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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786화 (781/1,132)

< -- 786 회: 혈맥 제2.1부 - 1 -- >

Epilogue 1.

기원 417년, 초봄, 어느 날. 황궁.

“황실 재정이 거덜났다면서 승전 기념 파티를 벌일 돈은 어디서 났냐?”

“설마하니 황제 주머니가 그 정도도 없을 만큼 텅텅 비었을까.”

카렐은 의아한 얼굴로 묻는 페로에게 별 것 아니라며 손을 저었다.

황궁 광장에서의 ‘종전 기념 특별 행사’를 마치고 본궁으로 돌아온 황제의 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막 궁에 들어서는 황제와 총리의 무덤덤한 표정은 함께 행사에 참여했던 문무백관들의 뭣 씹은 듯한 얼굴들과는 영 딴판이었다.

“전사한 장병들 위로금도 황제 이름으로 지급한다며?”

“당연히 내 이름으로 줘야지, 그걸 말이라고 하나?”

“내 말은 그 돈이 어디서 났냐고.”

페로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눈을 흘겼지만 카렐은 그의 말을 한 귀로 흘릴 뿐, 돈의 출처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황실 거덜났던 게 맞기는 한 거야? 설마 기분 내킨다고 황실 채권이라도 마구 찍어내려는 심산은 아니겠지?”

“글쎄, 지급불능 선언까지 한 황제의 채권을 살 바보가 있을까나.”

카렐의 귀엣말에 페로는 더 혼란스러워졌다. 마지막 전투에 임할 때만 해도 빚을 못 갚는다며 ‘디폴트 선언’까지 했고, 심지어 ‘이번에 지면 돈이 없어서 그런 거야.’ 라고까지 죽는 소리를 했던 황제가 어디서 눈먼 돈을 쓸어 담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 페로는 빈털터리가 된 황실을 위해 ‘종전 기념파티 비용 정도는 우리 가문에서 내 주지’라며 내심 생색을 낼 참이었다. 그리고 굳이 자이센 가가 아니어도 막 승전을 거둔 새 황실에 줄을 서려는 수많은 가문들이 앞을 다투어 ‘승전 행사를 지원하겠다’고 자진해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황제는 ‘황실 일은 황실에서 해결한다.’며 그들의 속 보이는 돈 봉투 세례를 일거에 거절해 버렸다. 게다가 ‘전쟁배상금 청구’도 하지 않겠다고 공포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실상 따져보면 황제가 돈에 너그러워진 건 결코 아니었다. 황실에 바치는 갖은 선물과 축하 메시지를 들고 온 각 가문 종장들, 제후들에게 황제가 대신 내민 건 제위 경쟁이 이어지던 2년 동안 ‘바치지 않은 세금+배보다 배꼽이 더 큰 가산세’ 청구서였다.

사실 그들 중 서부처럼 아예 어느 쪽에도 세금을 바치지 않은 경우도 있었지만, 수우 편에 섰던 상당수 가문들은 그쪽 황실에 계속 세금을 바쳐왔던 터였다.

얼떨결에 세금을 이중으로 물게 된 그들은 당연히 그쪽에 바친 세금도 인정해 달라고 애원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황제는 ‘가짜 황실에 돈을 바친 죄를 묻지 않은 것도 감지덕지할 것이지 어디다 생떼냐’며 또다시 도끼를 집어던지고―물론 황제가 ‘앞을 잘 못 보는 덕분에(?) 한 명도 날벼락을 맞지는 않았지만― 고함을 질러가며 대전을 한바탕 공포로 뒤집어 놓았다.

결국 황제가 내민 거액의 세금 청구서는 자기 편에 서지 않은 가문과 제후들에게 제목만 바꾸어 보낸 전쟁 배상금 청구서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왜 저렇게 다들 죽상이지?”

집무실로 가는 엘리베이터 앞에 선 카렐은 각자의 집무실이 있는 층으로 갈라지고 있는 각부 대신들을 돌아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거의 30여명의 문무 대신들이나 제후들은 마치 죽은 사람처럼 창백해져 있거나, 몇몇은 구역질을 하거나 까무러쳤다 막 깨어나 반쯤 제정신들이 아니었다.

“설마 몰라서 물으시는 건 아니시겠죠?”

“응, 몰라.”

페로의 반쯤 빈정 섞인 물음에 카렐이 시치미를 뚝 뗐다.

뒤따르던 신임 법부대신 아리아노 라자루스 경이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지금 몇 명을 죽이고 돌아가는 것인지는 아시는지요?”

“글쎄, 안 세 봤는걸.”

황제의 뻔뻔스런 대답에 아리아노가 할 말을 잃었다. 오늘의 대대적인 처형이 있기 직전, 바로 자신이 ‘오늘 처형대상은 602명’이라는 보고를 올렸던 것을 그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카렐이 황궁 광장을 힐끔 돌아보며 냉담하게 말했다.

“그래 봤자 사오시안트에서 죽은 우리 병사들보다는 적겠지.”

“…….”

“그나저나, 반역자 보벤 놈하고 그 패거리들 뒈지는 모습에 구역질한 놈은 도대체 누구냐?”

“흐음.”

황제의 소름끼치는 물음에 대신들이 헛기침을 하며 얼른 그의 시선을 피했다.

“산 채로 6토막 나는 모습이 웬만한 사람들에겐 익숙지 않았을 테니까요.”

“전장에서는 그보다 끔찍하게 죽는 사람도 숱한걸, 뭘 새삼스럽게.”

황제가 가볍게 코웃음을 치는 소리에 뒤따르는 대신들은 하나같이 뒷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주동자격인 샤자한과 제롬, 카산드라가 이미 죽었고, 베흔과 수우는 자진 투항한 와중에 극형을 받을 대상은 결국 ‘적은 용서해도 배신자는 용서 못한다’는 황제의 지론대로, 배신의 전력이 있는 보벤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말이 600명이지, 이 정도 규모의 처형은 지난번 카렐이 황도 전투 직전 실시했던 1천의 대규모 처형에 이어 제국 역사상 두 번째였다.

하지만 이번 처형은 지금까지 다른 지배자들이 승전 직후 대대적으로 벌인 처형과는 달랐다. 황실의 권위를 높인답시고 수십만의 시민들을 광장에 구경꾼으로 모아놓고 대대적인 ‘처형 쇼’를 벌이지도 않았고, 사형수들이 자신의 운명을 안 것도 비로소 오늘 아침에서였다. 처형이 집행된 황궁 광장은 민간의 출입이 철저히 통제되었고, 처형을 지켜보는 ‘특권’을 받은 건 일부 고관들, 그리고 이번에 참전했던 장병들 중 일부 뿐이었다.

사실 몇몇은 이번에도 공개처형을 실시해 황실의 권위를 보이자고 주장했지만 황제는 ‘눈앞에서 죽여서 영웅을 만들어주느니 개죽음을 당했다는 소문만 듣게 하는 게 나아.’라는 대답으로 그들의 의견을 묵살해 버렸다.

“그런데, 아직 제국민들 거의 대부분이 폐하의 얼굴도 모른다는 건 아십니까?”

병부대신 제네르가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지만 황제의 대답은 이번에도 엉뚱했다.

“잘됐군. 앞으로도 값싸게 얼굴 팔리는 건 사양이니까.”

“예?……이제 명실상부 제국의 지배자가 되셨는데 좀 더 적극적으로 존재를 알리시는 게…….”

“절대자는 적당히 베일에 가려 있는 게 낫지.”

“황실의 존재감을 알리기 위해서라도…….”

“옛날 대신관은 신비감이 도리어 무기였다지?”

황제의 대답에 유학자인 제네르가 눈가를 살짝 찡그리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상의 지고한 지위를 사교도 수장에 비유하심은 적당치 않은 줄 아옵니다.”

“말하자면 그렇다 이거지, 뭘 그리 발끈하나?”

카렐이 능글맞게 웃음을 지으며 멀찍이 뒤따라오고 있는 코리온과 신임 보안국장 사에나 쉐너를 힐끔 돌아보았다. 황궁이 무너지냐 마느냐가 갈리던 운명의 밤, 지하의 에아 신전에서 생사의 사투를 벌였던 두 명의 주역들이었다.

“허, 잘 어울리네.”

카렐이 아직 흐린 눈으로 그들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나름대로 친분을 쌓은 것인지, 아니면 별난 성격끼리 통한 것인지는 몰라도 사람들이 ‘누구나 다들 피하는’ 저 두 사람이 두 눈을 반짝거리며 무어라 열띤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저 대화가 들리면 좋을 텐데. 저 둘이 저렇게까지 진지하게 얘기할 정도면…….”

카렐이 아직 청력이 시원찮은 귀를 후볐다. 잘 못 듣는 황제를 대신해, 경호대장 카토가 냉큼 입을 열었다.

“열흘 후에 아켐에서 열릴 셔틀 레이스 결승리그의 팀별 승률과 배당금에 관해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흐, 음.”

순간, 완전히 헛다리를 짚은 황제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고, 지금까지 내내 죽상이던 대신들 사이에서 갑자기 웃음이 터져나왔다.

“허, 폭주(走)족하고 폭비(飛)족이 만났으니.”

제네르와 함께 있던 네피가 냉큼 빈정거렸다. 운전대만 잡았다 하면 야수로 돌변하는 사에나에, 셔틀만 탔다하면 곡예비행을 하는 별난 원리주의 유학자가 죽이 맞기는 맞는 모양이었다.

“오늘은 제네르 경과 학장이 뒤바뀐 것 같아.”

엉뚱한 소리로 상황을 무마한 황제는 엘리베이터에 들어서기 직전, 동쪽 창밖을 돌아보았다. 대대로 황실의 큰 행사가 열리던 대연회장 ‘아스트라이아 홀’이 있던 자리였지만 지금은 흉물스런 폐자재 더미일 뿐이었다.

따져보면 저곳이야말로 이번 제위 전쟁이 황궁에 남긴 가장 큰 상처였다.

옆에 있던 페로가 볼멘 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스트라이아 홀이 무너져서 승전 파티를 야외에서 여는 것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혹시 저녁에 비라도 오면…….”

“걱정 마. 안 오니까.”

카렐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네가 어떻게 알아? 예보관들도 잘 모르겠다고 하던데.”

“내가 안 온다면 안 오는 거야. 저녁때 보자고.”

카토, 사에나와 함께 막 엘리베이터에 오른 카렐이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씨익 웃었다. 카렐은 반신반의하는 그를 로비에 놔둔 채 엘리베이터 문을 쾅 닫아버렸다.

엘리베이터가 출발한 순간, 카렐이 갑자기 눈을 감으며 고개를 쳐들었다.

“휴우. ……힘들어.”

지금껏 겉으로는 밝고 여유만만한 척 하고 있었지만, 일순간 긴장이 풀린 그의 입에서 큰 한숨이 새어나왔다.

“아직도 못 찾았나?”

가볍던 황제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고 차가워졌다. 신임 보안국장 사에나가 고개를 숙이며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변화상황 없습니다.”

에아 신전에서 다쳤던 것이 아직 덜 회복되었는지, 목소리도 갈라졌고 힘이 없었지만 대답 내용은 분명했다.

“루토 대장은 적의 포로가 된 것 같고, 반역 가디언 쿠베의 시체는 바다에 떠밀려간 것 같습니다. 바위에 남은 혈흔으로 보아 사망이 거의 확실합니다만 만일의 경우도 고려하심이 좋을 것 같습니다.”

“빌어먹을.”

카렐의 턱에 힘줄이 바싹 곤두섰다.

“수송선 04, 05번이 예정대로 수에니에 나타났더라면 놈이 죽었다고 믿겠지만 그게 아니니 문제지.”

“……알고 있습니다.”

사에나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그도 황제가 사오시안트 전투 막판에 사라진 3만의 근위대를 가장 크게 염려하고 있다는 것을 알 알고 있었다.

제네르의 동맹군에 완전히 포위되었던 그들은 쿠베가 근위대 수송선을 재빨리 돌려 투입하면서 말 그대로 아슬아슬하게 손아귀를 빠져나가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황제는 그리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들이 갈 곳은 어차피 ‘미리 퇴각지로 예정되어 있던’ 수에니 반도였고, 그들이 수에니에 도착하는대로 베흔을 내세워 ‘자연스런 복귀’를 받아 줄 참이었다.

하지만 그 두 척의 수송선은 수에니에도, 제국의 다른 어느 곳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절벽에서 떨어진 쿠베의 시체도 발견되지 않았고, 카렐은 ‘전쟁이 다 안 끝났는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며칠을 지새우기도 했었다.

하지만 사라진 군대와 쿠베 모두, 보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 제국 어디에서도 끝내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사오시안트의 전투가 끝난 날, 동맹군은 수에니의 근위대 분견대에게서도 자진 투항을 받아냈지만 어처구니없이도 그들의 투항 이유는 ‘오기로 한 아군이 아무도 오지 않아서’였다.

결국 황제는 무언가 찜찜한 걱정을 떠안은 채 일단 ‘종전 선언’을 해야만 했다.

“계속 뒤져라. 그 부대 단 한 놈이라도 꼬리가 잡힐 때까지. 10년이든, 100년이든 상관없다.”

카렐이 곧 열릴 집무실 엘리베이터 문을 노려보며 이를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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