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798화 (793/1,132)

< -- 798 회: [3부] 파트1. 인동초 향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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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리프 카파키의 일지 3

놀라운 일이다. 세 명의 어른 생존자들이 우리가 임시 본부로 삼은 ‘판지셰르 마을’에 제 발로 찾아왔다. 부부(혹은 연인?)로 보이는 20세 내외의 젊은 남녀와 30세 정도의 남자 한 명이다. 얼굴이 많이 닮은 것을 보아 남자 둘은 형제지간이 아닌가 싶다.

놀랍게도, 이 셋 모두 기형도 아니고 정신도 온전해 보인다. 남자 둘은 멍이 들고 다친 흔적이 군데군데 보이지만 전체적으로는 건강한 것 같다. 바로 우리가 원했던 ‘첫 생존자들’이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고 차림새도 많이 누추하지만 그것만 빼면 우리와 전혀 다를 바가 없어 도리어 당혹스럽다.

단 열흘도 살기 어려워 보이는 이런 저주받은 땅에 저렇게 온전한 생존자들이 몇 년이나 살아남아 있었다니, 신의 놀라운 축복을 받은 자들이 분명하다.

처음에는 이들도 겁에 질린 기색이 역력했지만 1구조단에서 따뜻한 식사와 옷가지를 내주고 말을 건네자 비로소 안심하는 기색을 보였다. 비록 뜻은 통하지 않아도 우리에게 해칠 의도가 없다는 것은 이해한 모양이다.

다만 무언가 이상하다. 지난번 붙잡은 소년은 대화까지도 가능했는데, 왜 이자들은 어른인데도 몸짓을 빼면 거의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것일까? 이들은 전혀 폭력적이지도 않고, 탐사기계의 그림을 보여줬는데도 전혀 모른다는 반응을 보였다. 특별한 이상은 없지만, 그렇다고 이런 험악한 환경에서 살아남을 만큼 대단한 능력을 지닌 것도 아닌 것 같다.

이들이 그때 그 소년과 과연 같은 집단이 맞는 것인지, 우리 뒤를 쫓아오고, 심지어 탐사기계까지 훔쳐간 그 무리가 과연 맞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코메트들이 ‘조사’를 한다며 이 사람들을 또다시 데려갔다. 지난번 소년도 매질로 죽여 놓은 저 무뢰배들이 또 사고를 치지 않을지 걱정이 되지만 위에서 내려온 명령이니 다른 도리가 없다.

제발 이번엔 쓸데없는 짓으로 신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기를, ‘구조단’이라는 이름을 달고 온 우리들이 더 이상 창피함을 느낄 일이 생기지 않기만 바랄 뿐이다. 제발.

이마 387년, 드르바스파의 달, 26일.

제5구조단 서기, 트라카의 선택을 받은 자, 모간 타리프 카파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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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무렵 코메트 5백여 명이 갑자기 어딘가로 출동했다. 무언가 큰 작전을 벌이려는 것 같지만 무슨 이유엔지 우리에게는 ‘금세 돌아올 것이다.’라는 것 외에는 내용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기대에 차 잔뜩 들뜬 모습들이었지만 우리가 다가가 물을라 치면 바로 눈짓을 나누며 피해버렸다.

총단장도 구조단을 무시하는 저들의 전횡을 못 봐주겠다며 무척 격앙되어 있다. 저들이 며칠 전 투항한 생존자들을 데리고 간 것을 보아 무언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동료의 말에 따르자면 그들은 싫다고 저항하는 그 생존자들을 무기로 위협해 앞세우고 산악지대로 줄줄이 향했다고 한다.

저 세 명의 다른 동료들을 찾는 것이거나, 혹은 이곳을 떠난 생존자들을 뒤쫓는 것이라면(어쩌면 그 둘이 같은 의미인지도 모르지만) 당연히 구조단인 우리가 동행을 해야 하지만 그들은 우리에게까지 따라오지 말라며 위협을 가했다. 대체 무슨 속셈인지, 말도 안 통하는 저 생존자들에게서 무슨 정보를 얻어낸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이 떠나고 난 이 판지셰르 마을은 소름끼칠 만큼 고요하다. 마치 폭풍전야 같다. 혐오스런 작자들이지만, 저들에게 무언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엄습을 해 온다.

신이여, 비록 마음의 눈도 뜨지 못한 봉사들일지언정, 부디 누군가의 아들이며 아버지인 저들을 저주로부터 지켜 주시옵소서.

이마 387년, 드르바스파의 달, 30일, 저녁.

제5구조단 서기, 트라카의 선택을 받은 자, 모간 타리프 카파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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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은 항상 예상한 대로 찾아온다. 이 말밖에는 달리 형언할 수가 없다.

우리가 이곳 생존자가 아닌 코메트의 무뢰배들을 ‘구조’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이 좁고 가파른 골짜기(혹은 통로?)는 안을 가득 메운 지독한 탄내와 부상자들의 비명소리, 패닉에 빠진 생존 병사들의 울부짖음으로 아수라장이 따로 없다.

이 상황이 어찌된 것인지 설명을 해 줄 지휘관은 이미 시커먼 재와 뼛조각이 되어 말이 없다. 장교들은 죽었거나 중상을 입어 답이 없고, 온몸에 화상을 입고 이성을 잃은 사관들이 중얼거리는 넋두리는 더 어처구니가 없다.

‘불타는 용이 산꼭대기에서 골짜기를 타고 내려와 우리를 순식간에 먹어버렸다.’

단장은 산 자의 헛소리 속에서 어렵게 실마리를 찾아냈다. 직선으로 길게 뻗은 이 좁은 통로는 높이 100척(30m)에 달하는 수직 절벽으로 양쪽이 막혀 있고 폭은 5척(1.5m) 정도에 불과하다.

이 좁은 길을 따라 2열의 종대로 길게 전진하던 병사들은 위에서 갑자기 쏟아진 불벼락을 맞은 것 같다. 양쪽 절벽까지 온통 그을린 것을 보아 미처 피할 곳도 없이 그 불꽃을 뒤집어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병사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그대로 타버렸으니 놀라 도망칠 시간조차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아직 조사 중이지만 결과는 끔찍하다. 제일 앞에서 나아가던 선봉 중대와 지휘부 100여명은 사람인지 알아보기도 힘들 만큼 타 버렸다. 중간께의 100여명도 즉사했지만 신원을 알아볼 수 있는 시체라도 건질 수 있었으니 그나마 운이 좋다고 할까.

제일 운이 없는 자들은 뒤에서 어설프게 불꽃을 뒤집어쓴 자들이다. 불에 타 몸부림치다가 죽은 자들, 전신화상을 입은 채 구조단을 기다리다가 숨이 끊긴 자들, 치료를 받다가 죽은 자들이 140여명이나 된다. 비슷한 숫자가 응급치료를 받고 있지만 우리에겐 이 많은 중화상 환자들을 모두 치료할 약도, 장비도 없다.

이곳의 소수 생존자를 구하러 온 우리들이 이 많은 화상 환자를 떠안게 될 줄 누가 짐작이나 했단 말인가.

본토에 긴급 의약품과 의료용 프리깃을 요청했지만 언제 올지는 알 수가 없다. 본토에서 이곳까지 워프루트가 없으니 답변이 그곳까지 가려면 며칠은 기다려야 할 테고, 그곳에서 바로 물자와 프리깃을 보낸다 해도 이곳에 도착하려면 한 달이 넘게 걸릴 거다.

울부짖는 환자들 앞에서 차마 말하지 못했지만, 오늘의 부상자들이 그때까지 살아 버티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리고 이들이 억지로 데려갔던 3명의 이곳 생존자들도 지휘부 장교단의 잿더미 사이에서 찾아낼 수 있었다. 새카맣게 탄 그들의 모습은 이제 우리 군인들과 다를 게 없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들을 죄고 있는 쇠사슬이 이 불운한 생존자들의 처했던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쇠사슬마저 녹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고열 속에서 우리는 엄지손가락 한 마디만한 작은 쇳조각 하나를 찾아냈다. 한쪽 면은 오팔이 박혀 있고, 반대편은 솜씨 없는 석공이 정으로 마구 쪼아놓은 것 같은 울퉁불퉁한 면이 있는 금속 조각이다. (그런데 오팔은 열에 약한 보석 아니었던가?)

위치로 보아 남자 생존자 중 한 명이 갖고 있던 것 같다. 용도는 알 수 없지만, 그 정체불명의 조각도 일단 다른 유품들과 함께 챙겨놓았다.

그런데 이 코메트의 쓰레기 같은 놈들이 대체 무슨 속셈으로 이들을 끌고 여기까지 왔는지, 성직자로서 분노가 치밀어 참을 수가 없다.

수많은 시체들, 아니 잿더미와 악취 사이에서, 지금 나도 미치기 일보 직전이다.

신이시여, 이 종이 이 끔찍한 지옥에서 대체 언제까지 버텨야 하옵니까.

부다 답을 주옵소서.

이마 387년, 에아의 달, 1일의 끔찍한 새벽.

서늘한 바람이 내리치는 판지셰르의 골짜기에서.

제5구조단 서기, 트라카의 선택을 받은 자, 모간 타리프 카파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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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 결과는 갈수록 우리를 소름끼치게 한다.

아직 가설이지만, 불길은 선봉에 서 있던 한 병사에게서 시작된 것 같다. 병사가 등에 지고 있던 화염방사기의 압축 기체연료에 무슨 이유엔지 불이 붙어 폭발하면서 시작되었고, 화염은 희한하게도 통로의 오르막 방향이 아닌 내리막 방향으로 급속히 번지지 않았나 싶다.

발화점 일대, 그리고 그 아래쪽의 통로, 그 양쪽 벽까지도 온통 재만 남았다. 반면 떼죽음당한 병사들이 당초 가려 했던 통로 위쪽 오르막은 그을음조차 없고 놀랄 만큼 깨끗하다.

그렇지만 아무도 그곳의 땅을 밟으려 하지 않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파괴 정도로 보아 불꽃은 좁은 통로를 타고 초속140척(초속42m/시속151km) 이상의 엄청난 속도로 순식간에 아래로 번져나간 것 같다. 여기에 후미 부대의 화염방사기병 연료통까지 연쇄폭발을 일으키며 병사들의 증언 그대로, ‘불타는 용의 아가리처럼’ 병사들을 순식간에 집어삼켜 버렸다.

.......우리는 망연자실한 코메트 지휘관에게 이렇게 설명했고, 그도 그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모든 설명이 허점투성이라는 것은 우리 구조단 학자들은 모두 잘 안다. 그저 다른 설명 방법이 없어 아무도 입을 열지 않을 뿐이다.

왜 화염이 통로 위쪽도, 하늘로도 아닌, 오직 통로 아래로만 번졌는지도 이해가 되지 않고, 화염방사기에는 안전장치가 있어 그렇게 갑작스럽고 빠른 연쇄폭발이 불가능하다 것도 고려되지 않았다.

아무 것도 확실치는 않다. 증거가 되어야 할 연료통들은 모두 폭발해 조각조각나 버렸고, 증인이 될 발화점 부근의 병사들은 말 그대로 증발해 버렸다.

그렇지만 불길은 분명 병사들을 정확히 노리고 덮쳤다. 그것도 거의 태풍을 능가하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이젠 탄내도, 악취도 모두 익숙해져 느껴지지도 않지만 빨리 이곳을 떠나고만 싶다.

점점 이성을 잃어가는 것 같다.

이마 387년, 에아의 달, 1일, 자포자기한 저녁.

침묵만 감도는 판지셰르의 골짜기에서.

제5구조단 서기, 트라카의 선택을 받은 자, 모간 타리프 카파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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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골짜기’로 알았던 이 곧고 좁은 통로는 알고 보니 자연 지형이 아니었다. 오래된 먼지와 이끼, 먼 옛날 죽은 나무와 덩굴을 벗겨 낸 그 안쪽은 누군가 인공적으로 세운 거대한 옹벽이었다.

이 골짜기, 아니 통로는 기준고도 40스타디아(6,000m)가 넘는 정상에서 판지셰르 마을이 있는 분지로 이어지는 깊이 100척의 거대한 인공 수로(?)였던 것 같다.

물론 수로라는 것도 가설에 불과하다. 수로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저지대의 우물이나 저수지도 없고, 다른 강과 연결되지도 않았다. 5백의 목숨을 삼켜버린 이 끔찍한 인공 통로의 용도가 무엇인지, 아직은 모든 것이 미스터리다.

조금씩 이성을 찾으면서, 우리 구조단 일행은 코메트들이 20대가 넘는 화염방사기를 가져갔다는 것을 비로소 미심쩍게 여기기 시작했다. 화염방사기는 미개척지를 돌파할 때 우리도 종종 사용했지만 비상시를 고려해도 두세 대면 충분했다. 이 흉물은 위험한데다가 연료와 소모부품까지 포함하면 딸린 보급품이 많아 이렇게 수십 대를 가져가는 건 분명 바보짓이다.

그런데 한때 치안군에 있었다는 한 보안요원이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을 말해 주었다. 이 요원은 ‘5백의 병력에서 이 정도 개수의 화염방사기면 토벌작전에 투입될 때의 기준이다’이라는 말로 우리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저들이 정말 생존자 토벌작전을 나섰다가 저 꼴을 당한 것일까?

생존자들은 우리를 공격하지도 않았고, 고작해야 탐사기계 몇 대를 훔쳐간 것이 의심될 뿐이다. 그런데 뭣 하러 무시무시한 화염방사기까지 수십 대를 들고 수백의 병력이 비무장의 생존자들을 토벌하러 간단 말인가. 왜?

이마 387년, 에아의 달, 2일, 여전히 무거운 아침.

정체모를 터널 속에서의 이틀째.

제5구조단 서기, 트라카의 선택을 받은 자, 모간 타리프 카파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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