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77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
.
.
“수에니로 가는 게 꼭 나쁘지만도 않군.”
구디엔 경이 손목이 없는 그 여자, 케스난을 내려다보며 처음으로 피식 웃었다. 패전으로 망가졌던 기분도 조금이나마 나아지는 느낌이었다.
“귀하신 상급귀족께서 설마 소녀같이 천한 평민의 몸을 원하신다는 말씀은 아니시겠지요?”
케스난의 노골적인 물음에 구디엔 경의 표정이 잠시 굳어버렸다. 아랫사람들이 민망한 표정으로 얼른 흩어지며 짐짓 자신들의 일에 몰두하는 척 했다.
“설마.”
구디엔 경이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소녀 이미 받드는 분이 있사옵니다. 하오나…….”
케스난이 얇은 입술 사이로 하얀 이를 살짝 드러냈다.
“목적지까지는 1시간 반쯤 걸릴 것 같사옵니다.”
케스난은 딱 한 마디만 남긴 채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휙 돌아섰다. 몸에 딱 붙는 긴 원피스 자락을 끌며 멀어져가는 그의 가는 실루엣, 잘록한 허리와 탄탄한 히프가 구디엔 경과 무장들의 눈동자를 한참동안 딱 잡아놓고 있었다.
“완전 미치게 만드는군.”
몇몇 젊은 무장들이 억지로 시선을 떼고 전장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1시간 반이라.”
구디엔 경이 시계를 보며 짐짓 아무 관심 없는 척 했다.
“빨리 들어와! 빨리 퇴각해야 해!”
무장들이 전장에서 돌아오는 장병들에게 악을 썼다. 치열한 전장에서 탈진할 지경까지 기력을 다 짜내고 만신창이가 된 남부 보병들, 타고 갔던 말까지 버리고 북부보병들과 처절한 백병전을 벌였던 기병들, 사령관을 잃은 상태에서도 동맹군 기병에게 끝까지 저항했던 기병들이 지친 얼굴로 하나 둘 수송선에 올랐다.
죽어서 남겨졌거나, 혹은 적에게 투항해 줄어든 자들을 제외해도 10만이 넘는 대군이 일거에 13척의 수송선에 몰려들고 있었지만 잘 훈련된 정예군답게 큰 혼란은 벌어지지 않았다.
“척후병 연락입니다! 우리 기병을 돌파한 적군 일부가 우리 후방에 에너지 장벽을 설치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뭐?”
지금까지 느긋하던 구디엔 경은 그제야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을 깨닫고는 북쪽을 얼른 살폈다. 제네르의 기병대가 히르직스의 남부기병대를 박살내는 동안, 동맹군 몇몇 병력이 이미 후미까지 깊숙이 진출해 있었다. 망원경으로 자세히 보니 사역병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정체불명의 병력이 후방에 어슬렁거리는 모습이 분명히 보였다.
“맙소사, 저게 설치되면 퇴각 자체가 물거품이 됩니다!”
“저놈들 저것 때문에 우리 후미를 안 막았던 건가?”
구디엔 경이 소리를 꽥 질렀다. 그도, 그의 참모들도, 자신들이 휩쓸려있는 끔찍한 시나리오에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그런데 근위대는 왜 꼼짝도 않고 있지?……엉? 저놈들 지금 싸우고 있는 거야?”
구디엔 경이 서쪽 해안을 돌아보았다. 전투 내내 놀고 있던 3만의 근위대들은 막상 싸움을 마무리하고 물러나야 할 지금 난데없이 싸움에 휘말려 있었다.
“예, 우리 퇴각결정을 할 때 놈들이 갑자기 공격을 개시했다는 연락입니다!”
참모의 뒤늦은 보고에 구디엔 경이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입을 쩍 벌렸다.
“젠장! 어쨌든 빨리 물러나라고 해!”
“그런데 마지막 수송선 2대가 도착하지 않아서 아직 못 물러나고 있습니다.”
“그 2척은 어떻게 된 건데!”
구디엔 경이 담당 참모에게 버럭 언성을 높였다. 난감한 표정으로 할룩스와 몇 분째 씨름하던 참모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기계고장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해서 조금 더 늦어질 것 같다고 합니다.”
“제기랄! 처음부터 못 온다고 했으면 다른 수송선이라도 투입했을 텐데 이게 뭐야!”
근위대 한 부대의 퇴각만 늦어지자 초조해진 구디엔 경의 표정이 점점 흙빛이 되어갔다. 3만이나 되는 최정예 근위대라면 연합군으로서도 절대 버릴 수 없는 소중한 전력이었다.
“사오시안트 시내에 여분 근위대 수송선이 있을 텐데!”
“우리 퇴각에 이미 수송선이 배정되어서 그 수송선들에는 근위대 사오시안트 수비부대하고 다른 군수품을 싣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이라도 연락해서 짐을 버리고 이리로 오라고 해 볼가요?”
“어느 세월에! 에너지 장벽이 설치되면 어쩌라고!”
구디엔 경이 몇 번째 시계를 확인했다.
“이봐, 여긴 더 태울 자리 없어?”
구디엔 경이 발을 동동 구르며 물었다.
“자리가 없어서 부상당한 군마까지 살처리하고 내버렸습니다. 더 이상은 어렵습니다.”
“제후님, 차라리 퇴각을 포기하고 여기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결판을 내는 게 좋지 않을까요?”
몇몇 강경한 무장들이 목소리를 높였지만 구디엔 경이 바로 고개를 저었다.
“상황이 안 되니 문제지!”
구디엔 경은 해치 밖으로 보이는 전장의 상황을 확인했지만 역시 녹록치 않았다. 마지막 퇴각 시간을 벌 임무를 받은 부대가 수송선 주변에서 마지막 저항을 하고 있었지만 동맹군도 도망가는 적들을 가만히 보아주지는 않았다. 제네르의 기병대, 하지즈 장군의 낙타병단과 아샤드 경의 ‘검은 사신부대’가 퇴각하는 뒤를 바싹 조여오는 중이었다.
“저 뒤를 보십시오!”
남부 무장이 공격해 오는 적들의 후미를 가리켰다. 연합군이 가장 무서워하는 타크마의 3천 근위대가 5천의 포로들을 단속하는 일을 어느 정도 끝내고 뒤이어 추격을 해 오는 중이었다.
“저놈들이 퇴각하기를 기다리다가는 우리도 다 죽습니다!”
구디엔 경이 낯을 찡그렸다. 이들 말대로, 뒤처진 근위대를 살리려다가는 안전한 퇴각 자체가 완전히 어그러질 판이었다. 구디엔 경으로서는 무언가 결단을 해야 할 때였다. 퇴각을 포기하고 다시 나가 싸우거나, 처진 근위대를 포기하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남은 근위대는 쿠베 녀석이 협상으로 살리라고 해. 지금 상태에서 우리로는 역부족이다.”
구디엔 경이 마지막 책임을 슬그머니 쿠베에게 넘겨버렸다. 그는 시계를 확인하며 아랫사람들에게 일렀다.
“저놈들 살리려고 나머지가 다 죽을 순 없지. 그래, 주력군이 사는 게 협상에도 유리해.”
자신을 최대한 합리화시킨 구디엔 경이 초조한 얼굴로 이륙을 명했다.
“퇴각! 퇴각!”
수송선단 주변에서 마지막까지 적을 저지하던 기병들이 막 닫히는 해치에 허겁지겁 몰려들었다.
“일단 이륙부터 해! 해치는 나중에 닫아도 돼!”
후미의 장병들이 막 떠오르려는 수송선에 필사적으로 달려들었다. 늦게 도착한 느려터진 연합군 장병들이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해치 위로 끌어올려졌지만 완전히 낙오한 장병들은 거의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들을 몰아붙이던 동맹군 기병들도 떠오르는 수송선 아래까지 파고드는 위험한 시도는 하지 않았다.
“올 태면 와 봐!”
쓸데없는 허세에 불과했지만, 몇몇 연합군 장병들이 땅 위에 남은 동맹군 장병들을 향해 괜스레 놀림을 퍼붓기도 했다. 10만이 넘는 연합군의 대군의 퇴각은 최소한 아직까지는 아주 교과서적이고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이건 아닌데.”
3만의 근위대를 남겨둔 채 떠나가는 구디엔 경도 맘이 편한 건 아니었다. 적이 에너지 장벽을 설치하고 있다는 말에 일단 꽁지 빠지게 도망을 치기는 했지만 그 결과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는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협상이 제대로 될 수 있을까…….”
그는 수송선 창밖으로 보이는 사오시안트의 살벌한 새벽 풍경을 지켜보며 입술에 꽉 힘을 주었다. 황제령 제2의 그 대도시는 항구에서 시작된 화재가 남쪽 시가지로 옮겨붙어 아비규환이 되어 있었고, 성벽은 구멍 난 둑처럼 한구석이 흉측하게 무너져 동맹군이 지금까지도 안팎을 개미떼처럼 드나들고 있는 한심한 꼴이었다.
“차라리 우리도 이대로 그냥 영지에 돌아가 버릴까?”
옆에 동부 측근들이 와 있다는 것을 확인한 구디엔 경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포기하고 싶어. 다 지겨워졌어.”
구디엔 경이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쿠베는 손을 잡고 버텨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는 ‘반역도’의 수괴로 앞에 서는 건 결코 원치 않았다.
“이 배에 탄 건 거의 우리 동부기병대지?”
“8할 정도는 우리 병력입니다. 수송선 책임자를 구슬르면 가능할 것도 같습니다.”
“카렐 황제가……가만히 있겠습니까?”
동부 측근들이 한쪽에 모여 있는 남부 무장들의 눈치를 살피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
“그쪽도 코가 석자니 한동안은 동부 촌구석 따위엔 신경 못 쓸 거야. 악감정 같은 건 시간이 해결해 줄지도 모르지. 시간을 두고 계속 빌면 가능할지도 몰라.”
마음을 굳힌 구디엔 경이 옷을 툭툭 털었다.
“아까 그 여자에게 가 봐야겠다. ……아무도 따라오지 마.”
“이동 중엔 아무도 해치를 못 떠나게 되어 있지 않던가요?”
선장실을 찾은 구디엔 경을 맞아준 건 물담배를 뻐끔거리고 있는 조금 전 그 여자, 케스난 오나시스였다. 케스난은 선장석이 아닌, 그 옆에 놓인 작은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기괴한 눈길로 이 제후를 맞아주고 있었다.
“나도 말인가?”
“후훗.”
케스난이 피식 웃으며 물담배를 한 모금 삼켰다.
“기다리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늦게 오셨군요?”
여자의 간드러진 목소리에 갑자기 몸이 화끈 달아오른 구디엔 경은 가슴을 넓게 펴고 최대한 당당한 몸짓을 보였다. 그는 딱히 색을 밝히는 남자는 아니었지만 이 정도의 노골적인 유혹까지 무시해버릴 목석도 아니었다.
“아까 했던 말이 그런 뜻이었나? 난 몰랐는데?”
“오호, 그러셨나요?”
구디엔 경의 빤한 거짓말에 케스난이 깔깔대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뭣 하러 오셨죠?”
케스난이 물담배 연기를 훅 내뿜으며 태연히 물었다. 구디엔 경이 계속 떠오르는 잡생각을 머리에서 떨쳐내며 최대한 사무적으로 말했다.
“수에니 말고 동부로 가 줬으면 좋겠어. 다른 데 알리지는 말고.”
“정치나 전쟁 따위는 잘 모르지만……아마도 제 고용주가 화낼 것 같군요?”
“상급제후의 첩이 되면 고용주 따위는 잊어도 돼.”
“첩이요?”
케스난은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진지한 표정으로 구디엔 경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 매혹적인 여자의 눈길을 받은 구디엔 경은 다시 한 번 가슴을 펴고 어깨에 힘을 꽉 주었다.
몇십 초가 지난 후, 케스난이 물담배를 끄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제야 드리는 말씀이지만 어차피 수에니에 갈 생각은 없었어요.”
‘뭐 이리 쉽게 넘어오나?’
케스난의 말을 멋대로 해석한 구디엔 경이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리고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 여자의 반쯤 드러난 젖가슴을 힐끔 쳐다보며 가빠진 숨을 꾹 눌러 참았다.
“실은 말이죠.”
구디엔 경의 바로 앞에 선 케스난은 그의 허리에 맨 무기 벨트, 두툼한 갑옷을 끌러 멀리 내던졌다. 얼떨결에 무장해제를 당하면서도, 여자의 눈빛에 홀린 구디엔 경은 다른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었다.
“해치에 있는 저 수많은 피 끓는 사내들 몸 냄새가 여기까지 풍겨와서 저도 미칠 지경이거든요?”
케스난이 그의 목과 허리를 대담하게 먼저 안았다. 여자의 푹신한 젖가슴이 닿는 감촉에, 그리고 예리한 갈고리가 목 뒤로 살며시 감기는 차가움에 구디엔 경이 자기도모르게 깊은 숨을 한 번 몰아쉬었다.
“그대 살 냄새가 이 방에 꽉 차서 나도 견디기 힘들어.”
목 뒤를 살짝 긁는 차갑고 날카로운 금속에 그의 등골이 오싹해졌지만 이런 색다른 자극도 난생 처음이었다.
구디엔 경이 묵직해지는 아랫도리를 느끼며 케스난의 귓가에 조심스레 입술을 가져갔다.
“바로 앞에 있는 이 사내의 몸 냄새로도 충분할걸?”
키득거리며 벨트를 풀려던 구디엔 경이 갑자기 움직임을 뚝 멈추었다. 그는 케스난을 내려다보며 부르르 떨었다.
“으읍.”
그는 떨리는 손으로 케스난을 밀어내려 했지만 뒷골에 구멍이 난 상태에서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짜릿한가요?”
케스난이 갈고리로 남자를 거칠게 확 잡아당기며 귓가에 입술을 대고 작은 소리로 물었다. 그의 황금색 갈고리가 이 건장한 무장의 뒷머리를 꿰고 귀 밑까지 쑥 빠져나왔다.
“대뇌가 살아있으니 아직 의식은 멀쩡하신 거 압니다, 구디엔 카나 님.”
케스난은 피가 주르르 흘러내리는 구디엔 경의 귀에 여전히 부드럽고 유혹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런, 제가 받드는 분의 비릿한 피 냄새는 당신 따위 잔챙이 귀족과는 비교도 안 되게 짜릿한데요?”
케스난이 구디엔 경의 뒷목에 꽂은 갈고리를 확 뽑아냈다. 뇌 한쪽에 구멍이 나 버린 이 거구의 무장은 가냘픈 여인 앞에 힘없이 털썩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때, 선장실 문이 열리더니 건장한 선원 두 명이 성큼 들어섰다.
“탈출정 준비되었습니다, 마스터. 원격비행 설정 끝났으니 가면 됩니다.”
“잘했다.”
케스난은 쓰러진 채 여전히 바들바들 떨고 있는 구디엔 경의 얼굴을 구두 끝으로 꾹 밟으며 다시 매혹적인 웃음을 비쳤다. 여전히 의식이 남은 구디엔 경이 눈만 껌벅거리며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톱 하나 가져와 봐라, 얘들아. 그냥 가긴 아쉬우니 연합군 마지막 제후의 머리나 기념품으로 거둬가자꾸나.”
++++++++++++++++++++++++++++++++++++++++++++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The Iron Vein 개인지 구매사이트 : http://vein.zio.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