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87 회: 혈맥 제2.1부 - 2 -- >
Epilogue
기원 417년, 초봄, 어느 날. 황궁.
133층 집무실에 내려선 황제를 기다리고 있는 건 비서실의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들 사이를 당당하게 걷던 카렐은 텅 비어있는 한 자리를 문득 돌아보았다.
“후.”
카렐은 ‘폐하는 왜 나만 동네북처럼 골탕을 먹이시는지 모르겠어’라며 저 자리에서 매일같이 투덜대곤 하던 자그만 사내를 떠올렸다. 지금 그 자리에는 황제가 얼마 전 보낸 조화(弔花)와 여러 사람들이 보낸 꽃다발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우베…….”
카렐은 슬픈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려 무진 애를 쓰며 비서실 안쪽의 집무실로 걸었다. 그는 승전을 거둔 황제가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인사를 올리는 여러 비서관들에게 웃음과 함께 수고했다며 손뼉까지 쳐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비서실을 지나 자신의 집무실에 든 카렐은 미리 깨끗이 정돈되어 있던 자신의 자리에 털석 몸을 기댔다.
“이 자리에 얼마만에 돌아와 보는 건지.”
진이 빠진 카렐이 그 긴 다리를 앞으로 쭉 뻗었다. 전쟁이 끝나고 꽤 여러 날이 지났지만 그가 이곳에 온 건 오늘 새벽이었다.
이젠 ‘격벽식 방어체계’도 해제가 되어 고속셔틀로 금방 올 수 있는 거리였지만 ‘황궁의 안전점검을 끝내거든 오십시오.’ 라는 코리온의 고집 때문에 황도에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었다. 덕분에 전투를 끝내고도 거의 보름 가까이를 잿더미로 가득한 사오시안트에서 원격 집무를 보아야만 했다.
“설마 무너지지는 않겠지? 133층에서 떨어지면 제아무리 등급 없는 가디언이라도 뼈도 못 추릴걸.”
바닥을 쿵쿵 굴러보며 엄살을 부리는 황제에게 사에나가 냉큼 대답했다.
“안전상 문제점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만일을 대비해 교단 시절에 만들어진 오래된 황궁 지하 구조에 관해 보안국 차원에서 비밀 연구 조사를 추진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작성한 계획 초안입니다.”
겨드랑이에 끼고 있던 두툼한 ‘계획서’를 내밀려던 사에나가 머뭇거렸다. 황제의 탁자 위에는 이미 산처럼 쌓인 서류들로 새 자료를 얹을 자리도 없었다.
카렐이 어마어마한 서류를 올려보며 혀를 찼다.
“그나저나 이것들이 도대체 다 뭐냐.”
“학장이 그간 폐하를 대리해 처결한 사안들입니다. 확인해 보십시오.”
사에나가 까치발을 하고는 방금 전의 ‘계획서’를 그 산더미 위에 한 층 더 쌓아올렸다.
“허, 학장 그 양반, 머리 쓰는 일 하나는 정말 팔방미인이군. 뭐 하나 못 하는 게 없으니 흉내도 못 내겠어.”
앉은 채로 손을 뻗었던 카렐은 제일 높은 서류더미 꼭대기에 손끝이 닿지 않자 버럭 짜증을 냈다.
“……이런, 제기랄, 신임 비서관은 키가 나만큼 큰 놈을 뽑아야 되려나.”
“폐하께서도 발현자 아니십니까?”
“나? 난 손이라면 몰라도 머리 쓰는 건 질색이라고 말 안 했던가?”
카토가 대신 내려 준 파일 몇 개를 받아든 카렐은 보는 둥, 마는 둥, 손으로 대충 넘겨보고는 서명만 쓱쓱 해서 옆에 휙 던져버렸다.
“봐, 황제는 손만 쓰면 되지.”
황제의 어처구니없는 넉살에 카토가 웃음을 꾹 참았다.
“그런데 글씨는 보이십니까?”
“아니.”
카렐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사에나와 카토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황제는 그저 기계적으로 ‘평소 서명하던 곳’에 대충 이름을 써서 옆에 휙 던졌다.
“뭐 알아서 좀 잘 했을까.”
카렐이 이번에도 평소 잘 하던 말을 늘어놓았다. 황제의 사람 보는 눈은 무서울 만큼 정확하고 엄격했지만 그는 ‘사람’에 신경을 쓸 뿐 ‘일’에는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자잘한 실수에는 애당초 무신경했고, 실무적인 사안은 ‘잘 하는 놈이니 알아서 했겠지’라며 믿고 맡긴 채 참견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다른 사람도 아닌 코리온’이 직접 작성한 저 많은 서류들 앞에서 황제가 할 일은 ‘손을 쓰는 것’ 외에는 없다는 것도 틀린 표현은 아니었다.
그렇게 열심히 ‘손을 쓰고 있던’ 황제가 사에나에게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북부 쿠트라스에서는 연락 왔나?”
“유배중인 수우 델루지 부부를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어제 말씀드린 것에서 변함없습니다. 둘 다 트라카 병원에서 치료중이고, 처 구르베스 슈트란은 트라카 교단 신학교에 곧 복학 예정이라고 합니다. 아, 델루지 가와 슈트란 가에서 오늘부로 이 둘을 파문한다는 공식적인 연락이 왔습니다.”
“파문? 벌써?”
열심히 ‘손을 움직이던’ 카렐이 문득 고개를 들어 사에나를 돌아보았다. 사에나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어차피 예상했던 일입니다. 이 일은 황실에서 관여할 명분이 없습니다.”
“그건 안다.”
카렐이 차갑게 대답하며 다시 서명을 계속했다.
“구르베스야 교단 성직자가 되기로 했으니 그랬다 쳐도 수우를 파문한 속내는 그리 선량해 보이지 않는군.”
카렐이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델루지 가 섭정을 맡고 있는 종부 오르테 라자루스가 딸 세데스의 계승권을 확실히 보장하려고 서두른 것이 분명합니다.”
경호대장 카토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제롬이 죽었고, 외동딸 세데스가 아직 미성년이니 제롬의 동생인 수우 델루지가 가문 후계자 아닙니까? 왜 오르테 부인이 섭정입니까?”
“수우가 구르베스와 이혼하라는 가문 원로회 권고를 거부했거든. 사교 성직자를 부인으로 뒀으니 상급귀족가에서 파문을 열 번 당해도 할 말이 없지.”
“종장 자리도 버리고 말입니까?”
“글쎄, 이상해 보일지는 몰라도 내가 보긴 지극히 수우다운 결정인데?”
카렐은 어린 시절 수우를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항상 머리보다 가슴을 쫓던 그 녀석은 결국 가문 종장이라는 명예와 상급귀족의 지위까지도 모조리 버리고 사랑하는 여자를 택한 모양이었다.
“세데스가 지금 10살이던가?”
“현실적으로 40세는 넘어야 제대로 인정을 받으니 30년쯤 후면 델루지 가 종장으로 역할을 할 것 같습니다.”
“세데스 라자루스 델루지…….”
카렐이 서명을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죽은 제롬의 외동딸 세데스는 베흔의 손녀니 카렐에게도 좀 멀지만 사촌 격이었고, 아버지 제롬에게 여러 번 딸자랑 팔불출 소리를 듣게 만든 야무지고 똑똑한 소녀였다. 하지만 사실 따져보면 세데스는 델루지 가 피라고는 한 방울도 안 섞인 꼬마였다.
“다음번 델루지 가 종장이라…….”
카렐이 이마를 손가락으로 똑똑 두드렸다. 비록 델루지 가가 이번 패전으로 남부최고제후에서 2제후로 강등될 운명에 처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아직까지는 제국에서 가장 넓고 기름진 영토를 보유한 막강한 제후로서 지위는 여전했다.
“수우하고 구르베스의 반응은 어떻던가?”
“이미 예상한 일이라 담담해 보였습니다. 수우 델루지는 퇴원 후에 교단 병원의 자선 극단에서 자원봉사로 일해도 되는지 유배 감독관에게 문의를 해 왔습니다. 어떡할까요?”
“개인으로만 보면 더 잘 되었는지도 모르지. 맘대로 하게 놔 둬.”
카렐은 겉으로는 무덤덤하게 서명을 계속했지만 속은 어딘지 편치를 않았다.
“잠깐, 구르베스 뱃속의 아들에 관해서도 언급이 있었나?”
“……아뇨, 그런 내용은 없었습니다.”
“잘됐군.”
카렐이 살짝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수우 부부에게 아이 성은 반드시 ‘델루지’로 붙이라고 말하게.”
그 많은 서류들에 서명을 모두 끝낸 카렐은 뻐근한 팔을 풀어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녁때 파티에 참석하려면 좀 쉬어야겠다.”
막 정리를 하고 일어서려던 카렐은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다시 짜증을 냈다.
“아직도 뭐 할일이 남았냐?”
“폐하, 지난번 말씀하신 탈라스의 그 소년을 데려왔습니다.”
집무실 문이 조심스레 열리더니 밖에서 비서관 한 명이 들어서며 고개를 숙였다.
“‘탈라스의 소년’이라니? 이름이 뭔데?”
황제의 물음에 비서관이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머뭇거렸다.
“한심한 놈, 데려와 놓고 이름도 몰라?”
“아니, 그게……이름이…….”
머리를 긁적거리던 비서관이 문제의 ‘소년’을 확 끌어다가 앞에 세웠다.
“네가 이름 직접 말 해 봐라.”
“부지우루그파드 루스타미르드입니다. 폐하.”
소년이 황제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13, 14살 정도 되었을까, 부리부리한 눈을 부릅뜬 야무진 얼굴이었지만 몸에는 누덕누덕 기운 에키트 족의 가죽옷을 걸치고 있었다. 황제 알현을 위해 미리 단장이라도 시켰는지 그래도 얼굴만은 어색할 만큼 희었다.
“부, 부지……어휴. 아비나 아들이나.”
카렐이 이마를 짚었다.
“가디언 열 명을 죽인 에키트 족 제일의 용사, ‘부지우루그우미드 야즈디기르드’의 아들입니다, 폐하.”
에키트 족 소년이 전사한 아버지의 이름을 깜짝 놀랄만큼 큰 소리로 자랑스레 말했다. 펜지켄트의 지하 무덤에서 황제 일행을 뒤쫓던 근위대 가디언들의 머리 위에 돌더미를 쏟아붓고 함께 죽은 에키트족 전사 ‘락시 대장’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아들이 자기 이름도 모를 만큼 어리다고 했었는데? 내 잘 보이지는 않아도 저 정도면 거의 다 큰 놈 같은데? 정말 그 친구 아들 맞나?”
카렐은 별 차이도 안 나는 소년과 비서관의 키를 어림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들을 부탁한다는 락시 대장의 마지막 부탁대로 황실에 데려온 것이었으니 탈라스 오지의 사냥꾼 소년 입장에서는 출세도 이만저만 큰 출세가 아닐 터였다. 사정이 그렇다면 다른 엉뚱한 아이가 그 행세를 할 가능성도 충분했다.
“생긴 것도 딴판 같은데? 몇 살이냐?”
카렐이 여전히 미심쩍은 얼굴로 소년에게 다가가 아직 어두운 눈을 바싹 들이댔다. 우락부락하고 각지고 못생긴 얼굴에 더벅머리, 치열도 엉망이던 그 사내와는 대조적으로 뽀얀 얼굴에 이도 가지런했고 큰 눈도 초롱초롱한 것이 퍽이나 똘똘해 보이는 소년이었다.
“8살입니다.”
“엥?”
카렐이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비서관을 돌아보았다.
“소도 때려잡게 생긴 녀석이 8살?”
황제의 물음에 당황한 비서관이 얼른 서류를 내보였다.
“저, 저희도 의심스러워서 출생 기록에 유전자까지 확인했지만……부지……대장의 아들이 분명합니다. 혹시 몰라서 의사도 치아와 성장판까지 모두 확인했는데 8살이 맞습니다. 다만 나이에 비해……좀 많이 큰 것 같습니다.”
비서관이 난감한지 멋쩍게 웃었다.
“허, 그럼 한 가지는 아비를 닮았군.”
카렐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에키트 족들이 대체로 큰 편이지만 생각해 보니 죽은 락시 대장은 개중에도 더 큰, 카렐도 능가하는 거구였다.
“어쨌든 약속을 했으니 일단 내관부로 데려가서 시동(侍童) 명단에 올려라. 어미와 함께 지내게 집 한 채 내리고 고등교육까지 받을 수 있게 해.”
“소인 부지우루그파드 루스타미르드, 황상의 은혜, 망극하옵니다.”
소년이 바닥에 납죽 엎드리며 절을 올렸다. 물론 미리 ‘사전 연습’을 한 대로 따라 하는 것이겠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것이 8살 꼬마가 맞나 하는 생각이 다시 들 정도였다.
“아참, 너도 이름은 좀 바꿔야겠다.”
집무실을 나서던 카렐이 소년을 다시 돌아보았다.
“앞으로 루스탐이라고 해.”
++++++++++++++++++++++++++++++++++++++++++++++++++
에필로그는 2부와 3부를 잇는 짧은 다리 역할이고요, 전반적으로 가벼운 외전 격입니다.
원래 외전은 3부 연재와 함께 폭파예정이었지만 이 두 편은 3부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되어 일부 남겨두기로 했습니다.
참고로, 지금까지 나온 1, 2부 출판본 전권을 안내해 드립니다.
The Iron Vein 개인지 구매사이트 : http://vein.zio.to/ 에서 주문 가능하고요, 단권별로도 가능합니다. ^^
[1부 - 총10권]
1권 : 디모르포세카, 음지에 피다 (11,000원/권)
2권 : 나를 잊지 말기를 (11,000원/권)
3권 : 하이포시스 오리어 (11,000원/권)
4권 : 핏빛 장미 위의 사마귀 (11,000원/권)
5권 : 떡갈나무 언덕에 홀로 서다. (11,000원/권)
6권 : 쓰러진 베로니카를 품에 안고 (11,000원/권)
7권 : 그는 항상 크로커스를 품고 있다. (11,000원/권)
8권 : 매화는 봄을 기다린다. (11,000원/권)
9권 : 밀짚꽃을 짓밟지 말지어다. (10,500원/권)
10권 : 내 아버지 곁의 고결한 소나무 (1부 완결) (10,500원/권)
[2부 - 총8권]
1권 : 두 그루의 월계수 (10,500원/권)
2권 : 유리벽 너머 수선화 한 송이 (10,500원/권)
3권 : 아카시아, 창을 깨다. (10,500원/권)
4권 : 신께서 쥐신 검은 튜울립 (10,500원/권)
5권 : 질풍도 주목에 찢기운다. (10,500원/권)
6권 : 하나의 가지, 다른 색의 꽃 (10,500원/권)
7권 : 축복받은 혈통, 저주받은 운명 (11,000원/권)
8권 :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11,000원/권)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