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08 회: [3부] 파트2. 작은 여신의 무지개빛 눈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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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맙소사. 이게 누구야?”
당황한 하투샤가 누구의 시체인지 확인하려 했지만 얼굴이 완전히 함몰되고 짓이겨져 신원을 알아볼 수도 없었다. 다만 몸에 걸치고 있는 푸른 조끼를 보아 조합원 중 하나로 짐작될 뿐이었다.
“누군지 알아?”
하투샤가 뒤따라온 동료에게 물었지만 그들도 경악을 하며 뒷걸음치기만 할 뿐 누군지는 알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저 꼴인데 누군지 어떻게 알아.”
충격을 받은 조합원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입을 가리며 소리를 질렀다.
“누구 다른 사람 봤어? 누구 짓이냐고!”
하투샤가 주변을 둘러보며 다시 물었다. 조금 전 처음 이 시체를 발견했던 조합원은 미심쩍은 눈길로 자신을 쳐다보는 동료들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 횡설수설 변명을 늘어놓았다.
“모, 몰라, 웬 놈이 차 사이에서 뛰어 나가길래 쫓아와 봤더니 저 시체가 있었어!!!”
“누가? 누가 나갔길래?”
하투샤가 눈을 흘기며 물었다.
“몰라, 회색 옷 입고 덩치 큰 게……맞아! 저 용역 놈 같았어! 분명해! 여기서 회색 옷 입은 게 용역 놈들밖에 더 있냐고!”
“용역들 짓이라고?”
“닥쳐, 멋대로 넘겨짚지 말고. 제대로 본 것도 아니라잖아.”
하투샤가 버럭 화를 냈지만 시위의 와중에 격앙되어 있던 조합원들은 끔찍한 몰골의 시체와 사방에 낭자한 피, 동료의 증언에 이미 크게 술렁거리고 있었다.
“빨리 치안군 불러, 저놈들이 끼어들기 전에.”
“컴플렉스 주변에서는 저 용역들이 치안권이 있잖아.”
시위대가 멈칫거리며 정문 앞 용역들을 돌아보았다.
“말도 안 돼. 저놈들이 죽였다니까! 저 용역 놈들이 우리 조합원을 죽였다고!”
시체를 발견했던 조합원이 비명처럼 크게 소리를 질렀다. 잘못 일이 꼬이면 그가 범인으로 몰릴 판이니 당연했지만 목소리가 워낙 커서인지 주변에 있던 시위대들까지 모두 ‘용역들이 조합원을 죽였다’는 말을 다 듣고 말았다.
정문 앞에서 시위대를 노려보고 있던 나딘은 내심 불안했다. 시위를 벌이는 조합원들은 비록 조직력이라고는 제로에 가까운 시정잡배무리처럼 굴고 있지만 50여명에 불과한 그의 용역들에 비하면 10배가 넘었다. 분위기를 보아 당장 큰 일이 날 것 같지는 않지만 숫자 때문에라도 내심 움츠러드는 것이 사실이었다.
“만일을 대비해 비번인 직원들 100명도 대기시켜 놨습니다.”
나딘은 부관의 보고에 조용히 고개만 끄덕이며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부관이 정문 안쪽에 모이고 있는 광부와 종업원들을 돌아보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저 친구들은 군인 출신들입니다. 용역들의 부모도 있는데 자칫…….”
“그러니까 쓸 만하지.”
나딘은 자신이 이끄는 젊은 용역들을 돌아보며 키득거렸다.
“그나저나, 저네들 왜 저래?”
조합원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그제야 눈치 챈 나딘이 눈에 낀 스코프를 확대시켜 보았다. 강성 시위대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는 한쪽에 바리케이드처럼 화물차들이 죽 세워져 있었고, 차들 사이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는지 수십의 조합원들이 격앙된 얼굴로 술렁이고 있었다.
“저기 무슨 일인지 가서 보고 와.”
나딘이 부관에게 눈짓을 보냈다.
“저기요? 시위대들 모여 있는데요?”
“그냥 조용히 보고만 오라고. 무슨 일인지.”
부관은 시위대 바로 옆으로 가야 한다는 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어쩔 수 없이 서너 명의 부하들을 데리고 일단 그쪽으로 향했다. 아직까지 별 싸움이 벌어지지 않아서인지 구호를 외치던 시위대도 측면으로 다가오는 용역들을 물끄러미 보고만 있었다.
화물차 부근에 다가갔던 부관이 ‘용역들이 사람을 죽였다’는 외침을 들은 건 그때였다. 그는 피 묻은 옷차림으로 서 있는 조합원들과 그들 사이로 짧게 보였던 푸른 조끼의 시체에 깜짝 놀랐다.
“뭐야, 사람이 죽었어?”
부관이 시체 주변의 사람들에게 비키라며 손을 저었지만 그들은 도리어 도끼눈을 부릅뜨며 그들 앞을 살벌하게 막아섰다.
“물러나! 범죄 현장은 우리가 통제한다!”
소리를 지르던 부관은 자신이 저들에게 괜한 소리를 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범죄 현장’이라는 말에 조합원들의 얼굴이 험악스러워지고 있었다.
‘이런.’
시위를 하던 사람들까지 ‘용역들이 조합원을 죽였다’는 말에 하나 둘 모여들고 있었다. 겁에 질린 그는 시위대들에게 다가오지 말라며 손을 휘저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때, 뒤에서 지켜보던 나딘의 목소리가 할룩스로 전해져왔다.
“확인 했냐? 거기 무슨 일이야?”
“웬 시체가 있습니다. 살인사건 같습니다. 그런데 주변이 영…….”
별 일 아닌 줄로 알고 왔던 부관과 그의 용역들은 살기 띤 눈으로 주변을 에워싸는 시위대와 형체를 알아보기도 어렵게 망가진 시체를 번갈아 쳐다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분위기가 안 좋으니 물러나는 게 좋겠습니다.”
부관이 모여드는 시위대를 보며 나딘에게 더듬더듬 말했다.
“물러나? 누구 멋대로? 거기 지키고 있어! 저놈들이 무슨 흉계를 꾸미는 것 같으니!”
“부장님. 자칫…….”
“컴플렉스 내부하고 주변 범죄는 우리가 1차로 책임지는 걸 모르냐!”
“그렇긴 합니다만…… 눈치가 우리를 의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무슨 짓을 했다고?”
똑똑한 나딘도 뭔가 미심쩍다는 것을 눈치 챘다. 조합원 시체가 나왔다면 의혹이 누구에게 쏠릴지는 뻔했고, ‘누군지는 몰라도’ 자신들을 용의자로 만들어 무언가 나쁜 시도를 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조합 놈들 자작극일지도 몰라. 말려들면 안된다. 치안군을 부를 테니까 빨리 현장을 장악하고 시체를 확보해. 안 그러면 우리가 정말로 덤태기를 쓴다.”
나딘은 정문 안쪽에 대기시켜 놓았던 백여 명의 직원들에게 나오라며 손짓을 보냈다. 지금까지는 그저 신경전 정도로만 벌어지던 시위는 도중에 발견된 정체불명의 시체 한 구를 두고 갑자기 피 말리는 대결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당황하고 있기는 시위대의 지휘부도 마찬가지였다. 난데없이 튀어나온 시체를 두고 전전긍긍하던 사람들 사이에 검은 옷차림의 웬 키 큰 사람 하나가 슬쩍 끼어들었다.
“저놈들이 시체를 빼앗으려는 모양인데요. 뭐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카렐이 하투샤에게 다가가 슬쩍 운을 띄웠다.
“저놈들이 시체를 가져가면 보나마나 현장 발견한 조합원을 범인으로 몰아붙일 겁니다.”
카렐의 말에 현장을 처음 목격했던 조합원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이 낯선 이간질꾼의 귀띔에 하투샤는 물론이고 주변의 조합원들까지 흔들리기 시작했다.
“저놈들이 조합을 나쁜 놈으로 몰아붙여서 이번 건을 유야무야 넘기려는 수작이 빤합니다. 이런 거 한두 번 당했나요.”
그때, 그들의 눈에 쇠파이프를 들고 컴플렉스에서 나오고 있는 백여 명이나 되는 광부들이 들어왔다.
“맙소사, 저걸 봐요.”
카렐이 짐짓 놀란 표정으로 조합원들의 당혹감, 분노를 자극했다.
“용역들한테 절대 당하지 마세요. 시체하고 현장 못 지키면 시위대가 살인범으로 몰릴 거라고요.”
“……맞아. 여길 지켜야 돼.”
하투샤가 조합원들에게 앞을 막으라고 손짓을 보냈다. 시위대나, 용역이나, 이 민감한 상황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시체 한 구를 놓고 모두가 상대방을 의심하고 있었다. 자칫 여기서 주도권을 놓친다면, 그리고 더 운이 없다면 둘 중 어느 쪽이든 살인자로 몰릴 수도 있는 막다른 상황이었다.
이 와중에 더 난감해진 건 시위대 중간에 고립되어 있던 나딘의 부관과 그의 용역들이었다.
“빨리 물러나라! 더 이상 접근하지 말고!”
잔뜩 겁을 집어먹은 그들이 서로서로 등을 맞대고 시위대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경고한다! 이 일대 사법권은 우리가 위탁받았으니 정당한 사법권 집행이다! 빨리 거기서 물러나!”
“너희가 죽였잖아! 본 사람이 있는데 현장 확보는 무슨 빌어먹을!”
시위대는 얼떨결에 고립되어버린 부관과 그 부하 용역들에게 더 위협적으로 몰려들었다.
“싸우지 마! 괜히 핑계거리 주지 말고 막기만 해!”
시위를 하며 잔뜩 흥분해 있던 동료들을 본 하투샤가 그들의 앞을 막아서며 분위기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동료로 추정되는 사람이 ‘아마도 용역들에 의해’ 피떡이 되어 죽었다는 말이 입과 입을 통해 순식간에 번져나가면서 뜻대로 되지 않았다.
“빌어먹을 살인자 놈들!”
몇몇 다혈질 조합원들은 하투샤와 동료들의 저지를 뿌리치고는 시위대 사이에 고립되어버린 나딘의 부관과 5명의 용역들에게 일제히 와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싸우지 말라니까!”
지부장 하투샤, 그리고 몇몇 이성 있는 사람들의 외침이 격앙된 시위대들의 고함 사이에서 의미 없이 메아리쳤다.
“버텨! 버텨! 동료들이 온다!”
용역들은 다급한 얼굴로 등을 맞대고 서서 사방에서 몰려드는 시위대를 막아보려 했지만 거친 조합원들을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몇몇 군인 출신 조합원들이 피켓을 휘둘러 용역 중 한 명을 순식간에 때려눕히자 시위대 사이에서 와아 하고 환호성이 터졌다.
용역들이 쓰러지는 모습을 본 광부들, 종업원들 역시 눈이 뒤집어졌다. 자신, 혹은 동료들의 자녀들이 일방적으로 구타당하는 모습에 이성을 잃은 그들은 쇠파이프니 무기를 들고 시위대에게로 돌진해 나아갔다.
“빌어먹을 시위꾼 놈들!”
백여 명의 광부와 종업원들, 아니 한때 군인, 그것도 제국에서 가장 정예군으로 꼽히던 조직의 일원이었던 이들은 순식간에 이전 같은 단단한 스크럼을 만들고는 상대방의 정체도 모른 채 어수선하게 앞을 막아서는 조합원들을 무자비하게 때려눕히기 시작했다.
“다 모여! 도와줘!”
용역들의 고무막대, 광부들의 쇠파이프에 쓰러지는 조합원들이 속출하면서 지금까지 뒤에서 지켜보기만 하던 다른 시위대까지 속속 패싸움에 끼어들었다.
“맙소사, 저놈들은 또 뭐야!”
상황이 복잡하게 꼬이면서 5백이 넘는 시위대가 질세라 주변에 몰려들었다. 시위를 빙자한 기세싸움 정도가 고작이던 컴플렉스 앞 광장은 눈 깜짝할 새 용역들, 흥분한 광부, 시위대까지 모두 뒤엉켜 난투극과 비명으로 정신도 차릴 수 없는 난장판이 연출되었다. 그때, 누군지는 몰라도 시위대 중간에서 확성기까지 들고 고래고래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저놈들이 우리 다 때려죽인다! 우리가 숫자도 많은데 왜 당해야 하냐고! 정문으로 가자!”
누군가의 선동 덕분에 일순간 집단의식에 사로잡힌 시위대들은 갑자기 방향을 돌려 컴플렉스 정문 쪽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정문을 지키던 나딘과 그의 용역들은 수백이나 되는 시위대가 몰려오는 모습에 바싹 긴장을 했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이 그 뒤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맙소사! 저놈들 미쳤나!”
시위대 뒤에서 다가오는 거대한 검은 그림자에 놀란 나딘이 비명을 질렀다. 시위대 한쪽에 세워져 있던 화물차 중 한 대가 부릉거리는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며 정문으로 돌진해오고 있었다.
“차단장치! 차단장치 켜! 빨리!”
나딘이 뒤늦게 경비실에 고함을 질렀다. 이곳 정문에도 기계장치에 오작동을 일으켜 난입을 차단하는 비상장치가 있지만 조금 전 노에누스 가 협상단 차량을 들여보내느라 잠시 꺼 놓은 상태였다. 뒤늦게 장치가 작동하면서 정문 주변에서 사이렌과 함께 붉은 경고등이 켜졌지만 이미 가속을 해 달려오기 시작한 거대한 컨테이너 화물차는 엔진이 꺼졌어도 멈추지는 않았다.
“으엑!”
누군지는 몰라도 화물차를 출발시켰던 사람이 문을 열고 옆으로 몸을 날려 뛰어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 날랜 동작이 시민으로 가능할까 싶은 정도였지만 당장 그런 것까지 따지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빌어먹을! 피해!”
나딘이 정문을 지키던 50여명의 부하들에게 다급히 손을 저었다. 폭주한 화물차량은 정문 앞에 세워놓았던 바리케이드들을 놀리듯 차례대로 짓밟으며 컴플렉스 정문을 덮쳤다.
“에, 에이씨! 어떤 놈이야!”
차를 피해 몸을 날리다가 발목을 삔 나딘이 다리를 움켜쥐고 소리를 질렀다. 육중한 화물차는 바리케이드를 그대로 밀고 들어와 컴플렉스의 거대한 철문과 담 한쪽을 박살내고는 초소 건물을 들이받아 반쯤 붕괴시켜놓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부족했는지, 컴플렉스 안으로 한참을 밀고 들어가 창고 건물에 부딪혀 옆으로 전복되면서 가까스로 멈췄다.
“피해 상황은! 누구 다쳤어?”
나딘이 갈라진 목소리로 악을 썼다. 다행히 치어 죽은 사람은 보이지 않았지만 차를 피해 도망치다가 넘어지거나 부서지는 바리케이드와 철문의 파편에 받혀 부상을 입은 사람들이 열 명 가까이 되어보였다. 하지만 이제 문제는 점점 격해지는 분위기에 휩쓸려 폭도에 가깝게 변해버린 시위대들이었다. 차량에 받혀 부서진 문을 본 시위대들이 와아 소리를 지르며 정문으로 쇄도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장님! 대장님!”
몸 성한 용역들이 달려들어 쓰러진 나딘을 문 안쪽으로 급히 끌어당겼다. 이제 시위대도, 용역들도 원래 모인 목적 따위는 까맣게 잊은 채 분노와 집단의식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안으로 못 들어오게 막아! 안에 연락해서 작업 중단시키라고 하고 젊은 놈들 불러내서 막아! 빨리!”
당황한 나딘이 절룩거리고 일어서서는 아랫사람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몸 성한 용역들이 몰려드는 시위대에 맞서 부서진 문 부근을 막아섰지만 차 때문에 담이 크게 부서지고 설상가상으로 몇 명이 다쳐 쓰러지면서 그들만으로 막기는 버거운 상태였다.
“들어가! 들어가서 정문을 점거하자!”
누군지는 알 수 없어도, 굵은 목소리가 흥분한 시위대 중간에서 계속 분위기를 선동했다. 집단의식에 이성도 잃은 시위대와 용역들 사이에서 격한 패싸움이 벌어지면서 컴플렉스 전체에 비상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볼만하군.”
카렐이 웃었다. 행려병자의 시체 한 구와 시위대 사이에 심어놓은 프락치 몇 명만으로 지금의 모든 상황을 자아낸 검은 옷차림의 ‘사장님’은 슬쩍 뒤로 물러나 이들의 싸움을 남 일처럼 구경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군대도 투입할 만 하겠지?”
카렐이 피식 웃으며 옆에 선 루스탐을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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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우, 하필 오늘 같은 날 이런 씬을 올리게 되어 좀 씁쓸하네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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