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794화 (789/1,132)

< -- 794 회: [3부] 파트1. 인동초 향기 -- >

.

.

.

개인 셔틀을 타고 막 종가에 도착한 세데스는 긴 비단포와 머플러 자락을 날리며 성큼성큼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마치 전쟁터라도 나가는 것처럼 허리에 긴 칼을 찬 그는 공손하게 인사를 올리는 하인들 사이를 무표정하게 지나 이 거대한 종가를 가로질러 걸었다.

죽은 아버지 제롬이 그랬듯이, 그도 항상 몸에서 무기를 놓지 않는 전형적인 무골이었고 뛰어난 무장이었다. 동시에 법조 명가인 라자루스 가 출신 법률가 어머니의 엄한 교육 덕분에 치밀하고 빈틈없는 감각을 갖춘 행정가로 자라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빈틈없는 처신도 항상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칼릴 주둔군에서는 네가 안 왔다더군.”

피곤한 얼굴로 집무실에 막 들어선 세데스를 기다리고 있는 건 차갑게 쏘아붙이는 여자 목소리였다. 표정이 확 굳어진 세데스가 짜증스레 눈을 흘겼다.

“제가 지금 몇 살인지 알고는 계시나요?”

“100살이 넘어가도 내 딸네미지.”

집무실 안쪽의 큰 제후 의자에 앉아 있던 검은 피부의 미녀가 원피스 치맛자락 사이로 드러난 길고 늘씬한 다리를 반대편으로 휙 꼬고 앉으며 냉큼 대답했다.

“거짓말을 했으니 한 소리 듣는 건 당연한 거고.”

“100년을 돌보며 키우셨어도 가문 종장은 접니다.”

세데스는 가문 문장인 주작이 크게 수놓인 거대한 태피스트리에 삐딱하게 기대어 서며 피식 웃어보였다.

“앉아계신 그 자리도 제 것이고요.”

“누구 덕택에 여기 앉았는데?”

제후 자리에 앉아있던 여자, 오르테 라자루스 부인이 딸의 말대꾸에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어떤 놈을 만났는지 말 안 하는 걸 보니 별 볼 일은 없는 놈팽이인가보군.”

오르테 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책상 위에 놓인 서류들을 직접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제후인 제가 그런 것까지 다 눈치를 보아야 하나요?”

세데스는 어머니가 치우던 서류들을 슬쩍 빼앗아들며 씨익 웃음을 지었다. 그런 딸의 눈을 힐끔 올려보았던 오르테 부인은 섭섭한 내색을 애써 감추며 한쪽의 소파로 향했다. 세데스가 그런 어머니에게 계속 말을 이었다.

“저만 탓하지 마시고 어머니도 홀몸 된지 30년이나 되었으니…….”

“다른 지역 남자 만나 재혼해서 좀 떠나 달라고?”

딸의 의도를 일찌감치 눈치 챈 오르테 부인이 씨익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네 아버지 죽고 완전히 빼앗길 뻔했던 권력하고 영지를 30년 동안 힘겹게 싸워 지켜냈으니 나도 여길 얼마간 즐길 권리 정도는 있지 않겠니? 응?”

어머니의 기이한 눈웃음에 난처해진 세데스가 괜스레 헛기침을 했다.

오르테의 말대로, 아버지 제롬이 죽은 후 이 모녀의 위치는 한동안 말 그대로 풍전등화 신세였다. 당시 제롬의 유일한 후계자인 세데스는 열 살 꼬마였고, 가문에는 새 종장 자리를 노리는 세력가 원로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그들 중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수우는 다행히 처를 따라 사교로 개종해 제 복을 스스로 걷어차 버렸지만 그 다음 차례로 제롬의 숙부였던 마누엘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오시안트의 마지막 전투에서 황실에 포로로 잡혔던 마누엘은 ‘생각지도 않게’ 일찍 풀려나 가문에 복귀했고, 어린 종손녀 세데스의 후계권을 가장 크게 위협하는 세력으로 홀연 등장했다.

남편과 아버지를 잃은 오르테 모녀는 그 단순한 성격의 원로 무장에게 자칫 권력과 후계자 지위를 모두 빼앗길 뻔했지만 오르테가 ‘약간의 편법을 동원해’ 마누엘과 연정(聯政)을 결성하는 과감한 결단으로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결국 세데스가 남극성당을 졸업해 성인으로 인정받을 때까지, 이 모녀는 목숨까지 위협하는 살얼음판 같은 가문 내 정쟁 속에서 어렵게 위치를 유지해 올 수 있었다. 세데스가 지금처럼 살아남아 ‘제후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원로들과 악착같이 맞서며 딸의 위치를 지켜낸 어머니 오르테 덕분이었다.

“당장 결혼해 떠나시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건 원치도 않고요.”

세데스가 어머니에게서 ‘빼앗은’ 서류들을 서랍에 넣고 냉큼 잠가버리며 말했다.

“진심이라면 정말 다행이구나.”

오르테가 소파에 걸터앉으며 딸에게 다시 씨익 웃었다.

“나도 이젠 고향 황제령보다 여기가 익숙하거든.”

“언제는 무뚝뚝한 남부 남자들은 지긋지긋하다면서요.”

세데스가 눈을 흘겼다.

“후훗.”

오르테도 딸의 말 속에 ‘다른 지역 남자하고 결혼해 좀 떠나라.’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뻔뻔스레 웃으며 다시 다리를 꼬고 앉았다.

“제국에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또 있던가?”

“어머니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뜻밖이네요.”

세데스가 어머니와 남부 사이에 담을 또 한 층 덧쌓았다. 재혼 이야기에도 나름대로 침착하던 오르테는 자신의 정체성까지 위협당하는 지경에 오자 비로소 얼굴을 붉히기 시작했다.

“나도 이제 남부 사람이야.”

오르테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실상 그의 출신과 혈통은 남부에 세력을 쌓는 데 지금껏 계속 걸림돌이었다. 그의 출신가문인 황제령 라자루스 가는 개혁파 성향의 법률가, 행정가 가문답게 황실에만 충성을 바치기로 유명했다. 게다가 오르테는 모계와 부계 모두 다른 지역 피라고는 거의 섞이지 않은 보기 드문 순혈의 황제령 사람이었다.

“남부 사람들이 어머니를 그리 안 봐 주니 문제죠.”

세데스가 어머니의 가슴에 일부러 대못을 박았다. 사실 오르테는 항상 남부 옷만 입고 억양도 남부 식으로 바꿔가며, 심지어 여러 정치 현안에서 황실 법무대신 어머니와 숱한 충돌까지 감수해 가며 철저히 시가인 남부 편에 서려 애를 쓰고 있었다.

그렇지만 황실 법무대신인 아리아노 경의 장녀라는 사실이 황실에 내심 적개심을 지닌 델루지 가 사람들에게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전쟁에서 황실에 패하고 2등 지역으로 전락해버린 남부 사람들의 무너진 자존심은 딸을 위해 가문과 고향까지 버린 이 억척스런 가문 종부를 아직까지도 진짜 남부 사람으로 받아들여주지 않고 있었다.

“네가 남부 피를 받은 정식 제후라는 게 이렇게 멋대로 싸돌아다니며 몸을 아무렇게나 굴려도 된다는 뜻은 아니야.”

딸의 말장난에 휩쓸려 자칫 주제를 놓칠 뻔했던 오르테가 얼른 내용을 처음 것으로 돌려놓았다. 어머니가 생각대로 반응하지 않자 세데스가 헛기침을 하며 얼른 표정을 가다듬고 제후 자리에 앉았다.

오르테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런 그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차라리 여러 남자를 결혼해 들이는 건 몰라도 아무나 만나고 다니는 건 네 정적들에게 괜히 공격할 빌미만 줄 뿐이지. 아직 가문에는 네 적이 남아있으니 현명하게 처신해라. 기왕 만나려면 제대로 된 남자 만나고.”

“…….”

“그래, 젊은 혈기에 당장은 이 어미의 존재가 부담스럽고 훼방꾼 같겠지. 하지만 걱정 마라. 어차피 난 때가 되면 네게 권력을 다 넘겨주고 물러날 테니까. 네가 다른 남부 정적들처럼 날 황제령 앞잡이라고 몰아붙이면서 철없이 악담을 퍼부어도…… 어쨌든 내 피를 받은 귀한 외동딸이니까.”

세데스가 자신을 응시하는 어머니의 까만 눈동자를 빤히 올려보았다. 그는 난데없이 모정을 듬뿍 드러내는 그의 시선에서 내심 불안함을 느꼈다. 그리고 이런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려면 결혼부터 해야지? 명색이 제후인데.”

오르테가 씨익 웃음을 지은 순간, 세데스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가문에서 네 지위를 확고하게 하려면 하루라도 빨리 결혼해서 자녀들을 여럿 둬야 해.”

“전 이제 겨우 40살이라고요.”

세데스가 짜증스레 대답했다.

“당장 하라는 건 아냐. 든든한 가문과 약혼이라도 해 두면 아무도 널 못 건드릴 거다.”

세데스가 얼굴을 찡그렸지만 달리 반박할 말이 없었다. 30년 동안 가문 원로들과의 정쟁에서 딸을 지키는 데 모든 것을 쏟아 부었던 어머니 오르테 입장에서 결혼을 통한 동맹은 이제 당연히 꺼낼 수순의 카드였다.

“부마 예르마크 경 같은 참하고 가정적인 성격에 ……생긴 거하고 머리는 그 아들 리쿠 학장 정도 되는 남자라면 한 번 생각해 보죠.”

세데스가 짐짓 태연한 표정으로 장난스레 대꾸했지만 어머니가 꺼내든 카드는 그보다 훨씬 충격적이었다.

“어쩌면 그보다 더 나을지도 몰라.”

“예?”

“내 레곤 대공주하고 네 외할머니한테 주페 태자하고 네 중매 좀 서 달라고 얘기해 놨다.”

‘태자’라는 말에 순간 세데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태, 태자요? 지금 태자라고 하셨나요? 황제 둘째아들?”

“응, 주페 카파키 리쿠 태자. 왜? 놀랐냐?”

오르테는 집무실 한쪽에 있던 홍차를 손수 우려내며 여유만만하게 대답했다.

“맙소사, 그놈은 겨우 열 살 조금 넘긴 꼬마라고요!”

“너하고 고작 30살 남짓밖에 차이 안 나. 약혼만 하고 몇 년 기다리면 웬만큼 어른 노릇 할 거다. 황실이 뒤숭숭하니 분위기도 일신할 겸 대공주가 적당한 타이밍 잡아 황제한테 올리겠다고 하더군.”

오르테는 갓 우려낸 홍차를 홀짝 들이키며 잔뜩 놀란 딸에게 다시 미소를 보냈다.

“그 녀석 크고 나선 아직 못 봤지? 내 지난번 황실 모임에서 보니 성격도 좋고 의젓하더라. 황제 닮아 이목구비 시원시원하니 생긴 것도 네 소원대로 학장 못지않던걸. 아직 좀 어려도 제대로 될 놈이 분명해. 제후들 죄다 탐내는 기색이 역력하더군.”

“그래 봤자 꼬마라고요! 제후들 탐내는 건 장태자가 골골하니 황천 문턱 드나들어서 그렇지 어디 그놈이 잘나서인가요?”

“괜히 삐딱하게 굴지 마라. 혹시 아니? 네가 장태자비가 될지. 너도 만나보면 분명 맘에 들 거다. 다들 침 질질 흘리니 빨리 선점하는 게 중요해.”

오르테가 씨익 웃었지만 세데스는 기대는 고사하고 온몸에 소름이 쫙 돋는 느낌이었다.

“꼴 보기 싫은 황실 놈하고는…….”

“네가 요즘 의도적으로 황실 심사를 건드려 보고 있는 건 나도 알아. 이번 기근 이용해서 황실에서 큰 거 얻어내려 하는 것도 알고.”

오르테가 딸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내 충고 하나 하마. 이제와 황실하고 대립해서 좋을 건 없어. 어쨌든 우리가 아랫사람이니 먼저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는 게 순리고 좋은 선택이야. 황제가 잔혹하기는 해도 말 잘 듣는 아랫사람한테는 너그럽거든. 저런 사람한테는 쓸데없이 자존심이니 원한 따지느니 먼저 고개를 숙이는 편이 도리어 얻어내는 게 많지.”

“은근히 황제 편 드시네요? 그리고 제가 사사건건 황실과 부딪치는 건 쩨쩨하게 옛날 원한 때문은 아니라고요.”

세데스의 말에 잔뜩 가시가 돋아 있었지만 이번만은 오르테도 순순히 넘어가 주지 않았다.

“남들이 이 어미를 황제령 샌님라고 부르건 말건, 네게, 그리고 가문에 이득이 된다면 괜히 눈치 보면서 피할 생각은 없다. 황실과 혼인을 맺는 건 황제에게도, 우리에게도 장기적으로 분명 좋은 선택이야.”

오르테가 마지막 말에 잔뜩 힘을 주었다.

“서부와 동부의 기근 때문에 우리에겐 쥔 카드가 많아. 내 가문 비축곡물을 무상 지원하는 조건으로 황실에 청혼하겠다고 대공주한테 편지 보냈다.”

“제후인 저한테는 한 마디 상의도 없었잖아요!”

흥분한 세데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지금 말하잖니.”

오르테 부인은 흥분한 딸에게 여유만만하게 손을 저으며 문가로 향했다.

“다시 말하지만, 100살이 넘어도 넌 내 딸네미야. 네 혼인에 대한 결정권은 내게 있다는 걸 잊지 마라. 세데스 태자빈, 아니, 미리 장태자비라고 해 줄까.”

그는 부들부들 떨고 있는 세데스를 뒤로 하고 집무실을 나섰다. 집무실에 혼자 남은 세데스는 이를 갈며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The Iron Vein 개인지 구매사이트 : http://vein.zio.to/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