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780화 (775/1,132)

< -- 780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

.

.

페로와의 협상을 앞두고 항구의 야적장에서 마음을 가다듬고 있던 쿠베는 컨테이너 더미 사이에서 나타난 웬 낯익은 얼굴에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자, 잠깐. 저게 누구지?”

쿠베는 눈을 한 번 비비고는 다시 눈앞의 사람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 남자의 얼굴, 행동, 심지어 걷는 걸음까지도 똑같았다.

“네놈 대체 누구냐!”

쿠베는 회담을 앞두고 측근에게 맡겨두었던 칼을 휙 빼앗아들고는 눈앞의 남자에게 겨누었다.

“쿠마르 놈은 죽었는데!”

쿠베는 갑자기 유령처럼 나타난 이 옛 측근에게 큰 소리로 물었다.

“대장, 저 맞습니다. 제가 왜 죽습니까.”

쿠베에게 대답을 하던 쿠마르가 갑자기 몇 번 힘겹게 기침을 했다. 어디서 왔는지 몰라도 온몸이 먼지와 검댕이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뭐야? 안 죽은 거였나!”

목소리까지 확인한 쿠베는 그제야 무기를 치우고 이 측근에게 조심스레 다가갔다.

“적군이 네 머리까지 내걸었던데?”

“제 머리를요? 지금 여기 붙어 있는 것 말씀입니까?”

쿠마르가 다시 기침을 하며 자기 머리를 가리켰다.

한편으로 안도하던 쿠베는 갑자기 불같이 화를 버럭 냈다.

“제기랄! 그럼 속은 거였어?”

“도망치다가 할룩스도 빼앗기고……신분을 감추려고 입었던 옷까지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적들이 제 물건들을 이용해서 가짜 시체를 내세운 게 분명합니다.”

“그런데 왜 연락도 안 받다가 일이 이 지경이 된 후에야 나타난 거냐! 놈들이 네 머리라고 내다걸고 보안국이 박살이 났는데!”

쿠베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보안국만 제 자리를 지켜줬더라면, 승패가 갈리던 그 결정적인 순간에 연합군의 신경망이 마비되지만 않았더라면 병력과 지형지물, 보급까지 모두가 유리한 상황에서 결과가 이 꼴로 망가지지는 않았을 터였다.

“죄송합니다. 법무대신 아리아노 경이 배신을 해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쿠마르가 좋지 않은 호흡을 다시 억지로 가다듬었다.

“그런데, 별궁을 연결하는 유일한 다리를 동맹군이 장악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빠져나온 거지?”

살짝 의심이 서린 쿠베의 물음에 쿠마르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다리를 고치던 사역병들이 북부 출신들이라 제 사람들을 쓸 수 있었습니다. 사정이 그래서 제대로 연락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궁과 시내에서 도망다니던 부하들을 만나 상황을 보고받고 몰래 이곳까지 왔습니다.”

쿠마르가 횡설수설 변명을 늘어놓으며 자신이 추슬러 온 십여 명의 보안국 간부들을 가리켰다. 그들 중 몇은 쿠베의 눈에도 익은 사람이었지만 상당수는 쿠마르가 보안국장이 되면서 데려왔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꼴이 이 모양이냐?”

쿠베는 그의 몸 곳곳에 왜 검댕이가 묻었는지, 왜 계속 콜록거리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어렵게 사지를 빠져나온’ 그를 마구 몰아붙일 경황은 없었다. 쓸 만한 수하를 모조리 잃은 그로서는 도리어 그의 재등장이 반갑기까지 했다. 그것도 패전이 거의 확실해진 상황에서 이렇게 돌아와 준 것만도 반갑게 끌어안아 주고픈 맘이었다.

“그래도 어쨌든 돌아와는 줬군.”

잔뜩 신경이 곤두선 쿠베는 차마 ‘잘 왔다’라는 칭찬까지는 해 주지 않았다.

“좀 있으면 페로 그놈이 이 야적장으로 올 거다.”

쿠베가 새벽 여명이 밝아오는 하늘을 올려보며 말했다. 야적장은 항구로 들여온 원자재나 곡물, 부피 큰 물건들을 내보내기 전 잠시 보관하려 만들어진 넓은 공간이었다. 사오시안트에서 항구 선착장을 제외한 외곽 해안가가 대부분 그렇지만, 이곳 주변도 거친 바다 위로 불쑥 솟아 있는 까마득한 절벽과 접하고 있었다.

“일단 약속으로는 양쪽 모두 가디언 10명 이상은 데려오지 않기로 했다. 가디언을 제외한 측근은 15명까지고.”

“그런데 ‘약속대로’ 하실 생각은 없으신 모양이군요.”

쿠마르의 말에 쿠베가 피식 웃었다.

“절벽 바로 아래가 작은 선착장이야. 그놈 몸도 성치 않다던데 재빨리 잡아서 리프트 타고 절벽 밑으로 뛰어내리면 어쩔 거야. 그놈 가디언들이 설마 리프트케이블까지 준비해 오지는 않았겠지.”

쿠베는 외투 속에 숨겨서 차고 있는 허리띠의 리프트 케이블 뭉치를 슬쩍 내보였다.

“놈의 호위가디언은요?”

“가디언 10명을 더 매복시켜 뒀다.”

“어디요?”

쿠마르가 컨테이너들이 쌓여 있는 이 야적장 주변을 빙 둘러보았지만 어디 숨어있는지 바로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는 함께 있는 근위대 장교의 스캐너를 힐끔 살피며 조심스레 말했다.

“설마 저 컨테이너 안에 숨겨두신 건 아니죠? 괜히 병력 어설프게 숨겨놓거나 셔틀로 공수했다가는 눈치채고 바로 달아날지도 모릅니다. 놈의 가디언들은 제국 최고 수준입니다.”

“설마 내가 그런 뻔한 짓을 할까. 어차피 공중 에너지장벽 때문에 공수는 못해.”

“놈도 못 도망가고요.”

“가디언이라고 물건까지 다 뚫고 보는 건 아니지.”

쿠베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양쪽에 쌓여있는 모래더미와 곡물 포대를 가리켰다.

“아하.”

쿠마르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하시다면 제 사람들도 빌려드리겠습니다. 저와 함께 왔습니다.”

“됐다. 페로 놈의 가디언들한테 걸려. 일반 시민은 가디언의 감각을 속이기 어렵다.”

“걱정 마십시오. 가디언들도 잡아내지 못합니다.”

“어떻게?”

“지금 특등급인 대장도 모르고 계시지 않습니까?”

“응?”

쿠베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쿠마르의 손짓에 컨테이너니 화물들 구석구석에 귀신같이 숨어있던 대여섯 명의 석궁 사수들이 손을 들어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흐음.”

기겁을 한 쿠베가 다시 헛기침을 했다. 보통 시민의 호흡, 몸에서 내뿜는 특유의 적외선, 심지어 심장이 내는 미세한 파동도 가디언의 감각에 바로 걸리기가 일쑤였지만 저들은 달랐다.

“뭐 하는 놈들이지? 왜 내가 못 느끼는데?”

“제가 북부에서 데려온 용병들입니다. 아까 보시지 않았습니까? 근접전 전문이 아니라서 전장에 내보내지 않았던 병력들입니다. 만일을 대비해 시가지에 남겨두었던 저격수들입니다.”

쿠마르는 ‘왜 안 느껴지는지’에 관한 대답은 얼렁뚱땅 넘겨버렸다. 괜스레 자존심이 상한 쿠베가 짜증을 냈다.

“가디언을 저격하긴 어려워. 고작 석궁 따위로는…….”

“놈들의 움직임을 제한하는 데는 충분합니다.”

쿠마르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원하시면 사살용이 아니고 마취약을 담은 볼트도 준비시키겠습니다.”

“……나쁘지 않군.”

“대장! 적 총리의 셔틀이 접근합니다!”

자세를 가다듬고 하늘을 올려보려던 쿠베는 ‘협상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두툼한 방수포 천막을 쳐 두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천막은 위와 3면이 막혀 있고 한쪽만 트여 있으니 저격을 하기는 시야가 크게 제한되는 구조였다.

“빌어먹을, 천막은 괜히 쳤군.”

쿠베가 입을 삐죽거리며 천막 밑에서 빠져나가 사방이 확 트인 야적장 공터로 나아갔다. 페로가 탄 리쿠르고스 셔틀이 불빛을 깜박이며 넓은 야적장 중앙의 공터에 천천히 접근하고 있었다.

“쏘려면 여기가 낫겠지. 내 명령이 떨어지면 마취용 볼트로 페로부터 쏴라. 기선 제압이 중요하다.”

“잠깐, 저게 누구더라?”

페로에 앞서 셔틀에서 내려선 우베는 적 근위대장 쿠베의 옆에 서 있는 남자의 얼굴이 어딘지 눈에 익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베가 셔틀에서 내리던 페로의 앞을 얼른 막아섰다.

“뭐 하는 짓이냐.”

버럭 짜증을 내는 페로에게 우베가 작은 소리로 알려주었다.

“쿠마르 우펠루. 적 보안국장입니다. 북부 상공조합 위원인데 황상의 즉위식에도 왔었다가 나중엔 적에게 붙은 악질입니다.”

“그건 나도 알아. 그런데?”

“사오시안트 별궁에서 아리아노 경의 손에 죽었던 놈입니다. 저놈도 코런덤의 좀비 같습니다.”

“코런……뭐? 죽긴 뭘 죽어? 지금 앞에 있는데?”

우베의 말길을 못 알아들은 페로가 딴소리를 했다. 우베는 그제야 이 총리가 ‘재생 가능한 헤네티들’에 관해 전혀 모른다는 것을 눈치 챘다.

‘맙소사, 상께서 말을 안 하셨었나?’

우베가 순간 당황했다. 황제가 교단 문제에 관해서는 총리에게도 입을 다물고 있던 것이 분명했다.

“총리 각하, 어쨌든 좀 이상합니다.”

우베는 쿠마르의 존재에서 무언가 불길함을 직감했다. 죽었던 쿠마르가 재생해서 이곳에 또 다시 나타난 것이라면 절대 혼자는 아닐 터였다. 그렇다면 헤네티 잔당이 아직도 사오시안트 어딘가에 더 남아있을 가능성도 높다는 말이었다.

우베는 여전히 페로를 가로막은 채 말을 이었다.

“각하, 놈들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돌발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니 협상을 포기하심이 좋겠습니다.”

“저놈들 속이 시커멓다는 거 모르고 왔나?”

페로는 앞을 막은 이 자그만 남자를 옆으로 치워내고 혼자 앞으로 나섰다.

“각하, 제발.”

우베는 끝까지 그를 막으려 했지만 단단히 마음의 무장까지 하고 온 이 남자를 그 혼자 힘으로는 저지할 수가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먼저 아는 척을 한 건 쿠베 쪽이었다. 그는 원래 만들어져 있던 구석의 천막 대신, 야적장 중앙의 완전히 노출된 곳에 우뚝 서 있었다.

“오랜만이다. 쿠베.”

막 인사말을 건넨 페로는 콧잔등에 떨어진 굵은 빗방울에 문득 하늘을 올려보았다. 조금 전의 부슬비가 또다시 굵어지고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비 같으니.”

험악한 날씨를 미처 예상치 못했던 페로가 짜증을 내며 고운 비단포를 바싹 여미었다. 황실 제일의 멋쟁이답게, 그는 평소처럼 화려한 비단포에 악세사리까지 빼놓지 않고 모두 걸치고 있었다.

쿠베가 빗속에서 페로에게 두 팔을 벌려보였다.

“이렇게 와 주셨으니……페로 경?”

“일개 가디언이 귀한 상급귀족 손님을 비 맞은 생쥐로 만들 참이냐?”

페로를 맞아주려던 쿠베가 제풀에 놀라 움찔했다. 그에게 바로 다가오던 페로는 갑자기 한쪽의 천막으로 방향을 휙 돌렸다.

‘이런.’

비를 감수하고 일부러 노출된 곳에 서 있던 쿠베는 페로가 삼면이 막힌 천막으로 황급히 비를 피하는 모습에 크게 당황했다. 처음에 별 생각 없이 설치했던 저 천막이 문제였다.

“흐음.”

빗속에 서 있던 쿠베는 낮게 헛기침을 하고는 페로를 따라 천막으로 향했다.

비를 피해 천막 아래로 들어온 페로는 뒤를 바싹 따라온 킵에게 슬쩍 수화를 보냈다.

- 비도 오는데 천막을 두고 밖에 있던 게 수상하다. -

주인의 재빠른 지시를 받은 킵은 함께 온 가디언 2명에게 다시 지시를 내렸다.

- 주변을 살펴라. 계속 움직여. -

지시를 받은 페로 가디언들이 도끼눈을 뜨고 천막 주변을 이리저리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양쪽 모두 서로의 흑심을 알고 있었고, 칼만 들지 않았을 뿐, 이미 싸움은 시작되어 있었다.

“환영의 뜻을 보이려고 일부러 빗속에 나와 있었는데 제 환영도 안 받고 들어오시니 섭섭하네요.”

쿠베가 먼저 천막 밑에 와 기다리는 페로와 우베에게 뻔뻔스럽게 웃음을 지었다.

“내가 아직 환자라는 걸 몰랐나? 환자보고 저 장대비를 맞으라고?”

페로가 버럭 화를 냈다.

페로의 돌발행동에 당황했기는 저격을 주도하고 있던 쿠마르도 마찬가지였다. 쿠마르의 할룩스로 저격수의 메시지가 들어왔다.

- 천막 때문에 시야가 막혔습니다. 가디언 2명이 트인 곳을 오가고 있어서 쏘아도 중간에 걸립니다. -

- 시간을 끌어 볼 테니 새로 위치를 잡아. -

쿠마르는 서둘러 답신을 보내고는 쿠베와 함께 있던 가디언에게 슬쩍 수신호를 보냈다.

- 입구의 페로 가디언을 붙잡고 있어. -

지시를 받은 근위대 가디언이 천막 입구를 오락가락하며 저격수의 눈을 흐리던 페로 가디언의 앞을 확 막아서며 어색한 웃음과 함께 인사말을 건넸다.

“잠깐, 이봐, 5차 혼란기 때 정글에서 우리 만난 일 있지 않았던가?”

마치 친구같이 뻔뻔스럽게 인사말을 건네자 순간 두 명의 페로 가디언이 걸음을 멈추고 그 근위대 가디언을 별 생각 없이 돌아보았다.

“뭐라고?”

그때, 쿠마르는 할룩스로 들어온 ‘1’이라는 저격수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목표 확인했으니 곧 쏜다는 약어였다.

그리고 동시에, 마주앉은 페로의 할룩스에도 ‘기병대 진입합니다.’라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

<자리에 앉아 일만 하고 있어야 하는 게 죄스러운 6월 5일 저녁입니다. -_->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The Iron Vein 개인지 구매사이트 : http://vein.zio.to/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