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15 회: [3부] 파트2. 작은 여신의 무지개빛 눈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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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정말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 믿기 어려운 현실을 무수하게 접했지만 이토록 놀라 보기는 처음이다.
오늘의 사건은 자정이 거의 다 되어 시작되었다. 4명의 코메트 중상자가 실려 왔다는 다급한 보고에 나가 보니 한 명은 타박상에 다리가 부러져 있었고, 둘은 싸움을 벌이다가 다친 듯 몸 곳곳에 자상이 보였다.
그런데 마지막 한 명은 얼마 전 우리가 지긋지긋할 만큼 보았던 익숙한 모습이었다. 병사는 온몸에 중화상을 입은 상태였고, 화염방사기 연료 냄새가 코를 찔렀다. 등과 뒷머리에 집중적으로 화상을 입은 것을 보아 등에 메고 있던 화염방사기 탱크에 불이 붙었던 것 같다.
그 병사를 본 순간, 우리는 지난번 5백 명이 타죽었던 참사를 떠올리며 전율해야 했다. 대체 무엇 때문에 화염방사기에 계속 이런 문제가 터지는지 의아했지만 그 순간은 그런 것을 따질 여유가 없었다.
우리는 어디선가 교전을 벌이다가 그리 된 것인지, 아니면 자기들끼리 패싸움을 벌인 것인지 물었지만 부상자들 중 누구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들을 데려온 사관이 곁에서 그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상황이 그 정도로 끝났다면 우리도 저 무뢰배들의 패싸움 정도로 여기고 끝냈겠지만 부상자들은 그 뒤로도 계속 실려 왔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중상자가 많아졌다. 우리는 무언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 상황에서 갑자기 어떤 생각이 들어 내가 그런 결정을 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3명의 의사 출신들을 불러내어 부상자들을 후송한 일행을 무작정 뒤쫓아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문제의 현장은 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북쪽으로 고작해야 10스타디아(1.5km) 정도나 갔을까, 그곳은 이미 전쟁터나 마찬가지였다. 아니, 이미 전쟁터였다. 그곳에는 순찰을 돌던 무장 코메트들 백여 명(아마 그보다 더 되겠지만 내 시계(視界) 내에는 그 정도가 한계였다.)이 혼비백산한 얼굴로 돌아다니고 있었지만 저녁의 짙은 어둠과 잿빛 대기 속에서 그들도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정확히는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응급함을 들고 병사들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던 나는 어둠 너머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여기야]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그 직후 누군가의 비명이 이어졌고 코메트들이 마을에서 가져온 거대한 서치라이트를 켜는 소리가 들렸다.
의사로서의 직업의식 때문이었을까. 나는 비명이 들린 곳으로 무작정 달려갔고, 서치라이트 너머로 난생 처음 끔찍한 ‘전투’를 보았다. 그곳에는 큰 보따리를 짊어진 30여 명의 여자, 아이와 노인들이 모여 울부짖고 있었고, 그보다 조금 많은 젊은이들이 그들을 지키며 코메트들과 맞서고 있었다.
그들 모두는 더럽고 누더기 같은 옷을 걸치고 있었지만 분명 정상적인 모습의 사람들이었다. (판지셰르 마을을 떠났던 생존자 무리의 일원들이 아니었을까?)
내가 가장 놀란 건 덩치 큰 어른 남자들의 사이에 아이들이 섞여 있다는 점이었다. 고작해야 12살, 13살쯤 되어 보이는 꼬마들도 손에 무기를 들고 덩치가 두 배는 되는 어른 남자들 사이에서 함께 싸우고 있었다. 그것도 어른의 싸움을 돕는 정도가 아닌, 분명 한 명의 전사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힘, 빠른 몸놀림을 본 순간, 우리들은 지난번 동료를 순식간에 죽였던 ‘미치광이 소년’을 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나는 저 사람들의 정체를 코메트 장교에게 물었지만 그는 우리에게 다가오지 말라고 고함만 질렀을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말리는 군인들을 뿌리치고 싸움에 더 가까이 다가갔던 나는 여자, 노인들이 지고 있는 등짐의 틈새로 말린 채소, 감자 같은 먹을거리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의 발치에는 화염방사기 공격을 받고 타죽은 듯 보이는 어른 생존자의 시체 두 구가 있었고, 작은 식량 꾸러미를 멘 어린아이 둘이 얼굴과 팔에 중화상을 입은 채 어른의 품에 안겨 큰 소리로 울고 있었다.
(그 모습에 정말, 정말로 부끄러워 숨고만 싶었다.)
그들 부근에는 폭발한 화염방사기와 운명을 함께한 병사의 시체도 함께 있었다. 왜 화염방사기가 폭발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나중에야 발견했지만, 그곳에 투입되었던 화염방사기병(兵) 4명은 모두 같은 식으로 죽어 있었다. 처음에 우리에게 실려 왔던 그 중화상 환자가 아마도 유일하게 살아남은 화염방사기병이었던 것 같다.
압도적인 숫자의 무장 군인들과 누더기뿐인 생존자들의 싸움은 언뜻 생각하기에 말도 안 되는 대결이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서치라이트를 켰어도 불빛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더 많아 주변은 깜깜했고, 앞도 제대로 못 보는 군인들은 걸핏하면 방향감을 잃고 헤매거나 대오를 이탈하곤 했다.
코메트 병사들이 그렇게 우왕좌왕하며 쩔쩔 매는 와중에 생존자들은 누군가의 날카로운 휘파람소리에 맞춰 단체로 속도를 맞춰 움직이고, 약하거나 뚫린 자리를 재빨리 메워가며 코메트들의 어설픈 포위망을 뚫고 나갔다.
그들의 휘파람을 내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이 혼탁한 대기 속에서 무엇보다 효율적인 의사소통 수단인 것만은 분명했다. 병사들은 어른들 사이에 숨어 있던 아이들이 기습적으로 튀어나와 휘두르거나 던지는 칼에 무기력하게 쓰러졌고 생존자 무리는 결국 포위를 뚫고 서치라이트 불빛에서 하나 둘 빠져나갔다.
나는 그 광경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왜 그리 바보 같았는지 아직 모르겠다.
응급상자를 끌어안고 넋이 나간 채 서 있던 나는 내 앞의 병사들이 모두 쓰러진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그 생존자들을 계속 쳐다보고만 있었다. 왜 그 순간 내가 공포를 느끼지 못했을까? 화염방사기 공격으로 격앙된 생존자들이 날 공격할 것이라고는 생각을 왜 못 했을까?
내가 정신을 차린 건 한 소년의 칼끝이 이미 내 목으로 들어왔을 때였다. 괴성을 지으며 내게 칼을 내지르던 그 거친 소년의 눈과 마주친 순간, 부끄럽지만 나는 어른이라는 것도 까맣게 잊은 채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그때, 날 살린 건 짧게 끊기는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였다.
그때, 나는 두 달만에 [카히나]를 다시 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카히나였던 것 같다.) 지난번 내가 보았던 10살 남짓 소녀의 외모는 아니었지만 분명 카히나 같았다.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그 ‘휘파람’으로 일행들을 지휘하던 사람은 적어도 15살은 넘어 보이는 소녀였고, 마르고 단단한 몸에 거의 나만큼이나 훌쩍 큰 키였다. 키와 나이는 분명 이전의 그 어린 소녀가 아니었지만 오팔빛 큰 눈동자와 얼굴을 가로지른 큰 칼자국은 분명 카히나였다. 아니, 굳이 흉터가 아니었어도 평생 잊지 못할 그 눈빛, 눈물이 방울방울 맺혀 있었던 그 아름다운 무지개색 눈동자를 내가 어떻게 잊는단 말인가!
(그런데 고작 2달 동안 어떻게 저리 갑자기 클 수 있는 거지???)
그때의 날 기억했던 것일까? 카히나는 동료들이 떠난 자리에 혼자 남아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지난번같이 눈물로 적셔진 나약한 소녀의 얼굴이 아닌, 거칠지만 늠름한 자태로 우뚝 서서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50명이 넘는 동료들을 코메트의 공격에서 구해낸 그 소녀는 손에 쥐고 있던 큰 돌을 마지막 서치라이트를 향해 힘껏 던졌다. 유일한 불빛이 사라지면서 그의 마지막 모습도 짙고 탁한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그 직후, 나는 누군가가 옆을 스쳐 지나는 것을 느꼈다. 내 눈은 어둠에 가려 장님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그 ‘누군가’가 여자임을, 그의 머리칼에서 오는 강한 체취를 느낄 수 있었다.
순간, 내 본능은 그 향기가 카히나의 것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난 그때까지도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내 주변에는 (아마도) 시체 타는 냄새, 피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었을 테지만 어찌된 일인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내 뇌가 일으킨 어처구니없는 착각이었는지는 몰라도, 그가 스쳐 지나간 한참 후까지도 내 머리는 여전히 그의 향기를 느끼고 있었다.
(맙소사,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이마 388년, 트라에타오나의 달, 25일
구조단 총단장
트라카의 선택을 받은 자, 마스모간 타리프 카파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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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 되어 어제의 그곳에 다시 찾아가 보았다. 아침이라고 해 봤자 뿌연 재 사이로 산란되는 햇빛이 조금 있다는 정도지만 그래도 어젯밤보다는 주변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나는 코메트 병사들이 현장을 정리하기 전에 얼른 구조단원들을 풀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그들이 왜 내려왔었는지를 조사했다.
결과는 내 걱정대로였다.
다시 확인해 본 그곳은 마을에서 가까운 작은 야산자락이었다. 그곳에는 사람 한 명 가까스로 기어들어갈 크기의 작은 굴이 있었고, 밖에서 보기에는 그저 야생동물이 쓰던 것 정도로만 보였다. 하지만 그 안으로 한참을 기어들어가 보니 넓은 공간이 있었고, 그들이 미처 가져가지 못한 감자와 콩, 마른 채소, 그리고 그들이 식용으로 썼던 듯 보이는 말린 쥐와 큰 벌레를 엮은 꾸러미도 있었다. 딱 보기에도 그들의 식량 창고가 분명해 보였다.
그런 곳이 바로 마을 인근에 있었다니. 워낙에 시계가 불량하고 정찰이 어려워 코밑의 창고를 지금껏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변명이 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아니, 도리어 다행이었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내 짐작이지만, 몇 달 전 이곳 주민들이 마을을 급하게 버리고 떠나느라 창고에서 식량을 다 챙겨가지 못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러다 대기가 나빠지고 우리의 수색정찰이 어려워지자 비로소 숨겨두었던 식량을 되찾아 가져가는 모험을 시도한 게 아닐까.
어젯밤 짧게나마 본 생존자들은 언뜻 보기에도 여위어 있었다. 어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주름이 자글거렸고, 아이들의 통통해야 할 볼도 움푹 패 있었다. (카히나의 도드라진 광대뼈가 왜 그리 안쓰러워 보였던지!)
어제 현장에서 찾은 생존자의 시체는 체지방이 종잇장 같아 제대로 타지도 않았고, 위 내용물은 텅텅 비어 있었다. 지난번 우리에게 투항했던 3명의 생존자들의 영양 상태가 비교적 양호해 보였던 것을 떠올려 보면 이들이 마을을 떠난 후 심한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고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다.
이곳에 원래 얼마나 많은 식량이 저장되어 있었는지, 이들이 얼마나 성공적으로 식량을 빼갔었는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이곳에는 지금 남은 것이 별로 없다. 어쩌면 다른 곳에도 이런 비슷한 곳이 더 있을지 모르겠다.
생존자들이 이런 작물을 어떻게 구했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다. 우리가 오기 전까지 이곳 날씨가 다른 곳보다는 양호했다고 해도 극단적인 일교차 때문에 농사는 불가능했으리라는 것이 지금까지 우리의 추측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들은 우리의 교만한 예측을 무참히 깨 버렸다.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까. 오늘 새벽, 테번은 거의 전 병력을 동원해 이 일대에서 굴이라는 굴은 모조리 다 들어가 확인하라는 명령을 내린 모양이다. 제발 그들의 마지막 생명의 끈이 병사들에게 짓밟히지 않기를 몰래 기원해 본다.
(젠장, 구조단장이라는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마 388년, 트라에타오나의 달, 26일 아침.
구조단 총단장
트라카의 선택을 받은 자, 마스모간 타리프 카파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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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다.
아침에 굴 주변 현장에 남겨 놓고 온 연구원들에게서 ‘신기한 것’을 찾았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코메트의 개차반들을 앞질러 우리 연구원들이 운 좋게 찾아낸 건 폐허가 되어버린 온실이었다. 합성수지, 파이프, 혹은 나뭇가지까지 모조리 동원해서 만든 뼈대에 얇은 비닐을 누덕누덕 기워 놓은 어설픈 구조물이었지만, 그곳은 분명 온실이었다.
그것을 본 순간, 생존자들이 어떻게 먹을 것을 얻었는지에 관한 우리들의 궁금증도 비로소 풀릴 수 있었다.
반쯤 부서진 큰 온실 자리에는 새카만 재를 뒤집어쓰고 얼어 죽은 감자와 이름 모를 콩 줄기가 남아 있었고, 비료로 썼음직한 퇴비 통도 보였다. 그리고 다른 작은 온실에는 철창에서 얼어 죽은 쥐들, 큰 항아리에 음식 찌꺼기와 함께 담긴 벌레(아침에 창고에서 보았던)도 보였다. 역시 이들이 못 챙기고 떠난 흔적이었다.
이번에 발견한 건 비록 우리 눈에는 조잡하기 짝이 없는 구조물, 입에 넣고 싶지 않은 것들이었지만, 우리 모두는 그 앞에서 숙연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죽어가는 땅에서 살아남을 방법을 찾았고, 우리와 똑같은, 아니 이 지옥에서 생존의 문을 통과해 낸, 선택받은 사람들이 분명했다.
나는 기침약을 보관하던 작은 유리병을 꺼내 약을 버리고 대신 이 온실의 흙을 조심스레 떠 담았다.
그때는 별 생각 없이 한 행동이었지만 이제와 돌아보니 검은 재를 뒤집어쓴 채 버려진 그 황량한 온실 자리의 기억을 어떻게든 남기고 싶었나보다.
이곳의 흙 한 줌도 개인적으로 거둬가는 건 엄격히 금지되어 있지만, 나는 그 병을 내 개인 짐 속에 몰래 챙겨놓았다. 그리고 내 죽는 날까지 이 일지와 함께 보관할 참이다.
먼 훗날, 내가 죽어 땅에 묻힌다면 병 속의 흙도 그 위에 뿌려주기를 조심스레 기원해 본다. 아니, 이 병의 흙이 언젠가 다시 풍요로워질 이 땅 위에 뿌려질 수 있다면 내 무덤 속에서 기뻐 춤을 추고 싶으리라.
이마 388년, 트라에타오나의 달, 26일 늦은 밤.
구조단 총단장
트라카의 선택을 받은 자, 마스모간 타리프 카파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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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2. 작은 여신의 무지개빛 눈물]은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회부터는 [파트3. Fimbulwinter (핌불윈터)]가 시작됩니다.
*Fimbulwinter는 북구 신화에서 신들의 전쟁 무렵 여름이 없이 3년간 줄곧 이어지는 춥고 가혹한 겨울을 말합니다. 굶주린 사람들은 전쟁을 벌이고, 형제들끼리 죽고 죽이는 참사가 이어진다고 합니다.
(fimbul은 영어에서 big이라는 뜻이고요, 직역하면 [거대한 겨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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