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91 회: [3부] 파트1. 인동초 향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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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 대군의 하관의식이 취소된 그날 저녁, 대전에 모인 대신과 각 지역 대사들 사이의 분위기도 몇 시간 전 묘지에서만큼이나 차가웠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냉랭한 분위기는 묘지에서의 ‘엄숙함’과는 다른, ‘살벌함’에 가까운 기세싸움 때문이었다.
황제의 도착 예정시간을 몇 분 앞두고 대전에 든 많은 사람들은 이번에 논의될 예민한 사안을 놓고 누가 적이고 누가 자기 편인지를 세심하게 저울질하며 ‘작전’에 몰두하고 있었다.
“시간 다 되었습니다.”
회의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 대신들이 일제히 자기 자리로 흩어지며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대전 안에는 선대 황제 때는 감히 상상도 못했을 차가운 침묵과 엄숙함이 번졌다. 그만큼 오늘의 회의는 특별했다.
황제는 정력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었지만 대신들이 투닥거리며 싸워대는 자잘한 회의에까지 모두 모습을 드러내는 건 아니었다. 그는 웬만한 일은 총리부와 대신들이 스스로 처리하도록 놓아둔 채 뒤에서 지켜보기만 했고, 그래도 해결되지 않을 때에만 개별적으로 대표를 한둘 부르거나, 최후통첩으로 훈시를 내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무슨 이유엔지 황제는 제위전쟁의 승리 이후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꺼리게 되었고, 드물게 외출을 할 때도 이전 가디언 시절처럼 망토로 얼굴까지 모두 가리고 다니곤 했다.
그렇다보니 일반 제국민은 물론이고 황궁의 웬만한 공무원까지도 황제가 ‘키가 크고 당당한 체구의 가디언 출신’이라는 정도만 알고 있을 뿐, ‘나 황제다’라는 티만 내지 않으면 바로 옆을 지나가도 누군지 알아보지조차 못할 정도였다.
그런 황제가 이렇게 몸소 대신들을 불러낼 정도라면 이 상황까지 일을 해결 못 한 누군가에게는 말 그대로 ‘사단’이 나곤 했다.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하나같이 긴장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잔뜩 고개를 숙여붙인 대신들은 황제가 자주 이용하는 당상 옆쪽의 문 열리는 소리에 일제히 침을 꿀꺽 삼켰다. 그들은 바닥을 성큼성큼 딛는 황제의 자신에 찬 걸음소리를 기다리며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음?”
제일 먼저 눈동자를 움직인 건 당상 가까이에 서 있던 병부대신 상장군 제네르 하크로딘이었다. 무언가 약간 엇박자가 난, 바닥을 툭툭 딛는 힘없는 소리가 그의 귀를 울리고 있었다. 제네르를 비롯한 부총리급과 황실의 각부 대신들이 여전히 허리를 숙인 채 황제 출입문 쪽을 힐끔 곁눈질했다.
“자, 장태자 전하?”
“제국의 두 번째 기둥이시며 황제의 합법적인 대리인이신 카이 자이센 리쿠 장태자께서 드시니 모두 존경을 표하시오!”
“충심으로 받드나이다.”
황실 대신들이 얼른 시선을 거두며 고개를 숙여붙였다. 총리 페로와 함께 대전에 든 건 황제가 아닌, 마르고 창백한 얼굴의 10대 중반 정도의 소년이었다. 기골이 장대한 황제의 피를 받았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핏기도 없고 툭 밀기만 해도 쓰러질 듯 약해보이는 소년이었다.
“다들 모였는가.”
장태자의 낮은 목소리가 대전에 울렸다. 비록 비쩍 마르고 힘도 없어 보였지만 장신에 큰 골격, 강한 이목구비, 빛이 살아있는 선명한 눈동자에는 황제에게서 내려온 매서운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 황제의 외모를 아는 사람이라면 ―검은 눈동자와 머리칼을 빼면― 그를 그대로 빼닮았다는 것을 바로 알아챌 수 있을 정도였다.
“오르시지요.”
황빈 베아트릭스의 부축을 받으며 힘겹게 당상을 향해 한 걸음씩 오르던 소년은 몇 발짝 오르지도 못한 채 중간에 멈춰 버렸다. 몇 발짝 걷지도 않았지만 소년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시종들을 무른 베아트릭스가 휘청거리는 그를 두 팔에 재빨리 안아들고 당상에 재빨리 올라서는 다시 바닥에 내려주었다.
“고맙습니다, 황빈.”
작은 소리로 감사를 표한 소년은 옥좌 옆의 후계자 자리에 힘겹게 작은 몸을 기대앉았다.
“휴우.”
장태자의 외조부이기도 한 총리 페로가 반대편의 다른 자리를 차지하고 앉으며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이는 이 소년을 걱정스레 쳐다보았다. 저 13살짜리 소년이 비록 중요한 정책결정을 내리지는 못하겠지만 이 자리에 ‘황제를 대신해’ 나와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와 대신들에게는 중요한 의미였다.
“상께선 어디 계시지?”
이런 중요한 회의가 황제가 아닌, 장태자 배석으로 열린다는 데 놀란 대신들 몇몇이 웅성대기 시작했지만 이번 회의를 발의한 재무대신이 큰 헛기침으로 일단 분위기를 바로잡았다.
“5일 전 소인이 황상께 이 회의를 건의하여…….”
“지금까지의 진행상황은 이미 알고 있으니 본론부터 시작하게.”
카이 장태자가 마른 손을 들어 주제와 상관없는 잡다한 절차를 설명하려는 재무대신의 입을 막았다.
“보고 배운 도둑질이라고 저러실 때 보면 붕어빵이시네.”
법무대신 아리아노 라자루스 경이 함께 선 조카 릴라크 예리노프 대장군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이 심각한 분위기에 뜬금없이 나온 이모의 농담에 릴라크는 황실군 기사단장이라는 직위도 잊고 살벌한 대전에서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흐트러지는 분위기에 당황한 재무대신이 재빨리 본론을 꺼냈다.
“지난해부터 2년 연속으로 동부와 서부에 잎마름병과 해충이 들끓었습니다. 여기에 올 봄 서부에 대규모 열풍(熱風)이 덮쳐 식량비축창고의 시설이 망가지고 비축된 곡물 상당량이 썩어버렸습니다. 여기에 남부의 대외판매 중단까지 겹치면서 해당 지역 곡물가격이 연초대비 4.9배로 상승하여 빈민들 가운데 아사자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그건 알아.”
장태자가 비서관이 올린 관련 자료들을 뒤적거리며 대답했지만 저 소년이 정말로 내용을 잘 알고 대응할 것이라 생각하는 대신들은 아무도 없었다. 도리어 그들의 관심은 실질적인 결정권을 지닌 총리 페로의 입을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사태 회복을 위해 지역 제후들이 정체된 곡물 유통을 활성화시킬 방안을 요청하였습니다, 한편으로 전략 비축곡물 매각을 황실에 공식 요청해 와서 모두 이렇게 모였사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총리의 입만 향하고 있는 이때, 뜻밖에 먼저 입을 연 건 어린 장태자 쪽이었다.
“여기에는 남부가 수출중단을 한 이유가 나와 있지 않은데? 이보게, 우읍…….”
소년 장태자가 갑자기 하던 말을 멈추고 찢어지듯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시종들이 얼른 달려들어 주변을 에워싸고 힘겨워하는 그의 모습을 대신들의 시선에서 가렸다.
“당상만 좀 추운 것 같아. 난방을 좀 할걸 그랬어.”
당황한 베아트릭스가 입고 있던 비단포의 자락을 여미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그런 것 같습니다. 저희 시종들의 실책이옵니다.”
황빈의 눈짓을 받은 시종들이 재빨리 작은 난로를 가져가다 장태자 옆에 대 놓았다. 하지만 사실 당하에서 추워 떨고 있는 대신들은 아무도 없었고, 당상과 당하가 체감온도까지 다를 만큼 어마어마하게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난 괜찮다. 물러나 있어.”
카이 장태자가 손짓을 해 시종들을 돌려보냈다. 그리고는 끓는 목소리로 당하의 각 지방 대사들 쪽을 가리켰다.
“남부 총괄대사 어디 있는가. 이 자료엔 그쪽 의견이 안 들어가 있으니 말 좀 해 보게.”
장태자가 이 와중에도 계속 회의를 주도해 나가자 몇몇 사람들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후우, 제법이신데요?”
릴라크가 이모 아리아노에게 눈을 쫑긋거렸다. 하지만 장태자의 ‘제법 괜찮은’ 주도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아랫사람들이었다.
“남부 총괄대사 어디 있냐고.”
장태자가 자꾸 죽어가는 목소리에 억지로 힘을 넣으며 대신들을 압박했다. 총리 페로는 자신의 손자이며 제위 후계자인 이 소년이 대신들을 리드하려 애쓰는 모습을 아직까지는 물끄러미 지켜보고만 있었다.
“어디 갔지?”
대전의 대신들이 조금씩 웅성대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 당연히 있어야 할 최고제후 플라칼 가 출신 남부 총괄대사의 모습이 감쪽같이 보이지 않았다. 사라진 총괄대사를 대신해 2제후 델루지 가 대사가 얼른 앞으로 나섰다.
“흐, 음, 소신이 대신 말씀드리…….”
“난 총괄대사 말을 듣겠다고 했네.”
카이 장태자가 손끝으로 그에게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순간 델루지 가 대사의 얼굴이 붉어졌지만 그는 여전히 자리에 선 채 계속 말을 이었다.
“이번 흉작의 원인이 된 잎마름병과 기생충의 방제를 위해 저희 남부에서는 거액의 방제비용과 대대적인 노동력을 투자하였습니다.”
“내 경에겐 들어가라 했네.”
장태자가 다시 역정을 냈지만 대사는 자리에 꼿꼿이 선 채 계속 말을 이었다.
“대표자가 소인밖에 없지 않습니까, 계속 들어 주시옵소서. 허나 동부와 서부에서는 턱도 없이 미미한 인상폭만을 제시하였고…….”
“들어가라고 했지…….”
흥분해 목청을 높이던 장태자가 또다시 기침을 하며 휘청거리자 대기하던 시종장이 허겁지겁 달려 올라왔다. 그 와중에도 남부 대사는 계속 들으란 듯 말을 이었다.
“게다가 저희 역시 올해 소출이 2할이나 격감하여 안보상 도저히 반출을 허가할 수 없는 상황이온지라…….
“뭐야.”
델루지 가 대사의 대담한 것인지, 멍청한 것인지 알 수 없는 태도에 황실 대신들은 물론이고 다른 지역 대사들까지 웅성대기 시작했다. 몇몇 대신들이 그에게 입을 다물라고 대놓고 눈짓을 주었지만 델루지 가 대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명령이 전혀 통하지 않자 장태자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 때문인지 또다시 콜록거리며 심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이 어처구니없는 광경을 지켜보던 법무대신 아리아노 경이 낯을 찡그리며 릴라크에게 속삭였다.
“저 새끼, 미리 계획하고 온 게 분명해. 일부러 장태자를 흥분시키고 돌아가서 짤리는 걸로 대충 무마할 속셈이야.”
당황한 시종들이 다시 달려들어 장태자를 에워쌌다. 베아트릭스가 휘청거리는 이 소년의 입에 얼른 면수건을 대어 흐르는 침을 닦아주었다.
“괜찮으십니까? 힘드시면 이만 접고 총리께…….”
“아뇨, 제가 합니다.”
여전히 격앙된 장태자는 씩씩거리며 시종들에게 물러나라며 재차 손을 저었다. 하지만 휘청거리는 장태자와 시끌시끌해진 대전 분위기를 보다 못한 총리 페로가 반대편에서 막 일어섰다.
“모두 조용히…….”
페로의 고함이 이어지려는 그때, 갑자기 뒤쪽의 주출입문이 홱 열리더니 수십의 친위 가디언들이 우루루 뛰어 들어와 대전 주변을 빙 에워쌌다.
“그래서 이번 조치는 저희 남부로서는…….”
지금까지도 물 만난 고기처럼 목청을 높이던 델루지 가 대사가 그제야 하던 말을 멈추고 얼른 눈동자를 굴려 좌우를 살폈다. 그리고 대전 안에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들려온 순간 그는 이번 ‘돌발계획’이 어마어마한 실수였음을 직감했다.
“제국의 지배자이시며 가장 높은 기둥이신 카렐 대제께서 이곳에 드시니 모두 그 앞에 무릎을 꿇을지어다!”
루스탐의 굵고 우렁찬 목소리가 넓은 대전 안을 뒤흔들었다. 놀란 대신들이 황급히 꿇어앉아 바닥에 이마를 가져갔지만 조금 전까지 목소리를 높였던 델루지 가 대사는 일부러 꿇을 필요도 없었다.
“이런.”
창백해진 대사가 주저앉은 건 절을 올리려는 것이 아니고 다리가 풀려서였다. 그 모습을 고소하다는 눈으로 힐끔 째려본 릴라크도 얼른 바닥에 이마를 가져갔다. 그리고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내딛는 소리가 이번엔 대전 뒤쪽에서부터 조금씩 가까워졌다.
발소리만 들어도 의심을 품을 여지도 없이 분명 황제였다.
“내 후계자 앞에서 무엄하게 떠들고 있는 자가 누구냐.”
쇳소리같이 걸걸한 목소리가 짜증과 뒤섞여 대전을 차갑게 짓눌렀다. 검은 비단용포를 끌며 등장한 이 저승사자 같은 황제 앞에서 감히 누구도 함부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수십의 수행원, 호위 가디언과 상선 루스탐을 대동한 황제는 대전을 가득 메운 대신들 사이를 무표정하게 가로질러 당상으로 향했다.
“폐하?”
문득 걱정이 든 페로가 살짝 눈동자를 들어 황제의 모습을 확인했다. 몇 시간 전까지 침대에 누워 있던 ‘카렐 대제’는 당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오고 있었다.
“괘, 괜찮으십니까?”
페로가 황제의 낯빛을 확인하며 이례적으로 물었다. 긴 깃털이 꽂힌 사파이어 서클렛 아래로 매처럼 매서운 눈과 표정이 사라진 황제의 얼굴이 보였다. 그간 안 좋은 일들에 발작의 후유증까지 겹쳐 여위고 핏기도 없었지만 큼직한 은빛 늑대털이 걸쳐진 그의 넓은 어깨는 여전히 당당해 보였다.
“여기가 언제는 안 괜찮다고 피할 수 있는 자리였나.”
카렐이 자신의 앞에 놓인 옥좌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쳐들었다.
“장태자.”
카렐은 옥좌 옆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나 힘들게 허리를 굽히고 있는 소년에게 다가갔다.
“수고했다. 역시 당당하구나.”
카렐은 어깨에 걸치고 있던 두툼한 늑대털을 벗어 아들의 어깨에 덮어주었다.
“부, 부족한 소자가 폐하의 위엄에 누가 되지 않았을까 걱정이옵니다.”
카렐은 대답 대신 엷은 미소와 함께 그를 품에 한 번 안아주었다. 잠시 창백해졌던 장태자의 얼굴에 붉은 혈색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다.
“일단 시작했으니 장태자가 계속한다.”
카렐은 옥좌에 비스듬히 앉으며 아랫사람들을 빙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조금 전의 델루지 가 대사를 손으로 가리켰다.
“너냐?”
“예?”
다리가 풀린 채 엎드려 벌벌 떨고 있던 그 대사는 주변에 서 있던 수행원들과 다른 남부 대사들이 그새 자신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것을 그제야 알아챘다. 다시 생기를 되찾은 장태자는 황제의 은빛 털을 어깨에 두른 채 당상에 우뚝 서 있었다.
“뭐 하나? 아까 하던 말 마저 끝내야지?”
장태자 뒤에 앉은 카렐은 페리도트 반지가 끼워진 긴 검지를 까딱거리며 대사에게 일어나라고 손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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