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800화 (795/1,132)

< -- 800 회: [3부] 파트1. 인동초 향기 -- >

.

.

.

“내 이번에 오르마즈 경의 묘를 파헤칠 참이네.”

황제를 보며 실실거리던 베흔의 어깨가 확 움츠러들었다.

“예……에?”

“오르마즈 경의 관을 열 참이라고. 그 양반 시체가 자네 말대로 정말 거기에 있나 없나.”

카렐이 놀란 토끼 같은 베흔의 얼굴을 보며 씨익 웃었다.

“나한테 뭐 할 말 없나?”

베흔이 여전히 눈을 크게 뜬 채 더듬거렸다.

“아, 아니 거긴 북부의 성지라서 훼손하면 난리가…….”

“알아, 그러니까 지금까지 안, 아니 못 건드리고 참았지.”

카렐이 베흔보다 더 능글하게 웃었다.

“카파키 가 종장인 어머니가 그 양반 묘를 건드리는 걸 동의하지 않아서 차마 못했지만 이젠 안 되겠어.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이젠 내가 살아야겠거든. 혹시 할 말 없나?”

“그, 으, 오르마즈 그 양반이 죽기 전에 앓던 병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이미 관련된 자료는 죄다…….”

카렐은 베흔의 얼굴이 절반 사색이 된 것을 빤히 보면서도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관 뚜껑을 열고 상태를 보는 것만 하겠나? 내 삽 들고 여기 있는 루스탐 데리고 가서 밤에 몰래 묘를 파헤칠 참이라네.”

“예에?”

베흔이 눈앞이 캄캄해졌는지 고개를 숙이며 이마를 짚었다. 카렐이 그런 베흔에게 다시 웃으며 물었다.

“자아, 내게 할 말 있으면 더 늦기 전에 지금 하게나. 명색이 황제가 도굴꾼이 되어서 한밤중에 죽어라 삽질하고 허탈감에 몸을 떠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말이야.”

“그, 으, 오르마즈 경의 관은……비어 있습니다.”

“그건 알아.”

카렐이 굳은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대답했다.

“그 양반 시체가 없어진 게 정확히 언제, 어디였지?”

베흔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오르마즈 경의 시체는 북부파견군 사령부에서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투 끝나고 보름 정도 지난 무렵에 3제후 카산드라 경이 밤중에 와서는 제발 용서해 달라고 싹싹 빌지 뭡니까. 알고 보니 파견군 의무대에서 보관 중이던 시체를 몰래 훔쳐갔었다고 실토하더군요.”

황제의 표정이 점점 진지해져가는 것을 확인한 베흔이 목소리를 더 낮추고 대답했다.

“그 며칠 전에 호지 가 수하들이 시체를 훔쳐 자기네 의무대로 가져가려 했던 것 같습니다. 티 안 나는 일반 차량에 싣고 가다가 누군가에게 습격을 당해 빼앗겼다고 하더군요.”

“그 말은 누군가 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것 같군?”

“그랬던 것 같습니다. 카산드라 경도 자긴 이용당했을 뿐이라고 강변하는데 그때는 저도 눈이 뒤집어져서 소리만 질렀지 변명을 제대로 못 들었습니다.”

“이용당했다? 누구한테?”

“모르겠습니다. 시체를 훔쳐냈던 자들 중 일부가 도둑들과 한패거리였던 모양입니다. 그놈들이 동료들을 배신하고 시체와 함께 도망갔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범인을 찾아내기도 쉬웠을 것 같은데?”

카렐이 눈을 더 크게 부릅뜨고 묻자 베흔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물론 그랬을 것 같습니다. 카산드라 경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고요. 그래서 처음 제게 실토했을 때는 시체를 최대한 빨리 되찾아오겠다고 약속했지만…….”

“그런데?”

“한 달쯤 후에 다시 와서는 자기 힘으로는 안 된다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습니다. 무슨 이유엔지 파랗게 질려 있었습니다. 말은 안 했지만 누군가에게 무시무시한 위협을 당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추궁해도 입을 안 열더군요.”

“황제의 고모인 남부 3제후가 천하의 근위대장 앞에서도 겁먹어서 제대로 얘기를 못 할 만큼 무서운 자였다?”

“그래서 저희 근위대가 나서서 따로 조사를 했습니다.”

베흔이 갑자기 가슴을 펴며 생색을 냈다.

“조사해 보니 시체 도둑을 추적하던 호지 가 요원이 황도의 한 호텔에서 8토막이 난 채로 발견되었더군요. 그 동료는 옆방에서 개한테 절반이 먹힌 채로 발견되었고 말입니다.”

“카산드라 경이 고작 그 정도에 겁먹을 사람은 아니었을 텐데.”

표독스럽고 야무졌던 3제후 카산드라 호지 경을 떠올리며 카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황제의 의문에 베흔이 적당한 설명을 덧붙였다.

“그런데 그 요원의 살점을 먹던 개가 문제였죠.”

“개?”

“카산드라 경이 키우던 사냥개였답니다. 그 개도 내장을 드러낸 채로 죽어있었죠.”

“그게 왜?”

카렐이 눈을 찡그렸다.

“잠잘 때 항상 침대머리에 매놓고 자던 개였는데 그 일이 있기 며칠 전에 자고 일어나 보니 감쪽같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줄은 예리한 칼로 잘려 있었고 말입니다. 아마 일어났을 때 카산드라 경도 서릿발에 맞은 느낌이었을 겁니다.”

순간 온몸이 오싹해진 카렐이 입가에 힘을 꽉 주었다.

“그러니까, 누군지는 몰라도 시체를 훔친 괴한이 제후의 잠자리까지 다녀갔다고?”

“경호원들은 누군가 다녀간 것도 모르고 있었으니 카산드라 경이 패닉에 빠져 혼비백산한 것도 당연하죠. 게다가 훈련된 사냥개가 사람 고기를 먹었다는 것도 이상하고요. 개에게 뭔가 이상한 짓을 했던 것 같습니다.”

“섬뜩한 경험이긴 하겠지만 범인도 모르면서 그저 겁먹어서 입을 다물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요원들을 죽였을 때 범인들이 그 자리에 힌트를 넌지시 남겨놓았던 모양입니다. 협박문을 남긴 건지, 뭐 다른 표시를 해 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때까지만 해도 오르마즈의……아니, 오르마즈 경의 시체를 찾으려고 나름대로 동분서주하던 카산드라 경이 공포에 반쯤 미쳐버렸고 말입니다.”

카렐이 턱을 똑똑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럼 카산드라 경이 하임달 후에 정신과 치료까지 받은 게 전투에서 당한 개망신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말 같군?”

“아마도 그럴 겁니다.”

“저어, 지하에서 아까부터 다들 기다리고 있습니다만.”

마치 ‘빨리 좀 가라’는 식의 베흔의 말에 카렐이 눈을 슬쩍 흘겼다.

“가지 말라고 잡아도 갈 테니 염려 말게나. 앞으로 내게 해 줄 말이 많을 거야.”

카렐은 한숨을 푹 내쉬는 베흔을 뒤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돌아올 테니 준비 해 두게나. 병사들 보고 싶으니.”

그는 식당을 나서서는 부대 중앙에 자리한 ‘의무실’로 향했다. 멀쩡한 부대 중앙에 지휘소도 아닌 의무실이 있는 것부터가 꽤나 기이한 배치였지만 카렐은 마치 이곳에 꽤 오랫동안 살던 사람처럼 아주 익숙하게 부대를 가로질러 의무실 문을 열었다.

의사 하나 없는 썰렁한 진료실을 지나 접어든 수술실에는 수술대 대신 지하로 이어지는 음산한 철제 계단이 놓여있었다. 계단을 타고 지하로 내려가 계단실 문을 열고 나간 순간, 허름한 바깥에서는 전혀 상상도 못 했던 지하 공간의 환한 조명이 눈을 찔렀다.

“어서 오십시오.”

그의 앞에는 거대한 지하 광장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광장을 중심으로 깨끗한 타일로 마무리된 복도가 수많은 방향으로 갈라져 있고, 각각에는 ‘병기부’, ‘생체정보부’, ‘의학부’ 같은 이런저런 표시가 붙어 있었다.

“준비 끝내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광장 중간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이곳 책임자로 있는 자그룰라 모렌 박사와 보안국장 사에나의 익숙한 모습이었다.

“이 외진 구석에서 일하고 있느라 수고 많았네.”

카렐은 간만에 마주한 자그룰라 모렌 박사를 품에 다정하게 안아주었다.

“이번 일만 끝나면 다시 세상에 멋지게 복귀할 수 있게 될 테니 조금만 참아주게나.”

“이렇게 매번 격려를 받을 수 있다면 출혈열로 죽은 실험실 귀신으로 남아도 괜찮은데 말입니다.”

모렌 박사가 깔깔대고 웃으며 황제의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 바깥세상에서는 이미 죽은 것으로 알려진 그도 이곳 ‘시라즈 연구소’에서는 여전히 수장으로 건재하게 살아 있었다.

“가시죠.”

카렐은 이 둘을 따라 ‘생체정보부’라고 쓰인 방향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견고한 철문을 몇 번이나 지나 복도 마지막 문을 열고 성큼 들어섰다.

“지난번 셔틀에서 발견된 근위대 병사 변사체입니다.”

카렐은 이미 부검을 한 흔적이 있는 2구의 남녀 시체에 다가갔다. 둘 다 머리와 목에 치명상을 입었고, 남자는 무릎 아래가 잘려 당장 떨어져나갈 듯 말 듯 너덜거리고 있지만 다른 큰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한때는 근위대였지만 이젠 아닙니다.”

모렌 박사가 시체들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끝이 뭉툭한 고속의 물체에 급소가 관통되었습니다. 보시다시피 상처가 상당히 크고 주변부 피해도 큽니다. 목이 아니고 몸통이었어도 즉사했을 겁니다.”

“팔다리에 맞아도 과다출혈로 죽을 수 있고.”

황제의 말에 사에나가 눈을 힐끔 움직여 카렐의 목덜미를 쳐다보았다.

“훗, 나도 가까스로 피할 정도였으니……일반인은 절대 못 피했겠지.”

카렐은 목덜미의 상처를 무심코 더듬었다.

“어디서 죽었는지는 아직 못 밝혔고?”

“이자들의 신발과 바지에서 다량의 산화철 성분 토양이 발견되었습니다. 셔틀이 들른 지역의 토양과 비교 분석해 보니 바하칼리 카나트 시 부근에 있는 ‘붉은 사막’이 가장 유사한 것 같습니다.”

“바하칼리의 붉은 사막? 보석 광산이 많은 곳 아니던가?”

“그렇습니다. 셔틀이 보석류를 픽업하던 중이었으니까요. 북부에서 3번째로 큰 보석 산지입니다. 이 둘의 신발 바닥 잔여물 중에 갱도 공사에 사용하는 약품이 다량 검출되었습니다.”

“그럼 이 둘이 광부였다고?”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곳은 외부 환경이 열악해서 거주민의 대부분은 광업 컴플렉스의 종사자들뿐입니다. 그런데 먹었던 음식이나 몸 상태를 보아 열악한 환경에서 혹독한 노동을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관리직이었거나, 광부였다고 해도 시설이 상당히 좋은 대형 광산 중 하나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둘 다 기혼자라고 하지 않았나? 광부든 관리직이든 살아 있었다면 남은 가족들과 한두 번이라도 연락을 했을 텐데?”

“가족들과의 연락도 전혀 없었습니다. 이 남자의 딸들은 다른 가정에 입양되었고, 이 여자의 남편은 자식을 데리고 재혼했습니다.”

“대체 뭐야.”

카렐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문제는 저 무기로군. 광부였는지 관리직이었는지 몰라도 저 무기를 어쩌다 맞았는지를 알아야 하는데. 어느 광산인지는 짐작이 가나?”

“시체에서 나온 정보는 그 정도가 전부입니다. 그런데 붉은 사막의 대형 광산인 57번 컴플렉스에서 작은 소동이 있어서 주목하고 있습니다.”

“소동?”

카렐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그쪽에 생필품을 공급하던 업자가 노상강도에게 피살을 당했는데, 그 뒤로 다른 외부 업자와 계약을 하지 않고 외부인의 출입을 일체 금지한 모양입니다. 바하칼리의 컴플렉스에 물품 공급을 독점하는 운송조합과 마찰이 벌어져서 시끄러운 상태입니다.”

“업자가 죽고 갑자기 외부인 출입 금지라……구린내가 난다고 생각한 게 나뿐인가?”

카렐이 턱을 똑똑 두드리며 사에나를 돌아보았다. 사에나가 회심의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아시겠지만 오지의 광산 컴플렉스는 외부에서 주기적으로 공급하는 식량과 물자로 엄격한 공동생활을 합니다. 외부인이 접근하는 방법은 공급업자 아니면 직접 광부가 되는 것뿐입니다. 다행히 코나가 이전에 광부였던 일이 있어서 조사를 시켜놓았습니다.”

“부탁 하나 있는데, 코나 그 친구하고 좀 만나야겠어. 내 먼발치에서라도 그곳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으니.”

황제가 직접 간다는 말에 사에나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폐하께서요? 굳이 그러실 필요가 있습니까. 코나 시켜서 광산 내부사정을 조사하면 될 일입니다. 그 광산의 배후에 정말 사교가 있다면 이곳을 폐쇄해 돈줄을 끊으면 될 일입니다.”

사에나의 반응에 카렐이 눈살을 살짝 찡그렸다.

“3만의 근위대를 사교가 데려간 것이라면 어쩌려고 그러나? 거기에 정말 근위대원이 있었다면 고작 광산 하나의 문제가 아냐.”

카렐은 이 방의 구석에 있는 커튼을 확 걷었다. 가는 눈으로 노려보는 그의 앞에는 지난 제위 전쟁 때 베흔의 손에 죽은 ‘쌍둥이 베흔’, 그리고 전투 과정에서 어렵게 얻어낸 수십 구의 이런저런 헤네티 시체들이 가지런히 놓인 유리 표본병 안에 죽 놓여 있었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 부분, 그 어디보다 단단히 자물쇠가 채워진 투명한 캐비넷 안에는 13선지자의 묘 지하에서 눈까지 멀어가며 어렵게 꺼내 왔던 8개의 캡슐 상자가 새로운 라벨을 달고 차곡차곡 놓여 있었다.

“그네들의 기술력과 정보력이 정말 우리보다 앞서가고 있다면……아찔하지 않나.”

카렐은 한때 수천 개의 세포들이 보관되어 있었던 그 오래된 상자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이 친구들이 제대로 커 줬어야 하는데.”

그때, 카렐의 할룩스에서 익숙한 베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사열 준비 끝났습니다.”

“알았다. 지금 올라간다. 내 목소리를 방송에 연결시켜라.”

카렐은 위생복을 벗고 방을 성큼 나서서는 처음 계단을 내려왔을 때 들어섰던 지하 광장으로 향했다. 그 사이, 하얀 조명을 제외하면 텅텅 비어있던 이 ‘지하 궁전’은 조금 전의 그 풍경이 아니었다. 사방으로 거미줄처럼 연결된 이 ‘시라즈 지하 별궁’의 각 부서를 상징하는 동굴 입구 앞에는 검은 친위대 제복 차림의 수많은 연구원들, 유난히 젊어 보이는 건장한 병사들―거의 황제와 체격이 맞먹는―이 부동자세로 서서 황제를 향해 턱을 바싹 쳐들고 있었다.

++++++++++++++++++++++++++++++++++++++++++++

800회까지 그동안의 관심 캄사합니다~

이곳까지 함께 와 주신 독자분들 한 번씩 생존확인 겸 출석체크 해 주세요~~

추천까지 찍어주시면 연말에 대박나실 겁니다. ^^

* 이 글의 출판본이 조아라 프리미엄에서  연재중입니다.

출판본을 원하시는 분들께선 프리미엄을 이용해 주시면 됩니다.

프리미엄은 10회까지는 무료입니다. ^^

뷰어 왼쪽의 [작품]에 보시면

혈맥 The Iron Vein [출판본] - 제1부 : 세상의 중심으로

링크가 있습니다. ^^

* 2011년 9월부터 전자책 서비스도 시작되었습니다. 전자책도 물론 무삭제 출판본 기준이고 표나 삽화, 부록 등이 함께 들어있고, 기간제한없이 영구적으로 소장하고 볼 수 있습니다. 9월 말 현재 4권까지 올라 있고 1달 단위로 2~4권씩 업데이트 예정입니다. (일부 권은 성인용입니다.)

전자책은 유페이퍼(http://www.upaper.net/kiltie), 예스24, 알라딘, 영풍문고, 반디앤루니스, 리브로에서 구입 가능합니다. ['vein' 혹은 '혈맥' 으로 검색하시면 될 겁니다.]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The Iron Vein 개인지 구매사이트 : http://www.vein.pe.kr/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