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01 회: [3부] 파트1. 인동초 향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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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황제가 오른 후, 중앙 군제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병부대신 제네르가 이끄는 ‘황실군’은 이전의 근위대 보병부대, 동맹군 북부보병대, 슈로 기사단, 슬레이프니르, 아메샤 스펜타, 에키트 보병대 같은 시민 출신 군 조직이 통합되어 거의 30만에 달하는 명실상부 황실의 주력 군사조직이 되어 있었다.
한편 이전의 근위대 가디언여단과 일부 특수목적 부대들은 ‘황제 친위대’라는 이름으로 재편되어 황제의 직속 조직으로 만들어졌다. 지금 이 [시라즈 여단]도 명목상 친위대 예하의 특수부대였지만 서류에는 수베르에 주둔하는 의무(醫務)여단으로만 등재되어 있었다.
“오랜만이다, 시라즈의 제군들.”
연구원들 사이에 군데군데 섞여 있던 검은 군복 차림의 건장한 젊은 청년들이 고개를 들고 가슴 앞에 각자의 무기를 붙였다. 그들의 우람한 가슴에는 부대를 상징하는 날개 달린 사자 모양의 은빛 문장이 반짝이고 있었다.
“내 없는 동안 늠름하게 자라 주었구나.”
할룩스를 입에 댄 카렐은 우두커니 서서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대신, 보폭이 큰 걸음으로 그들 사이를 성큼성큼 걸어 나아가며 우렁찬 목소리로 이 넓은 지하 별궁, 그리고 부대가 위치한 지상을 쩌렁쩌렁 울렸다.
“약속했던 대로 다시 돌아왔다. 이젠 그때 같은 10대 소년들이 아니니 세상에 나아가 싸울 영광을 주마.”
수많은 연구원들, 요원들 중간을 가로지른 카렐은 조금 전 내려왔던 음침한 계단실을 다시 걸어 오르며 큰 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난번처럼 적의 정확한 정체도, 수단도 아직 모른다. 전쟁을 일으키려는 것인지, 아니면 지난번처럼 바이러스로 산 제물을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더 악독한 어떤 수단을 사용할지 알 수 없다.”
계단실을 나선 카렐은 여전히 텅텅 비어 있는 ‘진료실’을 지나 뜨거운 사막 햇볕이 내리쪼이는 연병장에 나섰다.
“이제, 그대들과 짐은 운명을 같이한다.”
카렐이 연병장을 내려다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처음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 나온 것이었지만 그의 앞에 펼쳐져 있는 풍경은 처음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는 연병장에 자로 잰 듯 도열해 있는 1천의 병사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황제와 베흔 못지않은 이 거구의 전사들은 마치 자로 잰 듯 똑같은 키, 거의 비슷한 모습들이었다.
그리고 베흔과 함께 이 여단을 이끌고 있는 1제대장 타크마, 2제대장 힐러―7년 전 출혈열로 죽은 것으로 되어 있는―를 비롯한 간부 가디언들이 그들 앞에서 황제를 올려보고 있었다.
“전에는 죄다 앳된 얼굴들이더니, 그새 많이 성숙했군. 이제 25살들인가? 가르쳐 보니 어떤가? 베흔 여단장.”
이 자리에서 제일 ‘불량한’ 자세로 있던 베흔이 냉큼 대답했다.
“체력과 전투력만으로는 분명 기존의 가디언을 능가합니다. 성격들이 단순하고 복종적이지만 일반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날 만큼 큰 성격상의 결함은 없는 것 같습니다. 지난 전쟁에서 제가 만났던 그 똑같은 놈은 의도적으로 그렇게 키운 것 같고요.”
카렐은 자신이 지하에 있는 새, 지상의 연병장에 감쪽같이 모여 자로 잰 듯 도열해 있는 [시라즈 여단] 병사들, 아니 5세대 헤네티들을 죽 둘러보며 다시 물었다.
“어떤가? 죽었던 그대의 5세대 동기들 유전자가 다시 태어나 자라는 걸 본 느낌이.”
“제가 저 비슷한 괴물 같던 놈 잡아내고 시체를 거둔 덕분 아닙니까. 그게 아니었으면 이놈들을 제대로 합성하는 방법을 못 찾았을 겁니다.”
“하여간, 여기서도 생색을 안 내면 입에 가시가 돋치나.”
카렐은 여전히 생색을 내는 베흔의 말을 코웃음으로 넘겨버렸다.
“눈까지 멀어가면서 그 지하에서 이놈들 유전자 캡슐을 꺼내 온 건 바로 나라네. 응? 안 그런가?”
또다시 자기의 옛 잘못이 드러나자 베흔이 슬쩍 눈을 흘겼지만 어쨌든 이번에도 자기 무덤을 판 꼴이었다.
이들. [시라즈 여단] 병사들은 황제가 ‘13선지자의 묘’ 지하에서 꺼내 온 8천여 개의 캡슐―지금은 이곳 지하에 보관되어 있는― 중 합성에 성공한 1천여 명의 ‘신형 헤네티들’ 이었다. 베흔의 말대로, 사오시안트 항구에서 그가 목숨을 걸고 잡아냈던 ‘쌍둥이 베흔’의 시체를 이용해 어렵게 얻어 낸 결과물들이었다.
베흔은 표정 없는 얼굴로 황제를 올려보고 있는 그들 1천명을 하나하나 눈에 담아 보았다. 일부는 아는 얼굴―정확히는 아는 얼굴과 매우 흡사한―도 있었지만 이젠 기억에서 지워져버린 얼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가 기억하는 옛 동기들 중 누군가는 유쾌했고, 누군가는 말이 많았고, 누군가는 신경질적이기도 했지만 지금 이곳에 선 병사들에게는 옛 동기의 향기가 전혀 없었다.
“몸뚱이의 설계도는 비슷할지 몰라도 제 동기들은 분명 아닙니다.”
베흔이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내 그들이라고는 안 했네.”
황제도 바로 그의 말을 긍정했다. 그리고는 또다시 팔을 들어 짧은 손짓을 보냈다. 황제의 명령을 받은 그들은 대답 한 마디 없이, 구령 하나 없이 사방으로 쫙 흩어지며 각자의 위치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새, 부대는 다시 쥐죽은 듯 고요함만 남았고 지상의 연병장은 평소와 똑같은 모습으로 순식간에 돌아갔다. 5세대의 젊은 헤네티들로 만들어진 [황실 친위대 시라즈 특무여단]만의 특별한 모습이었다.
“뭐라고요? 그걸 황실에 넘겼다고요?”
세데스의 연락을 받은 쿠베는 ‘잎마름병 방제법’을 황실에 넘겼다는 말에 파랗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 큰 테이블에서 혼자 저녁식사를 하고 있던 세데스는 격앙된 얼굴로 따져묻는 그에게 짜증스레 대꾸했다.
“어머니가 넘기셨으니 괜히 나한테 발끈하지 마. 이미 한판 붙었으니.”
욱한 쿠베가 다시 뭐라 하려 했지만 이미 벌겋게 달아올라 있는 그의 얼굴을 보아 더 신경질을 내 봤자 괜한 싸움만 날 듯 보였다.
쿠베가 성을 참으며 목소리를 애써 낮추었다.
“제가 연구소 족쳐서 그거 알아내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요. 그걸로 남부가 한몫 잡아보시라고 했더니만 고작 황실 좋은 일만 시켜주시면 어쩝니까.”
쿠베가 최대한 순화시킨 어투로 말하려 애썼지만 이미 신경이 곤두서 있던 세데스에게는 여전히 비수였다.
“그만 좀 하라니까.”
세데스가 포크를 내던지며 버럭 화를 냈다.
눈을 확 부릅떴던 세데스는 눈앞에 있던 이 건장한 남자가 무슨 이유엔지 옆을 힐끗거리는 것을 눈치 챘다.
“뭐야? 지금 누구하고 같이 있는 거야? 지금 어딨는데?”
세데스가 매섭게 눈을 흘겼다. 이 남자는 공장인지 연구소인지 알 수 없는, 웬 기계가 가득한 곳에 혼자 서서 서성거리는 중이었다.
“괜히 말 돌리지 마시고요.”
쿠베가 짜증을 내며 세데스의 공격을 넌지시 피해버렸다. 하지만 세데스도 지금 그런 것을 따질 만큼 여유가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나하고 주페 태자하고 약혼을 추진하는 것 같아. 그 청혼 선물로 줘 버렸으니.”
쿠베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려던 세데스는 그가 당혹스런 얼굴로 다시 옆을 힐끔거리는 것을 놓치고 말았다.
“화, 황족하고 결혼한다고요?”
더 놀란 쿠베가 말까지 더듬거렸다.
“뭐, 어머니 생각대로 진행되지는 않을 테지만.”
세데스가 나름대로 자신만만하게 대답했지만 여전히 쿠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는 못했다. 덕분에 이 남자가 연거푸 옆을 돌아보는 것도―그리고 누군가에게서 지시를 받는 것도― 알 수가 없었다.
“보아하니 대공주 그 뚱땡이가 앞장서서 추진하는 모양이야. 곧 대공주 생일모임 있는데 거기에 초청 형식으로 불러다놓고 나하고 자연스레 만나게 할 모양이던걸. 쳇, 만나서 뭐해, 열 살 꼬마 놈 생긴 거 빤하고 지가 머리통이 여물어 봤자지.”
“모임이요? 어디서요?”
쿠베가 갑자기 목소리에 잔뜩 힘을 주며 진지하게 물었다.
“알아서 뭐 하게. 와서 깽판이라도 치려고?”
세데스가 다시 눈을 흘겼다.
“설마요.”
쿠베가 짐짓 기분이 상한 척 눈가를 찡그렸지만 실제로는 그렇게까지 화난 표정은 아니었다.
“꼬맹이는 꼬맹이일 뿐인데 제가 뭣 하러요.”
“대공주 부계인 호지 가 쪽에서 생일 치러주겠다고 한 모양이야. 어쨌든 지금 내명부 밖 황족 중에서는 대공주가 제일 위계가 높으니까.”
세데스가 결국 입을 열었다.
“그럼 클리코브요?”
“호지 가 종가가 거기 있지 그럼 너희 뒤뜰에 있냐.”
세데스는 하인이 가져온 새 포크로 다시 식사를 개시하며 퉁명스레 대답했다.
옆에서 무언가 다시 눈짓을 받은 쿠베가 목소리를 낮추고 입을 열었다.
“그런 중요한 모임을 의미 없이 억지로 넘기지 마시고.”
“의미 없다니? 그 꼬마랑 찐하게 데이트라도 할까?”
세데스가 포크를 멈추고 쿠베에게 눈동자를 굴렸다. 쿠베를 잠시 쳐다보던 그는 옆에 있던 하인들에게 나가 있으라고 눈짓을 보냈다.
잠시 후, 자리에 혼자 남은 세데스가 다시 쿠베에게 눈길을 주었다.
“지금 말하려는 게 뭔데.”
“잎마름병 치료법은 이미 넘어갔으니 뭔가 황실을 압박할 수단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쿠베가 잠시 뜸을 들이며 세데스의 눈치를 보는 척했다. 세데스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본 쿠베가 사뭇 비장하게 한 마디 덧붙였다.
“경께서 정말로 그 꼬맹이를 남자로 보실 맘이 없다면요.”
자존심을 공격당한 세데스의 얼굴이 일순간 붉게 달아올랐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그럼 제게 그걸 보여 주시라고요. 저도 자존심이 있는 남자라고요.”
쿠베가 다시 반쯤 성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세데스도 만만하게 그의 말에 휩쓸리지는 않았다.
“이봐, 나도 널 좋아하기는 하지만 명색이 한 지역 제후야. 내가 남자 기분 풀어주려고 안 되는 사고를 칠 바보로 보여?”
“걱정 말아요. 꼬맹이 죽이는 바보짓 하라는 말이 아니니까요.”
그때, 밖에서 누군가 문을 열려고 하는 소리에 지레 놀란 세데스가 고개를 뒤로 휙 돌렸다. 바깥의 조짐에 놀란 세데스가 지금까지 켜 놓았던 할룩스를 서둘러 들고 말을 이었다.
“다시 연락할 테니까 나중에 봐. 어머니 오시는 것 같으니.”
“훗, 나한테도 다행이네.”
세데스와의 연락이 끊어지자 쿠베는 자신에게 계속 ‘대화 지도’를 해 주고 있던 사람 쪽을 다시 힐끔 쳐다보았다.
“따로 생각하신 내용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쿠베는 통화 내내 억지로 웃는 표정을 짓느라 잔뜩 경직되어버린 얼굴 근육을 풀며 이 공장―혹은 실험실―을 가로질러 걸었다. 공장 한쪽의 밀폐된 창 너머, 클린룸에서는 흰 위생복 차림의 직원들이 바삐 움직이며 불투명한 병에 든 무언가를 박스에 열심히 담는 중이었다.
“글쎄, 지금이라도 생각해야지.”
공장의 구석진 관리인 자리에 앉아있던 한 잘생긴 미남자가 잔 밑바닥에 남은 술을 훌쩍 비워버리며 냉담하게 대답했다.
“빌어먹을, 그 기술이 넘어갔으면 이 공장도 이제 닫을 때가 다 된 건가. 하긴, 알 게 뭐야. 어차피 마지막 계획도 거의 완성되어 가고 있으니.”
허탈한 표정의 아스탈은 은빛의 반짝이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작은 소리로 투덜거렸다. 유리창 하나 없는 이 널찍한 공간은 안에만 있어서는 바깥이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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