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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806화 (801/1,132)

< -- 806 회: [3부] 파트2. 작은 여신의 무지개빛 눈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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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근위대 유전자는 하나도 없다고?”

화물차 조수석에 앉은 채 할룩스를 받아든 카렐이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지난번 코나가 57번 컴플렉스의 작은 난투극 와중에 구해 온 피얼룩, 먹고 난 컵의 조사 결과는 일단 실망스럽게 들렸다.

“그게 보시다시피…….”

사에나와 함께 검사 결과를 살피던 모렌 박사가 머쓱한 표정으로 자료를 내보이며 뭐라 말을 덧붙이려 했지만 카렐의 신경질 섞인 두 번째 물음이 선수를 쳤다.

“그럼 헤네티는?”

“헤네티 유전자도 검출되지 않았습니다.”

“젠장, 잘못 짚은 건가. 지금 한참 가는 길인데.”

카렐은 흔들리는 화물차의 황량한 차창 밖 풍경을 내다보았다.

“그럼 별 수확 없는 겁니까?

옆에서 운전을 하던 코나가 역시 허탈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카렐과 코나가 탄 [투아렉 상사] 소유 화물차는 산화철이 섞인 붉은 빛 모래먼지가 짙게 날리는 ‘붉은 사막’을 가로질러 문제의 57번 컴플렉스를 향하는 중이었다.

“젠장, 이거 괜히 헛다리짚고 일만 키워놓은 거 아냐.”

눈에 낀 푸른색 렌즈를 막 빼내려는 황제에게 모렌 박사가 방금 하려던 말을 얼른 이어갔다.

“보고를 끝까지 들으셔야죠.”

“응?”

카렐이 눈에서 얼른 손을 떼며 푸른색으로 위장한 눈동자를 반짝였다.

“혈흔 중 일부에서 미등록 유전정보가 발견되었습니다. 제국 시민이라면 황족이 아닌 한 검색이 되어야 하는데 말이죠. 유목민이나 화전민 같은 오지 출신이라 해도 컴플렉스와 노동계약을 하려면 일단 등록이 되었어야 하는데 뭔가 이상하더군요.”

“미등록자?”

카렐이 큰 손을 가릴 수 있는 큼직한 작업용 장갑을 끼며 재차 물었다. 모렌 박사가 조심스레 설명을 덧붙였다.

“그래서 염색체별로 정밀 검사를 해서 비교를 해 봤습니다. 그랬더니 근위대원과 매우 유사한 염색체가 일부 발견되었습니다. 특히 성염색체에서 말입니다.”

“그럼…….”

보고 결과를 비로소 이해한 카렐의 눈이 일순간 휘둥그레졌다.

“아마도 실종된 근위대원들의 2세로 추정됩니다. 총 4건 정도 발견되었습니다. 여자 하나와 남자 셋이고 모두 미등록자입니다.”

모렌 박사가 수확물을 내보이며 비로소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4명이나?”

카렐이 웬만해서는 잘 드러내지 않는 놀란 눈으로 재차 물었다. 그는 옆에서 운전을 하는 코나에게 다시 물었다.

“이 컴플렉스가 가족들이 모두 함께 사는 특이한 조직이라고 했던가? 그때 정문 앞에서 조합원들과 싸움을 벌였던 게 누구였지?”

“컴플렉스 입구를 지키는 용역들하고 잡일하는 노역자들이었습니다.”

“나이가 얼마나 되어 보이던가?”

코나가 그제야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상당히 젊은 것 같습니다. 나중에 컴플렉스 쪽 책임자가 나와서 말릴 때 보니 어린애들을 다루는 것 같았습니다.”

“어린애들이라…….”

카렐이 흔들리는 차창 밖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턱을 만지작거렸다.

“근위대가 실종된지 30년, 그리고 미등록자라면 이전에 낳은 아이들은 아니겠지. 실종되고 얼마 후에 낳았다면 지금쯤 20대는 되었을 테니……. 그런데 여기에는 많아야 몇천 뿐이라면 3만이나 되는 근위대 나머지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카렐이 이번엔 사에나에게 물었다.

“저 컴플렉스 모회사인 ‘마사게타이 사(社)’에 관해 알아보라고 하지 않았나?”

모렌 박사의 옆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던 사에나가 비로소 목소리를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서류상으로는 특별히 미심쩍은 면이 없습니다. 사소한 담합이나 탈루, 회계규정이나 환경법 위반 같은 흔한 건으로 몇 번 적발된 외에는 수백 년 동안 크게 법적인 문제를 일으킨 일도 없었습니다.”

“그런 것도 없었다면 더 수상하게?”

카렐이 냉소적으로 대꾸했다.

“그런데 ‘서류상’이라는 건 무슨 뜻이지? 다른 쪽으로는 뭐 있다는 뜻인가?”

카렐이 마지막 남은 기대감을 슬쩍 드러냈다.

“이 회사 알고 보니 7, 8년 전에 대규모 적자를 냈더군요. 그리고 작년에도 큰 적자를 기록했고 올해도 적자를 낼 것 같습니다.”

카렐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7, 8년 전? 출혈열 때 아닌가? 그맘때 귀금속 가격이 폭등했는데 광산이 왜 적자를 내? 의약과 농학 쪽에도 발을 뻗쳤다면 대박을 내도 부족한 판국에?”

“자료에는 출혈열 치료약 개발에 실패하면서 의약 부분에서 거액의 연구비를 날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광산의 이익을 모두 까먹고도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난해와 올해는…….”

이번에도 카렐은 사에나가 말을 잇기 전에 냉큼 내용을 가로챘다.

“광산은 이익을 냈는데 잎마름병 방제기술 개발에 실패하면서 이번엔 농학 쪽에서 왕창 까먹었다 이 말이지?”

“정확하시군요.”

사에나가 송곳니를 살짝 드러내며 특유의 살벌한 미소를 살짝 내보였다.

“서류상으로는 이 회사의 광업 외 사업은 대실패입니다. 농학과 의약에서 내는 엄청난 적자를 광산의 이익으로 근근이 유지하는 정도입니다.”

“그게 정말 적자였을까, 아니면 몹쓸 짓에 들인 ‘진짜 투자’를 감추려는 수작이었을까.”

카렐이 계속 턱을 만지작거렸다. 사막 먼지 속을 한참 가로질러 달려온 낡은 화물차 창밖으로 조금씩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기가 57번 컴플렉스입니다.”

코나가 불빛 주변의 거대한 단지를 가리켰다. 말굽 모양으로 휜 바위산맥 중앙의 움푹한 분지에 수많은 인공조명의 무리가 차가운 금속으로 만들어진 광업단지를 화려하게 밝히고 있었다. 카렐 일행이 탄 화물차는 요란스레 덜컹거리며 ‘말굽’의 남쪽 개구부로 난 정문으로 다가갔다.

“그나저나, 컴플렉스 규모가 저 정도로 큰데 왜 진입도로는 이 모양이지?”

차창 밖으로 몸을 내민 카렐은 도로라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의 불량한 지면을 힐끗 내다보았다. 도로는 포장 같은 건 고사하고 울퉁불퉁한 바위면 위에 그저 ‘여기가 도로’임을 나타내는 표지석만 드문드문 박혀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저기 사람들은 도로를 별로 안 이용하나보지?”

“이전부터 진입도로가 나빠서 운송조합 사람들의 불만이 많았다고 합니다. 가족까지 있어서 거주민은 3, 4천 정도로 추정되는데, 업무차 나오는 일부 간부를 제외하면 외부로 나오는 경우도 없다고 합니다.”

“그럼 말 그대로 합법적인 수용소 아닌가?”

카렐이 입을 씰룩거렸다.

“하긴, 보석 광산이라니, 전혀 의심받지 않고 고립된 공간을 꾸밀 수 있는 훌륭한 핑계거리일지도 모르겠어.”

컴플렉스가 조금씩 가까워지면서 카렐의 눈가에 힘이 들어갔다. 오늘의 목적지인 57번 컴플렉스는 군사 요새를 연상케 하는 몇 겹의 철조망과 높은 합성수지 벽이 주변과 내부를 완전히 차단한 폐쇄된 공간이었다. 겹겹이 쳐진 담 너머로 여러 개의 철탑 크레인, 수북한 폐석더미가 비죽 머리를 내민 것이 이곳의 정체가 광산 컴플렉스라는 것을 마치 광고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런 폐쇄적인 곳이니 외부인들이 몰려든 것이 아주 맘에 안 들겠죠.”

정문이 조금씩 시야에 들어오자 코나가 모자를 똑바로 고쳐 썼다.

조합원들의 시위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컴플렉스 정문 주변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전쟁터를 연상케 하는 못 박힌 바리케이드와 큰 철문이 위압적으로 외부인을 막아서고 있었고, 그 앞에는 회색 제복에 경무장을 한 ‘용역’ 50여명이 손에 시위 진압용 고무막대를 하나씩 손에 들고 정문 앞 광장을 무섭게 노려보는 중이었다.

그렇지만 맞은편 시위대는 용역들의 이런 비장한 분위기와는 사뭇 대조적이었다. 정문 앞 널찍한 광장에 모인 5, 6백 정도의 조합원들은 정문을 빙 에워싼 느슨한 줄을 이룬 채 피켓과 띠를 두르고 산발적으로 욕설 섞인 고함을 질러대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나마도 앞줄에 서서 고함이나마 질러대는 몇몇 강성 조합원을 빼면 그 뒤에 선 다른 조합원들은 마치 소풍이라도 나온 듯 옹기종기 모여 잡담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사실 조합원을 상징하는 촌스런 작업용 조끼와 머리띠 정도가 아니라면, 시위 뒤쪽의 분위기는 그저 화물차 기사들의 흔한 친목모임이라고 해도 무방해 보였다.

“어제까지는 2, 3백 남짓 돌아가며 시위를 하는 정도였는데 오늘은 중재협상이 있는 날이라 조합에서 사람들을 동원해서 두 배 늘어난 것 같습니다. 비번인 일대 기사들이 다 모인 모양입니다.”

“그럴 줄 알았지.”

카렐이 입가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코나가 모는 대형 화물차도 다른 조합원의 차들처럼 시위대 옆쪽에 천천히 접어들었다.

“보고 싶으시다기에 어쩔 수 없이 모시고 왔지만 밖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자칫 위험할 수 있는 일은 아랫사람들에게 맡기시고…….”

코나가 황제를 걱정스레 쳐다보았다.

“가능하면.”

황제는 별로 신뢰가 가지 않는 대답만을 해 주었다.

코나도 황제가 편안한 황궁과 아름다운 비빈들을 놔두고 이렇게까지 나선 진짜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황제는 종종 ‘이 꼴로 갇혀 살다보니 훈련을 해도 옛 실전 감각도 잃는 것 같고 어딘지 타성에 젖어드는 것 같아.’라며 종종 한숨 섞인 불만을 털어놓곤 했다.

옛 가디언 시절이 황제에게 행복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옛날을 추억하며 가끔 보이는 눈빛에서는 이전의 본능이 언제든 폭발할 날을 기다리며 자라나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었다. 이번 같은 황제의 위험천만한 ‘외도’도 일단은 제국을 구하겠다는 거창한 의도이겠지만 한편으로는 황제라는 족쇄에 갇혀버린 전사의 응어리를 풀려는 몸부림처럼도 보였다.

“크게는 걱정 말게, 난 기사들 상대로 영업하러 온 ‘투아렉 상사’ 사장님이니까. 구경꾼일 뿐이야.”

차가 멈추기가 무섭게, 카렐은 평소처럼 ‘영업용 가방’을 챙겨들고 차 문을 열었다.

“걱정 말고 안에서 연락이나 제대로 잘 해.”

컴플렉스 문 앞에 선 나딘과 이디나는 화물차들과 조합원의 시위 광경을 보며 낯을 찡그렸다. 특히 이곳의 용역 대장을 맡고 있는 보안부장 나딘의 표정은 어딘가에서 얻어맞고 온 사람처럼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잠시 후, 소란스런 시위대 사이로 노에누스 가 ‘중재협상단’이 탄 관용차 몇 대가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을 노려보던 나딘이 옆에 선 동생에게 짜증스레 잔소리를 퍼부었다.

“노에누스 가 심기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시간만 벌어.”

“…….”

“시설물하고 사람들 모두 철수시키려면 열흘쯤 걸릴 테니 그 동안은 보안을 유지하는 게 중요해. 관리들하고 조합 대표 놈들 주머니에 돈 좀 찔러주면 될 거다.”

“…….”

“시설물하고 요원들 철수한 후에는 조합 놈들하고 재계약을 하든, 뭔 짓을 하든 상관 없으니. ……귀가 먹었냐? 왜 대답이 없어?”

나딘의 험악한 추궁에 화들짝 놀란 이디나가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예? 전 그저 아버지 말씀대로…….”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게 아버지 명령 아냐.”

“그건 저도 아는데…….”

나딘은 당황한 얼굴로 대답하는 여동생의 입을 거친 말투로 확 끊어버렸다.

“관리들하고 조합 대표들 상대 잘 하라고. 괜히 만만하게 보여서 집안 망신시키지나 말고.”

“흐음.”

이디나는 격려를 빙자해 자존심을 무참하게 깔아뭉개는 오빠의 무례한 태도에 겁을 먹은 듯 고개를 숙이고 낮게 숨을 한 번 내쉬었다. 그렇게 잠시 말이 없던 이디나는 별다른 반격 한 마디 못 한 채 갑자기 입가에 억지스런 웃음을 지었다.

“잊지 않게 확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라버니.”

‘이년이?’

나딘은 동생의 창백한 얼굴을 힐끔 돌아보았다. 이 여동생은 어릴 때부터 약골인데다가 공부도 고작해야 중간을 맴돌았고, 소심한 것인지 남들 앞에서는 말수도 지나치리만큼 적었다. 그렇다보니 대신관 혈통다운 강한 카리스마는 고사하고 소심한 태도로 아버지 아스탈을 실망시키곤 했다.

덕분에 오빠 나딘은 물론이고 아스탈 측근들조차 ‘대신관의 딸만 아니었다면 대체 어디에 써먹겠냐?’며 무시하곤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뭐 이런 멍청한 년이 다 있어?’

나딘이 내심 기가 막혀 코웃음을 쳤다. 대신관의 자녀로서, 그도 다른 형제들과 ‘생존경쟁’을 해야 한다는 것은 절박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이복 여동생 이디나도 잠재적인 경쟁자다보니 오누이지간의 따뜻한 정 따위는 애당초 기대할 사이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옆의 이디나는 어차피 그냥 놔둬도 도태될, 혹은 경쟁 상대조차 되지 않을 열등한 존재다보니 필요도 없는 모험 따위는 생각도 않을 뿐이었다.

오빠의 이런 비웃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새 옷 매무새를 가다듬은 이디나는 막 관용차에서 내려서는 노에누스 가 관리들에게 웃음을 지으며 반갑게 맞아주고 있었다. 하지만 나딘의 눈에는 저 한심한 여동생이 미련한 짓으로 접대를 망쳐놓지나 않을지 내심 걱정이 태산이었다.

“아니 셔틀로 오겠다니까 왜 번거롭게 차로 오라는 건지……도로도 엉망진창이구만.”

이번 협상의 중재와 컴플렉스 실사를 맡은 수십의 관리들이 오는 내내 기분이 좀 상한 듯 먼지투성이가 되어버린 차를 돌아보며 계속 투덜거렸다.

“죄송합니다. 도로 사정이 좀 안 좋죠? 주기장이 급한 공사 중이라 지금은 셔틀을 대기가 어려운 상태입니다. 부다 너그러운 양해 부탁드립니다.”

이디나가 머쓱한 표정으로 그들에게 웃음을 보였다.

관리들이 도착하면서, 조합원 시위대와 있던 ‘조합 대표단’ 십여 명도 잔뜩 인상을 쓰며 관리들 일행에 합류했다. 조합 간부들에게 뇌물을 뿌려 이번 대표단 일원이 된 코나도 그들 사이에 소리 없이 섞여 있었다.

“총무과장 이디나라고 합니다. 절 따라오시죠.”

이디나가 앞장서서 일행을 안내했다. 그리고 다른 조합원들처럼 약간 구겨진 조합원 조끼에 머리띠까지 제대로 갖춰 맨 코나 역시도 그 누구의 의심도 받지 않고 용역들 사이를 여유롭게 가로질러 문제의 [57번 광산 컴플렉스] 안에 발을 들여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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