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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776화 (771/1,132)

< -- 776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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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베와의 연락을 끊은 구디엔 카나 경은 눈앞이 막막했다.

얼떨결에 대군의 사령관이 되기는 했지만 그는 대군을 지휘해 본 경험도 없었고, 이번 전쟁의 결과를 모두 뒤집어쓰는 무거운 책임도 원치 않았다. 그는 그저 가장 안전한 길을 따라온 것이었고, 어쩌다 운이 지지리도 없다보니 연합군 쪽에 남은 마지막 상급제후가 되었을 뿐이었다.

“어쩌지.”

구디엔 경은 눈앞에서 죽어가고 있는 휘하 장병들을 보며 절망감에 주저앉고 싶은 맘이었다. 가디언 타크마가 이끄는 3천의 근위대가 지금은 방금 투항한 남부 근위보병들을 ‘처리’하느라 여념이 없지만 그 작업이 끝나고 그들이 전선에 복귀한다면 그가 지휘하는 기병들의 운명은 폭풍 앞의 등불 꼴이었다.

“젠장! 수송선은 언제 온다는 거냐!”

구디엔 경은 하늘만 쳐다보며 자기도 모르게 손가락 끝을 물어뜯었지만 괜히 갑옷을 씹어 이만 상할 뿐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다시 카렐에게 고개를 숙이고 되돌아가고 싶었지만 탈라스에서 그를 죽이려 했던 샤자한의 무리 편에 섰던 전력이 문제였다.

“제, 제후님.”

부장 중 한 명이 핏기가 사라진 얼굴로 손에 큰 주머니를 하나 들고 달려왔다.

“왜!”

버럭 소리를 질렀던 구디엔 경은 부장이 주머니를 펼쳐 보인 순간, 화를 낼 기운조차 잃고 말았다. 주머니 안에는 그가 쿠베나 남부 사람들 몰래 카렐에게 보냈던 ‘협상 사자’의 잘린 머리가 들어있었다.

연합군 주력인 근위대와 남부 사람들 몰래 자신만이라도, 아니 자신의 측근과 동부기병대의 목숨만이라도 건져보려는 것이 그의 속셈이었지만 잔혹한 황제는 그나마도 받아들일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너무……늦었어.”

구디엔 경은 희미한 여명이 비치기 시작하는 동쪽 하늘을 보며 막막함에 가슴을 뜯었다. 밤새 이어진 전투는 이제 마지막 장으로 넘어가는 전환점이었고, 살기 위해 버둥거리는 지친 병사들의 동물적의 의지까지 꺾인다면 학살 단계에 접어드는 건 시간 문제였다.

“좌군의 제네르 그년 기병들이 이쪽으로 몰려와서 후방까지 차단하면 이제…….”

“그건 아닙니다.”

쿠베와 입씨름을 벌이는 동안 대신 명령을 수납했던 슈트란 가 출신 부장이 시계를 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좌군의 남부 기병들이 오래 버텨주고 있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적들이 그놈들만 죽자사자 두들기고 있지 우리 쪽으로 안 오고 있습니다.”

“응?”

정신을 퍼뜩 차린 구디엔 경이 망원경으로 멀리 동쪽과 후방을 차례대로 살폈다. 히르직스를 꺾은 제네르의 부대는 여전히 그곳에서 남부기병들만 쥐 잡듯 두들기고 있을 뿐 아직 연합군의 후방을 차단할 생각은 없는 듯 보였다.

“저 멍청한 년.”

구디엔 경의 입에서 처음으로 상대를 비웃는 말이 튀어나왔다.

“저년이 우릴 살려주는구나.”

“젠장, 우리 수송선은 언제 오는 거야!”

구디엔 경이 다시 같은 말을 반복하며 망원경으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남쪽 하늘에서 날아온 은색 셔틀이 처음 눈에 들어온 건 그때였다.

“저거 눈에 익은데?

“리쿠르고스 셔틀입니다. 페로 경의 전용셔틀입니다. 초고속 셔틀이라 벌써 도착했군요.”

“저쪽에선 대공이라고 할걸.”

구디엔 경이 입을 씰룩거렸다. 격벽식 방어체계가 풀리고 나타난 첫 비행체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사오시안트 성에 걸려 있던 공중 에너지 장벽 일부가 풀리는 모습이 보였다.

“페로 경이 왔으니 이제 우리 퇴각 수송선이 올 차례인데?”

구디엔 경이 초조한 얼굴로 북쪽하늘을 올려보았다. 쿠베가 ‘페로 경의 셔틀이 성 안에 내리는 게 퇴각 신호입니다. 그때 전군을 데리고 물러나십시오.’라고 말했으니 이제 분명히 물러날 때였다.

“저깁니다!”

하늘을 살피던 부장이 어딘가를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멀리 북쪽 하늘에서 깜박이는 몇 개의 불빛은 그들 눈에는 동쪽 하늘의 희미한 여명보다 훨씬 반가웠다.

“몇 척이냐?”

“하나, 둘……총13척입니다!”

“13척? 쿠베 놈이 15척이라고 했는데?”

구디엔 경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때, 명령을 수납하던 부장이 어딘가와 급히 연락을 나누고는 입을 열었다.

“2척은 기계고장이 생겨서 좀 늦게 온다고 합니다.”

“잠깐, 13척에 다 탈 수 있는 거야?”

구디엔 경의 물음에 아랫사람들이 재빨리 계산을 시작했다. 그리고 제일 먼저 나온 대답은 그리 희망적이지 않았다.

“기병이 많아서 어렵습니다. 15척도 다 타긴 빠듯한데 2, 3만 정도는 아무래도 좀 늦게…….”

“어느 부대가 뒤에 오는 걸 타?”

구디엔 경의 조심스런 물음에 부장들이 일제히 서로 눈치를 보았다. 부장들 중에는 동부 출신도 있고 남부 출신도 있지만 오직 한 부대 사람만이 이 자리에 없었다.

“잘됐어. 우리가 죽도록 싸우는 동안 저놈들은 싸움도 한 판 안 벌였어.”

구디엔 경이 약간 감정이 섞인 시선으로 서북쪽을 향해 눈을 흘겼다. 서북쪽 해안가에서 동맹군쪽 근위대와 대치중인 근위대는 밤새 단 한 번 칼도 휘둘러 본 일이 없었다.

“그게 좋겠군요.”

남부와 동부 무장들이 일제히 맞장구를 쳤다.

“저어……황도 공성전 때도 근위대만 황도 부근에 놔두고 갔다가 그네들이 적에게 투항해 버렸습니다. 좀 무리를 해서라도…….”

소수의 무장들이 동료들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실수를 지적했지만 그들의 의견은 사방의 곱지 않은 시선에 곧 묻혀버리고 말았다. 그들을 데려간다는 건 곧 누군가 남는다는 뜻이니 말 한 마디 잘못 꺼냈다가는 ‘그러면 너희가 남아.’라는 말을 듣기 십상이었다.

“됐어, 저네들은 아직 전선과 멀리 있으니 나중에 오는 것 타고 오라고 해. 수송선은 후방 20스타디아(3km)에 착륙하라고 하고.”

구디엔 경이 간단히 결론을 내려버렸다. 나중에 쿠베와 충돌이 생기건, 저들이 위험에 처하건 하는 문제는 당장 자신의 목숨을 걱정하고 있는 그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퇴각할 수송선을 확인한 구디엔 경은 제네르의 기병대를 다시 확인했다. 다행히 동맹군 기병들은 여전히 후방을 막지 않은 상태였고, 퇴로는 훤히 열려 있었다.

“됐어. 충분히 퇴각 가능하다. 퇴각나팔을 불어.”

길게 늘어지는 ‘퇴각나팔’이 밤새 전투의 피로에 절고, 죽어 없어지는 지휘관들 때문에 의욕까지 잃었던 연합군의 머리 위에 울려 퍼졌다.

“퇴각! 퇴각! 20스타디아 후방의 수송선까지 축차 퇴각한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퇴각 명령에 후미의 연합군들이 그제야 갑자기 힘을 내어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껏 ‘완전히 무너진 일이 거의 없는’ 견고한 남부 보병대답게, 대오도 무너지지 않았고 퇴각하면서도 전혀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연합군에서 퇴각나팔이 들려올 때까지도, 전선 북서쪽의 시로와 제파는 여전히 근위대와 대치중에 있었다.

쿠베를 따르는 3만의 근위대는 상대 진영의 최정예 병력, 그들을 이끄는 2명의 걸출한 특등급에 싸움을 내켜하지 않았고, 시로와 제파 역시 숫자도 많은 옛 동료들에 먼저 싸움을 걸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보니 구디엔 경의 말대로, 이들은 전투 내내 적군, 아니 정확히는 이전 전우와 눈싸움만 실컷 벌였을 뿐 칼 한 번 맞대어 본 일이 없었다.

“이거야 원, 어디 가서 사오시안트 전투에 나갔다고 창피해서 말도 못 하겠군.”

바위 위에 걸터앉은 시로가 빗물에 퉁퉁 불어버린 발을 작은 방패로 부쳐 말리며 투덜거렸다. 비를 쫄딱 맞으며, 그것도 질척거리는 습지에 발을 담근 채로 밤새 버티다보니 지휘관이건 병사들이건 구분 없이 몰골들이 말이 아니었다.

“젠장, 타크마 보내지 말고 내가 갈걸 그랬나?”

제파는 황제가 있는 좌군 쪽을 돌아보았다. 저곳에서 벌이는 혈전도 이들에게는 지금까지 완전히 남의 일이었다. 1개 연대를 이끌고 저곳으로 간 후배 타크마가 카산드라의 남부 근위보병대를 잡아내며 ‘한 건’을 올리는 것을 이 두 선배들은 손가락 빨면서 구경만 해야 했다.

“차라리 잘됐지 뭐. 같은 근위대끼리 싸워서 뭐해.”

시로가 반쯤 언 발을 호 불어 녹이며 건성 대답했다. 이쪽 근위대도 저쪽 근위대도, 모두 싸움 따위는 아예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듯 하나같이 딴짓에 빠져 있었다.

“이봐, 그래도 적은 적이야.”

제파가 퇴각하는 남부보병대를 걱정스레 쳐다보았다. 지금까지의 전투들처럼, 동맹군은 이번에도 역시 연합군 주력인 남부보병대 특유의 ‘견고함’을 결국 무너뜨리지 못한 셈이었다. 남부보병대는 여전히 질서를 지키고 있었고, 혼비백산해 대오를 무너뜨리고 도망치는 자도 없었다.

“빌어먹을, 저 돌덩이 같은 놈들 정말로 무너뜨리려면 수만 명 목숨 쳐들여가면서 2, 3일은 두들겨야 가능하려나? 어휴, 아주 징글징글하네.”

시로가 발바닥을 문지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제파가 적군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연합군 전체가 물러나려는 모양인데, 그럼 근위대도 그냥 이대로 보내주는 거야?”

“아까 못 들었냐? 쿠베하고 협상하신다는 것 같던데? 그럴 거면 굳이 싸울 필요가 있을까?”

“쿠베 놈 얍삽한 얼굴을 또 봐야 한다고? 제기랄. 그놈 살려두면 두고두고 화가 될 거라고. 협상을 할 때가 따로 있지, 지금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제네르처럼, 이들도 약속이나 한 듯이 황제의 이번 결정에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 말을 들은 것처럼, 이 둘의 할룩스가 갑자기 울리기 시작했다.

“엉?”

발신자를 확인한 시로가 기겁을 하며 얼른 신발부터 신고 할룩스를 켰다. 괜스레 제 발 저린 시로가 죄인처럼 더듬거리며 먼저 입을 열었다.

“흐, 음. 폐하, 지금 적과 계속 대치상황이…….”

“공격 개시해라.”

“예에?”

“적을 공격해라. 수송선에 오기 전에 공격해서 근위대를 해안가에 묶어 놔라. 연합군과 함께 퇴각 못 하게 해.”

시로가 침을 꿀꺽 삼키며 맞은편의 근위대 3만을 돌아보았다. 그들도 전혀 싸움 생각은 없는 듯, 하나같이 피곤한 얼굴로 퇴각 준비를 하는 모습들이었다.

“고, 공격이요?”

시로가 말을 더듬거렸다. 지금까지 아무 말도 없던 황제가 막판에 와서 뜬금없이 저들을 공격해 잡아 놓으라니 그로서는 황당하기까지 했다.

“적과 협상하시려는 것 아니었습니까?”

“누가?”

카렐이 마치 전혀 모르는 일처럼 갑자기 시치미를 뚝 뗐다.

“반역도하고 내가 협상을 한다고?”

무언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한 시로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존명하겠나이다.”

시로가 마지못해 대답했지만 옛 동료들에게 싸움을 거는 것은 아무래도 내키지 않았다. 그래도 어쨌든 황명이었다.

“들었지? 준비!”

시로의 손짓에 날카로운 진격 나팔이 새벽하늘에 울려 퍼졌다. 지금까지 반쯤 싸움을 포기하고 있던 1, 11군단 근위대들도 막판에 떨어진 생각지도 않은 진격명령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놀란 건 막 퇴각을 준비하던 반대편의 근위대도 마찬가지였다.

“공격!”

시로가 도끼를 쳐들고 앞을 가리켰다. 하지만 이번 공격을 꼭 해야 하는 것인지 하는 의문은 여전했다.

구디엔 카나 경이 이끄는 연합군 본대의 퇴각은 잘 훈련된 견고한 남부보병대의 움직임에 따라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후미의 보병들이 퇴각해 2차 대오를 만들고, 전방의 대오가 다시 퇴각해 그들 뒤에 또 다시 벽을 치는 정형화된 방법으로, 그들은 느리지만 거의 손실이 없이 동맹군을 차근차근 따돌리며 물러날 수 있었다.

“휴우. 북부 수송선이라고 했던가?”

부하들보다 먼저 수송선에 도착한 구디엔 경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자신을 기다리던 최신형 스페이스 수송선의 거대한 선체를 올려보았다. 건조한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이 ‘새 수송선’은 새벽여명 아래에서 유달리 반짝거리고 있었다. 13척이나 되는 새 수송선이 지평선을 꽉 채우고 늘어서서 퇴각하는 병력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든든해 보였다.

“기왕이면 새 놈이 기분은 좋지.”

한때 동맹군 소속이었던 이 거대한 수송선의 옆에는 원래 있던 카렐의 황실 문장이 조잡한 페인트로 지워져 있었다. 그 꼴이 이 때깔나는 새 수송선에서 굳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계집도 그렇지요.”

살았다는 안도감 덕분인지, 그를 따라온 무장 중 한 명이 퇴각 분위기에 안 어울리게 농담까지 꺼냈지만 구디엔 경도 이번은 화를 내지 않았다.

“요즘도 그런 년이 있나?”

제일 먼저 퇴각한 구디엔 경과, 그를 따르는 지휘부, 근위병 수백은 빗물과 전투로 온통 더러워진 몸을 이끌고 수송선에서 내려놓은 발판을 타고 거대한 해치에 지친 걸음을 들여놓았다. 해치 구석구석에서는 이 수송선의 승무원들이 패장 신분으로 들어오는 이들을 냉담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밤새 수고 많으셨습니다.”

지치고 신경까지 곤두서 있던 구디엔 경은 넓은 수송선 해치 안쪽에서 울려온 가늘고 매혹적인 여자 목소리에 정신이 퍼뜩 드는 느낌이었다.

“누구?”

두리번거리던 그가 실제로 목소리의 주인공을 본 순간, 그는 지금까지 전장에서 쌓인 피로가 일순간 싹 풀리는 것 같았다.

“허, 함교보다는 내 침대 위가 훨씬 어울리겠군.”

구디엔 경이 몇 번이나 침을 삼키며 여자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반짝이는 갈색 피부, 색기가 도는 까맣고 큰 눈동자는 동부에서는 볼 수 없는 북부나 서부 미녀들만의 특징이었다.

“동부 5제후 구디엔 카나 경 아니십니까.”

여자는 구디엔 경에게 사뿐사뿐 다가와 바닥에 공손히 꿇어앉았다.

“제가 이 수송선의 책임자입니다. 목적지까지 편안히 모시겠나이다.”

여자가 가는 눈웃음을 보이며 이마 위로 흘러내린 까만 머리칼을 옆으로 넘겼다.

“흐읍.”

순간, 몇몇 무장들이 몸서리를 치며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여자의 오른손에는 손가락 다섯 개가 달린 사람의 손 대신, 황금색으로 반짝이는 예리한 갈고리가 끼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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