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83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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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흔과 킵이 지키는 쪽을 밀어붙이던 쿠베는 뒤에서 달려온 부하의 고함에 고개를 휙 돌렸다.
“대장! 항구 외부에서 적 기병대와 가디언들이 들어옵니다! 우리 외곽 병력이 막고 있지만 얼마 버티기 어렵습니다!”
“벌써?”
쿠베가 뒤를 휙 돌아보았다. 빗속에서 아직까지 타들어가고 있는 사오시안트는 시내 전체가 붉은빛 대화재와 하늘을 가득 채운 회색빛 연기에 휩싸여 있었고, 그 소름끼치는 배경을 등지고 검은 깃발을 앞세운 기병대의 위압적인 실루엣이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외곽에 있는 우리 3만 병력이 적에게 포위당했습니다! 그네들을 실어가기로 되어 있던 수송선은 아직까지 포착도 되지 않습니다.”
“안 돼. 안 돼.”
쿠베가 고개를 저었다. 이 와중에도 기병대의 말굽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오고 있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음을 절감한 쿠베는 아직 이곳에 남아있는 자신의 병력, 그리고 성문 외곽에서 동맹군에 완전히 포위당한 채 고집스레 저항중인 3만의 근위대 잔여 병력을 떠올렸다.
마음을 굳힌 그는 잠시 앞에서 물러나 할룩스를 빼들었다. 그리고 아직 자신의 휘하에 남아있는 모든 근위대에게 통신을 열었다.
“사오시안트에서 근위대장 쿠베가 내리는 마지막 명령이다.”
빗물로 흠뻑 젖은 쿠베의 목소리가 낮고 비장했다.
“내가 있는 한 우린 아직 죽지 않는다.”
쿠베가 침인지 눈물인지를 꿀꺽 삼키고는 다시 어렵게 말을 이었다.
“수송선 04호, 05호는 적재한 모든 짐을 버리고 성문 밖에 포위된 3만의 아군을 구출해내라. 남은 전군, 전투요원, 내게 충성을 바쳤던 모든 자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곳을 빠져나가 타르서스와 수에니에 집결해라.”
쿠베는 빗물과 눈물로 젖은 입가를 다시 훔쳐냈다.
“‘등급 없는 가디언’의 정체를 안다면 절대 속지 마라. 난 반드시 살아 돌아와 저 변종의 가슴에 칼을 박을 테니.”
쿠베가 잠시 말을 끊었다. 사실 지금 이 말은 진심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와 대세를 거역하기는 틀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카렐의 가슴에 칼을 박기는 고사하고 필요하다면 그의 발등에 기꺼이 입을 맞출 준비도 되어 있었다.
다만 새 황제의 발등에 입을 맞출 만한 자리라도 차지하려면, 든든한 협상조건을 챙겨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상이다. 사오시안트 상공의 공중 에너지장벽을 모두 해제해라. 수에니에서 다시 보자, 제군들.”
연락을 끊은 쿠베는 우베의 시체를 놓아두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페로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죽이든지, 납치해 버리고 싶었지만 그와의 사이에는 왼쪽의 킵, 오른쪽의 베흔과 다른 가디언들이 벽을 쌓고 있었다.
거의 2배 가까운 숫자의 근위대 가디언들이 그들을 몰아붙이고 있었지만 컨테이너와 낭떠러지 사이, 좁은 공간에 바싹 밀집한 적들을 쉽사리 뚫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 근위대 부하들이 베흔이 있는 오른쪽은 적극적으로 공략하지 않으려 들고 있었다. 그에게는 남은 시간도, 남은 방법도 거의 없었다.
“셔틀 109번, 내 말 들리나.”
쿠베는 자신이 퇴각할 때 쓰기 위해 대기시켜 두었던 셔틀을 불러냈다.
“예.”
“에너지장벽이 풀리는대로 여기 야적장으로 와라. 연료용으로 쓰는 인화물질 한두 통 싣고 당장 날아와라. 주기장에 당연히 있겠지?”
“물론입니다. 그런데……어디 쓰려고 하십니까?”
“내가 명령을 내리면 불을 붙여서 여기 모인 적들 머리 위에 던져버려라. 여길 불바다로 만들어버려. 난 절벽 이래 물에서 기다릴 테니 로프 던져주면 된다.”
셔틀 조종사가 긴장한 듯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알겠습니다.”
일단 자신의 탈출로를 마련한 쿠베가 칼을 쥔 손에 힘을 주며 함께 싸우는 근위대 가디언들에게 명령했다.
“너희 놈들, 살고 싶으면……킵 놈이라도 뚫어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해결한다.”
베흔과 무조건 싸우라는 무리한 명령 대신, 그는 우회로를 택하기로 했다.
“내가 절벽으로 내려가면 너희도 따라와라.
지시를 받은 가디언들은 시킨 그대로, 베흔 쪽을 포기하고 킵이 있는 쪽을 일제히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적이 난데없이 자신 쪽으로 몰려들자 놀란 킵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뭐야!”
킵이 밀려나면서 여전히 버티고 있던 베흔과의 사이가 일순간 조금 벌어졌다. 그리고 쿠베는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이 가짜야, 여기서 뒈져!”
부하들이 벌려놓은 틈새로 쿠베가 칼을 앞세우고 무섭게 돌진했다. 그가 틈새를 노린다고 생각한 베흔이 재빨리 그 사이를 막아섰다. 적개심에 사로잡힌 베흔은 이 후배와의 무모한 정면대결을 피하지 않았다.
“네가 감히 근위대장이라고 했냐?”
베흔이 쿠베의 돌격을 악을 쓰며 받아냈지만 평소라면 몰라도 최소한 지금은 등을 다쳐 애당초 성치 못한 것이 문제였다. 베흔이 기합소리까지 내며 있는 힘을 다해 이 후배의 공격을 막으려 했지만 그의 발은 젖어 미끄러운 땅바닥 위를 죽 밀려나갔다.
“아익!”
힘에서 밀린 베흔의 허리가 뒤로 휙 꺾이고 말았다. 어떡해서든 자리를 버텨보려던 베흔은 중심을 잃으며 뒤로 한참을 확 밀려나고 말았다.
‘당했다!’
베흔의 눈앞이 캄캄해졌지만 뜻밖에 쿠베는 더 이상 그를 노리지 않았다. 그는 쓰러진 옛 상관의 숨을 끊어주려 쫓는 대신, 컨테이너 옆에서 등을 보이고 있던 페로로 바로 표적을 바꾸었다. 그를 지키는 가디언들은 이미 전면의 다른 싸움에 휘말려 뒤에서의 기습을 미처 대비할 여유가 없었다.
“이런!”
뒤를 휙 돌아보았던 페로가 엉겁결에 칼을 들었다. 하지만 부상을 입은 보통의 시민과, 멀쩡한 몸의 특등급 가디언과의 대결은 애당초 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네놈이 뵈는 게 없구나!”
쿠베의 큰 양손검이 페로의 얼굴 앞을 붕 소리를 내며 돌았다. 페로의 목을 거의 동강내버릴 기세로 공중을 휙 돌아간 칼은 그가 들고 있던 검 중간을 사정없이 부러뜨러 버렸다.
“우웁!”
손목으로 전해진 무서운 충격에 페로가 칼을 떨어뜨리며 자리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가만히 있어!”
쿠베는 쓰러진 페로를 손날로 힘껏 후려쳐 제압하고는 왼팔로 그의 가슴을 덥석 낚아채 절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조금 전, 그가 지시를 내린 109셔틀이 시내 쪽에서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주인님!”
눈 깜짝할 새 주인이 납치당하는 광경에 2명의 페로 가디언들이 경악을 하며 일제히 쿠베의 뒤를 쫓았다. 자신을 쫓는 가디언들의 모습을 확인한 쿠베가 날아오는 셔틀에 대고 헐떡이며 연락을 보냈다.
“내가 뛰어내리면 뒤에 떨어뜨려!”
쿠베는 허리에 찬 리프트 케이블의 끝부분 후크를 땅바닥에 힘껏 내리박고는 페로를 붙든 채 낭떠러지로 그대로 몸을 날렸다. 그의 허리에 찬 와이어가 죽 풀리면서 쿠베와 페로는 까마득한 바닷물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내리꽂혔다. 근위대 가디언들도 미리 지시받은 대로 사방으로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저놈 미쳤어!”
쿠베를 놓친 페로 가디언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절벽으로 머리를 내밀었지만 그들이 당장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어보였다. 페로를 납치한 쿠베는 물에 가까워지자 조금씩 제동을 걸며 속도를 늦추고 있었다. 다른 페로 가디언들, 뒤늦게 컨테이너에서 내려온 자이납도 하나 둘 절벽으로 달려왔지만 그들도 속수무책이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런 그들 등 뒤에서 누군가의 굵고 거친 목소리가 울렸다.
“이 머저리 가디언 새끼들! 머리는 어디다 쳐박아두고!”
베흔이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는 모습에 킵과 페로 가디언들이 기겁을 하며 얼른 길을 내 주었다.
“비켜!”
베흔은 땅에 박혀 있던 쿠베의 리프트 케이블 후크를 덥석 붙들었다. 그 모습에 킵이 기겁을 하며 베흔의 손을 붙들었다.
“맙소사! 그걸 뽑으면 우리 주인님도 떨어져 죽습니다!”
“허! 혼구멍 내 주고는 싶지만 지금은 아니거든?”
베흔은 말리는 킵을 거칠게 밀어내고는 끙 소리를 내며 정말로 후크를 땅에서 확 뽑아냈다.
“이크!”
창백해진 킵을 무시하며 베흔은 후크를 쥐고는 갑자기 육지 쪽으로 후다닥 달려가기 시작했다.
“설마?”
그제야 저 똑똑한 가디언의 속내를 눈치 챈 킵이 얼른 절벽 밑을 내려다보았다. 줄을 조금씩 풀며 내려가던 쿠베는 위에서 줄을 당기면서 갑자기 내려가는 속도가 늦어지자 당혹스런 얼굴로 위를 올려보고 있었다.
“그럼 제가 대신 당기겠습니다!”
부상으로 몸이 느린 베흔 대신, 킵이 와이어를 덥석 쥐고 번개처럼 빠른 걸음으로 야적장을 가로질러 악을 쓰고 질주했다.
바로 그때, 웬 근위대 셔틀 한 대가 아직 비가 내리는 야적장 위로 날카로운 소음을 내며 접근해왔다. 와이어를 킵에게 맡기고 그곳을 휙 올려보았던 베흔은 셔틀의 해치가 열려 있는, 그리고 그 안에 반짝거리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아니, 왜 저길 열고……젠장!”
베흔이 휙 돌아서서는 여전히 낭떠러지에 남아 페로와 쿠베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찢어져라 고함을 질렀다.
“모두 흩어져! 거기 있지 말고!”
베흔의 쩌렁쩌렁한 고함에 가디언들이 영문도 모른 채 혼비백산 사방으로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베흔의 불길한 예상대로, 웬 통이 사방으로 인화물질과 불꽃을 뿌리며 하늘에서 요란스레 떨어지고 있었다. 뒤늦게 컨테이너 위에서 내려온 자이납도 우베의 시체를 짊어진 채 비명을 지르며 달려왔다.
“으아아악!”
자이납이 한쪽에 쌓인 모래 뒤로 몸을 날리며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조금 전까지 페로 가디언들과 근위대 가디언들이 뒤엉켜 사투를 벌이던 낭떠러지 주변을 붉은 불꽃과 폭음이 일순간 휩쓸었다.
“이크!”
와이어를 쥐고 정신없이 달려가던 킵은 폭음에 놀라 뒤를 휙 돌아보다가 중심을 잃고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는 깜박 놓쳤던 와이어를 재빨리 움켜쥐었지만 야적장을 시뻘겋게 집어삼키고 있는 무서운 불꽃 너머 낭떠러지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주인님! 주인님! 빌어먹을! 우리 셔틀 불러!”
낭떠러지로 달려가 페로의 안전을 확인하고 싶어도 저 불이 사그러질 때까지는 이젠 그 주변에 접근조차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아직 채 밝지 않은 하늘도 이젠 시커먼 연기가 온통 뒤덮고 있었다.
“줄을 더 끌어올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병신! 주인님을 저 불바다로 끌어올리라고?”
킵이 멍청한 소리를 하는 부하를 확 떠밀었다. 낭떠러지 위가 온통 인화물질과 열기로 덮여 있으니 저곳으로 페로를 끌어올릴 수도 없는 판국이었다.
“안 그러면……와이어가 녹아 끊어질지도 모릅니다!”
킵이 그제야 손에 쥔 와이어를 의식했다. 생각해 보니 이 가는 금속제 와이어의 중간이 훨훨 타는 불길 중간에 걸쳐 있었다.
“이런, 제기랄.”
베흔과 킵이 위에서 줄을 끌어올리면서 그때까지 조금씩 내려가던 쿠베의 몸이 절벽 중간에서 덜컹 하고 울리며 멈춰 버렸다.
“우윽!”
내려가던 중간에 갑자기 정지해 버리자 허리에 충격을 받은 쿠베가 공중에서 움찔거리며 중심을 잃을 뻔했다. 와이어 뭉치를 급히 살폈던 쿠베는 줄이 거의 풀린 것을 발견했다. 이젠 더 내려갈 수가 없었다.
“젠장.”
쿠베가 몸을 움츠렸다. 낭떠러지 위의 야적장에 불벼락이 쏟아지면서 그곳애서 튄 불똥과 파편, 시커먼 재가 이 이 둘의 머리 위에 우박처럼 우수수 쏟아져 내려왔다.
“이, 익.”
쿠베의 몸이 갑자기 흔들리면서, 정신을 잃은 채 그의 어깨에서 얹혀 있던 페로의 의식도 희미하게나마 돌아왔다.
“학.”
아직 멍멍한 페로의 의식에 제일 먼저 들어온 건 코를 찌르는 역겨운 탄내, 비명소리, 그리고 눈앞에서 흔들거리는 거친 새벽 바다의 풍경이었다. 그는 쿠베와 함께 이 아찔한 낭떠러지 중간에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쿠베를 구하러 오던 근위대 셔틀도 짙은 연기와 사방으로 튀는 불똥을 피해 주변을 멀찍이 선회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놈.”
페로는 자신을 짊어지고 있는 이 건장한 가디언의 얼굴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었다. 쏟아지는 불똥과 검은 재에 잔뜩 움츠리고 있던 쿠베가 이를 갈며 그를 쏘아보았다.
“인질 주제에 뒈지기 싫으면 가만히 있어.”
한 줄에 매달려 원치 않게 한 운명이 되어버린 두 남자는 서로의 눈을 노려보며 적의를 불태웠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쿠베는 페로가 필요했고, 페로를 이 천 길 낭떠러지에서 받치고 있는 것도 쿠베였다.
“내 이름에 그 따위 단어는 안 맞는다.”
페로가 질세라 더 공격적인 표정으로 이를 드러냈다. 끔찍한 공포감이 엄습했지만 그보다는 이미 반쯤 망가져버린 자존심, 그리고 짐이 될 수는 없다는 강박에 가까운 의무감은 그보다 더 강했다.
“차라리 공신묘역 묘비 위가 낫지.”
페로는 쿠베의 허리로 손을 뻗어 그의 몸을 X자로 엮고 있는 리프트 벨트의 버클을 덥석 붙들었다.
“미쳤나!”
공포에 질린 쿠베의 고함과, 페로의 입 속을 오가는 낮은 웅얼거림이 하늘을 짙게 채운 잿빛 연기 속을 흘렀다.
‘미안하다……카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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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는 이제 마지막 한 편 남았습니다.
그 뒤로 에필로그가 두세 편 이어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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