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02 회: [3부] 파트1. 인동초 향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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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탈은 옆에 서 있던 자그만 체구의 남자, 그리고 보통 체구에 마치 병자처럼 창백한 얼굴의 또 다른 여자를 향해 바로 지시를 내렸다.
“질질 끌지 말고 여기서는 철수 준비 해야겠다. 꼬리 길게 안 남기려면 뭐든지 결단이 빨라야지.”
아스탈이 델루지 가 관련 자료들을 뒤적거리며 말을 이었다.
“멍청한 델루지 가 놈들 생각 외로 속 썩이는군. 오르테 그년이 너무 실리적이라 영 거슬려. 뭐, 나한테는 그렇지만 테번 그 새끼 며느리 하나는 정말 잘 얻어놓고 갔군.”
아스탈이 남부에 회의적인 모습을 보이자 일순간 창백해진 쿠베가 그 남자에게 ‘뭐라고 말 좀 해 봐’라며 힐끔 눈짓을 주었다.
“그렇게까지 서두르실 일 있겠습니까.”
쿠베의 눈짓을 받은 남자가 주군의 술잔을 슬쩍 옆으로 치워내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쿠베가 근위대장이었던 때 수족이었던 쿠마르 우펠루는 지난 전쟁에서 아리아노에게, 그리고 자이납에게 연거푸 죽음을 당했지만 이제 다시 얻은 새 몸으로 세상에 서 있었다.
“기술을 얻었다고 해도 하루아침에 기근에서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이미 오염된 경작지 갈아엎고 토양까지 모두 방제해서 새로 소출을 얻으려면 아무리 빨라도 1년은 더 걸립니다. 저네들이 조금 빨리 수습한다고 해도 크게 나빠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때까지는 물론이고 장기적으로도 델루지 가의 효용가치는 충분합니다.”
“그네들이 쓸모없다는 건 아냐. 이번 건의 약발이 다 되어간다는 거지.”
쿠마르의 설득에 납득당한 것인지 아닌지, 아스탈은 재차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책상 위에 있던 낡은 노트를 집었다. 표지가 완전히 닳아 이젠 너덜너덜해진 노트였지만 소중한 문화재처럼 투명한 필름이 꼼꼼히 씌워져 있었고 도난을 막기 위한 보안 태그까지 붙어 있었다.
“지금껏 델루지 가처럼 우리에게 쓸모 있는 가문이 또 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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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리프 카파키의 일지 - 4
불길이 휩쓴 판지셰르 골짜기에서 시신을 모두 거두고 녹초가 되어 돌아온 우리 앞에는 믿기 어려운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지난번 돌연변이 소년에게 피살당한 동료의 시신을 거두기 위해 어젯밤 본토에서 특별 사절이 도착해 있었다.
그런데 말단 탐사단원의 시신을 거두기 위해 온 사절단 수장이 스루바라 교단 5신관이고 델루지 가 후계자인 샤카드 델루지였다고!!! 허, 내 참. 그 정도의 고위 신관이 본토에서 1달이나 날아와서 이 저주받은 땅에 납셨다니?
사절단은 16명이나 되고, 3명의 성직자와 델루지 가 수행원을 빼면 대부분 스루바라 마구스 하렘에 있던 내관들이다. 그리고 여기에 교단 중앙본부의 특별 장의사까지 동행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대체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모두 의아해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최소한 처음에는 말이다.
하지만 잠시 후, 스루바라 교단 출신 성직자 친구의 한 마디에서 우리는 바로 해답을 얻었다.
[그 친구는 우리 교단 간택자도 아니었는데? 이마에 조각은 고사하고 흉터만…….]
말을 하던 그 친구가 지레 놀라 입을 다물었고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 ‘맙소사, 우리 중간에 계셨다니.’라며 탄식을 했을 뿐 그 뒤로 우리 사이에는 꽤 오래 침묵이 감돌았다.
그렇다면, 코메트들이 그 많은 화염방사기를 들고 토벌작전을 떠난 것이 스루바라 신의 다음 현신을 죽인 데 대한 피의 앙갚음이었다는 말인가?……아니, 그런 높은 뜻을 가지고 떠난 무리가 저런 처참한 꼴을 당했을 리가 없다.
그리고 지난번은 미치광이 소년이 저지른 사고였을 뿐, 집단 모두를 태워 죽이는 복수를 할 만한 사건은 절대 아니었다. 그가 평범한 의학교 조교수가 아니고 정말 스루바라 마구스의 후계자였다 할지라도 그건 옳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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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모르겠다. 명색이 성직자인 내가 얄팍한 도덕관념으로 지도부의 결정을 나무라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모르겠다.
이마 387년, 에아의 달, 4일.
판지셰르 마을
제5구조단 서기, 트라카의 선택을 받은 자, 모간 타리프 카파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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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만에 써 보는 일지일까.
정체불명의 화재(?)사건이 있고 20일 가까이가 지났다. 지금까지 일지를 쓰고픈 맘이 전혀 없었을 만큼 마을의 분위기는 침울하다 못해 살벌했다. 구성원의 1/4이 순식간에 타 죽은 상황에서 사람들은 말을 줄였고, 걸핏하면 사방에서 이런저런 주먹다짐과 말싸움이 빈번했다.
불에 탄 5백 중 지금까지 버틴 생존자는 10명이 채 되지 않는다. 죽은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들이 일찍 세상을 떠나 더 이상 의약품을 낭비하지 않은 것이 소수의 생존자들에게는 차라리 축복이었다. 어쩌면 이들 중 몇은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설상가상으로 이곳 공기도 심상치 않다. 우리가 처음 이곳 ‘판지셰르 낙원’에 왔을 무렵만 해도 간간히 햇볕이 들기도 했고, 정화장치가 없이도 충분히 숨을 쉴 수 있을 정도였다. 본토처럼 화창한 날씨까지는 아니어도 회색빛 옅은 안개 속에서 육안만으로도 별 문제 없이 외출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젠 이곳도 이전의 ‘낙원’이 아니다. 이 저주받은 땅의 다른 곳들처럼 검은 먼지가 짙어지기 시작했고, 안개 사이로 가끔 보이던 햇살도 사라져 버렸다. 대낮에도 랜턴을 켜야 앞이 보이는 날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우리가 오고 나서 무언가 큰 변화가 생긴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죽은 자들의 망령은 여전히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그 많은 시체들을 보관할 곳이(그리고 보존용 약품도) 없다는 사실이다. 본토에서 새 물자와 시체 보관용 관을 실은 프리깃이 와 주려면 아직 한참이 남았고, 그 많은 시체들을 온전히 보존하는 건 불가능하다.
코메트 시체들의 처지는 점점 처량해져갔다. 위패와 함께 마을 중앙의 회관에 모아두었던 시체들은 악취를 견딜 수 없다는 사람들의 불평에 외곽의 한 창고로, 그리고 나중에는 멀리 떨어진 황무지에 내버려졌고, 종국에는 아예 땅 속에 묻어버려야 했다.
(생명이 사라진 이곳에도 시체를 부패시키는 혐오스런 세균은 여전히 남아 있었나보다.)
이번 사건으로 직위해제당한 코메트 부대장은 보급 프리깃 편에 고향으로 돌아갈 참이다. 하지만 억울해 하거나 침울해 있기는 고사하고 빨리 본토에 돌아갈 수 있다며 내심 반색하는 눈치다.
마을에 남은 1천5백의 코메트 부대원들도 모두 의욕을 잃은 눈치다. 임무완수는 포기한지 오래고, 본토에서 일제 철수명령이라도 오지 않을까 하고 고대하는 기미가 역력하다.
나도 마찬가지다. 아내 시린의 잔주름진 얼굴과 잔소리가 그립고, 개구쟁이 두 아들도 보고 싶다. 말썽꾼 빌루이와 겁 많은 구다르즈가 매일 밤 울면서 아빠를 찾던 버릇까지 잊은 건 아니겠지?
젠장, 이 저주받은 황무지에서 이게 무슨 꼴이람. (빌어먹을, 이 따위 곳에 누가 뒈지건 말건 내가 알 게 뭐야!!!)
이마 387년, 에아의 달, 25일
아직 시체 썩은내가 다 가시지 않은 마을회관에서.
제5구조단 서기, 트라카의 선택을 받은 자, 모간 타리프 카파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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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메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지난번 도착한 스루바라 교단 일행이 단순히 마구스 후계자의 시신만 수습하러 온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책임자인 샤카드 델루지 신관은 시신만 거두어 곧 되돌아갔지만 장남인 테번이라는 젊은이는 무슨 생각인지 이곳에 그대로 남았다. 사실인지 아닌지 몰라도, 저 청년이 코메트 주둔군의 새 지휘관이 될 것이라는 소문도 있다.
(구조단 총단장이 요즘 부쩍 내 눈치를 보는 것이 그 때문일까?)
콜로니 양대 가문 후계자 둘이 이곳에 함께 있다는 사실을 놓고 사람들의 이런저런 구설수가 오가는 것도 같다. 세상물정 모르는(혹은 둘의 마찰을 염려하는?) 동료들은 ‘저 20살 핏덩어리가?’라며 웃어넘기라고 한다.
그렇지만 저 청년의 할아버지는 델루지 가 종장이고, 동시에 세속 제일의 권력자인 콜로니연합 의장 하다르 델루지다. 가문의 공식 후계자인 아버지 샤카드 델루지 신관의 입지가 건재한 이상, 가문 장손인 저 청년은 델루지 가의 다음 후계자라고 봐도 무방하다.
나보다 20살 가까이 어린 저 풋내기를 의식하는 게 우스운 행동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수백 년간 고위 신관 명단에 2, 3명이 넘는 이름을 항상 올려놓는 가문이 거저 세워지는 건 아니다. 델루지 정도의 명문가에서는 10대 이전에 정치에 눈을 떠야 하고 20살이면 사람 다루는 법을 이미 깨쳤어야 할 나이다.
사람들은 명문가에서의 출생을 그저 행운으로만 알지만 어릴 때부터 맞닥뜨려야 하는 형제, 친척들과의 보이지 않는 전쟁은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자신을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알력을 피해야 살아남을 수 있고, 그 와중에 종장의 신임까지 얻어 후계자로 자리를 잡아야 한다.
명문가의 장남 혹은 장녀가 목숨을 잃지 않고 몸 혹은 정신이 성한 상태로 16세의 성년을 맞는 게 채 절반도 못 된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기는 할까? 태어날 때 몇 번째 자식이었건, 저 정도까지 무사히 성장해 가문 지도부의 신뢰를 얻는 건 빼어난 정치적 재능이 없다면 절대 불가능하다.
내 알기로 저 청년은 이미 후계자의 엘리트코스를 밟는 중이고 큰 문턱은 넘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이 먼 곳까지 데려와 놔두고 떠났다면 무언가 큰 임무를 맡겼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 칭찬하고 싶지는 않은 관계이지만, 그 청년은 호리호리하고 큰 키에 단단한 무골인 데다가 코메트 장교들과의 대련에서 한 번도 지지 않을 만큼 싸움에도 능하다. 다혈질인 것이 흠이지만 말주변과 사교성도 좋아 남자라면 모두가 저 청년을 좋아하는 것 같다. 너무 어린 나이만 빼면 코메트 부대장감으로 손색이 없는 인물인 건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내 보기에, 상황에 따라 미묘하게 돌변하는 저 청년의 눈빛과 말투 속에는 무언가 다른 인격이 하나 더 숨어있는 것 같다. (절대 편견 때문에 그리 보이는 게 아니다!)
아직 저자의 능력을 본 건 아니지만 언젠가는 내게(혹은 내 후계자가 될 장남 빌루이에게) 위험천만한 적수가 될 것 같다는 불안감이 든다. 저자가 정말 마수를 감추고 있는 새끼호랑이인지, 아니면 이 저주받은 땅에서 그저 불편한 동행자 정도로 머물지 아직은 모르겠다.
신이여, 부디 이 저주받은 땅에서 제게 평온함을 유지할 수 있는 너그러움을, 남편, 아버지 없이 지내는 고향의 미천한 식솔들에게는 용기와 은총을 주옵소서.
이마 387년, 에아의 달, 29일
제5구조단 서기, 트라카의 선택을 받은 자, 모간 타리프 카파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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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올 것이 온 것일까.
신년 모임에서 테번 델루지가 코메트의 새 부대장으로 전격 발표되었다. 우리 구조단은 물론이고 고작 20살의 청년이 뭘 하겠냐며 반신반의했던 코메트 장교들도 모두 경악을 했지만 그 청년은 자하크 대신관님의 서명이 분명히 되어 있는 임명장을 내보이며 그간 설마설마했던 사람들 모두를 바보로 만들었다.
사실 우리를 기가 막히게 한 건 그자가 새 부대장이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자의 임명장은 전신으로 온 복사본이 아니고 원본이었다. 그렇다면 본토에서 출발할 때(그러니까 화재 사건이 있기도 전에) 이미 저 임명장을 받아 놓았었다는 말이고, 전임 부대장은 지난 전과에 관계없이 어차피 해임될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저 청년은 지금껏 그 사실을 감쪽같이 숨긴 채 이곳 사람들과 태연히 (침울해 있던 전임 부대장과는 태연히 술을 마시고 위로와 격려까지 해 가면서) 마주했다는 말이다. 기가 막힌 노릇이다.
그런데 내게도 난데없이 구조단 총단장이라는 직위와 우리 교단 제10신관이라는 영전이 주어졌다. 5구조단 서기에 불과한 내가 갑자기 5개 구조단 전체의 총 책임자라니???
표면적으로는 내가 생존 소년의 메모를 분석해 이 ‘판지셰르’의 위치를 알아낸 공로 때문이라고 하지만 우스운 핑계일 뿐이다. 나이도 많고, 경쟁 가문 후계자인 내가 새파랗게 어린 델루지 가 후계자의 명령을 들어야 하는 상황을 염려한 정치적인 판단이 분명하다.
문제는 이 일로 학자집단인 구조단과 무장조직 코메트가 전보다 더 서먹해질 것 같다는 사실이다. 우리 구조단과 코메트 사이의 알력이 괜스레 두 가문의 갈등, 아니 하마타와 하마피타 사이의 마찰로 번질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을 감출 수가 없다. 내가 이번 승진(?)을 도저히 기뻐할 수 없는 이유다.
이곳에서 무언가 큰 일이,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큰 일이 이곳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새해 벽두부터 나를 괴롭힌다.
이마 388년, 새해를 맞이하는 티시트리야의 달, 1일
구조단 총단장 (어딘지 어색하다.)
트라카의 선택을 받은 자, 마스모간 타리프 카파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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