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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778화 (773/1,132)

< -- 778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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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들의 제후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꿈에도 모르는 수송선 장병들은 해치에 와글와글 모여 앞으로 벌어질 일에 관해 진지한 얼굴로 동료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이번 전쟁을 주도했던 연합군의 최고지휘관들이 지난밤 전투에서 몰살당했다는 정도는 웬만한 장병들도 다 눈치를 챈 모습들이었고, 패색이 짙어졌다는 것도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그렇긴 해도 막무가내 버티기를 포기하고 일단 사지에서 빠져나온 이상, 지금까지 관례를 보아 말단 사병들까지 고향에 돌아가는 것을 걱정하는 건 아니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이재 남은 지휘부가 어떻게 새 황제와 정치적으로 깔끔히 합의를 이루느냐 정도였다. 그 결과에 따라 고향의 가족들에게 바로 돌아갈 수 있을지, 아니면 쓸데없는 저항을 계속하다가 결국 수용소로 가서 한동안 매운 대가를 치른 후에야 돌아갈 수 있을지가 결정될 일이었다.

그렇다보니 일부에서는 ‘적당히 기회를 잡아’ 탈영이라도 해서 목숨만 건지는 편이 현명할지도 모르겠다며 수군거리는 기회주의자들도 있었다.

어쨌든, 위아래를 막론하고 분위기는 무거웠고, 하나같이 더 이상은 싸울 의욕을 상실한 모습들이었다.

이 수송선에 탄 5천 정도의 기병, 보병들은 ‘다른 수송선에 탄 놈들은 무사히 빠져나왔으려나?’하는 쓸데없는 걱정들을 하며 널찍한 실내 체육관만한 해치에 빽빽하게 주저앉고, 드러누운 채 목적지 도착만 기다리는 중이었다.

“제후님께선 왜 안 오시지?”

몇몇 무장들이 시계를 보며 초조한 얼굴로 해치 위를 올려보았다. 해치의 천장 부근에 정비를 위해 설치된 철제 다리에는 십여 명의 선원들이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빌 밑의 연합군 장병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보나마나지, 뭐.”

무장들은 함교가 있는 위쪽을 힐끔 쳐다보며 키득거렸다.

“모르긴 몰라도 스트레스 제대로 풀고 오실걸.”

“풉. 여자 눈 번들번들한 거 보아하니 두 발로 걸어서 돌아오시는 것도 쉽지 않겠던데.”

“대타 불러주셔도 대환영인데.”

젊은 동부 무장들이 어깨를 들썩거리며 눈짓을 주고받았다. 침울하던 분위기에 잠깐이나마 웃음이 감돌았다.

“근데 함교에 간 놈들하고 연락이 안 되네? 움? 할룩스가 죽었잖아?”

장교 중 두셋이 먹통이 된 할룩스를 두들기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빨리 가려고 스페이스로 나와서 비행하고 있나보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가서 확인해 볼까?”

“넌 눈치도 없냐.”

그들이 제후를 찾아 나서려는 고지식한 동료에게 핀잔을 주었다.

“지금 속 편하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몇몇 무장들이 동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함교로 통하는 복도로 오르려 했지만 계단을 찾을 수가 없었다.

“문도 잠겼는데?”

위로 올라갈 길을 찾던 무장들은 해치 꼭대기에 드리워진 복도를 올려보았다. 그곳에서는 여전히 선원들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봐! 계단 문 열어!”

“탈영을 막기 위해 규정된 요원들 외에는 이동 중 선실 층에 올라오는 게 금지되어 있는 것도 모르십니까. 용건 있으시면 저희에게 말씀하십시오.”

“이런, 빌어먹을. 열란 말이야! 여기 있는 장교들만 가는 건데 누가 탈영한다냐!”

거친 무장들이 잠겨있는 계단실 문을 거칠게 걷어차며 언성을 높였다. 해치에 달린 큰 영상장치가 작동한 건 그때였다.

“밤새 고생하더니 좀 쉬었는가?”

영상보다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지만, 이곳의 사람들, 특히 동부기병들은 거칠고 갈라진 그 목소리만으로도 누구의 것인지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뭐야? 어디 있는 거야!”

겁에 질린 동부기병들이 몸서리를 치며 무기를 쳐들고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적은 그들의 코앞이 아니고 해치 벽의 영상 안에 있었다.

“짐의 신형 수송선에 탑승한 걸 환영한다. 제군들.”

“맙소사.”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영상을 확인한 장병들이 몸을 부르르 떨며 옆에 선 동료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온몸에 진흙과 피를 뒤집어쓴 채 등에 창과 칼을 메고 갯벌에 서 있는 이 주인공은 이미 지친 이들 눈에는 마치 저승사자처럼 보였다.

“충분히 쉬었을 테니 이제 그대들의 행선지를 결정할 자비를 내려줘도 되겠지?”

카렐이 고개를 들며 살짝 송곳니를 드러내고 웃었다.

“무기를 버리고 너희가 망가뜨린 황제령을 재건하는 신성한 노역을 할 거냐? 아니면 바로 저승에 갈 거냐?”

‘저승’이라는 말에 가뜩이나 황망해 있던 연합군 장병들 사이에 혼란이 번지기 시작했다.

“뭐 하는 협박이야! 제길! 누가 장난을 치는 거냐고!”

몇몇 강경한 남부 무장들이 발끈하며 영상에 대고 투구와 무기를 집어던지고 마구 고함을 질렀다.

그때, 해치 위쪽에 모여 있던 선원들이 동부와 남부 장병들 중간에 피로 젖은 천으로 돌돌 말아놓은 무언가를 홱 집어던졌다. 그 밑에 있던 동부 병사들이 큰 물체가 머리 위에서 뚝 떨어지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건 뭐야?”

흩어졌던 동부 병사들이 자루 주변에 하나 둘 모여들었다. 굳이 가까이 다가가지 않아도, 머리 없는 시체라는 정도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누, 누군지 알아?”

누군가의 물음에 동부 기병들 중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답을 몰라서는 아니었다. 비록 머리는 잘려나가고 없었지만, 아직 남아 있는 갑옷 약간과 시체를 말고 있던 번개 문장의 망토만으로도 그들에게는 충분했다.

뒤이어 비행을 감시하기 위해 함교로 올라가 있던 연합군 헌병 장교들의 시체가 사방에서 차례대로 바닥에 내던져졌다.

황제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너희 13척의 수송선은 모두 원격 조종 중이다. 다시 묻겠다. 저승이냐? 노역이냐?”

황제는 협박조도 아니었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 높낮이도 없이 차갑고 침착하게 묻는 목소리가 듣는 사람들 더 섬뜩하게 만들고 있었다.

“짐의 선원들이 탈출정을 타고 모두 내리기 전에 결정을 해라.”

연합군 장병들의 시선이 일제히 머리 위, 철제 복도로 향했다. 황제의 말대로, 해치 위의 복도에 있던 선원들이 보란 듯 비상 탈출정이 있는 함교 쪽으로 가고 있었다.

“저, 저놈들 어디 가는 거야!”

몸도 다치고, 의지까지 꺾여 있던 부상병들이 먼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어떡해! 이걸 어떡하냐고! 다 죽을 거야!”

부상병들이 발광을 하고, 성한 병사들도 어쩔 줄 몰라 하며 해치 안을 서성거리고 벽의 창을 두들겼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저승사자 같은 황제가 여전히 영상 안에서 이들의 혼란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폐하, 30호 수송선은 투항했고 33호는 거부했습니다.”

황제 옆에서 누군가가 보고를 올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쪽으로 살짝 눈동자를 굴렸던 카렐은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대답했다.

“사막에 떨어뜨려.”

순간, 해치 안 곳곳에서 비명과 탄식이 터져 나왔다. 패닉 상태에 빠진 병사들을 장교들이 달래보려 했지만 이미 공포에 질린 병사들은 불통이 되어버린 할룩스를 두들기고, 잠긴 창과 문으로 몰려들어 이미 사방에서 난동을 피우는 중이었다.

카렐이 고개를 들며 침착하게 말했다.

“다시 말한다. 살고 싶다면 너희 스스로 무장해제하고 양처럼 얌전히 있어라.”

“제, 젠장! 우리가 저 가짜 황제에게 무릎 꿇을 줄 알았냐! 안 속아!”

남부 출신의 선임 연대장이 황제의 영상을 향해 투구를 힘껏 집어던졌다. 그는 멍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수천의 장병들에게 잠긴 철문을 가리키며 악을 썼다.

“모두 따라와! 같이 함교로 가자! 아무나 수송선에 관해 아는 놈 있으면 나와!”

선임 연대장과 남부 무장들 몇이 앞장서서 잠긴 철문을 발로 힘껏 걷어찼지만 두꺼운 강화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해치에서 그를 지켜보는 겁 먹은 수천 장병들의 발도 마찬가지로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도 안 나오고 뭐해!”

굳어있는 장병들에게 연대장이 버럭 악을 썼다.

“젠장! 명령이다! 다 달려들면 이 문을 부술 수 있으니 빨리 나와!”

연대장의 명령에도 여전히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파랗게 질린 장병들은 선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있는 머리 위를 올려보며 바들바들 떨고만 있었다.

“그, 그냥 일단은 시키는 대로 하는 게…….”

무장 한 명이 이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조심스레 용기를 내어 말했다.

“뭐야?”

이를 드러내며 고개를 번쩍 돌렸던 연대장은 번적 칼을 빼들고는 경고나 꾸지람 한 마디 없이 그 무장의 목덜미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이크!”

그 무장 편을 들려던 무장들이 창백해지며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미처 막아볼 새도 없이 칼벼락을 맞은 무장은 짧은 비명만 남긴 채 바닥에 그대로 축 늘어져 버렸다.

“빨리 이 문을 부숴! 이 새끼들아!”

반쯤 미쳐버린 연대장과 그를 따르는 몇몇 무장들은 여전히 답답하게 굳어 있는 사병들 무리에 칼을 든 채로 마구 달려들더니 사방에 사정없이 발길질을 퍼부었다. 병사들은 공포에 이성을 잃었고, 무장들은 책임감과 분노에 정신을 놓아버린 상황이었다. 이제 해치에 선원들은 몇 남아있지 않았다.

“이 병신들아! 빨리 문 부수라고!”

집단으로 얼이 빠진 것처럼 서 있던 병사들은 이성을 잃은 채 미치광이처럼 날뛰는 연대장과, 이제 거의 빠져나간 선원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모두가 제정신이 아니었고, 시간은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 연대장은 여전히 굳어있는 병사 중 한 명을 철문 앞으로 확 밀었다.

“이 새끼! 빨리 열어!”

그때, 덩치 큰 병사 한 명이 느닷없이 연대장의 뒷덜미를 덥석 붙들었다.

“싸움도 진 주제에! 이젠 우릴 몰살시키려고!”

그 한 명을 시작으로, 다른 병사들까지 남부, 동부 할 것 없이 큰 함성을 지르며 장교들에게 무더기로 몰려들었다.

“너희 장교들이 책임을 지라고!”

“우리가 뭘 잘못해서!”

공포에 휩싸여 눈이 뒤집어진 병사들 앞에서는 동부 출신이건 남부 출신이건, 귀족 기병이건 평민 보병이건 아무 차이가 없었다. 병사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연대장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장교들을 다 잡아!”

지금까지 소름끼칠 만큼 조용하던 해치 안은 분노한 병사들의 고함과 그들을 저지하려는 말단 장교들의 절규, 병사들에게 기습을 당한 고위 장교들의 비명소리가 뒤엉켜 난장판이 되었다.

“맙소사, 폭동이야. 폭동이라고.”

지금껏 중립을 유지하던 장교들이 미쳐버린 부하들에게서 주춤주춤 물러서기 시작했다. 죽음의 위기에 몰린 병사들은 방금 전까지 칼을 들고 날뛰던 연대장과 그 휘하 장교들에게 벌떼처럼 달려들어 투구와 발길질로 사정없이 폭행을 퍼붓기 시작했다. 견고한 군기로 유명하던 남부제후군, 자존심 센 동부기병대에 사상 초유의 집단 반란이 벌어진 순간이었다.

“도망가! 도망가라고!”

통제를 상실한 해치 아래는 병사들에게 폭행을 당하고 죽은 고위 장교들의 시체, 겁먹고 도망치는 장교들, 장교를 다 죽이겠다며 광분하는 병사들, 그저 분위기에 휩쓸려 생각 없이 함께 뛰어다니는 병사들과 흥분한 동료들에게 짓밟혀 비명을 지르는 부상병들로 뒤죽박죽이었다.

“제발! 원하는 대로 하겠습니다! 제발요!”

몇몇 병사들이 이미 황제의 형상이 사라진 스크린을 향해 애원을 했고, 해치를 빠져나가려는 선원들에게 소리를 지르는 자들도 있었다. 거의 빠져나갔던 선원들이 그제야 걸음을 돌리고 다시 해치로 하나 둘 돌아오기 시작했다.

“무기! 무기를 거둬! 무장해제해야 돼!”

그나마 이성을 지키고 있는 일부 장병들과 하급장교들이 날뛰는 병사들을 필사적으로 저지했다.

“그만! 그만하라고! 이 새끼들아! 이러다간 다 죽어!”

그나마 병사들에게 평판이 좋은 나이 많은 하급장교가 앞장서 나서서 나팔수의 나팔을 빼앗아들고 마구 불어댔다. 그들이 나서서 반쯤 미친 동료들을 저지하면서 이 짧은 폭동도 일단 잠잠해졌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난데없는 무장 반란에 놀라고 겁먹은 장교들, 그리고 공포에 휩쓸려 지금껏 한 번도 상상 못 해 봤던 일을 저지른 병사들 모두가 반쯤 얼이 빠진 모습들이었다.

“제발 무기 좀 버려, 이놈들아!”

조금 전의 그 장교가 여전히 멍한 얼굴로 서 있는 자식들 같은 젊은 병사들에게 악을 썼다.

“사관들은 병사들 무기하고 갑옷 거둬서 내 뒤에 모아놓고! 나머지 놈들은 반대편에 집결해! 빨리!”

잠시 서로의 눈치를 보던 병사들이 하나 둘 무기를 내려놓았다. 지금껏 그 누구 앞에서도 완전히 무너져 본 일 없는 그들이었지만, 결국 ‘공포’ 앞에서는 모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폐하, 31호 수송선에서 투항 의사를 밝혀왔습니다.”

여전히 그 자리에서 사오시안트 성을 응시하던 카렐은 카토의 보고에 살짝 눈동자를 굴렸다.

“최고 지휘관이 탔으니 명색이 기함인데, 순순히?”

“사병들의 선상 반란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반란? 장교들을 해쳤단 말인가?”

카렐이 눈가를 찡그렸다.

“그런데……33호 수송선은 정말로 떨어뜨리실 겁니까? 차라리 해치만 떨구고 수송선은 건지는 게 경제적이지 않을까요?”

“수송선이 내리꽂힌다고 하면 더 섬뜩하지 않겠나?”

카렐이 물 한 모금을 꿀꺽 삼키며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카토는 이 심각한 상황에서 하마터먼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내가 미쳤나. 그 비싼 스페이스 수송선을 추락시키게.”

카렐이 여윈 얼굴에 짧게 웃음을 지었다.

“그럼 탈출정은 뭣 하러…….”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선원들도 정말 떨어뜨리는 줄로 알고 있어야 그럴싸하게 연기를 하지?”

“그렇군요.”

카토가 그제야 수긍을 했다.

“몇 명이나 탔다고 했지?”

“보병 4천과 기병 2천 정도입니다.”

“해치를 통째로 대사막 보안구역에 쏟아버리라고 해. 감시팀을 하나 붙여서 멀찍이에서 지켜보게 하고. 줄줄이 말라죽으면 알아서 살려달라고 빌 테니.”

“알겠습니다.”

“수용소로 데려가면 선상 반란 주동자들은 조용히 제거해라.”

“예? 그자들은…….”

카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상관의 명령에 저항한 자들이다. 어차피 두고두고 탈이 된다.”

카렐이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리고는 조금 전까지 응시하고 있던 사오시안트 성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이제 그럼 근위대와 쿠베만 처리하면 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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