벗으며 눈을 부릅떴다.
“으읍.”
제네르를 뭐라 나무라려던 예르마크는 뺨에서 흐른 피로 붉게 물들어 있는 그의 얼굴에 움찔하며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제네르와 히르직스의 무기는 사방에 흩어져 있었고, 아타르도 여전히 바닥에 쓰러져 둘의 처참한 싸움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같은 시각, 주변의 기병들, 심지어 그를 따라 온 남부 기병들조차 천하의 히르직스를 혈투 끝에 꺾은 영웅 제네르의 이름을 여전히 연호하고 있었다.
제네르가 다시 눈을 부라리며 쏘아붙였다.
“상장군의 직권으로 경의 할룩스 코드를 회수하겠습니다. 예르마크 세닉 대장군. 죄명은 굳이 알릴 필요 없겠죠?”
“…….”
“근위병! 죄인을 황상께 데려가라.”
제네르가 함께 온 근위기병에게 찢어져라 소리를 질렀다. 그의 의도를 깨달은 예르마크는 입술에 바싹 힘을 주며 대답했다.
“내 잘못은 알지만 저자만은…….”
“알면 됐습니다.”
제네르는 풀 죽은 예르마크의 마지막 변명을 끊어내며 단호하게 말했다.
“이자는 죽었소. 부마의 지위를 생각해 포승은 하지 않겠습니다. 황상께서 적당한 처분을 내리실 것이요.”
제네르의 눈짓에 근위병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자리에서 부들부들 떨던 예르마크는 결국 어깨의 할룩스 키를 빼 제네르의 근위병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 마디를 어렵게 꺼냈다.
“나 때문에……위험해졌다면 사과하겠소. 상장군. 허나…….”
제네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예르마크가 근위병에게 끌려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제네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히르직스의 유품들을 둘러보았다. 그의 말이 주인을 잃은 채 어슬렁거리고 있었고, 무기들도 사방에 널려 있었다. 일기투에서 죽은 자의 유품과 시체를 유족에게 돌려주는 건 승자로서 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였다.
“누구한테 주지?”
제네르는 죽은 히르직스를 다시 돌아보았다. 제국 무장들을 공포에 떨게 한 맹장이었지만 사생아로 태어나 죽을 때까지도 혼자였으니 자식은 물론이고 장례를 치러 줄 사람도 남아있지 않았다.
히르직스의 무기를 챙기던 그는 그의 말안장에 달려 있는 봉투를 발견했다. 그는 별 생각 없이 안을 들쳐보았지만 곧 기겁을 하며 다시 닫고 말았다.
“후우.”
잠시 숨을 가다듬은 제네르는 안에 다시 손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투명한 필름에 싸여 있는 손바닥만한 태아의 시체를 조심스레 꺼내보았다. 이미 사람의 모습을 다 갖춘 사내아이의 작은 몸에는 탯줄도 여전히 붙어있었다.
-네놈 더러운 핏줄로 내 귀한 딸의 시신과 성스러운 가문 묘지를 더럽히고 싶지 않으니 알아서 내다버려라. 카나르 플라칼. -
“이것 때문이었소?”
제네르는 죽은 아기와, 마찬가지로 숨이 끊어진 히르직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제국 제일의 무골인 플라칼 가와 맹장 히르직스의 피를 모두 받았으니 제대로만 태어났다면 어머니의 명민함과 아버지를 용맹함을 고루 갖추고 자랐을 아기였다.
“너도 아버지와 똑같이 되었구나.”
제네르는 아버지에게서도, 어머니 가문에서도 모두 버림을 받은 이 불쌍한 아기의 시체를 손끝으로 말없이 쓰다듬어 보았다. 그는 아기를 봉투에 다시 넣는 대신, 죽은 히르직스의 망토로 감싸 한 팔에 안았다.
그때, 황제가 있는 서쪽에서부터 뜬금없는 기상나팔 소리가 봉화를 올리듯 차례대로 메아리치며 울려오기 시작했다. 그는 무심코 시계를 확인했지만 지금은 기상나팔이 울릴 때가 아니었다.
“뭐지?”
잠시 후, 그의 할룩스로 황제의 짧은 연락이 들어왔다. 할룩스에서 나타난 황제의 지치고 여윈 얼굴에 제네르도 다른 사람과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폐하? 얼굴이 왜……. 조금 전에도 괜찮지 않으셨던가요?”
“별 것 아니다. 어쨌든……제롬 녀석과 적 총사령관 카산드라 호지가 죽었다.”
“…….”
제네르는 바로 대답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무슨 이유엔지, 입이 바로 떨어지지를 않았다. 그는 하마터면 황제에게 ‘제롬이 말입니까?’라고 물을 뻔했다. 바로 코앞에서 그를 죽이려 했었고, 친구 라손의 머리를 부숴 죽였던 철천지원수가 황천길로 갔다니 기뻐 춤이라도 추고 싶어야 했지만 그의 가슴 한구석이 무언가로 콱 막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알겠습니다.”
제네르는 한참만에 어렵게 대답을 했다. 카렐은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알고 있지만 짐짓 모르는 척 하던 말만 이었다.
“쿠베 놈의 근위대가 방금 2번 도시의 ‘격벽식 방어체계’를 풀었다. 이곳을 포기하고 수송선과 셔틀을 이용해 다른 도시로 탈출하려는 것 같다.”
“그건 우리도 셔틀이나 항공 수송선을 쓸 수 있다는 말 아닙니까.”
제네르는 여전히 비가 들이치는 하늘을 올려보았다. 양쪽 모두 이동이 자유로워진다면 지금부터는 완전히 다른 싸움이 될 판이었다. 물론 카렐이 그런 것을 미리 챙기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펜지켄트에 있는 베아트릭스 플라칼 대장군에게 오라고 했지만 시간이 될지 모르겠다. 황궁의 페로 대공과 북극의 아메샤 스펜타도 온다고 했지만 그쪽은 적어도 한 시간은 넘게 걸릴 테고. 지금부터는 총 공세에 들어간다. 약간의 추가 피해는 감수한다.”
“페로 대공께서요? 그 몸으로 말입니까? 지난번에 칼에 찔리신 건…….”
“무언가 큰 역할을 하고 싶다고 우기는데 그 고집을 누가 말려.”
카렐이 퉁명스레 대답했지만 제네르는 그가 황제만 아니라면 ‘남 말 하시는 군요.’라고 말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욕심 많은 페로가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병상에서 듣고 싶지 않아 하는 건 족히 이해가 가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그것을 용납한 황제의 결정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쿠베 놈이 방금 항복 협상을 제의하더군.”
카렐이 그제야 진짜 의도를 드러냈다.
“황제야 다 끝나서 포로들한테 절이나 받으면 되지 협상까지 구질구질하게 다 나설 필요 있나.”
“총리께서 협상을 가신다고요? 맙소사, 도망갈 시간을 벌려는 수작이 분명합니다. 방금 놈들이 탈출하려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물론 그렇겠지.”
나름대로 문제를 지적했던 제네르는 황제가 아무렇지 않게 긍정을 해 버리자 도리어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럼 무슨 의도로 협상을……. 협상할 여지 자체가 없지 않습니까? 쿠베 놈을 살려줄 수도 없고 말입니다. 전군이 최대한 공세를 펼쳐서 한 놈이라도 더 처치해야 문제의 여지가 없어집니다.”
제네르가 강경하게 목소리를 높였지만 황제는 피곤해서인지, 아니면 정말로 냉정해서인지 목소리에 톤도 없이 조용히 대답했다.
“아무리 포위공격을 하고 압승을 거두어도 어딘가 살아남아 말썽을 피우는 놈은 남기 마련 아닌가.”
카렐이 바싹 여윈 뺨에 주름이 깊숙이 잡힐 정도로 기이하게 웃었다. 그가 전장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협상은 총리가 할 테고. 성 안쪽은 릴라크 경이 책임질 테니 바깥은 경이 맡게. 내가 전투를 직접 지휘하긴 어려울 것 같다.”
내심 협상 자체가 탐탁지 않았지만 제네르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협상을 하실 거라면 적을 포위하고 최대한 시간을 끌면 되겠습니까?”
“아니. 대오만 붕괴시키고 넋이 빠져서 도망가게 해라.”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적의 숫자는 아직 위협적입니다. 전장의 분위기는 뒤집어졌는지 몰라도 실제로 죽은 적은 많지 않습니다. 놈들이 도망을 치고. 수송선이 와서 실어내가면 협상에도 불리해집니다. 또 어딘가에서 싸움을 일으킬 겁니다.”
제네르가 바로 반발했지만 카렐은 발끈한 그에게 별것 아니라며 손을 저었다.
“꼭 칼로 찍어 죽여야 궤멸시키는 건 아니다.”
“그럼…….”
제네르는 황제의 이상한 명령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반쯤 탈진한 몸으로 가까스로 상황을 통제하고 있는 황제와 말싸움을 벌이는 것도 좋은 선택은 아닌 것 같았다.
“패한 놈이 아주 더럽게 굴었다면 승자가 약간 ‘덜 더러운’ 정도는 무시되지 않겠나.”
제네르가 침을 꿀꺽 삼켰다. 정확히 무언지는 몰라도, 황제는 그다지 ‘상식적인 방법’으로 전쟁을 끝낼 생각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존명하겠습니다.”
제네르는 다쳐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 아타르 대신 히르직스가 타던 붉은 말에 올랐다. 히르직스의 아기를 안장 앞에 놓은 그는 남부 무장들에게 험악한 표정으로 명령을 내렸다.
“적 수뇌부가 괴멸되었다. 마지막 공세를 펼칠 것이니, 이번에도 명을 어기는 자가 나오면 그때는 바로 목을 베어버리겠다.”
제네르는 삐어서 제대로 못 움직이는 왼팔을 등에 멘 방패줄로 대강 고정시키고 다시 말을 재촉했다.
“예비대는 이제 필요 없다! 전군 총 공격이다!”
제네르가 창을 세우고 적진으로 돌격했다. 무장으로서, 그리고 개혁파 유학자로서 그가 간절히 원했던 ‘강력한 황제가 이끄는 통일된 제국’의 출현이 이제 코앞에 와 있었다.
사오시안트의 성벽 위에서 장대비를 그대로 맞으며 전황을 지켜보던 근위대장 쿠베는 한참을 아무 말이 없었다. 조금 전 ‘2번 도시의 격벽 방어체계를 꺼라’라고 명령을 내린 이후로 그는 줄곧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잔뜩 굳은 표정의 참모들이 ‘누가 말 좀 꺼내 봐라’며 서로서로 눈짓을 주고받았지만 감히 아무도 나서지를 못했다.
“대장, 구디엔 카나 경입니다.”
무언가에 정신이 팔려 있던 쿠베는 참모가 건네준 할룩스를 받아들며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그는 할룩스를 받자마자 바로 입을 열었다.
“제롬 공이…….”
“알아!”
동부 5제후 구디엔 카나 경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연합군에 참여했던 제후들이 다 죽었으니 이제 그가 제후들 중 가장 선임자였다. 상급제후들 중 자신만 남았다는 것을 아는 그도 반쯤 패닉 상태에 빠져 있었다.
“카렐 그놈이 공세를 시작했어! 카산드라 경도 죽고 근위보병 5천도 투항했어! 우리 편 황상인지 밥상인지 어떻게 된 거냐! 그 새파란 새끼도 적 손에 죽은 거냐!”
구디엔 경은 황제에 대한 존대 따위도 까맣게 잊은 채 창백해진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히르직스도 죽었다며? 그쪽이 무너지면 적 주력 기병들이 와서 뒤를 칠 텐데! 그렇게 되면 우린 전멸이라고! 전 동부 3제후였던 플로브 하크로딘 경을 카렐 놈이 직접 사지를 찢어 죽인 건 알아?”
“입 좀 다무세요. 아무리 대군을 직접 이끄신 일이 없다지만 아랫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추접스럽게 굴고 싶으십니까?
그때까지도 횡설수설하던 구디엔 경은 그제야 마지못해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입에 자물쇠를 채워 놓은 쿠베가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병력은 분명 우리가 많습니다. 카렐 놈은 빚더미에 앉아서 더 이상은 싸움을 벌일 능력도 없습니다. 우린 2번 도시 내주고 시간을 더 끌면 됩니다.”
“말은 쉽게 하네! 우리도 돈이 없기는 마찬가지야!”
“방금 격벽식 방어체계를 풀었습니다. 수에니로 퇴각하면 됩니다. 수에니는 경제 기반도 좋고, 방어도 쉽고 거액의 근위대 군자금도 보관되어 있습니다. 수송선 15척이 올 겁니다. 보안국장 쿠마르 우펠루 측근들이 동맹군에서 빼앗은 수송선입니다.”
쿠베가 다시 헛기침을 했다.
“지금 병력을 건재하게 그곳까지 데려갈 수 있다면 끝까지 항전을 해서 놈의 진을 짜든, 협상을 해서 최대한 뜯어내든 할 수 있습니다. 카렐 놈도 지금 한계에 몰렸으니 협상만 잘 하면 우리가 새로 다리 뻗을 자리 정도는 충분히 건질 수 있습니다. 경도 죽은 플로브 경처럼 끔찍한 지경을 당하시지 않아도 되고요.”
“협상도 퇴각한 후에 해야 뭘 건져먹는 거지 싸움이 개판이 된 꼴에 무슨 협상이냐?”
구디엔 경이 버럭 화를 냈지만 쿠베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너무 앞서서 걱정하실 건 없습니다. 페로 놈이 오기로 했습니다.”
“놈이 협상에 응했다고? 그래서?”
“까짓거 막판인데 신사적으로 굴 필요 있습니까? 몸도 성치 않은 놈이 오는데요.”
쿠베가 다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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