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804화 (799/1,132)

< -- 804 회: [3부] 파트2. 작은 여신의 무지개빛 눈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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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작업은 아직 멀었나?”

클린룸 실험실 해체 작업을 확인하러 온 아스탈은 반쯤 난장판처럼 되어 있는 현장을 지켜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실험실이 있던 자리는 한창 해체 중에 있는 크고 작은 기자재와 약품들, 자료들로 정신이 없는 분위기였다.

“하루라도 빨리 끝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번 작업을 지휘하던 쿠마르는 아스탈의 재촉에 걱정스레 대답했다.

“해체는 내일이나 모레면 끝납니다만 장비들의 덩치가 커서 옮기는 게 문제입니다. 대형 수송선을 동원하면 빨리 옮길 수 있겠지만 치안군 검문에 걸릴 가능성이 높아서 어쩔 수 없이 조각조각내어 셔틀로 여러 번 옮겨야 안전합니다. 게다가 워낙에 정밀한 장비라서 적어도 7, 8일은 계속 셔틀을 돌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제기랄.”

아스탈이 낯을 찡그렸다.

“마지막 남은 건 어떡할까요?”

쿠마르와 함께 작업을 지휘하던 ‘창백한 얼굴의 여자’가 구석에 쌓여 있는 수백 개의 병을 가리키며 아스탈에게 물었다. 실험실이 있던 자리 구석에는 어른 주먹만한 크기의 불투명한 병 수백 개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어차피 오래 보관하기도 어려운 물건이니 하루라도 빨리 써 버리는 게 낫습니다.”

“황실에서 방제작업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한 번 마지막 불꽃을 피워 주는 것도 나쁘지 않지.”

이런저런 궁리를 하던 아스탈은 한쪽의 두꺼운 철문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휙 돌렸다. 허리춤에 긴 막대 모양의 ‘무기’를 찬 그 다부진 사내는 지난번 이곳에서 도망치던 근위대 출신 노무자 2명을 사냥했던 바로 그 ‘용역’이었다.

“무슨 일이냐, 나딘.”

아랫사람들에게 냉담한 아스탈이 이 사내에게는 웃음까지 지으며 아는 척을 했다. 보통 키, 다부진 몸매에 유난히 큰 눈을 반짝이는 그 미남자는 아스탈에게 경의를 표하며 침착하게 말했다.

“바깥이 좀 시끄럽습니다.”

“어차피 전부터 그랬잖아?”

아스탈은 실험실 자리 한쪽에 아직까지 켜져 있는 보안 모니터에 다가갔다. 그리고 그곳에 나오는 화면을 보며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뭐냐, 더 늘어난 거냐?”

“운송조합 놈들이 말을 영 듣지 않습니다. 조합 소속 차량을 계속 이용해 주지 않으면 지금처럼 교대로 계속 시위를 벌이겠다고 협박하고 있습니다.”

“제길,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든 건가…….”

아스탈은 당혹감과 짜증이 뒤섞인 표정으로 입가에 계속 욕을 뇌까렸다. ‘나딘’이라는 청년이 입술을 씰룩거리며 말을 이었다.

“바하칼리 내 도매업자들도 운송조합에 밉보이면 사업이 위태로워지니 우리에게 생필품 판매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행성계에서 생필품을 구매해 들여오는 건 너무 비효율적입니다. 차라리 보안을 강화하고 못이기는 척 요구를 들어주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아스탈의 곁에서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던 ‘창백한 얼굴의 여자’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아스탈이 이곳에 있는 내내 그의 곁을 지키고는 있었지만 주변 사람들이 의아해할 정도로 웬만해서는 입을 열지 않는 여자였다.

“일이 커져서 주변의 이목을 끄는 것도 현명치 못합니다. 보안 강화하려다가 도리어 역효과만 나게 되었으니 차라리 이전처럼 돌아가고 내부 보안만 강화하는 편이…….”

“닥쳐, 이디나.”

나딘이 바로 정색을 하며 그 여자의 말에 반박을 했다.

“이곳을 해체하는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 운영비 몇 푼 아끼려다 더 큰 것을 잃고 싶나.”

가뜩이나 창백한 그 여자의 얼굴은 나딘의 공격에 일순간 격앙되었는지 확 붉어졌다.

“비용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계약해지를 하면서 이 정도도 예상을 못한 건 아니시겠죠? 자칫 일이 커지면 대체 누가 책임을…….”

“뭐야?”

나딘이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그만.”

아스탈이 둘 사이의 다툼에 재빨리 끼어들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옆에 있는 쿠마르에게 비키라고 눈짓을 보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재빨리 파악한 그는 다른 아랫사람들까지 모두 데리고 재빨리 자리를 비워주었다.

“나딘, 이디나.”

사람들이 모두 자리를 비켜주자마자, 아스탈이 그 두 젊은이들을 향해 번갈아 눈을 흘겼다. 단단한 체구에 부리부리한 인상의 미남자 ‘나딘’, 그리고 마른 몸에 파리한 인상, 미인이라기는 어려운 외모의 ‘이디나’가 잠시 서로의 눈빛을 확인했다.

“내 다른 사람 있는 앞에서는 서로 각을 세우지 말라고 경고하지 않았더냐.”

아스탈의 목소리는 낮고 침착했지만 그의 눈빛과 표정은 당장이라도 그 둘을 때려잡을 듯 위협적이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오라버니.”

이디나가 재빨리 먼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나딘은 입술에 힘을 꽉 준 채 그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나딘.”

아스탈이 눈을 흘기자 나딘이 그제야 고개를 숙이며 마지못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언성을 높여서.”

“내가 후계자 선정이라도 할 줄로 알고 신경전을 벌이는 거냐?”

아스탈의 직접적인 한 마디에 그 둘이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움찔거렸다.

“태어나면 영원히 사는 세상에 내가 미쳤다고 후계자 선정 따위를 하나?”

아스탈이 눈을 무섭게 부릅뜨고 그 둘을 다시 번갈아 쏘아보았다.

“다시 말하지만, 너희 둘 다 순수하지 못한 피가 섞인 부적격자고 감히 현신의 지위를 넘볼 핏줄이 아니다. 내가 제거하지 않고 살려두는 것만도 은혜라고 여겨라. 무슨 말인지 알겠냐?”

아스탈이 그들의 가슴에 분명하게 못을 박았다. 아버지의 무서운 힐책에 나딘의 표정은 바싹 경직되었지만 이디나는 억지로나마 미소까지 지으며 다시 머리를 숙였다.

“물론이옵니다. 미천한 제게 몸과 생명을 주신 은혜만으로도 감사하옵니다.”

분위기를 파악하고 바로 꼬리를 내려버리는 이디나와는 달리 나딘은 여전히 뻣뻣했다.

‘이놈이?’

아들 나딘을 노려보며 아스탈이 다시 입가를 씰룩거렸다. 타고난 영민함과 단호한 성격, 잘생긴 외모까지 빼닮은 덕분에 자식들 중 그가 가장 아꼈지만 그것이 문제였다. 아버지의 신뢰를 아는데다가 워낙 자존심이 강하다보니 일단 고집을 세운 일에서는 절대 물러서는 법이 없는 강골이었고 ‘적당한’ 잔혹함까지 갖추고 있다보니 한편으로는 무슨 사고라도 치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번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명을 주십시오.”

나딘은 사과를 스리슬쩍 넘겨버리고는 주제를 이번 일로 돌리려 했다.

‘망할 놈.’

내심 아들의 사죄를 기대했던 아스탈의 속이 확 끓어올랐지만 누이동생 이디나 앞에서 오빠를 대놓고 나무라는 것도 좋은 선택은 아니라고 일단 결정을 내렸다. 비록 맘에 안 드는 면은 있을지언정 자존심도, 추진력도 없어 보이는 허약한 딸보다 종종 속을 썩여도 나름대로 강단 있는 아들이 그의 뇌리에는 훨씬 더 크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가 아직 20대밖에 되지 않은 아들에게 이 중요한 컴플렉스의 ‘보안부장’이라는 요직을 준 것도 그런 믿음 때문이었다.

그에 비하면 고작 광부들 급여나 계산하고 공동주택 관리하는 것 같은 궂은 일만 온통 도맡은 ‘총무과장’ 이디나의 위치는 오빠에 비해 훨씬 위축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딘 넌 나중에 따로 얘기 좀 하자. 그리고 이번 건은 그냥…….”

그가 아들을 편들어서 막 입을 열려는 순간, 방금 나갔던 쿠마르가 당혹스런 표정으로 들어와 헛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냐, 방금 나가 있으라고 했잖나.”

아스탈이 발끈하며 소리를 질렀다.

“흐, 흠, 송구하옵니다. 그게……지금 꼭 알려드려야 할 급한 일 같아서 결례를 무릅쓰고 들어왔사옵니다.”

“뭐길래.”

아스탈이 짜증스런 표정을 있는 대로 내며 눈을 흘겼다.

“이곳 영주인 노에누스 가 산업부에서 연락입니다. 제후의 특별지시로 당국에서 이번 사태의 진상조사에 나서겠다는 공문이 왔습니다.”

“뭐, 뭐?”

놀란 아스탈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 게을러터진 놈들이 이 정도 분쟁에 뭣 하러 끼어들어?”

아스탈이 버럭 화를 냈다. 북부 제후가는 컴플렉스나 조합 사이의 분쟁이나 이권다툼에는 어지간해서는 잘 관여를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곳에서 사업가로 나름 뼈가 굵은 아스탈은 이런 제후가의 반응이 믿어지지 않는 듯 귀를 후비고는 쿠마르에게 다시 물었다.

“정말이냐? 조합 놈들이 흘린 소문이 아니고?”

“예, 노에누스 가 쪽에서 방금 공문이 내려왔습니다. 기근으로 분위기가 뒤숭숭하다보니 작은 소요사태에도 제후들이 굉장히 예민해져 있는 것 같습니다. 내일 아침에 운송조합 대표들과 제후가 감사관들이 함께 이곳을 방문해 실사를 하고 중재모임을 갖겠다고 합니다.”

“내일 아침? 여기서? 여기로 온다고?”

당혹스러운 얼굴로 이곳의 생산시설을 황급히 둘러보았던 아스탈은 바로 조금 전, 이런 상황을 예측했던 총무과장 이디나의 반응을 슬쩍 확인했다. 눈치껏 감추고는 있지만 오빠를 노려보는 그의 눈길에는 ‘그것 봐라.’라는 식의 의기양양함이 감춰져 있었다.

속이 확 끓어오른 아스탈도 강경론자 나딘을 나무라고 싶었지만 실상 조금 전까지도 그 역시도 ‘저 운송조합 새끼들 제 발로 물러날 때까지 버티고 밀어붙여.’라고 말할 참이었다.

“잘못하면 아주 악수를 놓을 뻔했군.”

망신을 당할 뻔했던 아스탈이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럼 지금이라도 저 조합 놈들 원하는 대로 해 주면?”

“어떻게 처리되든 관청 실사단과 중재단이 우리 쪽을 방문해 관련 내용들을 보고받겠다고 하니 관리들이 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제기랄. 내일 아침이면……10시간도 안 남았잖아.”

아스탈이 이를 드러내며 자리를 잠시 맴돌았다.

“이디나.”

급히 결정을 변경한 아스탈이 딸을 손짓했다.

“관리들하고 조합 놈들 응대하는 일은 네가 맡아라. 아직은 공권력과 대놓고 싸울 때는 아니니까 대충 뇌물 좀 찔러주고 조합하고 우리하고 알아서 처리하게 맡겨두는 쪽으로 결론을 유도해. 알았나?”

이 ‘중재모임’의 진짜 배후가 누군지 알 리 없는 아스탈은 평소 해 오던 해결법대로 일단 지시를 내렸다.

“알겠습니다.”

이디나가 아무 표정 없이 고개를 숙였지만 이 딸이 속으로는 내심 쾌재를 부르고 있으리라는 정도는 아스탈도 눈치를 채고 있었다. 하지만 당장은 그것보다 내일 이곳, 지금까지 그 어디보다 보안에 모든 공을 들여왔던 바로 이곳에 들이닥칠 제후가의 조사단이 더 큰 문제였다.

잠시 난처해졌던 나딘이 동생을 째려보았지만 당장은 그가 목소리를 높일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얼굴을 가다듬고는 아스탈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실사팀은 어쩌실 거죠?”

“괜찮아. 어차피 아주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광산이니까. 여기만 빼면.”

아스탈이 별 것 아니라며 손을 저었다.

“여기까지 들어오지는 않겠지만 혹시 모르니……이디나 네가 중재하면서 관리들한테 실사팀은 대충 처리해 달라고 말해. 알았나?”

“예.”

이디나는 평소처럼 나긋나긋한 음성으로 짧게 대답했다.

“나딘 넌 문 밖에 모여있는 저 시위대 놈들 더 사고 못 치게 계속 단속하고 있고.”

자존심 상한 나딘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결국 이번 일을 해결하는 실질적인 일은 이디나에게 넘어가 버렸고, 강경한 입장을 고수해 온 그의 역할은 고작 시위대 상대하는 고약한 일 정도만 남아버린 셈이었다.

“알겠습니다.”

나딘이 마지못해 개미만한 소리로 대답했다. 아스탈은 마지막으로 이곳의 수많은 기자재, 약품들을 둘러보았다.

“잘 해결되면 좋지만 아닐 수도 있으니 쿠마르 넌 이 시설물을 최대한 빨리 철수시켜. 관청에서 온 놈들이 철수 광경 못 보게 신경 쓰는 거 잊지 말고.”

짜증은 냈지만 아스탈도 이번 일이 크게 번지리라는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았다. 돈독 오른 북부 제후가는 세금만 제때 잘 바치면 무슨 짓을 해도 신경 안 쓰는 속물들이었고, 그의 실제 적인 황실은 아직 이곳은 냄새도 못 맡고 있었다.

그가 아는 한도 내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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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로 2009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 (제가 소설 연재한지 몇년째죠?? ^^)

이 글을 보시는 시점이 언제인지 몰라도,2009년을 밝히는 오늘은 영하 10도에 육박하는 굉장히 추운 날입니다. 날은 추워도 해가 쨍쨍하니 맑은 것이 전형적인 혹한의 아침이네요.

(어쩌면 이 편을 처음 보시는 어떤 분께선 찌는 한여름날 선풍기나 에어컨을 켜 놓고 땀을 뻘뻘 흘리고 계실지도 모르지요. ^^)

이 글을 보시는 해가 몇년도, 언제일지 몰라도 제 글을 사랑해 주시는 모든 분들께 크나큰 행운이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이런 타임캡슐같은 글을 남기는 것도 몇 년을 줄곧 연재한 저만의 특권이라면 특권입니다. ^^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The Iron Vein 개인지 구매사이트 : http://vein.zi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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