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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785화 (780/1,132)

< -- 785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예고한 대로, 이번 편은 2부의 마지막 편입니다.

이번도 또 한 번 나눌까 생각을 했을 정도로......좀 깁니다. ^^;;

[나머지 잡설은 끝부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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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줄을 쥐고 여유만만하게 절벽으로 향하던 베흔의 어깨를 누군가가 덥석 붙잡았다.

“이 몸으로 페로 대공을 업고 절벽을 제대로 탈까?”

베흔은 뒤를 돌아보지도 못했지만 귓가에서 속삭이는 거칠고 갈라진 음성이 누구의 것인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한때 원수지간이었던 총리를 구하러 나섰던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이었네. 베흔.”

카렐이 베흔의 손에서 줄 끝을 확 빼앗았다.

“그 속셈이야 어쨌건 말이야.”

황제가 작은 목소리로 덧붙이고는 절벽 쪽을 돌아보았다. 속셈을 들키고 할 말이 막힌 베흔은 괜스레 헛기침을 하며 주변의 눈치를 보았다.

“흐, 음. 무슨 뜻이신지요?”

베흔은 황제가 어느 가디언을 지목할지 긴장하며 침을 꿀꺽 삼켰지만 그의 큰 착각이었다.

“내 올라올 때까지 불을 꺼 놔라.”

카렐이 손에 낀 가죽장갑을 이로 꽉 조이며 태연하게 말했다.

“예에?”

“마무리를 황제가 직접 짓는 것도 생각해보니 괜찮겠어.”

카렐이 화물을 고정할 때 쓰는 로프를 어깨에 휙 돌려 감는 모습에 베흔은 그제야 황제의 어처구니없는 속셈을 깨달았다.

“아, 아니 설마…….”

베흔이 미처 말릴 새도 없이. 황제는 거추장스런 검은 망토자락을 확 벗어 내던지고는 절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대가 줄을 잡고 있어. 두 번 당기면 돌아왔으니 올리라는 뜻이다.”

“이런!”

베흔이 기겁을 했지만 황제는 이미 불타는 바닥 위에 징검다리처럼 놓인 컨테이너 위를 넘고 있었다. 평소처럼 바람을 가르며 무섭게 질주하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절벽으로 가는 그의 걸음에는 단호한 힘이 깃들어 있었다.

“허, 못 말리겠군.”

베흔이 냉담하게 돌아섰지만 시선은 황제의 등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가디언과 기병들의 비명소리, 좀 말려보라는 누군가의 찢어지는 목소리가 메아리쳤지만 베흔은 황제의 무모하다 못해 어처구니없는 시도를 군말없이 지켜보며 쓰디쓴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쳇, ‘등급 없는 가디언’으로 남아있겠다고?”

베흔은 투덜대면서도 한편으로는 카렐의 목숨이 걸린 쇠줄을 꽉 붙들며 바닥에 엉덩이를 단단히 대고 앉아 발을 단단히 디뎠다.

“그러면서 나한테 목숨을 맡기다니.”

카렐이 절벽 밑으로 몸을 던지면서, 그의 체중이 걸린 줄에 육중한 힘이 걸리며 베흔의 팔에도 힘이 확 들어갔다.

“젠장, 확 놔 버릴까보다.”

쉴 새 없이 불평을 늘어놓는 와중에도 황제의 체중을 받치는 베흔의 팔에는 힘줄이 선명하게 곤두서 있었다.

“누가 밑에서 불 좀 꺼!”

베흔이 여전히 불타고 있는 야적장을 가리키며 병사와 가디언들에게 괜스레 버럭 화를 냈다. 몇몇 기병들이 간이 소화기를 가져다가 불을 끄려 하고 있었지만 가뜩이나 까다로운 유류화재에 설상가상으로 야적장의 화물에까지 옮겨 붙은 상황에서 불은 쉽사리 잡히지 않았다.

“소화기! 소화기!”

“집어 쳐라.”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기병들 사이에서 웬 여자의 짜증스런 목소리가 울렸다. 아직 울음의 찌꺼기가 남아 있는 목멘 소리였지만 어쨌든 그들에게는 상급자인 ‘중랑’ 이었다.

“예?”

기병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이납을 돌아보았다.

“이걸로 끄면 되지 웬 난리들이야. 이 멍청이들.”

자이납은 자기가 불을 피해 몸을 숨겼던 모래더미를 발로 차 바닥에 흩뿌려 보였다.

“익!”

절벽 밑으로 몸을 던진 카렐은 첫 번째로 가해진 충격을 팔과 손, 등에 온 힘을 다 주어 버티어냈다. 워낙에 몸이 무겁다보니 버티는 것만도 보통 사람의 2배의 힘은 필요했다.

“씨이!”

카렐은 가죽장갑을 낀 손과 발가락 끝에 최대한 힘을 주어 미끄러운 바닥을 버티었다. 흐린 시야 때문에 앞은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어차피 눈이 성하다 해도 제대로 보일 상황도 아니었다.

카렐은 발끝으로 전해지는 감촉과 쇠줄을 잡은 손의 감촉, 그리고 연기 너머에서 이곳을 확인하고 있는 셔틀과의 통신에 의존해 미끌미끌한 수직 절벽을 천천히 내려갔다.

카렐이 셔틀 조종사에게 물었다.

“내 위치가 보이나?”

“하강기류 때문에 연기와 물안개가 들어차서 정확히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스캐너로 대강만 파악이 됩니다.”

“상관없으니까 맞게 내려가고 있는 건지나 말해. 총리는 어디 있나?”

“지금 계신 곳에서 우측으로 40척(12m), 하방으로 230척(69m) 정도 같습니다.”

“오른쪽?”

카렐은 쇠줄을 타고 절벽을 빠르게 내려가며 세심하게 거리를 어림하려 애를 썼다.

“210척, 201척……131척……이크.”

줄의 거의 마구리 부분을 느낀 카렐이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다행히 이곳에는 발을 디딜만한 바위도 튀어나와 있었지만 이제 이 아래로는 줄도 없이, 그의 힘과 촉감만으로 페로를 찾아 내려가야 했다.

카렐은 양 손에 단검을 쥐고 석회암 벽에 힘껏 박아 넣고는 그 차가운 쇠에 조심스레 체중을 실었다.

“제발, 제발 버텨라.”

카렐은 단검으로 절벽을 힘껏 찍어 몸을 기대며 아래로 천천히 내려갔다. 그의 둔해진 감각으로는 페로의 기척을 느낄 수는 없지만 그저 옛 친구가 아직 살아 매달려 있으리라는 믿음에 기대어 조금씩 거리를 좁혀갔다.

“페로! 페로!”

적당히 거리가 가까워졌다고 판단한 카렐이 아래에 대고 무작정 소리를 질렀다. 이전 같았다면 어둠 속이든, 연기 속이든 사람의 존재를 바로 찾아냈겠지만 청각과 시각이 모두 둔해진 지금의 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수직절벽을 따라 마치 엷은 구름띠처럼 검은 연기와 물안개가 가득 들어차 있다보니 발밑에 펼쳐져있을 거친 바다도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페로! 대답 좀 하라고!”

“아아악!”

카렐의 외침에 되돌아온 건 페로가 굵은 목소리로 내지르고 있는 별 뜻 없는 고함이었다. 정신이 퍼뜩 든 카렐이 다시 소리를 지르며 그쪽으로 조심조심 움직였다.

“목소리 들리면 말 좀 해! 페로 이 새끼야!”

매캐한 연기 속에서 소리를 따라간 카렐은 거친 바닷바람에 펄럭거리고 있는 페로의 비단포 자락을 희미하게 볼 수 있었다.

“카렐?”

연기 사이에서 그를 본 페로 역시도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는 여전히 미끄러운 바위를 끌어안고 가까스로 버티고 있었지만 고작 단검 두 개에 체중을 의지해 매달려 있는 카렐의 형편이라고 딱히 더 나아 보이지도 않았다.

“너 미쳤냐!”

제대로 장비를 갖춘 ‘구조대’를 생각했던 페로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화를 버럭 냈다.

“지금 그 꼴로 날 구하겠다고 온 거야?”

“네 꼴보다는 나아!”

카렐이 단검 하나를 다시 뽑아내 옆의 석회암 벽에 힘껏 박았다. 그는 바위에 차례대로 구멍을 내며 페로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럼, 베흔이 왔으면 좋겠냐?”

카렐이 씩씩대며 페로에게 계속 말을 건넸다. 페로의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는 모습을 보아 거의 힘이 빠진 것이 분명했다.

“빌어먹을! 무슨 놈의 황제가 저 따위야!”

“이런 데서 살려달라고 짜고 있는 총리보다는 나으니까 입 다물지 못해!”

“뭐?”

카렐과 페로는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서로에게 마구 거친 말을 쏘아붙였지만 위험천만한 벽을 타고 그에게 다가가고 있는 사람도, 거의 탈진해가던 팔에서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어 버티고 있는 또 한 사람도, 이렇게 소리를 질러대는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다.

페로에게 최대한 다가간 카렐은 발을 디딜 수 있음직한 바위 위에 어렵게 서서는 어깨에 메고 있던 짧은 로프를 풀어 페로에게 휙 던졌다.

“젠장, 앞이 잘 안 보이니까 네가 알아서 좀 잡아. 빨리!”

바위를 붙든 채 버티던 페로는 잘 보이지도 않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줄을 휘젓고 있는 카렐을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그에게서 아무 반응이 없자 카렐이 버럭 다시 소리를 질렀다.

“젠장! 방금처럼 욕이라도 떠들어대야 네 위치를 알 것 아냐!”

“이젠 작게 말해도 들려. 카렐.”

약간 목이 메어 있는 페로의 대답에 카렐이 입을 꾹 다물었다. 페로는 그에게서 고작해야 4, 5척 아래에 매달려 있었다. 뒤이어 느껴진 팽팽한 장력으로, 그가 자신의 로프를 붙잡았다는 것을 느꼈다.

“꽉 쥐고 있어.”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려 악을 쓰며 질러대던 고함도 어느새 차분한 속삭임으로 가라앉았다.

“당길 테니까.”

카렐이 한 손으로는 벽에 박은 단검을 쥐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로프를 힘껏 잡아당겼다. 그리고 미끄러운 바위 위에서 사투를 벌이던 페로의 몸이 조금씩 따라 올라왔다. 코로 전해지는 이 거친 남자의 숨결과, 이곳에서 버티며 흘린 짙은 땀냄새가 조금씩 진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런 미친 년.’

카렐은 이 상황에서 뜬금없이 몸이 후끈 달아오른 자신에게 기가 막혀 욕을 퍼부었다.

줄을 타고 온 페로의 손이 그의 손목을 덥석 붙든 순간, 카렐은 때 이른 안도감에 낮은 숨을 후 하고 내쉬었다. 그리고 페로는 사람 한 명 서기도 빠듯해 보이는 좁은 공간 위에 카렐과 함께 가까스로 발끝을 올려놓고 설 수 있었다.

“피 좀 봐.”

몸을 조금 숙인 카렐이 바위 위에 엎드린 채 버티느라 긁혀 피투성이가 된 페로의 턱을 셔츠 자락으로 살짝 눌렀다. 페로도 그를 올려보며 무어라 말을 해 주고 싶었지만 정작 사지에서 빠져나온 지금은 머릿속이 텅 비었는지 조금 전까지도 정신없이 지껄여대던 욕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넋이 빠진 듯한 페로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카렐이 쓴웃음을 지었다.

“등에 업혀 있어.”

그는 페로의 허리와 다리 사이에 능숙하게 로프를 단단히 감고는 뒤로 돌아서며 등을 보였다. 감격스런 애정 표현 따위를 나누기는 둘 다 너무 살벌한 위치에 서 있었다. 카렐은 등에 업힌 페로의 몸과 자신의 가슴을 로프로 단단히 동여매 연결했다.

“생각해 봐, 베흔하고 이런다는 거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 않아?”

“풋.”

창백하게 질려 있던 페로가 짧으나마 처음으로 웃음소리를 냈다. 카렐은 자신의 어깨에 턱을 걸고 있는 페로의 지친 옆모습을 힐끔 돌아보았다.

“누구 남자인지 진짜 잘생겼네.”

“잘 보이지도 않는다면서, 무슨.”

페로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핀잔을 주던 순간, 카렐이 등과 팔에 힘을 꽉 주며 위로 두 사람, 아니 거의 세 사람분의 체중을 힘껏 당겨 올렸다.

“설마 여기까지 줄도 없이 내려온 건 아니겠지?”

“절반쯤 올라가면 줄이 있을 거야.”

카렐이 다시 왼팔에 끄응 하고 힘을 주었다. 고작 한 명을 업고 힘들어하는 카렐의 모습에 페로는 그의 체력이 이미 바닥난 상태라는 것을 직감했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줄이 어디 걸렸는지 안 보이는데.”

페로가 위를 올려보았지만 절벽 중간에 띠처럼 드리운 짙은 연기와 새벽 물안개 때문에 카렐이 타고 내려왔던 줄이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순간, 무언가 딱 하고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몸이 밑으로 확 떨어졌다.

“우읍!”

페로가 무심결에 카렐의 목을 안은 팔에 힘을 꽉 주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던 그는 카렐이 왼팔 하나로 절벽에 매달려 흔들리는 모습에 가슴이 멎는 것 같았다.

“제기랄, 계속 바위를 찍어댔으니 이놈의 칼이 배겨나나.”

카렐이 씩씩대며 날 부분이 부러져버린 오른손의 단검을 밑에 휙 내버렸다.

“씨이, 앞도 잘 안 보이는데 칼까지.”

지쳐 헐떡거리는 카렐의 빈 오른손을 페로가 덥석 붙들었다.

“됐어. 올 때 칼로 찍었던 구멍 거꾸로 따라가면 되지.”

페로는 앞을 잘 못 보는 카렐의 손을 움직여 칼자국이 있는 곳에 대 주었다. 단검이 꽂혔던 자리를 더듬으니 다행히 손가락 한두 개 정도는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익.”

손가락 2개로 구멍을 짚고 힘껏 몸을 추스른 카렐은 자신의 눈이 되어주고 있는 이 남자의 얼굴을 다시 새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지치고 쉰 목소리로 짧게 다시 중얼거렸다.

“똑똑하기도 하고.”

“됐어, ……집어쳐.”

페로가 짐짓 냉담한 척 이번엔 카렐의 왼쪽 손등을 붙잡고 다른 구멍으로 이끌었다. 더러워진 카렐의 손등을 꼭 쥐어주고 있는 페로의 손이 아주 따뜻했다.

“여기.”

페로의 인도를 받은 카렐의 손이 먼저 뚫은 칼 구멍을 차례대로 짚어가며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카렐의 팔 힘이 조금씩 떨어져갔지만 등 뒤에 업힌 소중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절대 쉬거나 지체할 수가 없었다.

“여기.”

페로가 가리키는 대로 바위의 칼 구멍 주변을 더듬던 카렐이 갑자기 멈칫했다.

“왜?”

페로가 물었지만 카렐은 아무 대답도 않은 채 조금 옆의 다른 곳을 더듬어 손끝을 힘껏 바위 틈새에 밀어넣었다. 좁은 바위틈을 억지로 비집고 들어간 손끝에서 피가 번졌지만 카렐은 아프다는 티 한 번 내지 않은 채 별 말 없이 그대로 계속 올라갔다. 카렐이 위로 힘껏 올라간 순간, 페로는 카렐이 왜 조금 전 그곳을 짚지 않았는지를 깨달았다.

“다음 구멍 어디야? 내 손 계속 잡고 있어야지? 나 솔직히……힘들어.”

카렐이 헐떡거리며 물었지만 이번엔 등 뒤의 페로에게서 대답이 없었다.

“페로? 뭐 해?”

“으, 응.”

손을 내밀어 무언가 하고 있던 페로가 그제야 다시 카렐의 손등을 잡았다. 번갈아 서로를 당황하게 했던 둘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줄 안 보여? 아직 멀었어?”

카렐이 자리에서 멈추고는 등 뒤의 페로에게 다시 물었다. 위로 점점 올라갈수록, 처음만 해도 여유를 보였던 카렐이 조금씩 지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내가 몇 번을 칼로 찍고 내려왔는지 기억이 하나도 안 나. 나 발현자 맞나.”

“지쳐서 그래.”

페로는 줄을 찾는 대신,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카렐의 얼굴부터 보았다. 페로는 그 후에야 위를 올려보았다.

“줄은 아직 안 보이는데”

페로는 비단포의 치렁치렁한 옷소매로 카렐의 얼굴에 묻은 땀방울을 쓰윽 닦아주었다.

“둘이 계속 이러고 있으라는 뜻인가.”

카렐이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페로의 뺨에 자신의 뺨을 살며시 가져갔다. 뺨을 댄 채 서로의 눈을 잠시 말없이 쳐다보던 둘은 다시 각자가 해야 할 일로 관심을 돌렸다. 카렐은 페로가 짚어 준 칼 구멍에 손을 넣고 다시 온몸에 힘을 주어 절벽 위로 올랐다.

“연기가 옅어지는 것 같은데.”

그때, 막 위를 올려보던 페로의 얼굴 위로 젖은 모래가 확 쏟아졌다.

“씨이, 뭐야.”

페로는 짜증을 내며 더러워진 얼굴을 털어냈다. 조금씩 옅어지는 연무와 연기 사이로 카렐이 타고 내려왔던 쇠줄의 끝 마구리가 희미하게 보였다.

“왼쪽에 줄이야. 거기, 거기.”

페로의 말대로, 카렐은 왼쪽으로 팔을 힘껏 뻗어보았다. 차가운 느낌의 쇠줄, 그리고 그가 처음에 발을 디뎠던 제법 널찍한 바위 위를 느낀 순간, 카렐은 눈을 감으며 하늘을 향해 큰 숨을 탁 내뱉었다.

“다 끝났어. 아니, 끝이면 좋겠어.”

넓적한 바위를 디디고 긴장이 풀린 카렐이 앞으로 휘청거리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등에서 내려선 페로는 연기와 물안개가 조금씩 걷혀가는 하늘과, 그리고 새벽 여명이 번지며 점점 환해져가는 수평선 너머를 빙 돌아보았다. 절벽 위 야적장에서 드문드문 모래가 쏟아지는 것을 보아 누군가 모래로 불을 끄고 있는 모양이었다.

“괜찮아?”

페로는 바닥에 주저앉은 카렐의 축 처진 어깨를 아주 조심스레 안아 보았다. 지치고 땀에 젖은 그의 몸에서 습한 공기 속으로 하얀 수증기가 희미하게 솟고 있었다.

“웬일이야. 몸 망가뜨린다고 핀잔도 안 하고.”

카렐이 등 뒤의 이 재미없는 남자를 돌아보며 퉁명스레 중얼거렸다. 페로는 못 들은 척 손톱이 우그러지고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카렐의 손등을 머플러로 감싸주었다.

“괜히 안 하던 짓…….”

빈정거리던 카렐은 이 남자의 입술이 거칠게 확 밀어붙이자 그대로 벽까지 밀려나 버렸다. 쪽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고 짧게 입을 맞추었던 페로는 바위에 기대앉은 채 멍한 눈을 뜨고 있는 카렐에게 씩씩대며 말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우리가 밖에서 이렇게 해 봐.”

“지금?”

카렐이 눈동자를 움직여 주변을 살폈다. 사방을 시커멓게 채웠던 연기와 연무도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

“그럼 제대로나 하던가.”

이번엔 카렐이 이 남자에게 먼저 다가갔다. 그리고는 방금 전 그를 짧게나마 흥분하게 만들었던 그의 거친 숨결을 이번엔 맘껏 입술 끝으로 빨아 삼켰다. 숨이 가빠질 만큼 서로의 입술과 혀끝을 느끼는 와중에도, 페로는 카렐의 쓰라린 손등을 자신의 손으로 꼭 감싸 가슴에 계속 품고 있었다.

천천히 입술을 뗀 둘은 잠시 말을 접은 채 이마만 맞대고 있었다. 가슴에 댄 카렐의 손등을 조용히 만지작거리던 페로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손 더 상할 일은 없겠지?”

“……글쎄.”

“이제 저 위로만 올라가면……넌 이제 명실상부한 진짜 황제가 되어 있겠지.”

페로가 자리에 주저앉아 있는 카렐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아쉬운 듯 속삭였다.

“제국을 재통일한 세나우스 4세, 카렐 리쿠 대제.”

카렐은 대답을 묵혀둔 채 말없이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페로가 그의 뺨을 더듬으며 말했다.

“나한테는 여전히 꽃이라면 환장하는 맘 약한 여자일 뿐인데.”

“난 변했어. 아직도 못 받아들이겠니.”

쓴웃음과 함께 고개를 젓는 카렐에게 페로가 주머니 속에서 젖은 흙 한 덩이를 불쑥 꺼내보였다.

“네가 아까 거길 왜 손으로 안 짚었는지 알아.”

페로의 손에 들린 건 뿌리의 흙 째로 뽑아온 어린 꽃 한 포기였다.

“이게 짓눌릴까봐 그랬지?”

잠시 망설이던 카렐이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디모르포세카.”

“더운 양지 사막에만 핀다고 했던가?”

카렐은 이전에는 꽃 따위 이름조차 전혀 모르던 이 무덤덤하고 냉혹한 남자의 얼굴을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빤히 주시했다.

“그런 꽃이 왜 여기에 피었을까?”

페로는 아직 늦겨울의 찬 기운이 남아있는 해안 절벽의 바닷바람을 느끼며 꽃을 카렐에게 불쑥 내밀었다.

“진짜 황제가 된 선물이야.”

페로는 형형색색 반짝거리는 카렐의 오팔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직 피지도 않은 봉오리를 받아들고 한참을 말이 없던 카렐이 짧은 한 마디와 함께 무겁게 몸을 일으켰다.

“이 꽃도 나 같은가 보지.”

카렐이 쇠줄을 한 손으로 붙들고는 두 번 힘껏 잡아당겼다. 황제의 귀환이 확인된 순간, 절벽 위에서 와아 하는 우렁찬 함성이 터지며 이 해안가 절벽을 뒤흔들었다.

“황상께서 올라오신다!”

언제 왔는지, 릴라크의 탁한 고함소리가 절벽 위에서 희미하게 들려왔다. 2년간 계속된 제위 경쟁을 거쳐 탄생한 새 제국, 재건된 황실, 참으로 오랜만에 맞아 보는 강력한 진짜 황제 ‘카렐 대제’를 연호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격한 환호가 아직 차가운 새벽 속에서 메아리치고 있었다.

“나도 어쩌다 이 자리에 섰는지 아직 잘 모르겠어.”

카렐은 페로와 함께 줄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제 진짜 황제라는 것 밖에는.”

페로의 허리를 꽉 안은 카렐은 줄을 잡아당기는 전사들의 힘찬 구령소리가 들려오는 절벽 위를 올려보았다. 그의 몸이 조금씩 절벽 꼭대기에 가까워지면서, 명실상부한 제국 지배자로 오른 황제 카렐을 연호하는 찌를 듯한 환호성이 절벽 주변을 메아리쳤다.

그때, 언젠가 카렐이 꿈 속에서 말했던 한 마디가 입에서 생각 없이 흘러나왔다.

“이맘……파티카람……아쿠나밤……니야쉬타야……카르타나이.”

마치 주문을 외운 것처럼, 그 마지막 한 마디에 낭떠러지 중간에 드리워 있던 짙은 연무가 옅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파란빛으로 밝아오는 갠 하늘과 낭떠러지의 정상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내 비로소 이 제국을 완성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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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본편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런데 뭐, 솔직히 완전히 끝은 아닙니다. 자잘한 마무리를 위한 에필로그가 아직 좀 남아있습니다. ^^;; 말이 에필로그지 본편 엔딩을 전후해 벌어지는 에피소드 모음이니 사실 연결되는 내용입니다.

다만 그것까지 엔딩에 다 우겨넣으면(?) 막판에 좀 산만해질 것 같아 에필로그로 따로 나누었습니다. (사실은 3부에 관계되는 꽤 중요한 내용도 일부 있습니다.)

잘 나가다가 마지막 엔딩에서 하품하게 만드는 대작(?)을 만들고 싶지는 않아서요. ^^;;

에필로그까지 마무리되면 2부 마지막 개인지 출판공지를 낼 예정입니다.

그리고 잠시 여유를 두시고 3부 [신이여, 당신 자손의 심장을 거두소서]를 기다려 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동안 2부를 성원해 주신 많은 독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그냥 휘리릭 가시지 말고 추천이나 코멘트 한 마디 남겨주고 가시면 정말 감사드리겠습니다.

(맘먹고 분량 많이 올린 편은 코멘트나 추천이 도리어 떨어지지는 징크스가..... -_-;;;)

* 참고로, 출판본을 가지고 계신 분은 1부 제4권의 354페이지를 참조해 주시면 이번 편 마지막 문단이 어떻게 3부와 연결되는지 이해에 도움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The Iron Vein 개인지 구매사이트 : http://vein.zi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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