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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805화 (800/1,132)

< -- 805 회: [3부] 파트2. 작은 여신의 무지개빛 눈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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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리프 카파키의 일지 - 5

본토에서 보낸 보급 프리깃이 오늘에야 비로소 도착했다. (무엇보다 반가운) 보급물자가 다시 채워졌고, 죽은 만큼의 병사들이 다시 충원되었고, 마을 주변에 묻혀 모두를 뒤숭숭하게 만들던 그 많은 시체들도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가매장된 시체를 도로 파내던 우리는 시체 썩은 물을 머금은 토양에서 막 자라기 시작한 이름 모를 식물의 싹과 곰팡이를 발견했다. 완전히 죽은 줄 알았던 이곳의 깊은 땅속에 아직 생명의 기운이 살아 있었다는 사실에 구조단 학자들이 모두 놀라고 반가와 했다.

하지만 코메트들은 우리가 채 샘플을 채취하기도 전에 그 젖은 땅에 화염방사기를 무차별적으로 쏘아 불을 지르고 완전히 태워버렸다.

이들의 이상한 행동이 단순히 동료들의 시체를 딛고 자라는 생명에 심사가 불편해져서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들은 처음부터 이 상황을 예상했던 것처럼 화염방사기를 가져왔고, 시체가 묻은 곳 일대의 토양을 모조리 태우고 제초제와 독한 소독약을 뿌려 막 되살아나려는 땅을 완전히 죽여 버렸다.

정확히는 몰라도, 본토에서 이곳 고향행성을 대하는 입장에 미묘한 변화가 생긴 건 분명해 보인다.

새 코메트 부대장으로 발표되고 고작 하루가 지난 오늘, 그 델루지 가 청년은 ‘토벌과 구조를 동시에 진행한다.’는 새 계획을 공개적으로 선포했다. 하지만 그 청년은 ‘누구를 토벌하고 누구를 구조한다는 것이냐’는 내 물음에는 끝내 명확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원했던 대답은 우리 교단 미르 마구스께서 보내신 밀서에 들어 있었다. 이번 프리깃 편에 온 밀서에는 ‘그대가 구할 건 별 가치도 없는 생명이 아니고 쓸 만한 지식과 유전자임을 명심해라.’라는,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

결국 양 교단이 순전히 정치적인 목적의 타협을 본 것일까? 임무가 변경된 것이라면, ‘구조단’이라는 우리 조직은 그저 대외적인 생색내기일 뿐이었을까? 그렇다면 2만이나 된다는 생존자들(물론 그 대부분은 ‘구조’할 가치가 없는 자들이지만)은 모두 죽도록 방치하라고? 이 마을에서 도망친 수백의 성한 생존자들은 그럼 어쩌라는 말이지?

내일이면 7백의 새 토벌대가 지난번 화재 사고가 난 통로를 피해 다시 판지셰르 골짜기를 올라간다고 한다. 새 사령관 테번은 이번 목적이 ‘돌연변이 토벌’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가뜩이나 통제가 어려웠던 저 잡병 무리는 동료들의 떼죽음 이후로 이젠 피에 굶주린 괴물이 되어 있는 것 같다. (하긴 언제는 안 그랬나.)

저들이 이곳에서 도망친 생존자 무리를 발견한다면 그네들이 책임 여부에 관계없이 말하기도 부끄러운 참극이 벌어질 것만 같다.

이번엔 저들이 과연 꼭대기까지 갈 수 있을는지, 지난번의 그 무시무시한 화재의 원인과 미스터리를 밝혀낼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아니, 이젠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이마 388년, 티시트리야의 달, 2일

구조단 총단장

트라카의 선택을 받은 자, 마스모간 타리프 카파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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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는 이전보다 더 나빠졌다. 밤에는 랜턴이 있어도 몇 발짝 앞조차 분간하기 어렵고, 낮이라고 해 봤자 검은 먼지로 꽉 찬 기분 나쁜 공기 사이로 희미한 빛이 산란되어 비칠 뿐이다. 흐린 때는 낮인지 밤인지조차 정확히 알기 어렵다.

지금까지 그 어디보다 좋았던 이곳의 환경이 왜 갑자기 이렇게 돌변했는지 모두 의아해하고 있다. 환경을 바꿀 만한 사건이나 큰 기상변화가 있던 것도 아니다. 사람들을 추위에 떨게 하던 차고 음습한 산바람도 한동안 불지 않아 기온은 도리어 전보다 온화해졌다. 바람이 불지 않아 이 분지의 대기가 정체되었다 해도 이 정도로 빠르게 환경이 나빠진 건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마을 주변의 토양 퇴적층까지 천공해서 지층별로 조사했지만 이곳에 이렇게 갑작스레 검은 재가 쌓인 건 처음 있는 일 같다. 놀라운 건 이 행성의 다른 지역이 순식간에 절멸했던 운명의 날(정확히 언제인지는 몰라도)에조차 이곳엔 다른 곳처럼 순식간에 검은 재가 쏟아지지는 않았었다는 사실이다. 이 정도면 원주민들이 이곳을 ‘낙원’이라 부를만하다. 지금까지는 말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날씨가 고약해지면서 코메트 사령관 테번도 7백의 병력을 데리고 골짜기를 올라가겠다던 당초 계획을 포기해야 했다. (정확히는 출발했다가 반나절만에 돌아왔다.)

어제까지도 나름대로 의욕에 가득했던 이 청년도 첫 작전에서부터 문제가 생겨서인지 신경이 곤두선 기색이 역력하다.

일단은 며칠간 추이를 지켜보며 계속 원인을 찾아 볼 참이다. (물론 본토에서의 명령대로 이곳의 생존자를 정말 포기하는 것이라면 그것도 별 소용없는 짓이겠지만.)

이마 388년, 티시트리야의 달, 3일

구조단 총단장

트라카의 선택을 받은 자, 마스모간 타리프 카파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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맙소사, 오늘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말았다.

그 소녀는 분명히 날 보고 있었다. 무지개 같이 빛나는 소녀의 눈동자가 분명 그 순간에 나를 향하고 있었다고!!!

지난밤은 대기까지도 최악이었다. 하루 종일 바람도 불지 않아 검은 재가 온통 마을을 뒤덮었고 랜턴도, 스캐너도 거의 쓸모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 두 사람, 중년의 여자와 소녀는 스캐너는 고사하고 랜턴조차 없이 마치 대낮처럼 건물들 사이를 가로질러 마을에 숨어들었다. 오래 관찰할 수는 없었지만 둘은 나이 차만 빼면 쌍둥이처럼 빼닮은 얼굴이었고, 오팔 같은 무지개 빛깔 희한한 눈동자까지도 똑같았다. 눈이 달린 사람이라면 그 둘이 일가족임을 바로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이곳에서 수많은 돌연변이 형질을 보았지만 ‘아름답다’고 느낀 건 그들의 무지개색 눈동자가 처음이었다.)

여자는 약간 말라 보였지만 큰 키, 다부진 몸에 30대 정도로 보였다. 하지만 이곳 원주민들은 외모로 나이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여자를 뒤따라온 소녀는 11살이나 12살 정도? 아니 조금 더 어린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가능했는지는 몰라도, 그 둘은 마을에 가득한 경비병들의 눈과 곳곳의 서치라이트까지 보란 듯 피해가며 우리 구조단 사무실에까지 들어왔다. 그들이 노렸던 건 코메트들과 함께 타죽은 3명의 생존자들이 갖고 있던 오팔 박힌 쇳조각이었다. 그 쇳조각이 목숨을 걸고 이곳까지 들어와 훔쳐낼 정도로 그들에게 중요한 것이었을까? 그렇게 중요한 것을 왜 지난번 그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것이지?

어쨌든 그 둘은 교묘하게 이곳에 숨어들었고, 내가 예정에도 없이 사무실에 들르지만 않았더라면 그 둘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전리품을 챙겨 이곳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지만 그까짓 쇳조각 정도는 아예 모른 척 도둑을 맞는 편이 내 맘에 더 편했을지 모르겠다. 놀라 당황하지 말고 그 둘을 달래 볼 것을, 경비병들을 부른 건 분명 내 실수였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아무리 코메트들이 앞뒤 못 가리는 망나니들이라 해도 좀도둑까지 죽이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여자 역시 순순히 항복을 할 줄 알았지만 그마저도 내 착각이었다. (어쩌면 그들이 나보다도 코메트들을 더 정확히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경비병들의 고함을 듣고 내가 달려갔을 때, 소녀는 여자의 품에 안긴 채 얼굴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고, 칼을 든 2명의 경비병들이 떨고 있는 그 둘을 양쪽에서 에워싸고 있었다.

그 여자가 용감했던 것인지, 무모했던 것인지 모르겠다. 여자는 경비병 한 명을 몸으로 덮쳐 넘어뜨리고는 다친 소녀에게 도망칠 길을 열어주었다. 무기라고는 고작 단검 하나뿐인 여자가 중무장한 남자 경비병 2명을 정말로 혼자 당해낼 수 있다고 믿지는 않았을 텐데.

결과만 보아서는 여자의 결정은 분명 무모했다. 여자는 경비병 한 명을 베어 손에 부상을 입혔지만 그것이 한계였다. 지난번 5백명의 소사(燒死)로 신경이 곤두서 있던 경비병들은 서투르게 칼을 휘두르는 그 여자를 30번이 넘도록 무자비하게 난도질을 해 죽였다.

내가 어떡해서든 말려보려 했지만 그 짐승 같은 경비병들은 나를 멀찍이 밀쳐내며 시체의 형체조차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계속 칼을 휘둘러댔다. 그리고는 숨이 덜 끊어진 여자의 마지막 떨림과 피냄새 나는 숨결을 지켜보며 자기들끼리 히죽거리기까지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소녀는 내게서, 그 현장에서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 무심코 고개를 돌렸던 나는 여자의 비명에 놀라 막 돌아서던 소녀의 희미한 실루엣을 볼 수 있었다. 소녀는 피투성이 얼굴로 뒤돌아 선 채 그 참혹한 광경을 망연자실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잿빛 대기 속에서 모든 것이 다 희미했지만 소녀의 커진 눈동자와 그곳에서 흘러내리던 오팔 같은 눈물방울만은 어색하리만큼 선명하게 보였다.

맙소사. 소녀가 그 참극을 빤히 지켜보며 울고 있었다고!

잿빛 대기로 앞을 제대로 못 보는 경비병들이 도망친 소녀를 계속 찾았지만 나도 이번엔 차마 소녀가 있는 곳을 알려줄 수가 없었다. 길고 끔찍한 여자의 비명이 완전히 끊기고, 소녀가 울며 돌아서서 멀어질 때까지도 난 얼음처럼 자리에 굳어있기만 했다.

(신이여, 얄팍한 동정심 따위에 무릎 꿇은 이 종을 부디 용서하소서.)

- 카히나? -

난도질당하던 여자가 소녀를 도망치게 하며 외치던 말들, 그리고 마지막 중얼거림 속에는 ‘카히나’ 혹은 ‘커히나’ 비슷한 단어가 몇 번이나 들어있었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얼마 전 맞아죽은 소년이 죽기 전 남겼다는 말에도 그 비슷한 단어가 들어있었던 것 같다. 그게 무슨 뜻일까? 도망치라는 뜻의 동사가 아니라면 그 소녀의 이름일지도 모른다.

카히나,

이것이 진짜 이름인지는 몰라도, 나는, 아니 우리 구조단 사람들은 그 도망친 소녀를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

이마 388년, 티시트리야의 달, 5일

구조단 총단장

트라카의 선택을 받은 자, 마스모간 타리프 카파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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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는 여전히 고약하다. 시계(視界) 전보다 더 나빠졌고, 공기는 극도로 오염되었다. 그동안 원주민들이 버리고 떠난 집에 흩어져서 머물던 우리 구조단 사람들도 모두 임시 합숙천막으로 숙소를 옮겨야 했다. 하루 종일 방진마스크를 쓰고 지내느니 밤 시간만이라도 정화설비가 된 천막에서 정상적인 숨을 쉬는 편이 낫다.

하지만 오늘 우리를 괴롭힌 건 그 먼지가 아니었다.

오늘은 지난밤 참살당한 여자의 시체 태우는 냄새가 종일 마을을 저주처럼 맴돌았다. 우리는 여자의 시체를 표본으로 거두려 했지만 코메트들은 더 이상의 표본 채취도 용납하지 않았고 심지어 바닥에 흘려놓은 혈흔, 경비병의 칼에 남은 소녀의 핏자국까지 약품을 뿌려 모두 지워버렸다.

그 야만적인 놈들은 여자의 시체를 토막 내 구덩이에 넣고 화염방사기 연료를 뿌렸다. 우리 연구원들이 장례라도 치러주겠다고 몸싸움을 벌였지만 그들은 ‘받은 만큼 돌려준다.’며 결국 구덩이에 불을 붙여버렸다.

그 뒤는 더 끔찍했다.

여자의 시체가 타는 것을 무기력하게 지켜보던 우리는 마을 주변 어디선가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울음소리인지, 노랫소리인지는 알 수 없어도 그건 분명 여자의 목소리였다. 살 타는 냄새로 가득한 마을에 낮게 퍼지는 그 소름끼치는 목소리에 우리는 물론이고 시체를 태우던 코메트들조차 소스라치게 놀라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몇몇 대담한 코메트들이 스캐너로 마을 주변을 뒤졌지만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조차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검은 재에 휩싸인 우리는 눈먼 장님도 부족해 이젠 귀머리가 된 것 같았다.

검은 재는 파동의 속성조차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우리의 감각을 속이곤 했지만 이번 같은 끔찍한 소리는 처음이었다. 마치 장송곡 같은 여자의 가는 목소리가 시체 타는 내내 마을 전체를 뒤덮었고 우리는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도 모른 채 몸서리쳐지는 섬뜩함에 몸부림을 쳐야 했다.

정말 지쳤다.

생존자고 뭐고 그대로 놓아두고 돌아가고만 싶다.

생존자들은 우리가 오지 않았다 해도 알아서 잘 살지 않았을까? 살 자, 도태될 자가 각자 다른 길을 가겠지만 결국은 자신들의 운명을 개척하지 않았을까? 우리가 온 것이 생존자들에게 은총일 것이라는 믿음이 혹시 우리만의 착각은 아니었을까.

어처구니없는 망상일는지 몰라도, 여자의 비명에 휙 돌아서며 눈을 크게 뜨던 그 소녀는 마치 작은 여신 같았다. 잿빛 공기 속에서 흩날리던 갈색 머리칼도, 오팔 같은 눈동자도, 심지어 그곳에 맺힌 무지개빛 눈물까지도 천상의 존재처럼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신이시여, 그 아이도 우리처럼 당신의 피조물이라면……그 뺨에 맺힌 피눈물과 슬픔을 이 미천한 종이 직접 어루만져줄 수 있도록 부디 허락해 주시옵소서.

이마 388년, 티시트리야의 달, 6일

구조단 총단장

트라카의 선택을 받은 자, 마스모간 타리프 카파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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